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30

2023 수원 문화재 야행과 수원시 박물관 나들이

특별한 것이 없다면 수원에 사는 이상 수원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에 찾는 편이다. 집에서 가까운 화성행궁은 문화의 중심지가 된지 오래라 여러 행사들이 일년 내내 펼쳐지는데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화성 야행을 찾았다. 화성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야행은 해마다 다른 주제를 가지고 갖가지 늦은 시간 여러 문화 행사를 진행한다. 작년에는 수원천변에서 화홍문을 중심으로 비디오아트 등 눈요깃거리가 많았는데 올 해는 조금 달랐다. 그 중 눈이 간 것은 수원시가 발굴하고 수원에서 널리 알리고 있는 수원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프로그램이다. 이미 야행 이전에 연극이나 뮤지컬 등으로 만들어져 수원시민에게 소개된 인물들인데, 야행을 통해 거리극으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로 주목 받..

화성시 황계동 정조마을 화소표석

화성시 황계동 정조마을 화소표석 화성시 황계동 황계1통은 점말로 최근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정조마을이 되었다. 2020년 화성시문화재단의 문화적 도시재생사업 연구용역에 따라 마을 입구에 정조가 원행을 나섰던 표식인 '능원소 화소'표석을 지난해 재건하였다. 아울러 원행의 이정표가 되었던 장승도 정조마을과 정조대왕을 나타내는 것으로 2기를 각각 건립하여 정조능행차로의 기념물로 알리고 있다. 작현, 까치고개 정조가 유첨현으로 개칭 이밖에 화성시 황계동 황계1통 정조마을의 표석 및 장승 재건 노력말고도 진품 복제품 등 정조 원행과 그 이후 능행과 관련된 표석과 장승 등이 주변 지역에 즐비하다. 정조마을 다음으로 현존하는 안녕리표석과 수원시 수원천변 버드내장승-하유천표석(세류역 앞)-상유천표석-남창교표석 등 약간의..

화성일기 이희평 이야기

『화성일기(華城日記)』 수록 『화성문화』 제6호(향토사 연구 자료집, 화성문화원, 1988) 『화성일기(華城日記)』는 1795년(정조19)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회갑연(수원 화성행궁) 등을 하고자 수원 현륭원으로 원행을 하였는데, 이때 혜경궁의 인척 자격으로 일행에 참가했던 이희평(李羲平, 자 성여.준여, 호 계서, 1772~1839)이 남긴 국문체(한글) 기행문이다. 이 기행문을 화성문화원에서 펴낸 『화성문화』 제6호에 해제와 함께 번역자료가 실려있다. 해제자인 화성군사 집필위원 김우영은 이희평에 대하여 '無名(무명)의 선비'라고 했지만 이희평은 한산이씨로 목은 이색의 16대손이자 당대 노론 벌열로 혜경궁홍씨의 외척이 되는 명문가였다. 토정 이지함과 선조대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방조이다...

세류삼각선(수인선 세류공원), 수원역 급수탑, 수인선 협궤열차

근대의 상징 철도, 수원시 문화유산 세류삼각선지(수인선 세류공원), 수원역 급수탑, 수인선 협궤열차 세계사적으로 근대를 규정하는 것은 보통 우리 인류발전 측면에서 정치체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확립을 든다. 이러한 근대를 향한 규정은 어디까지나 서구사회를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우리와는 차이가 많다. 우리의 근대는 제국주의 침탈과 식민지(일본), 그리고 수탈의 경제였기 때문이다. 근대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큰 변화로는 산업혁명을 들 수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을 이끈 산업이 바로 철도였다. 철도는 증기기관과 철로를 이루는 철로 인한 대규모 철강공업을 발전시켰고, 증기기관을 통한 동력은 석탄산업 발전과 대규모기계공정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19세기 들어 세계는 그야말로 영국뿐 아니라..

수원화성박물관 , 사도세자의 부마 흥은위 정재화

2021년 수원화성박물관 특별기획전 사도세자의 부마, 흥은위 정재화 특별기획전 마지막 날 방문하였다. 정재화는 사도세자의 딸 청선군주에 남편으로 정조의 매부이자 부마다. 청선군주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막내딸이므로 외명부 품계 정2품이고 그의 남편인 정재화는 의빈부 흥은부위로 정3품 상계 당상관이다. 고종 때 대한제국 선포 이후 장헌세자(아버지 사도세자 정조 즉위 추존)를 장종(장조, 1899)으로 높이면서 딸인 청선군주가 공주로 봉작되고 아울러 정재화도 흥은위로 추봉되었다. 품계는 이미 정조가 1784년에 의빈계 정1품 수록대부에 올리었다. 전시에는 부위보다 높은 종2품 순의대부에 가자된 교지(고신)를 확인할 수 있는데, 청선군주에게 장가들어 '흥은' 칭호를 받은 이듬해이다. 이번 전시회는 흥은위의 후손들..

