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204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2019 경기만에코뮤지엄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여행가자-지금을 기록하다'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일정 ~ 10:00 집결 및 출발 10:00~10:20 이동(소래산등산 입구) 10:20~11:20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탐방 11:20~11:30 이동(소산서원) 11:30~12:00 소산서원&하연선생묘 탐방 12:00~12:20 이동(물왕저수지) 12:20~13:20 점심식사 13:20~13:30 이동(KBS소래송신소) 13:30~14:00 KBS소래송신소 탐방 14:00~14:10 이동(호조벌) 14:10~14:40 호조벌,관곡지&연꽃테마파크 탐방 14:40~15:40 짚풀공예 체험 15:40~16:00 마무리 및 이동(시흥시청후문) 공정여행 '동네봄'의 진행(김지영, 원은주)으로 팸투어를 하였다. 사..

이익 선생묘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가 임금이 학문에 힘쓰는 데 대하여 진술하고 나서 아뢰기를, "고(故) 부제학(副提學) 이준(李埈)은 신의 선조인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을 스승으로 섬겨서, 독실하게 배우고 실천한 것은 연원이 있는 바였고 충성스러운 말과 훌륭한 계책들은 간책(簡策)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대개 선조(宣祖)와 인조(仁祖)의 융성한 시대를 만나 우뚝하게 한 시대의 명신이 되었는데, 영남(嶺南)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높은 덕과 훌륭한 행실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 감역관(監役官) 이익(李瀷)은 학문이 천인(天人)을 꿰뚫고 식견이 고금(古今)의 것을 다 통달하여 실천함에 조예가 있고 경술과 문장에 뛰어났으니 실로 당대의 대유(大儒)였습니다. 영조(英祖)의 융..

삼전도비

삼전도비(三田渡碑)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己丑/命張維、李慶全、趙希逸、李景奭, 撰三田渡碑文。 維等皆上疏辭之, 上不從。 三臣不得已皆製進, 而希逸故澁其辭, 冀不中用, 李慶全病不製, 卒用景奭之文)-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1637) 11월 25일 기축 1번째기사 이 기록은 삼전도비를 세우기 위해 삼전도비문 혹은 송로 문자(頌虜文字)로 불리는 것을 지은 기사이다.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은 삼전도비..

부여답사 2. 능산리 고분군, 능산리사지, 부여 나성

부여답사 2. 능산리 고분군, 능산리사지, 부여 나성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눈 부여 나성 바로 옆, 능산리 일원은 부여를 자주 찾았지만 처음이다. 백제왕릉원인 능산리 고분이 중요한 것은 고구려 고분의 특징인 돌방식 구조와 함께 사신도를 그려 넣은 벽화이다. 그리고 이곳 백제왕릉의 원찰인 능산리사지에서는 백제 예술의 백미 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한성백제의 멸망과 웅진, 사비기의 중흥 백제는 7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온 고대국가로 수도의 변천에 따라 한성기(기원전 18~475), 웅진기(475~538, 65년), 사비기(538~660, 122년)로 나눈다. 이중 한성기는 백제사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백제 총 31왕 중 21왕(온조~개로왕)이 통치한 시기에 해당한다. 이렇듯 백제사의 중심은 수도권인 지금의..

부여 답사 1. 부소산성, 부여현 관아(객사)

부여답사 1.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구 부여국립박물관, 부여현 객사, 부여현 동헌, 도영경당, 부여현 자료관, 서복사지, 백화정, 낙화암), 부여문화원 유홍준 교수 기증 유물 전시실 거진 10년만에 찾은 거 같다. 부여는 인연이 참 깊다. 국민학교 시절 처음 수학여행으로 다녀왔던 곳이고 대학 때 학교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부여 국립박물관을 찾아 전시장을 옮겨왔던 일, 그 때 이남규 은사님과 선배와 같이 부여에 있는 어느 중국집에서 먹었던 양장피와 요리는 푸짐하고 맛도 일품이었다. 그리고 고향 어린 친구들을 이끌고 역사탐험대라고 다녀왔던 기억 등, 지울 수 없는 선명한 기억이 있는 곳, 추억의 부여이다. 부여는 현재 '사비도성'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부르고 있다. 사비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를 이르는 말이다...

