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심곡서원

달이선생 2025. 1. 16. 15:01

전교하였다.

"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사판(祠版 : 죽은 사람의 위패 즉 조광조 위패로 심곡서원을 말함)이 본부 안의 행궁(行宮)에서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는데, 몇 칸 모옥(茅屋)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있다. 아, 선정의 도학(道學)으로 성조(聖朝)를 만나 당시 융숭한 지우(知遇)를 받은 것이 실로 천재일우의 성대한 기회였기에 내가 매양 그 유서(遺書)를 열람할 때면 여러번 되풀이하여 탄상(歎賞)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정학(正學)이 날로 묵어가고 사풍(士風)이 점차 투박해지는데, 어떻게 선정 같은 사람을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지척(咫尺)에 주필(駐蹕) 하니 내 감상이 배나 더한다. 승지를 보내 날짜를 가려서 치제(致祭)하고, 그의 봉사손(奉祀孫) 조국인(趙國仁)은 해조로 하여금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또 듣건대 사판(祠版)을 벽에 두어 예의를 갖추어 제사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옛날 정공(鄭公)의 집을 속환(贖還)한 것을 《당사(唐史)》에서 아름답게 일컬었으니, 수신에게 분부하여 집 한 채를 사서 향화를 받들게 하라.(敎曰: "先正文正公 趙光祖祠版, 在於本府之內行宮相望之地, 而數椽茅屋, 風雨不庇。 噫! 以先正道學, 遭際聖朝, 當時契遇之隆, 實爲千載盛會, 予每閱遺書, 未嘗不三復歎賞。 況今正學日蕪, 士風漸渝。 安得如先正者, 與之共國? 咫尺駐蹕, 倍增予感。 遣承旨卜日致祭, 其奉祀孫國仁, 令該曹初仕調用。 且聞祠版, 藏之壁間, 無以備儀受祭。 贖還鄭公之宅, 《唐史》稱美。 分付守臣, 買第一區, 俾奉香火。")"

정조실록44권, 정조 20년 1월 23일 경오 2번째기사 1796년 자료열람 | 조선왕조실록

 

 

   을사년을 맞아 두 아들 지시환을 벗 삼아 엄동설한을 뚫고 지척에 있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와 심곡서원을 다녀왔다.(2025.1.11.) 두 아해와 나서니 그 춥던 한철도 볕이 들고 온화하다. 답사를 다녀오고 정암 선생을 생각하며 어떻게 글을 쓸까 생각에 잠겼다. 블랙아이스로 길이 미끄러워 아이 손을 꼭 붙들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버드내도서관으로 향하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꼬리를 문다. 그 이야기를 푼다.

   용인에 걸출한 인물들이 많은데 그 중 조선 사림의 비조가 되는 두 분의 묘소가 있다. 한 분은 고향으로 가시다가 머물러 장지가 되신 분이고 한 분은 선산이 위치하여 친구 양팽손에 의해 묻히신 분이다. 바로 포은 정몽주와 정암 조광조이다. 따라서 정몽주 선생을 모신 묘가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 있고 재실 영모재와 배향된 충렬서원이 있다.

  조광조 선생은 정몽주 선생 묘와 반대인 서쪽으로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산 55-1(포은대로 125)에 위치한다. 선생의 묘소에서 큰 길로 나가면 정몽주 선생 묘로 이어지는 포은대로이다. 이 대로변에 수지구청이 위치한다. 이 도로는 수원에서 용인을 거쳐 광주로 이어지는 길로 광주 가기 전 모현읍이 정몽주 선생 묘가 있어 모현, 즉 성현인 정몽주 사모,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림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고 종장을 삼았던 사람이 조광조였다.

  한양조씨 선산(세장지, 응봉산 236m)은 증조부 조육에서 아들 조용에 이르기까지 묘가 쓰인 곳으로 입향조는 조광조 선생의 증조부 조육 선생이다. 세종대 전라감사를 역임한 용인(구성)이씨 이백지(재지거족)의 사위가 되면서 처가 입향한 것이다. 특히 이곳은 조광조 선생이 아버지 조원강을 19세(1500, 연산군6)에 여의고 아래 여막에서 3년상을 모신 곳이 이심곡리다. 조광조 선생이 실제 살았던 곳이다. 신도비의 기록에 따르면 조광조 선생의 묘소는 선생의 유언으로 조상을 모신 선산(용인현 심곡리) 아래 써달라하여 서쪽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친우 양팽손에 의해 초장이 이루어지고 이후 1541년 11월 25일 부인 한산 이씨가 졸하자 현재의 위치로 합장하여 묘를 썼다.