소다미술관, 만년제, 안녕리 표석

소다미술관, 만년제 화성에서 자랐지만 종종 화성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처럼 말이다. 6월 17일 화성시 안녕동 소다미술관을 찾았다. 소다미술관은 유명한 곳이었다. ‘인스타 미술관’, ‘하이브리드 미술관’ 등 으로 이야기되는 유명세가 있는 곳인데 지금껏 모르고 살았다. 이곳 장동선 관장은 사립미술관이지만 하루평균 주말 4,5백, 평일 1,2백명이 찾고 있어 이렇게 모인 관람료를 총 운영비 절반을 감당한다고 하니 여느 미술관이나 박물관보다 운영조건이 매우 양호하다. 그런데 소다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주변에 즐길 거리가 없다. 볼게 없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한다. 역사를 전공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본능적으로 '왜 없어 이렇게 많은데' 바로 옆 만년제니..

수원 행궁동 더페이퍼

어둑한 짙은 황사가 왔다가 두 차례 비가 지나고 4월의 햇살이 주춤하더니 파란하늘이 열리고 옷무새 날리는 바람이 시원하다. 사무로 시작한 일정이지만 가깝고도 멀었던, 행궁동을 찾았다. 행궁동을 찾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보통은 수원 화성행궁을 찾아서 오는 길손이 많을 것이고 더러는 행궁동의 아기자기한 찾집이며, 카페며, 혹은 점집을 찾아 드는 객이 많을 것이다. 10여년 전 매산로 부근에 살며, 화성성곽을 돌고 그 아래 행궁동이며, 지동이며 발품으로 곳곳을 누비고 다녔었다. 그 때 이런 일정에는 화성과 행궁 등 문화유산이 중심에 있던 나들이었다. 지금의 행궁동은 많이 변했다. 그 옛날 화성과 행궁을 찾아 오던 이보다도 더 행궁동 자체의 문화향수를 가지고 찾는 이가 많을 것이다. 혹자는 "도시재생이 벽화만..

효암

효암孝巖의 유래 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수기리 홍법산弘法山 기슭에 있는 이 효암은 고려 의종毅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효자 최누백崔婁伯이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죽자 곧 도끼를 매고 추적해 이 바위 아래에서 범을 잡아 부친의 원수를 갚고 또 호환虎患으로 난리를 겪던 이곳 백성들의 걱정을 덜어 주어 칭송을 받았던 곳이다. 지금의 수기촌과 분천 일대는 고려 때에 용성현龍城縣에 속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삼봉三峯이라 불리던 것을 일제가 삼봉 갈담葛潭을 합쳐 봉담으로 개명하였다. 조선 제22대 정조대왕正祖大王은 효성이 지극했던 임금으로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陵을 이곳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자주 이곳에 행차 했는데 행차 길에 최공의 후손을 불러 훌륭한 조사이라 극찬하며 수..

최루백 효자비각

인물은 한림 학사 국자 좨주 최누백(崔婁伯)이다. (【고려 인종(仁宗) 때 사람이다. 】人勿, 翰林學士國子祭酒崔婁伯, 高麗、仁宗特人)-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 전근대시대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바로 수원최씨의 비조가 되는 효자 최루백(?~1206)이다. 수원을 본향으로 하는 성씨 중 최씨는 둘인데 그중 본최(本崔) 또는 원최(原崔)가 되는 것이 최루백의 수원최씨다. 화성시 매송면에 무덤이 전하는 비조 최영규는 수원최씨, 수성최씨로 불리는 내최(來崔)이다. 최루백은 고려 때 수원의 호장 최상저(崔尙翥)의 아들로 한림학사를 지내 인근 화산에 사도세자를 모신 정조가 "최학사"로 칭했던 인물이다. 특히 정조는 이를 더하여 최루백이 아버지 최상저의 시신을 수습한 바위를 효암으로 명하..

영화천 십리길, 서호천에서 만석거(영화정)까지

영화천 십리길, 서호천에서 만석거(영화정)까지 영화천(迎華川) 십리길은 수원시 영화천변의 길이다. 서호천 13교인 한마루교에서 서호천의 지류인 영화천이 만나는데 여기부터 동북쪽으로 길을 잡아가면 정조가 축조한 만석거(萬石渠)가 나온다. 이 만석거가 영화천의 실질적인 발원지이다. 여기까지가 대략 2km가 넘고, 만석거의 둘레가 1km가 넘으니 다 돌아보면 거의가 십리(4km)라서 이름한 것이다. 참고로 수원시는 3월 16일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에 따라 일왕저수지는 만석거로, 서호는 축만제(祝萬堤)로 공식 명칭이 각각 변경됐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먼저 걸음하였던 황구지천과 서호천은 과거 수원 권역으로 볼 때는 도심 외곽에 위치한 변두리에 가까웠다. 지금도 황구지천은 수원 서부 들녘을 관통하지만 도심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