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15

수원 연등회

〈무진〉 특별히 흥왕사(興王寺)에서 5일 밤낮을 연등대회(燃燈大會)를 열었다. 칙서를 내려 모든 관사 및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개성부(開城府), 광주(廣州)·수주(水州)·양주(楊州)·동주(東州)·수주(樹州) 등 5개 주(州), 강화현(江華縣)·장단현(長湍縣) 등 2개 현(縣)에게 대궐 뜰에서 흥왕사 문까지 채붕(綵棚)을 얽되 연달아 서로 잇닿게 하고, 왕의 수레가 지나는 길 좌우에는 등산(燈山)과 화수(火樹)를 만들게 하니 불빛이 낮과 같았다. 이날에 왕이 의장을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행향(行香)하며 재물과 의복을 시납(施納)하니, 불교 행사의 성대함이 예로부터 일찍이 없었다.『고려사』 권8 세가(世家) 문종(文宗) 21년 1월 흥왕사에서 연등회를 열다 [오늘] 불기 2570년 부처님 오신 날이다. ..

삼괴 4.3 대한민국독립기념비

4월3일, 폭민 약 천명이 장안 우정양면사무소를 파괴해 서류 전부를 소각, 폐기해 면장을 데리고 갔다. 한층 더 그 수가 증가해 약2천명이 되어 화수경찰관 주재소(내지인 순경 1명, 조선인 순경보 3명)(수원 서남쪽 8리)를 덮쳐, 가와바타 순경이 발포해 항거 했지만, 총알이 떨어져 마지막에는 참살되어 그 순경의 시체는 51개소의 흉터를 남겨, 이비(귀와 코)를 깎아 음구(陰具)를 절단 하는 등, 잔혹을 가해 게다가 주재소에 방화 병기를 탈취해 그 지역을 떠났다. 「경기도 수원 안성지방 특별검거반의 행동」, 『독립운동가자료 기타보고서』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꽃피는 4월 누군가에게는 가슴 시린 날이다. 그간 제주 4.3이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3.1절 당시인 3월 1일의 중요성보다 4월 중순..

수원 동학농민군

안승관, 김승(정)현 등은 5천군을 거느리고 수원부를 점령하고 남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 던 바 관병과 일병을 만나 여러 날 싸우다가 마침내 패하였고 ...... 오지영의 「동학사」 에 나오는 기록이다. 1894년(고종 31) 1월 10일 새벽 고부읍 마항장(馬項場)에 모인 농민군 1,000여 명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고부읍의 삼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가자 조병갑이 달아났다.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本意)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의 중(中)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호강(豪强)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

수원 화성행궁

정조의 즉위와 행행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는 이름은 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영조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생부인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즉위하여, 홍국영(洪國榮)을 이용해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화성 야경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본래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인데, 신라가 수성군(水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남정(南征)할 때, 고을 사람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백여 사람이 귀순(歸順)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수주(水州)로 승격시켰으며,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 을사 【곧 송나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 에 이를 파하고, 현종(顯宗) 9년 무오에 다시 지수주사(知水州事)로 삼았다. 충경왕(忠敬王) 12년 신미 【곧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8년.】 에 몽고 군사가 대부도(大部島)에 침입하여 백성을 노략질하니, 섬 사람들이 분함을 못 이겨 몽고 군사를 죽이고 반(叛)하매, 주관(州官)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평..

수원 화성

수원부(水原府)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어필(御筆)로 편액(扁額)을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 부사(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판관(判官) 한 사람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을 고쳐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호위 대장(扈衛大將)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켰다. 전교하였다."왕위에 오른 이후로 재용을 많이 저축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 왔다. 그런데 다행히 황천에 계신 조종(祖宗)의 말없는 도움을 입어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좋은 자리를 잡아 영원토록 천억만년 끝없을 큰 운세를 정하였으니, 이 땅의 소중함은 실로 주(周)나라의 풍(豊)이나 한(漢)나라의 패(沛)와..

세계문화유산 화성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정수인 수원화성의 탄생은 제22대 정조(1752탄생 재위1776-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恨)과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지리적으로 교통이 사방으로 통하는 위치에 있는 수원을 상업 활동이 활발한 경제 신도시로의 건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화성을 축조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영조 즉위부터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붕당 서인 노론이 집권하고 있었다. 영조 즉위 이래 강력한 왕권강화책으로 탕평책을 펼쳤으나 여전히 강력한 기득권을 누리던 노론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 이성(李祘정조의 이름인 祘이 한자독음법에 따라 '산'으로 널리 읽히어 그간 정조..

수원 평동 학유당 SK고택

건실하면서 확실하게 산다최학배 선대회장 선친수원의 깍쟁이라는 말이 있다. 한양의 번화한 시장통의 상인들을 싸잡아 부른 말이 수원에도 정착했는데 정조가 화성을 쌓고 신도시를 만들면서 도회지로 만들기 위해 팔부자를 유치하면서부터이다. 이런 깍쟁이 중에 행궁 근처 문화공간 후소가 원래 수원의 큰 부자 양성관 가옥을 모태로 했는데 그 양성관이 있고 또 수원의 부자하면 영신연와를 창업한 박지원 등 많이 있다. 현재 한국의 대표하는 큰 부자로 널리 이름하고 있는 것은 SK다. 이 시작은 수원 평동에서 방직공장 선경직물에서 시작하였다. 창업자의 부친에 가르침대로 말이다.https://blog.naver.com/leelove97/223876966700SK고택(古宅)의 이름은 이곳에 터를 잡아 ‘창업자의 고향’이라는 뜻..

SK의 시작 수원 평동 선경직물

수원시 평동(坪洞)은 벌말, 평리로 불린 곳으로 평평한 대지의 마을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곳은 정말 평평하다. 다만 도시 속에 가득 채워진 곳이나 삭막하다는 느낌이 크다. 아무래도 곳곳이 자동차 정비소, 매매단지 등 그 계통 산업이 밀집하다 보니 그런 것으로 느껴진다. 이는 2000년대 이전에도 느꼈던 감정이다. 이 너른 대지는 원래 논과 밭이 펼쳐진 곳으로 멀리 현재의 수원군공항인 장지동을 지나 황계동을 지나 오산 양산봉, 독산성 아래까지 펼쳐진 황구지천과 서호천 등 여러 하천으로 형성된 평야(충적지)이다. 그래서 정조가 주목한 것은 수원을 조선 제일의 농업신도시로 육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곳에 큰 변화가 왔는데 바로 구한말 철도의 부설로 수원역이 개설되면서 그 배후지로 평동 일대가 개발되게 ..

수원 팔달산 성신사 정조대왕동상 선경도서관

수원 팔달산에는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많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 '꿈의 문화유산 화성(책이름 인용 : 유봉학, 1996, 신구문화사)'이다. 200년 전 정조가 만들고 정조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관련된 인물을 떠올린다면 단연 정조이지만 그 정조가 팔달산의 주인은 산신, 즉 성황이다.라고 하고 정조의 명으로 현재 융건릉이 있는 화산 바로 옆 성황산에서 성황사를 옮겨와 팔달산에 성신사를 만들고 제를 올려 이곳의 주인임을 기렸다. 또한 명령으로 유수가 음력 1월과 7월 헌관이 되어 고유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성신사가 오랫동안 묻혀지다 2009년 10월 드디어 복원되었다. 복원과 함께 고유제도 지내게 되었는데 정조가 명한 헌관은 수원유수 즉 현재의 수원시장인데 수원시장이 안 지내고 화성연구회에서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