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40

장성

장성에 가보지 않은 자는 사내 대장부라 할 수 없다.(不到长城非好汉)마오쩌둥(毛泽东)드넓은 중국, 장성 너머는 중국이 아니다. 중국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지금도 장성을 확대하고 있다. 들리는 말로는 동으로는 우리나라 평양성까지 확장할 기세다. 만리장성은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다. 우리나라 고구려와 고려 때 천리장성이 있듯이 중국에는 그보다 훨씬 크고 긴 만리장성이 있다는 인식이나 만리장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리장성의 대표적 조망대는 예부터 사신들이 본 북경 인근 팔달령 구간이다. 진시황제 때 각 제국이 쌓은 장성을 연결한 것이 시초로 지금의 모습은 명나라 때 완비된 모습이다. 이후에는 청왕조가 몽골과 국혼을 맺어 동맹 관계에 있었기에 방어적 관방 시설과는 거리가 멀었다.팔달령 장성은 명대 이후 각국..

수원 화성행궁

정조의 즉위와 행행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는 이름은 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영조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생부인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즉위하여, 홍국영(洪國榮)을 이용해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화성 야경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본래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인데, 신라가 수성군(水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남정(南征)할 때, 고을 사람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백여 사람이 귀순(歸順)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수주(水州)로 승격시켰으며,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 을사 【곧 송나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 에 이를 파하고, 현종(顯宗) 9년 무오에 다시 지수주사(知水州事)로 삼았다. 충경왕(忠敬王) 12년 신미 【곧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8년.】 에 몽고 군사가 대부도(大部島)에 침입하여 백성을 노략질하니, 섬 사람들이 분함을 못 이겨 몽고 군사를 죽이고 반(叛)하매, 주관(州官)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평..

세계문화유산 화성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정수인 수원화성의 탄생은 제22대 정조(1752탄생 재위1776-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恨)과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지리적으로 교통이 사방으로 통하는 위치에 있는 수원을 상업 활동이 활발한 경제 신도시로의 건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화성을 축조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영조 즉위부터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붕당 서인 노론이 집권하고 있었다. 영조 즉위 이래 강력한 왕권강화책으로 탕평책을 펼쳤으나 여전히 강력한 기득권을 누리던 노론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 이성(李祘정조의 이름인 祘이 한자독음법에 따라 '산'으로 널리 읽히어 그간 정조..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도원수의 공로 성조 때에 많았는데 / 元師功多聖祖朝깃털 서글피 바라보니 하늘에 있네 / 羽毛悵望在雲霄사방에 적병이라 외로운 성 작기만 하고 / 四郊受敵孤城小천 리 밖 근왕병들 한 자루 칼도 아득하네 / 千里勤王一釖遙백면서생이 오히려 세 번 승전을 아뢰니 / 白面猶能三捷奏푸른 바다에 만 척 범선을 누가 염려하랴 / 蒼濤誰慮萬帆飄위엄과 명성이 양강 북쪽까지 떨쳤으니 / 威聲又振楊江北끝내 우리나라 적막하지 않게 하였네 / 終使東韓不寂寥신경준, 독산성에서 옛날을 추억하며〔禿山城懷古〕 고전번역서 여암유고 제1권 시 독산성은 경기도 오산시와 화성시와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에 위치한 백제 시대의 산성으로,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불린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

수원향교 석전

1789년(정조 13) 정조가 융건릉이 위치한 화산 아래 구읍치를 지금의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신읍치를 열며 유교의 제사와 교육을 받들던 수원향교도 팔달산 아래로 옮겼다. 군현의 격이 도호부에서 화성유수부로 승격한 이유로 수원향교는 화성향교이기도 하다.수원향교는 현륭원 천봉 과정에서 급히 서두른 탓으로 목재 대부분은 옛 건물 그대로 옮겨와 건물의 하부가 물에 잠기어 목재가 썩는 등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정조는 직접 대성전을 배알하고 화성 신도시의 격에 맞게 더 크고 장중한 대성전 건축을 명한다.(1795년, 정조 19) 군현의 격이 수원도호부에서 화성유수부로 승격하면서 향교 대성전을 이건 증축하면서 그 규모가 한양 문묘와 대도호부의 이상인 전주(부윤) 등과 같이 큰 규모로 지어졌다.(보물 지정 제209..

국립농업박물관

근현대 농업의 상징 수원의 국립농업박물관​일찌감치 일어나 두 아해들과 3.1절을 맞아 국기를 게양하고 큰 아이가 가고 싶다고 보챈 국립농업박물관을 갔다. 사실 특별기획전시를 보려고 간 거였는데 전시를 마쳤다. 일반 관람은 이번이 두 번째로 박물관 개관(22.12.15.)을 맞춰 재작년에 찾았었다. 개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수원에 생긴 국립박물관이라는 기대감이 컸는지 별 감응 없이 지나고 다시 찾았다. 다시 찾은 박물관은 우리 농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양한 체험과 전시시설을 갖춘 곳으로 가족 나들이로 제격이다. 작은 식물원에서 소설 어린 왕자에서 나오는 바오밥나무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고 판매는 아니지만 중부지방에서 바나나가 재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제어형 식물공장이 옥상 ..

화성 봉돈

수원 화성(水原 華城) 봉돈(烽墩)​수원 화성 팔달문 동편 지동시장은 순대로 유명하다. 특별히 싸진 않지만 푸짐하고 신선한 재료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20대 때 아버지와 동생이랑 가서 순댓국을 처음 맛 들인 곳이다. 어쨌든 순댓국이 먹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가 완뚝했다. 부모가 좋아하니 어린 두 아해도 좋아졌는지 보채서 나선 길이다. 양이 많아 평소 같으면 애들 것도 넘볼 테지만 너무 배불러서 남겼다. 특히 청양고추 채 썬 쌈장이 별미다. 나오는데 아이들 사탕도 손 가는 대로 덥석 집어 쥐여준다. 엄마네 여긴 엄마네 말고도 다 그렇다. 등을 못 펼 정도로 배부르니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화성 성곽 동남각루가 옆이다. 여기 동산은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의 참수된 몸뚱어리를 굴렸다고 전해지는 데…..

심곡서원

전교하였다."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사판(祠版 : 죽은 사람의 위패 즉 조광조 위패로 심곡서원을 말함)이 본부 안의 행궁(行宮)에서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는데, 몇 칸 모옥(茅屋)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있다. 아, 선정의 도학(道學)으로 성조(聖朝)를 만나 당시 융숭한 지우(知遇)를 받은 것이 실로 천재일우의 성대한 기회였기에 내가 매양 그 유서(遺書)를 열람할 때면 여러번 되풀이하여 탄상(歎賞)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정학(正學)이 날로 묵어가고 사풍(士風)이 점차 투박해지는데, 어떻게 선정 같은 사람을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지척(咫尺)에 주필(駐蹕) 하니 내 감상이 배나 더한다. 승지를 보내 날짜를 가려서 치제(致祭)하고, 그의 봉사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