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삼전도비

달이선생 2019. 10. 4. 11:00

삼전도비(三田渡碑)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己丑/命張維李慶全趙希逸李景奭, 撰三田渡碑文。 等皆上疏辭之, 上不從。 三臣不得已皆製進, 而希逸故澁其辭, 冀不中用, 李慶全病不製, 卒用景奭之文)-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1637) 11월 25일 기축 1번째기사

 

  이 기록은 삼전도비를 세우기 위해 삼전도비문 혹은 송로 문자(頌虜文字)로 불리는 것을 지은 기사이다.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은 삼전도비의 이수 아래 전자로 '대청황제송덕비'로 적었다. 이러한 삼전도비가  지어진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이렇게 세워진 삼전도비각은 청나라 사신에게는 크나 큰 영광을 되새기는 명승과 같았기 때문데 올 때마다 찾아보고자 했던 기념비가 되었다. 다만 조선에서는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청에 대한 대비를 하는 터(효종의 북벌 등)라 삼전도비로 청 사신이 나아가는 것을 꺼려했다. 삼전도에서 남한산성이 잘 조망되는 지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송덕비문을 지은 일은 두고두고 화근이자 불명예가 되었다. 특히 1713년(숙종 39) 8월 6일 숙종실록을 보면 삼전도비문을 지은 이경석은 문형(文衡)으로 조야에서 꺼려한 대청황제공덕비문을 짓고 채택되어 8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자자손손 불명예와 지탄을 대상이 되었다. 실록에는 손자  지평(持平) 이진망(李眞望)이 상소하여 그의 할아버지 이경석(李景奭)을  홍계적(洪啓迪)·김진규(金鎭圭, 대사성)가 소론에 입장에서 상소하면서 당쟁까지 비화되는 등, 이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한 상소였다. 이처럼 삼전도비가 갖는 역사적 평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단(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중략)

 ...홍서봉(洪瑞鳳)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려 노모(老母)를 찾아 보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 그들의 어미가 강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석을시(金石乙屎)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상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兩胡, 來城外, 趣上出城。 上着藍染衣, 乘白馬, 盡去儀仗, 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王世子從焉。 百官落後者, 立於西門內, 搥胸哭踊。 上下山, 班荊而坐。 俄而, 兵被甲者數百騎馳來。 上曰: "此何爲者耶?" 都承旨李景稷對曰: "此似我國之所謂迎逢者也。" 良久, 龍胡等至。 上離坐迎之, 行再揖禮, 分東西而坐。 龍胡等致慰, 上答曰: "今日之事, 專恃皇帝之言與兩大人之宣力矣。" 龍胡曰: "今而後, 兩國爲一家, 有何憂哉? 日已晩矣, 請速去。" 遂馳馬前導。 上只率三公及判書、承旨各五人, 翰、注各一人, 世子率侍講院、翊衛司諸官, 隨詣三田渡。 望見, 汗張黃屋而坐, 甲冑而帶弓劍者, 爲方陣而擁立左右, 張樂鼓吹, 略倣制。 上步至陣前, 龍胡等留上於陣門東。 龍胡入報, 出傳汗言曰: "前日之事, 欲言則長矣。 今能勇決而來, 深用喜幸。" 上答曰: "天恩罔極。" 龍胡等引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 使淸人臚唱。 上行三拜九叩頭禮。 龍胡等引上由陣東門出, 更由東北隅而入, 使坐於壇東。 大君以下, 自江都被執而來, 列立於壇下少西矣。 龍胡以汗言, 請上登壇, 汗南面而坐, 上坐於東北隅西面, 而王子三人, 以次連坐, 王世子又坐其下, 竝西面。 又王子四人, 坐於西北隅東面, 二大君連坐於其下。 我國侍臣, 給席於壇下東隅, 江都被執諸臣, 入坐於壇下西隅, 進茶一杯, 汗使龍骨大, 告我諸侍臣曰: "今則兩國爲一家矣。 欲觀射藝, 其各效技...(중략)

...洪瑞鳳張維入伏於庭, 請得尋見老母, 【其母入江都故也。】 金石乙屎怒叱之。 上地坐田中, 待其進退, 日晡後, 始令還都。 王世子及嬪宮曁二大君及夫人, 竝令留置, 蓋將以北行故也。 上退, 入見嬪宮於幕次, 留崔鳴吉, 姑令陪衛焉。 上由所波津, 乘船而渡。 時, 津卒死亡殆盡, 只有空船二艘, 百官爭渡, 至攀御衣而上船。 上旣渡, 汗隨後馳來, 由淺灘渡軍, 就桑田箚陣, 令龍胡率護行軍兵, 挾路左右, 導上而行。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人定時, 始達京城, 御昌慶宮 養和堂)-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1637) 1월 30일 경오 2번째기사 

 

 

 