  학포 양팽손(學圃梁彭孫, 1488~1545)은 제주양씨로 조광조 선생과 경오 식년시(1510년 중종5) 생원 장원을 한 동기이자 기묘명현이며, 심곡서원에 함께 배향(1958년 추향)되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유배된 능성(전라남도 화순 능주)에 살았던 선비다. 서슬퍼런 조정의 눈치도 안 보고 유배 온 조광조와 어울렸고 어린 당질 양산보를 사사시킨 장본인이다. 양산보는 기묘명현으로 스승 조광조가 사사되고 담양으로 내려와 세상과 등지고 학문을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소쇄원이다. 그래서 그는 소새옹이라고 불렀다. 소쇄원은 조선 선비의 멋과 풍류를 대표하는 한국 정원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이런 양팽손이 정암 선생을 기리기 위해 초장한 이듬해 자신이 살고 있는 전라도 화순 능주의 중조산(中條山) 기슭에 최초로 사우(추모당)를 건립하였다. 이 사우는 후에 사계 김장생의 주도로 정암을 배향한 최초의 죽수서원(1570)으로 사액 확대되었다. 그리고 사림 주도 서원 배향에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의 주도로 양주 도봉서원이 건립되고 이듬해 사액되었다. 이렇게 영변 약봉서원(1688년 건립, 1707년 사액)에 이르기까지 정암 선생 배향서원이 무려 15곳에 이른다.

  이러한 가운데 정암 선생 묘소가 있는 용인에도 배향 노력이 이루어지는데, 1576년(선조 9)에 건립된 죽전(竹田)서원이 그것이다. 정몽주와 조광조의 덕망과 충절을 추모하여 두 분의 묘소 중간인 죽전에 건립하였다. 죽전(竹田)서원은 1609년(광해군 1) ‘충렬’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아 충렬(忠烈)서원이 되고 현재는 정몽주 선생을 주향으로 한다. 승정원일기 1871(고종8) 6월 24일 기록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이 처음 서원 철폐를 논의할 때 존치하는 것으로 결정될 정도로 심곡서원과 더불어 경기도 대표 서원이었다. 다만 개성의 입지를 중시한 흥선대원군이 별단을 고쳐 숭양서원을 존치시켰다.

  1605년(선조 38) 드디어 정암 선생의 배위를 따로하여 묘소 옆에 사우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바로 1650년(효종 즉위년) ‘심곡(深谷)’으로 사액된 심곡서원이다. 그간 심곡서원에 대한 건립 시기를 두고 논란이 많았는데 정암 선생의 심곡리 사우에 대한 최초의 사액 상소인 우영승 등의 상소(1625년[인조3])에 따라 현재의 시기로 정정되었다.

   심곡서원은 사우로 출발한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사액 후에 온돌을 들이지 않은 강당을 건립한 것이다. 특히 집권 서인의 주도로 건립된 서원이기에 강학을 중심으로 여긴 퇴계학파의 전통과 달리 향사를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의 전통을 따라 향사공간을 중심으로 서원 구조를 이루었다. 향사적 전통은 명분과 의리에 중심을 두고 결집하는 붕당적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인과 이후 이들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 등이 각별하였다. 사액 후 심곡서원 중수 상량문을 지은 사람은 병자호란 당시 주전론을 불사한 청음 김상헌이었고 강당을 건립하고 기문을 쓴 사람은 노론 영수이자 산림인 우암 송시열이었다. 그리고 강당 편액은 한 세대 후인 노론의 영수이자 정조의 스승인 몽오 김종수가 썼다. 이렇듯 정암 선생 묘에 위치한 심곡서원은 집권 서인과 후에 노론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정체와 정당성을 보여주는 곳으로 추숭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송시열의 호가 우암(尤庵)인 것을 보듯이 뛰어난 바위, 동떨어진 바위라는 뜻으로 김종직의 제자 정희량의 호가 허암(虛菴)이 욕심없는 바위(허암 : 인천 계양산의 허암봉에 유래)이고 조광조 선생의 호가 정암(靜庵), 고요한 바위(논어에 이르기를 어진사람은 고요하다[靜) 한다)이므로 외로이 서있는 바위나 암자로 비유하면서 겸허하게 조용하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뜻을 세운 것은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선배 유학 정암을 쫓았던 것으로 정암이 가지는 위상을 실감케 한다. 호만이 아닌 정암에 관련한 유허지 등 송시열은 정몽주를 대하듯 나아가 공맹, 주자를 대하듯 그들을 추숭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세웠다. 본인 또한 송자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옛 성현의 호 짓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의 이야기다.

