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농림학교, 수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4

달이선생 2019. 3. 9. 12:30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

2019. 3. 3, 3. 9(2일 2차례 답사)

 

  농촌진흥청과 함께 한국농업 발전을 이끈 것은 수원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1992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개칭), 일명 '수원 농대'이다. 원래 이곳은 전신인 농상공학교가 1904년 서울에서 개교하고 1907년 농림학교로 분리되어 수원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수원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교명이 바뀌다 해방후 194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정식 설치되면서 바야흐로 수원 농대의 역사를 열었던 학문의 전당이다. 그러나  2003년 9월 수원의 캠퍼스를 떠나 서울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농업대학이 가지는 위상과 의미가 퇴색하였다. 옮겨간 이후도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실질적인 연구가 필요하여 여전히 캠퍼스 맞은편 서호천 건너에 시험농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서울 농대 캠퍼스는 상당기간 방치되었다. 최근에는 폐가체험지로 인기라고 인터넷에 여기저기 소개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도 방치된채 폐허가 된 건물이 많다. 그나마 경기도에서 청년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경기상상캠퍼스'로 일부 운영하고 있고 서울대에서도 농업대학의 실질적인 공간 활용을 이어가고자 창업지원센터를 새로이 열었다.

  구한말 설립되어 일제의 침략과 수탈의 식민지 농정에 함께한 곳이지만 한국농업사에 중심이자 기틀을 다졌던 농대, 이곳이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는지 참담하다. 어린 시절 농대 정문에서 수원역으로 이어지는 대학로는 자주 버스가 막히곤 했는데, 바로 농대생들이 학생운동을 벌인 때문이다.  사실 농대는 경기도에서 학생민주화운동을 주도한 학교였다. 특히 1975년 4월 11일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박정희의 10월 유신에 반대하며, 서울대 68학번 김상진은 전날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작성하고, 당일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지금의 농대 건물 6동 앞에서 과도로 할복한 사건이 유명하다. 이후 유신반대 시위가 격화하였다.(오둘둘 장례시위) 김상진은 서울 출신으로 보성 중, 고교를 나와 학내에서 사회과학 연구동아리 '한얼' 활동을 하며, 세미나에 매진하였던 혁명가였다. 그런 그가 할복을 결행한 것은 당시 한국사회가 유신헌법에 국민 91%를 넘게 찬성하는 등 군홧발에 숨죽인 양심에 부끄러움을 일깨우고자 수오지심의 의(義)를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의 뜻을 기려 그 자리에는 작은 표석을 세웠다.(강당 앞 잔디밭, 현 창원지원센터 도서관, 2001) 이렇듯 농대의 학생운동의 역사는 수원지역의 한신대, 성균관대, 아주대 등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수원 농대 학생운동의 정신은 4.19혁명(4.20)과 일제시대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비밀결사운동(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 1928)에까지 닿아있다. 특히 농림학교의 출신으로 애국지사 류자명(柳子明, 1894~1945, 본명은 유흥식[柳興湜)])이 유명하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까지도 혁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민중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다는 구실 하에

실제로는 민중과 혁명을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시키려는 자가 있는 거이다."-류자명, '중국국민혁명 주도세력을 비판한 내용' 중

 

 “김원봉이는 앞에 내세운 사람이고 실제 일을 한 사람은 그 사람(류자명)이지요” -운암 김성숙

 

 “그는 중국 인민의 가장 친밀한 벗이었다.”-청싱링(程星齡)

 

  본명보다 류자명, 유자명으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그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Anarchism)였다. 신채호(申采浩, 1880~1936)와 여러 달을 함께 숙식하며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만들었던 조선의열단의 전략가로 신채호 선생이 민족주의자에서 혁명가(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로 자신의 사상이 거듭날 수 있었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이 바로 류자명이었다. 아래는 류자명이 아나키스트로 거듭나고 신채호와 관계를 말해주는 자료이다.

 

1919년 6월 신의주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소개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비서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었다. 이 시기 선생은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에 관한 역사>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 받아, 이후 신채호를 존경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한 혁명가의 회억(回憶)]·[러시아 문학의 현실과 이상] 등을 읽으면서 아나키즘(Anarchism)에도 공감하였다. 그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일제침략에 반대하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당면한 한국사회는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이 우선적이라 생각하였다.-한상도 건국대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국제주의자 유자명'

 

  또한 심산 김창숙 지사가 모금해 온 군자금으로 조선에서 의거할 청년 나석주를 소개했던 장본인이다. 그리고 한인애국단의 김구가 윤봉길과 의기투합하여 상해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할 때, 같은 시기 소리 없이 준비했던 장본인.. 그러나 한국에서는 잊혀진 영웅이다. 1950년 홍콩의 귀국길에서 6.25한국전쟁의 발발이 그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류자명의 자취는 중국 후난농업원(농업대학)에 기념관과 동상이 서있어 그가 중국에서는 유명한 농(원예)학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농업에 대한 지식이 남달랐던 선생을 한국전쟁 이후 북한 김일성이 정식 초청까지 하였던 그다. 전후 농업혁명을 이끌 적임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가 농업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졌던 것은 바로 수원농림학교 출신(1912~1916)이기 때문이다. 자랑스런 농대의 선배이다.

