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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평동 학유당 SK고택

건실하면서 확실하게 산다최학배 선대회장 선친수원의 깍쟁이라는 말이 있다. 한양의 번화한 시장통의 상인들을 싸잡아 부른 말이 수원에도 정착했는데 정조가 화성을 쌓고 신도시를 만들면서 도회지로 만들기 위해 팔부자를 유치하면서부터이다. 이런 깍쟁이 중에 행궁 근처 문화공간 후소가 원래 수원의 큰 부자 양성관 가옥을 모태로 했는데 그 양성관이 있고 또 수원의 부자하면 영신연와를 창업한 박지원 등 많이 있다. 현재 한국의 대표하는 큰 부자로 널리 이름하고 있는 것은 SK다. 이 시작은 수원 평동에서 방직공장 선경직물에서 시작하였다. 창업자의 부친에 가르침대로 말이다.SK고택(古宅)의 이름은 이곳에 터를 잡아 ‘창업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선대회장의 선친 최학배의 학(學)자와 한고조 유방의 고향에서 누릅나무 한 쌍..

SK의 시작 수원 평동 선경직물

수원시 평동(坪洞)은 벌말, 평리로 불린 곳으로 평평한 대지의 마을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곳은 정말 평평하다. 다만 도시 속에 가득 채워진 곳이나 삭막하다는 느낌이 크다. 아무래도 곳곳이 자동차 정비소, 매매단지 등 그 계통 산업이 밀집하다 보니 그런 것으로 느껴진다. 이는 2000년대 이전에도 느꼈던 감정이다. 이 너른 대지는 원래 논과 밭이 펼쳐진 곳으로 멀리 현재의 수원군공항인 장지동을 지나 황계동을 지나 오산 양산봉, 독산성 아래까지 펼쳐진 황구지천과 서호천 등 여러 하천으로 형성된 평야(충적지)이다. 그래서 정조가 주목한 것은 수원을 조선 제일의 농업신도시로 육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곳에 큰 변화가 왔는데 바로 구한말 철도의 부설로 수원역이 개설되면서 그 배후지로 평동 일대가 개발되게 ..

수원 팔달산 성신사 정조대왕동상 선경도서관

수원 팔달산에는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많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 '꿈의 문화유산 화성(책 이름 인용 : 유봉학, 1996, 신구문화사)'이다. 200년 전 정조가 만들고 정조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관련된 인물을 떠올린다면 단연 정조이지만 그 정조가 팔달산의 주인은 산신, 즉 성황이다.라고 하고 정조의 명으로 현재 융건릉이 있는 화산 바로 옆 성황산에서 성황사를 옮겨와 팔달산에 성신사를 만들고 제를 올려 이곳의 주인임을 기렸다. 또한 명령으로 유수가 음력 1월과 7월 헌관이 되어 고유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성신사가 오랫동안 묻혀지다 2009년 10월 드디어 복원되었다. 복원과 함께 고유제도 지내게 되었는데 정조가 명한 헌관은 수원유수 즉 현재의 수원시장인데 수원시장이 안 지내고 화성연구회에서 지..

수원향교 석전

1789년(정조 13) 정조가 융건릉이 위치한 화산 아래 구읍치를 지금의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신읍치를 열며 유교의 제사와 교육을 받들던 수원향교도 팔달산 아래로 옮겼다. 군현의 격이 도호부에서 화성유수부로 승격한 이유로 수원향교는 화성향교이기도 하다.수원향교는 현륭원 천봉 과정에서 급히 서두른 탓으로 목재 대부분은 옛 건물 그대로 옮겨와 건물의 하부가 물에 잠기어 목재가 썩는 등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정조는 직접 대성전을 배알하고 화성 신도시의 격에 맞게 더 크고 장중한 대성전 건축을 명한다.(1795년, 정조 19) 군현의 격이 수원도호부에서 화성유수부로 승격하면서 향교 대성전을 이건 증축하면서 그 규모가 한양 문묘와 대도호부의 이상인 전주(부윤) 등과 같이 큰 규모로 지어졌다.(보물 지정 제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