이수(李叟 이규보(李圭報))가 이름을 숨기고자 하여 그 이름을 대신할 만한 것을 생각해 보았다.옛날 사람은 호로 이름을 대신한 이가 많았다. 거소로 호를 한 이도 있고, 소유물로 호를 한 이도 있고, 소득의 실상으로 호를 한 이도 있었다.이를테면, 왕적(王績)의 동고자(東皐子), 두자미(杜子美)의 초당선생(草堂先生), 하지장(賀知章)의 사명광객(四明狂客), 백낙천(白樂天)의 향산거사(香山居士)는 거소로 호를 한 것이며, 도잠(陶潛)의 오류선생(五柳先生), 정훈(鄭熏)의 칠송처사(七松處士), 구양자(歐陽子)의 육일거사(六一居士)는 소유물로, 장지화(張志和)의 현진자(玄眞子), 원결(元結)의 만랑수(漫浪叟)는 소득의 실상으로 호를 한 것이다.이수는 이와는 다르니, 사방으로 떠돌아다녀서 거소가 일정하지 않고, 한 물건도 소유한 것이 없으며, 소득의 실상도 없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옛날 사람에 미치지 못하니, 그 자호(自號)를 무엇이라 해야 좋겠는가?(李叟欲晦名。思有以代其名者曰。古之人以號代名者多矣。有就其所居而號之者。有因其所蓄。或以其所得之實而號之者。若王績之東皐子。杜子美之草堂先生。賀知章之四明狂客。白 a001_503a樂天之香山居士。是則就其所居而號之也。其或陶潛之五柳先生。鄭熏之七松處士。歐陽子之六一居士。皆因其所蓄也。張志和之玄眞子。元結之漫浪叟。則所得之實也。)
백운거사(白雲居士)의 어록(語錄)白雲居士語錄 동국이상국전집 제20권 어록(語錄)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

 

  이에 따르면 우암이나 정암은 그들이 간직한 것과 얻은 것을 바탕으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암에 이어 도통 확립에 애쓴 송시열의 열의를 볼 수 있다. 이 과정에 정암의 봉사손 조위수가 역할을 하는데 우암의 제자로 정암 문집 간행도 하였다.

  이러한 심곡서원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노론 산림 도암 이재가 1737년 제정한 심곡서원 학규에 잘 드러난다. 도암은 심곡서원이 위기지학의 강론하는 본연의 장소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서원은 본래 선비들이 무리지어 거처하며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설치된 곳인데, 근래에는 서원을 찾는 자들이 다만 봄 가을의 향사 참여만을 중히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서원은 단지 선현을 향사하기 위한 장소가 될 뿐이니 그 이름은 있되 그 실상이 없다. 왕왕 재실에 거처하는 자들도 과거의 문장을 익히고 잡문을 보는데 지나지 않으니 강습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어찌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書院本爲士子羣居講學而設。而近來游書院者。但以春秋參祀爲重。故書院只爲先賢享祀之所。有其名而無其實。往往或有居齋者。而不過習科文而 觀雜書。未見有講習之美。可勝歎哉。)

도암선생집 권25 잡저 심곡서원 학규 도암 이재

 

 

  이재 선생은 그 뜻을 몸소 실천하고자 1740년(영조16) 심곡서원을 찾아 친히 청강까지 하였다. 이러한 학규 제정과 청강은 모두 이웃한 충렬서원과 함께 이루어졌다.

  다만 이 시기의 서원이 향사 중심으로 변화된 것은 단순히 서인 전통의 영향이기 보다는 조선 후기 신분제 변화에 따른 사족들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서인 노론 뿐 아닌 조선 전체 사족들이 서원에서 강학이 아닌 적을 두고 향사를 통해 사족이 모이고 권위를 도모하기 위한 장소로 변질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더욱이 심곡서원이 사우로 건립되어 서원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사액을 통한 국가재정의 도움 없이는 힘들 정도로 열악하였다. 이러한 심곡서원의 어려움은 글 처음 사료의 내용에서 정조가 1796년(정조20) 1월 23일 수원 행행을 나서 심곡서원이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로 신위 봉안공간도 어려워 향사를 지낼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암이 동방 5현으로 문묘종사 후 잘 나가나 싶더니 가문에 큰 위기가 드리운 것이었다.