 이렇게 농대는 학생 반제반독제 운동의 역사가 면면히 흐르는 실천지성의 요람이었다. 그런대 수원의 서울 농대가 학문적 지성과는 상관없이 서울이라는 간판을 덧쓰고자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딛고 있어야 할 너른 수원을 떠나 관악산 골짜기에 숨어들었다. 당시 이런 결정을 했던 인사들과 학생들은 과연 지성을 말 할 자격이 있을까 서울의 허명을 위해 지성의 진체를 버린 그들의 선택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정문 근처에는 농대를 추억할 수 있는 오래된 빨간 건물이 있다. 현재 교수 연구실 및 박물관으로 쓰인다고 하는데, 박물관 기능은 단순 전시 외에 별다른 기능은 없어 보였다. 예전 본관을 리모델링한 건물 앞쪽 좌측으로 식수가 있는데 전신 농림학교 개교 10주년(1916)을 기념한 진유(眞鍮)라는 배나무가 있다. 그 바로 위에는 90주년을 기념한 나무가 서있다. 농대의 역사성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자 주인이지만 주위가 너저분하고 관리가 안되고 있는 것이 주인 잃은 나무처럼 처량하다.

  그리고 수원 농대를 추억하는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곳이 상록회관(2019년 경기도 업사이클플라자 개원 예정)이다. 1957년 지어진 건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의 기술 및 물자로 온전히 지어진 건물로 매우 이국적인 외형을 가지고 있다. 남학생의 기숙사(상록사)와 후에 학생편의를 위한 부대시설로 활용되었다. 건물 옆에는 예전 작은 연못이 있었고 거기에 '상록의 얼'이라는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걸 기념해서인지 아닌지는 잘은 모르나 건물 좌측에 1964년 사생들이 세운 '푸른 얼'이라는 비석이 서 있는데, 이곳이 수원 농생대 임을 알려주는 추억의 기념물이다. 스산한 농대를 거닐며, 이곳을 추억하고 이곳의 기억을 전해줄 흔적을 찾기란 너무 어렵다. 인터넷이 대중화되었던 2003년 문을 닫았던 곳이지만 농대에 대한 기억을 기록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농대에 대한 소중한 기억과 추억.. 수 많은 이야기들 이렇게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쉽다. 농대에 다녔거나, 농대를 근간을 살았던 누군가가 이 글을 본다면 농대에 대한 기억을 꼭 남겨 주시길 바란다.

  서호에서 남북으로는 경기학연구센터에서 주관한 삼남길 제5길 중복들길이 서호천변으로 길게 조성되어 길걷기가 좋다. 서울 농대 옆 서호중학교에서 서호천으로 건너 맞은편으로 한국전쟁 당시 터키 파병 보병여단이 주둔하면서 운영하였던 고아원터를 기념하는 앙카라공원이 자그마하게 만들어져 있다. 최근 터키에서 개봉해서 화제가 된 영화 '아일라'의 소재로 현재의 모습은 주민들과 수원시의 무관심으로 방치되는 모습이다.

  수원시대 농대의 유명 정치인은 조선일보 기자로 시작하여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의 3허로 불린 실세로 통일원 장관을 역임한 허문도와 그 정반대의 길을 걸은 민주노동당 당대표와 대통령 후보였던 권영길, 노무현 대통령과 악연 한상률 국세청장 등이 있고, 가수 김창완, 이수만이 유명하다. 수원에서는 민선 1,2기의 심재덕 시장이 농림학교를 나와 농대 잠사학과를 나왔으며, 현재 염태영 시장도 농대 출신이다.  

 

 

 

답사경로(이 글의 장소 굵은 글씨)

옛 농촌진흥청(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 정문 - 권업모범장 표석 - 본관 - 김영삼 대통령 기념식수 - 녹 색혁명성취기념탑 - 여기산 우장춘 박사묘, 김인환 박사묘(중턱), 정남규 박사묘(정상부) - 서호 - 축만제 표석 - 항미정 - 서호 남쪽 서호천길(삼남길) - 앙카라공원 - 서울 농대 - 박물관 - 본관 - 진유(배나무, 10주년 기념식수[1916]) - 강당(김상진 열사 유신 항거 의거 기념표석) - 상록회관(경기도 업사이클플라자) - 경기상상캠퍼스   



 

 

 

 

 

 

 

 

 

 

 

 

 

 

 

 

 

 

 

 

 

 

 

 

 

 

 

 

 

 

 

 

 

 

 

 

일제강점기 서둔동 농림학교(서울대 농학도서관 소장)출처 : 수원시사 16권(이곳에 가면 수원의 역사가 보인다.), 2014, 323쪽

 

 

 

 

 

 

 

 

 

진유(배나무, 농림학교 10주년 기념식수[1916])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개교 90주년 기념식수 1996.10.12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여기는 1975년 4월 11일

김상진 열사가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의거한 곳입니다

2001년 5월 20일 김상진기념사업회

 

 

 

 

 

 

 

 

 

 

 

 

 

 

 

 

 

 

 

 

 

 

 

 

 

 

1964. 9. 17. 사생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