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풍양군 장선징 묘

달이선생 2019. 3. 28. 12:00

  풍양군 장선징 묘(豊陽君 張善澂 墓)

 

 

우리 나라에 본디 현명한 국구(國舅)가 많으나, 문장과 공업(功業)의 성대함으로는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만한 이가 없다. 숭릉(崇陵)166) 어필(御筆) 신도비(神道碑)의 성대한 유적을 추모하니 배나 슬픈 생각이 든다. 고 부원군 장유(張維)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 김씨(金氏)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고 판서 장선징(張善澂)에게도 똑같이 치유(致侑)하도록 하라."(我朝固多賢國舅, 而文章功業之盛, 未有如新豐。 追惟崇陵御筆神道之盛蹟, 一倍愴想。 故府院君張維永嘉府夫人 金氏墓, 遣承旨致祭。 故判書張善澂, 一體侑之。-정조실록 47권, 정조 21년 8월 17일 계축 1797년)

 

  장선징(1614~1678)은 효종의 국구인 신풍부원군 장유의 아들이자,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의 오라비이다. 당시는 안산군에 속하였지만 현재의 행정구역은 시흥시 장곡동 안골에서 동생 인선왕후와 출생하였다. 시흥시 태생의 문신이다. 풍양군에 대한 작호는 아버지 장유의 작위를 이어받은 것으로 조선 왕실과는 폐부지친(肺腑之親-왕실과 가까운 친족)이다. 실제로 조선의 왕은 효종 이후 장유의 외손으로 혈통이 현종에서 철종까지 이어진다. 헌종이 후사를 잇지 못해 가까운 왕족 중 철종이 뒤를 이었는데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손이다. 다음대인 고종은 종계로 효명세자를 이엇지만 이는 혈통적 승계가 아니다.(고종은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혈손) 그리고 장유 선생 가계 역시 혈통적으로 손자 장훤까지 이어지고 아들을 못낳아 장유의 형 장륜(음보로 의금부 경력을 지냄)의 손자 장설의 아들 장진환이 가계를 이었다.

  '계곡집'에서 밝힌 장유 집안의 내력이 판서를 지낸 아버지 장운익에 이어 자신과 동생 장신 대에서 현달하였는데, 장선징 사후 후손이 혈연적으로 단절되고 그 위계도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는 장유가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장선징 개인으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조선시대 환향녀 논쟁의 시초(인조16, 1938)가 되었고 그로인해 결국 부인 청주 한씨(부 한이겸)와 이혼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임금 인조와 최명길이 거듭 반대를 하였으나 장유는 절개를 잃은 며느리가 제사를 모시는 것은 있을 수 없어 외아들을 새장가 보내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후 장유가 죽고 부인 안동김씨(부 김상용)가 며느리를 칠거지악으로 몰아 끝내 장선징과 이혼시켰다. 사실 이 대목이 장유 선생을 평가하는데 여러 생각을 하게 되는 부분이다. 성리학 일변도의 사회에서 양명학까지도 열려 있는 사고를 했던 장유지만 사대명분론에 입각하여 인륜을 무시한채 청나라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며느리를 내친 것이다. 그 결과 사대부 사이에서는 양반가 자녀가 속환되어 돌아왔어도 모두 내쳐져야 하는 불운 겪게되었다.

  이후 이혼한 장선징은 경주이씨(부친 이승효) 결혼하였고 이후 해평윤씨(부친 윤종지)와 결혼한다(윤씨부인에 대한 기록은 장선징이 철원부사로 있을 때 문과급제하여 국조방목에 나옴). 외아들 장훤을 낳은 생모 한씨는 실록은 물론 덕수장씨 족보에서 지워지고 청주한씨 세보에도 불명확하게 표기된다. 딸의 처지가 기구하여 노복을 시켜 격쟁으로 부당함을 호소했던 한이겸도 세태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굴래는 아들 장훤에게 이어져 생모 한씨가 절개를 잃은 환향녀라고 해서 관직에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계모 이씨를 따랐는데 이는 도리어 천륜을 어긴 불효자로 낙인이 찍혀 아버지 작위는 물론 왕실의 친족이지만 관계 서용이 어려워졌다.

  이렇듯 장선징의 가정사에 어두움은 이후 정국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서인의 중신이었던 그가 숙종의 비위를 건드린 송시열이 내쳐지는 가운데 적극 변호하다 파직된 것이다. 아버지 장유의 학문이 성리학 외에도 양명학에 열린 문제로 사류의 지탄을 받았는데 이를 구원한 사람이 송시열이었다.(송시열은 장유 신도비문을 지어서 그를 일컬어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라고 하였다.) 사사로이는 숙종에게는 할머니의 오라비로 진 외종조부인 장선징이지만 숙종의 미움을 받아 낙심한 나머지 안산 고향으로 돌아가서 두문불출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버지 장유의 묘가 위치한 이 마을에 들어와 월파정()을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장선징의 묘소는 처음 금천현에 묻었다가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시흥시 조남동 장군재마을 응달말 아버지 묘소의 서쪽편 구릉 쇠머리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최근에 마련한 무덤 둘레돌과 봉분 왼쪽의 동자석을 빼고는 무덤 석물이 옛 것으로 당대를 대표할 만하다. 특히 상석 앞 둥근 향로석은 매우 희귀한 작품으로 조선시대 향로석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오석으로 쓰여진 묘갈은 예서(隸書)로 쓴 것으로 서예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 3정미(1787, 정조11)4월 모일이다. 의정부우찬성 박필주(朴弼周, 1665~1748)가 짓고 성주 이한진(李漢鎭, 1732~?)이 예서로 쓰고 전액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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