  이렇게 된데에는 1728년(영조4) 무신란(이인좌의 난)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남인으로 인척을 이뤘던 정암 후손인 봉사손 조문보가 보은현감으로 있으면서 승도들을 이끌고 반란에 가담하려한 사실이 공초에서 드러나며 멸문된 것이다. 당시 조문보는 민창도의 사위로 그는 탁남 거두 좌의정 민희의 아들로 대사성 역임하였고 부교리로 있을 때, 송시열 사사의 정당성을 차자한 인물이다. 그 아들 민원보는 중요 가담자였다. 또한 6촌형 조덕보와 그의 처남 김덕유와도 깊은 관계였는데, 김덕유는 남인의 영수 우의정 민암의 사위였다. 민암은 갑술환국 때 소론 남구만에게 탄핵되어 유배되고 숙종의 명에 의해 사사되었다.

  이렇게 멸문된 정암 가문은 영조 입장에서는 사림 도통의 맥을 잇는다는 것에서 정암 선생 가문의 쇠락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암을 ‘해동대현‘으로 추켜 세우고 단절된 봉사손을 잇기 위해 새로 입후에 나서 조문보 5촌 조익붕 계열의 조사엄을 봉사손으로 세우고 관직을 제수하였다.(1768년 영조44) 그러나 흔들린 가세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였고 정조 말년까지도 회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정조가 나서 사우로 쓸 저택 매입과 봉사손 조국인(생원 급제자)에게 벼슬을 주어 심곡서원을 유지하게 하였다. 이처럼 역도로 멸문되었지만 정암가에 대해서 은전을 내린 것은 도통의 종장 정암을 높이 세우는 것이 영, 정조의 왕권 강화와 맥을 같이 하는데, 이는 성현을 통한 왕통의 정당성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우로 건립되어 사림이 운영하다 문중으로 그 운영주체가 바뀌고 쇠락하다가 더욱 강학보다는 향사공간의 성격이 짙어졌다. 다만 근현대에 이르러 서원의 기숙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심곡서원에 마련되었고 아울러 교육법인인 심곡재단이 설립되어 정암 선생 시호를 따서 문성중학교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은 특기하다. 조선이 망하고 서원의 교육적 기능이 현대에 발한 것이다. 이는 전국 서원 중 유일하다.

  심곡서원의 특징은 정암 선생 묘를 정향으로 하여 평지 강당 건물보다 위쪽으로 비탈에 사당을 올려 건립하고 맞배지붕과 곡담을 둘러 작지만 사당을 우러러 볼 수 있게 배치한 구조이다. 이렇듯 전당후재(전학후묘)의 향사공간 중심에 서인 서원의 전통을 잇는 대표적인 서원이다. 또한 경기의 포은 선생을 배향한 개성의 숭양서원과 더불어 도학으로 충성과 대의를 지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을 면한 사액서원으로 '신미 존치 47서원'이라는 위상을 가지는 높은 명성을 가진다.