이전 삼전도비 옆 부조석화와 영화 '남한산성' 중 삼배구고두례 장면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40여일을 버틴 인조가 1637년 삼전도에서 청태종(황태극,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삼배구고두라는 항복례를 행한 실록의 기록이다.  이러한 치욕의 역사를 '대청황제공덕'이란 이름으로 지은 비문이니 조정과 조야에서 두고두고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만큼 가장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시흥시와 인연이 깊은 당대 문장가로 조선문학 4대가였던 장유와 시문이 뛰어났던 조희일이 비문 짓기를 꺼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이처럼 어두운 과거는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최고의 치욕이었다. 물론 임진왜란 7년의 가혹한 시련 등 실질적인 피해와 아픔을 겪은 일은 숱하게 많았지만 병자호란처럼 왕이 적 앞에 무릎을 꿇고 직접 항복한 일은 없었다. 우리 역사 초유의 사건인 것이다. 더욱이 청으로 끌려간 피로인이 적게는 40만에서 많게는 60만이 넘었고, 특히 조선의 여인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환향녀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결을 강요 한 짧은 기간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끔찍한 일이었다. 이러한 역사를 비극이 아닌 청나라 황제의 공덕으로 기록하고 세워진 역사의 흔적이 바로 '삼전도비'이다. 때문에 청의 속박에서 벗어나서는 비각을 없애고 비를 파묻는 등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기 바빴다. 그러나 지금은 이를 다시금 비각이 있던 가장 가까운 잠실동 47번지 석촌호수 옆에 세웠다.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재난 지역이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곳을 돌며 교훈을 얻는 여행')이 있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역사는 기억이다. 사실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 현재를 살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에 지장이 된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반면교사하여 미래의 백년지대계를 세우는 현명한 지성의 발로인 자성이다. 과거에 머문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과거에 대한 제대로된 반성으로 다시는 이러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정세에서 우리는 또 다시 당시 명과 청, 그리고 일본 사이에서 동아시아 역학관계를 고민했던 조선의 어려움이 오늘, 우리시대 도래하였다.

  전통적 강국 미국과 그 패권이 흔들리며, 역사적 강국이었던 중국이 G2가 되고 미국의 힘이 빠진 것을 경제강국 일본이 채우면서 군비확장이 아베내각에서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 우리는 조선과는 달리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더 어려운 지경이다.

  다크투어의 현장 삼전도비 앞에서 오늘 우리는 삼전도비의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그리고 그 비문의 이름인 '공덕'에 대한 의미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가 당한 수치이나 가해자의 행위를 정당화를 넘어 '공덕'으로 기념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조선, 그 조선의 역사가 다시 되풀이 되선 안된다.  

 

 

 

 

 

 

 

 

 

 

 

 

 

 

 

 

 

 

 

 

 

 

 

 

 

 

 

 

 

 

 

 

 

 

 

 

 

 

 

 

 

 

 

 

 

 

 

 

 

 

 

 

 

 

 

 

 

대청황제공덕비 전문 번역문

(비신 높이 3.23, 전체 3.95, 폭 1.4m, 두께 39cm) 전면 몽골어(몽문, 왼쪽), 만주어(만문, 오른쪽) 후면 한문 음각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元年)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께서, 우리 편에서 먼저 화의를 깨뜨렸으므로 크게 노하시어 병위(兵威)로 임하시어 바로 동녘을 치시니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 남한산성에 계셨는데, 위태롭고 두려워 마치 봄날 얼음을 밟는 것 같으시어, 밝은 해를 기다리시기를 5순(旬)이었다.

동남쪽 여러 군사가 잇따라 패해 무너지고, 서북쪽 장수들은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였으며, 성안의 양식 또한 떨어져 갔다. 이러한 때에 황제께서 대군으로 성에 육박하시니, 마치 서릿발 같은 바람이 가을 대나무 껍질을 휘몰아 가려는 것 같고, 화로의 이글거리는 불이 조그만 새털을 태워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죽이지 않는 것으로 병위를 삼으시고 오직 덕을 펴시는 것을 앞세우셨다. 그리하여 곧 칙유를 내리시어, “오라. 짐은 너를 온전하게 할 것이다.”하셨고, 용골대와 마부대 등 여러 대장들이 황제의 명에 따라 길에 가득 차 있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 문무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으시고, “내가 대국(大國)에 화호(和好)를 의탁한지 10년인데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내가 어둡고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천토(天討)를 재촉하여 만백성이 어육이 되게 한 것이니,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차마 죄인을 도륙하지 않으시고 이와 같이 타이르시니, 내 어찌 감히 타이르심을 받들어, 위로 우리 종묘사직을 안전하게 하고 아래로 우리 생령들을 보호하지 않으리오.”하셨다.

