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12

수원 화성행궁

정조의 즉위와 행행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는 이름은 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영조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생부인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즉위하여, 홍국영(洪國榮)을 이용해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화성 야경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본래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인데, 신라가 수성군(水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남정(南征)할 때, 고을 사람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백여 사람이 귀순(歸順)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수주(水州)로 승격시켰으며,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 을사 【곧 송나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 에 이를 파하고, 현종(顯宗) 9년 무오에 다시 지수주사(知水州事)로 삼았다. 충경왕(忠敬王) 12년 신미 【곧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8년.】 에 몽고 군사가 대부도(大部島)에 침입하여 백성을 노략질하니, 섬 사람들이 분함을 못 이겨 몽고 군사를 죽이고 반(叛)하매, 주관(州官)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평..

수원 화성

수원부(水原府)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어필(御筆)로 현판을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 부사(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판관(判官) 한 사람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을 고쳐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호위 대장(扈衛大將)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켰다. 전교하였다."왕위에 오른 이후로 재용을 많이 저축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 왔다. 그런데 다행히 황천에 계신 조종(祖宗)의 말없는 도움을 입어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좋은 자리를 잡아 영원토록 천억만년 끝없을 큰 운세를 정하였으니, 이 땅의 소중함은 실로 주(周)나라의 풍(豊)이나 한(漢)나라의 패(沛)와 같이 ..

세계문화유산 화성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정수인 수원화성의 탄생은 제22대 정조(1752탄생 재위1776-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恨)과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지리적으로 교통이 사방으로 통하는 위치에 있는 수원을 상업 활동이 활발한 경제 신도시로의 건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화성을 축조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영조 즉위부터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붕당 서인 노론이 집권하고 있었다. 영조 즉위 이래 강력한 왕권강화책으로 탕평책을 펼쳤으나 여전히 강력한 기득권을 누리던 노론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 이성(李祘정조의 이름인 祘이 한자독음법에 따라 '산'으로 널리 읽히어 그간 정조..

수원 평동 학유당 SK고택

건실하면서 확실하게 산다최학배 선대회장 선친수원의 깍쟁이라는 말이 있다. 한양의 번화한 시장통의 상인들을 싸잡아 부른 말이 수원에도 정착했는데 정조가 화성을 쌓고 신도시를 만들면서 도회지로 만들기 위해 팔부자를 유치하면서부터이다. 이런 깍쟁이 중에 행궁 근처 문화공간 후소가 원래 수원의 큰 부자 양성관 가옥을 모태로 했는데 그 양성관이 있고 또 수원의 부자하면 영신연와를 창업한 박지원 등 많이 있다. 현재 한국의 대표하는 큰 부자로 널리 이름하고 있는 것은 SK다. 이 시작은 수원 평동에서 방직공장 선경직물에서 시작하였다. 창업자의 부친에 가르침대로 말이다.https://blog.naver.com/leelove97/223876966700SK고택(古宅)의 이름은 이곳에 터를 잡아 ‘창업자의 고향’이라는 뜻..

SK의 시작 수원 평동 선경직물

수원시 평동(坪洞)은 벌말, 평리로 불린 곳으로 평평한 대지의 마을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곳은 정말 평평하다. 다만 도시 속에 가득 채워진 곳이나 삭막하다는 느낌이 크다. 아무래도 곳곳이 자동차 정비소, 매매단지 등 그 계통 산업이 밀집하다 보니 그런 것으로 느껴진다. 이는 2000년대 이전에도 느꼈던 감정이다. 이 너른 대지는 원래 논과 밭이 펼쳐진 곳으로 멀리 현재의 수원군공항인 장지동을 지나 황계동을 지나 오산 양산봉, 독산성 아래까지 펼쳐진 황구지천과 서호천 등 여러 하천으로 형성된 평야(충적지)이다. 그래서 정조가 주목한 것은 수원을 조선 제일의 농업신도시로 육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곳에 큰 변화가 왔는데 바로 구한말 철도의 부설로 수원역이 개설되면서 그 배후지로 평동 일대가 개발되게 ..

수원 팔달산 성신사 정조대왕동상 선경도서관

수원 팔달산에는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많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 '꿈의 문화유산 화성(책 이름 인용 : 유봉학, 1996, 신구문화사)'이다. 200년 전 정조가 만들고 정조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관련된 인물을 떠올린다면 단연 정조이지만 그 정조가 팔달산의 주인은 산신, 즉 성황이다.라고 하고 정조의 명으로 현재 융건릉이 있는 화산 바로 옆 성황산에서 성황사를 옮겨와 팔달산에 성신사를 만들고 제를 올려 이곳의 주인임을 기렸다. 또한 명령으로 유수가 음력 1월과 7월 헌관이 되어 고유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성신사가 오랫동안 묻혀지다 2009년 10월 드디어 복원되었다. 복원과 함께 고유제도 지내게 되었는데 정조가 명한 헌관은 수원유수 즉 현재의 수원시장인데 수원시장이 안 지내고 화성연구회에서 지..

선거연수원, 선거전시체험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선거전시체험관 수원시 여기산 아래 서호를 바라보는 양지바른 곳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이 위치하고 있다. 원래 서울 종로5가에 설치(1996)되었으나 2017년 11월 7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선거연수원이 자리잡은 이곳은 나주혁신도시로 이전된 옛 농촌진흥청 부지이다. 연수원 뒷산은 여기산으로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유물이 나온 여기산 선사유적지이고 연수원 앞 너른 호수는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을 쌓고 자족적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 축조한 축만제(서호)로 축만제둔 일명 '서둔'이라고 불린 너른 곡창지대의 젖줄이다. 지금은 서호 동편으로 중부작물부가 운영하는 농업시험장 일부가 남아 예전 서둔의 역사성을 드러내준다. 사실 대유평(북둔)이라고 불린 너른 곡창지대인 만석거에 비한다면..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농림학교, 수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4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 2019. 3. 3, 3. 9(2일 2차례 답사) 농촌진흥청과 함께 한국농업 발전을 이끈 것은 수원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1992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개칭), 일명 '수원 농대'이다. 원래 이곳은 전신인 농상공학교가 1904년 서울에서 개교하고 1907년 농림학교로 분리되어 수원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수원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교명이 바뀌다 해방후 194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정식 설치되면서 바야흐로 수원 농대의 역사를 열었던 학문의 전당이다. 그러나 2003년 9월 수원의 캠퍼스를 떠나 서울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농업대학이 가지는 위상과 의미가 퇴색하였다. 옮겨간 이후도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실질적인 연구가 필요하여 여전히..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축만제[서호], 항미정) 3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 2019. 3. 3, 3. 9(2일 2차례 답사) 전근대 수원은 화성시, 오산시까지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수원(水原)이라는 한자 명을 보더라도 물이 풍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현재 수원시와 화성시 등에는 많은 저수지들이 즐비하다. 삼한시대 모수국(牟水國) '벌물'의 뜻으로 '수원'의 뜻인 '물벌'과 같다. '모수'도 물을 뜻하고 고구려의 '매홀(買忽)'도 물을 뜻하는 것처럼 고려 때 '수성(水城)', '수주(水州)'에서 현재의 수원으로 변천한 명실공히 물의 도시가 수원이다. 이런 수원이 근현대 농업에서 중요한 변화를 맞는다. 조선후기 정조가 화성행행을 하며, 화산에 아버지 장헌세자묘(현륭원, 현재 융릉)를 천봉하고, 이어 화성행궁과 화성성곽을 연이어 축조하였다. 또한 신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