강화 하곡(하일리) 정제두 유허지

상도면(上道面) 187. 하일동(霞逸洞) 하현(霞峴)의 서남쪽은 골짝마다 그윽한데(霞峴西南谷谷幽), 재상이 예로부터 이 산중에 머물고 있네(山中宰相古今留). 두 정승(정제두, 최규서)의 집터와 세 정승의 무덤(정유성, 정제두, 권개) 있어(二公宅址三公墓), 이곳을 강화도의 ʻ제일구(第一區)ʼ이라고 부른다네(云是江州第一區). 상도면(上道面)은 강화부 관아 남쪽 35리에 있다. 도촌 정유성(陶村 鄭維城)은 묘는 하일리(霞逸里)의 서쪽 산기슭에 있다. 정제두는 도촌의 손자이다. 집터가 여기에 있는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도학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오조를 거쳐 국태로(國太老)의 학자라고 하였다. 또 하곡 선생이라고 불리었으며,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서세 283주기 하곡 정제두 선생 묘제

8월에 강화(江華) 하곡(霞谷)으로 옮겨서 살았다. 선생은 장손이 요사하는 변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였으며 따라서 선묘(先墓) 가까운 곳에 살고자 하여 이곳으로 이사하였다.(八月移居江華之霞谷。先生遭長孫殤悲哀。仍欲依近先墓。遷居于此。) -하곡집, 연보 조선의 양명학자 정제두 선생은 1709년(숙종 35) 61세에 안산군 추곡(楸谷,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에서 강화도 하일리로 이사하였다. 고령의 나이에 증조부 정근, 할아버지 정유성, 아버지 정상징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정제두 선생을 길러주신 할아버지 정유성의 고향이자 외가였다. 숙종과 영조로 부터 여러 벼슬을 제수 받았고, 특히 젊은 영조는 노론 중심의 정국에서 소론을 아우르는 탕평책을 펴며, 소론의 중심된 학자이자 원로였던 정제두를 가..

안산문화원 안산향토사박물관

안산문화원 안산향토사박물관 안산에는 다양한 박물관이 있다. 안산의 주요 인물을 기념하는 성호기념관(실학자 이익), 최용신기념관(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가-상록수)과 안산의 어촌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부도에 위치한 안산어촌민속박물관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의 역사성으로 안산 산업화를 드러내줄 수 있는 산업박물관도 개관준비가 한창이라고 한다. 이렇듯 안산은 자신이 디딘 뿌리에 대한 고민이 상당하고 그 고민을 다양한 형태의 문화 인프라를 통해 구현하고 있다. 안산문화원과 안산향토사박물관도 이러한 안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곳이다. 사실 안산문화원과 향토사박물관이 만들어질 당시 시흥문화원을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재 시흥문화원을 볼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안산문화원에는 원사 ..

사천 선진리성(사천 왜성)

사천(泗川)는 경상남도이다. 사천하면 생각나는 것은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비속어가 있다. 사천사람들은 싫어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삼천포가 사천보다도 유명해진 비결로 꼭 나쁘게만 볼 수 없을 듯하다. 요즘은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 해서 유명 관광지나 휴양지가 아닌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장소를 찾아다니는 관광이 성황이라니 삼천포 주민들도 역발상의 좋은 기회로 활용하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사천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1592년 5월 29일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최초로 돌격선인 거북선을 출병하여 왜선 13척을 궤멸시킨 사천해전의 승전지이다. 이 때 돌격선인 거북선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사실 남해안 전역은 조선 수군과 이순신 장군의 자취가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