대신들이 찬성하여 마침내 임금께서는 수십 기를 거느리시고 군전(軍前)에서 죄를 청하였는데, 황제께서는 예로써 극진히 대우하시고 은혜로써 가까이 하시어, 한번 보고 심복으로 허락하셨으며, 물품을 하사하는 은택이 신하들에게까지 고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황제께서는 곧 우리 임금을 서울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를 부르시어 서쪽으로 돌아가게 하셨으며, 백성을 무마하시고 농사를 권장하시니, 멀고 가까운 곳에 새떼처럼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와서 우리나라의 수 천리 산하가 이전과 같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소방(小邦)이 상국(上國)에 죄지은 지 오래되었다. 기미년의 전쟁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돕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는데, 태조무황제(누르하치)께서는 다만 홍립 등 몇 사람만 머물러 있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돌려보내셨으니 그 은혜가 한없이 컸다.

그런데도 소방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모르다가 정묘 년에 지금의 황제께서 동정(東征)을 명하시자 우리 임금과 신하는 성으로 피해 들어가서 화평을 청하였다. 황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시고 형제의 나라와 같이 보시어 강토를 복원하시고 강홍립 또한 돌아왔다.

이로부터 예우가 변치 않으시어 관개(冠蓋)가 서로 오고갔는데, 불행이 근거 없는 논의가 일어나서 소란꾸미기를 선도하므로 소방이 변방의 신하들을 선칙하였어도 불손한 말이 계속 돌아다녔다. 그 문서를 상국의 사신이 얻었으나 황제께서는 오히려 관대하게 용서하시어 즉시 군사를 가하지 않으시고, 먼저 명을 내려 나라에 출정할 시기를 호유하셨는데, 이리 핑계 저리 핑계 할 뿐 아니라 군사를 일으키지 않다가 몸소 명령을 받고 끝내 모면하지 못하였으니, 소방 군신의 죄가 더욱 모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황제께서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시고 다시 일부 군대에 명하시어 먼저 강화도를 함락시켜 궁빈(宮嬪), 왕자와 경사(卿士)의 가족들까지 다 포로로 하셨는데, 황제께서는 여러 장수들을 경계하시어 소란을 떨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시고, 종관(從官)과 내시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셨다.

또 크게 은전을 내리시어 소방의 군신과 포로 된 권속들을 옛집으로 돌려 보내셨다.

서리와 눈은 따뜻한 봄으로 변하고, 가뭄은 단비가 되었으며, 망한 것이 다시 살아나고, 끊어진 것이 다시 이어졌다. 동쪽 땅 수천리가 고구 생성의 혜택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만고의 기록에 드문 일이다.

한수 상류 삼전도의 남쪽은 곧 황제께서 머물러 계시던 곳이라 단과 뜰이 있는데, 우리 임금께서 수군에 명하시어 그 단을 더욱 높고 크게 하시고, 또 돌을 깍아 비석을 세워서, 황제의 공덕을 드날리어 영원히 전하게 하셨다.

참으로 천지자연과 함께 함이니, 어찌 우리 소방만이 대대로 영원히 의지하랴. 또한 대조(大朝)의 인(仁)을 행하고 무(武)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아무리 먼 곳에 있던 자라도 귀순하지 않는 자가 없으리니, 그것은 다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큼을 본뜨고 해와 달의 밝음을 그린다 하더라도, 그 만의 하나라도 방불하게 하기에는 모자랄 것이나 삼가 그 대략을 실을 뿐이다. 명에 이르기를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고 기르는데,

오직 황제께서 이를 본받아 위엄과 덕을 함께 펴시네

황제께서 동쪽으로 정벌하심에 그 군사는 10만이요

은은한 수레소리 호랑이 같고 표범과 같네

서쪽 변방의 터럭하나 없는 벌판과 북쪽 부락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창 들고 앞서 진격하니 그 위헤 혁혁하도다

황제게서 크게 인자하심으로 은혜로운 말씀 내리시니

10줄의 밝은 회답 엄하고도 따뜻하였네

처음에는 미혹되어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근심을 끼쳤지만

황제의 밝은 명령이 있어 비로서 깨달았네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고 함께 이끌고 귀복하니

단지 위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게서 이를 가납하시어 은택과 예우가 넉넉하니

얼굴빛을 고치고 웃으며 병장기를 거두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와 가벼운 갓옷

도회의 남녀들이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이 서울로 돌아가신 것은 황제의 선물이요

황제께서 군대를 돌이키니 백성들이 살아났네

유랑하고 헤어진 이들 불쌍히 여겨 농사에 힘쓰게 하시고

금구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제단은 더욱 새로우니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언 풀부리에 봄이 돌아온 듯하네

커다란 강가에 솟은 비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은 황제의 덕을 이어가리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신 여이징이 왕명을 받을어 전액을 씀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신 오준이 왕명을 받을어 씀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신 이경석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숭덕 4년(인조 17, 1639) 12월 초 8일에 세움

-출처 : 신봉승, 조선의 마음(도서출판 선,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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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탁본(일본 경도대학 인문사회연구소 소장본), 정문(판독문) 출처 :  http://cafe.daum.net/meetecho/d2fY/235?q=%EB%8C%80%EC%B2%AD%ED%99%A9%EC%A0%9C%EA%B3%B5%EB%8D%95%EB%B9%84%EB%AC%B8%20%EB%82%B4%EC%9A%A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