전국의 서원 중에서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폐하다예조(禮曹)에서, ‘한 사람에 대해 중첩하여 세운 서원(書院)을 헐어버리는 문제는 두 차례의 하교에 따라 신 조병창(趙秉昌)이 대원군(大院君) 앞에 나아가 품의(稟議)한 결과, 「성묘(聖廟)의 동쪽과 서쪽에 배향하는 제현(諸賢)과 충절(忠節)과 대의(大義)를 남달리 뛰어나게 지킨 사람으로서 실로 백세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개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사를 그만두며 현판을 떼어내도록 하라.」는 뜻으로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미 사액(賜額)하여 계속 남겨두어야 할 47개의 서원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 계하(啓下)한 뒤 각도(各道)에 행회(行會)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경기(京畿)의 개성(開城) 숭양 서원(崇陽書院), 용인(龍仁) 심곡 서원(深谷書院), 파주(坡州) 파산 서원(坡山書院), 여주(驪州) 강한사(江漢祠),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김포(金浦) 우저 서원(牛渚書院), 포천(抱川) 용연 서원(龍淵書院), 과천(果川) 사충 서원(四忠書院), 양성(陽城) 덕봉 서원(德峰書院), 과천(果川) 노강 서원(鷺江書院), 고양(高陽) 기공사(紀功祠), 충청도(忠淸道)의 연산(連山) 돈암 서원(遯巖書院), 홍산(鴻山) 창렬사(彰烈祠), 청주(淸州) 표충사(表忠祠), 노성(魯城) 노강 서원(魯岡書院), 충주(忠州) 충렬사(忠烈祠), 전라도(全羅道)의 태인(泰仁) 무성 서원(武城書院),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 장성(長城) 필암 서원(筆巖書院), 경상도(慶尙道)의 경주(慶州) 서악 서원(西嶽書院), 선산(善山) 금오 서원(金烏書院), 함양(咸陽) 남계 서원(藍溪書院), 예안(禮安) 도산 서원(陶山書院), 상주(尙州) 옥동 서원(玉洞書院), 안동(安東) 병산 서원(屛山書院), 순흥(順興) 소수 서원(紹修書院), 현풍(玄風) 도동 서원(道東書院), 경주 옥산 서원(玉山書院), 상주(尙州) 흥암 서원(興巖書院),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 진주(晉州) 창렬사(彰烈祠), 고성(固城) 충렬사(忠烈祠), 거창(居昌) 포충사(褒忠祠), 강원도(江原道)의 영월(寧越) 창절 서원(彰節書院),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 금화(金化) 충렬 서원(忠烈書院),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 청성묘(淸聖廟), 배천(白川) 문회 서원(文會書院), 장연(長淵) 봉양 서원(鳳陽書院), 함경도(咸鏡道)의 북청(北靑) 노덕 서원(老德書院), 평안도(平安道)의 영유(永柔) 삼충사(三忠祠), 안주(安州) 충민사(忠愍祠), 영변(寧邊) 수충사(酬忠祠), 평양(平壤) 무열사(武烈祠), 정주(定州) 표절사(表節祠)이다.】(禮曹以"書院疊享毁撤事, 謹依兩度下敎, 臣秉昌進詣大院君前稟議, 則以爲‘聖廟東西廡配食諸賢及忠節、大義卓然炳烺, 實合百歲崇奉之四十七院外, 竝爲撤享撤額’之意, 奉承敎意, 已賜額常存處, 四十七院, 謹玆別單書入, 待啓下, 行會各道"啓。 【京畿: 開城 崇陽書院、龍仁 深谷書院、坡州 坡山書院、驪州 江漢祠、江華 忠烈祠、廣州 顯節祠、金浦 牛渚書院、抱川 龍淵書院、果川 四忠書院、陽城 德峰書院、果川 鷺江書院、高陽 紀功祠。 忠淸道: 連山 遯巖書院、鴻山 彰烈祠、淸州 表忠祠、魯城 魯岡書院、忠州 忠烈祠。 全羅道: 泰仁 武城書院、光州 褒忠祠、長城筆巖書院、慶尙道: 慶州 西嶽書院、善山 金烏書院、咸陽 藍溪書院、禮安 陶山書院、尙州 玉洞書院、安東 屛山書院、順興 紹修書院、玄風 道東書院、慶州、玉山書院、尙州 興巖書院、東萊 忠烈祠、晉州 彰烈祠、固城 忠烈祠、居昌 褒忠祠。 江原道: 寧越 彰節書院、鐵原 褒忠祠、金化 忠烈書院。 黃海道: 海州 淸聖廟、白川 文會書院、長淵 鳳陽書院。 咸鏡道: 北靑 老德書院。 平安道: 永柔 三忠祠、安州 忠愍祠、寧邊 酬忠祠、平壤 武烈祠、定州 表節祠。】)
고종실록8권, 고종 8년 3월 20일 경술 4번째기사 1871년 자료열람 | 조선왕조실록

 

  이러한 명성과 달리 심곡서원이 현대에 이르러 새로이 중수된 지금의 모습은 의미가 깊다. 처음 대한 모습이 너무 소박하고 단촐하여 의아하였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이야말로 조선 사림과 성리학자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한 후손들의 철학이 담긴 걸작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는 더이상 강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제향만 춘추로 이어질 뿐이다. 그런 서원을 당대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데 장대하고 위엄을 갖춘 건축으로 미화하는 것이 정말 정암 선생의 뜻을 바로 따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허례허식이 아닌 진정한 도학을 추구한 정암 선생의 뜻을 잘 받들은 검박한 서원이 심곡서원인 것이다. 도산이나 병산서원, 고부의 무성서원 같은 고래의 품격은 없으나 질박한 맛이 있는 경기도의 대표 서원이다.

  조선을 세운 성리학자들은 화려하고 외향적인 고려를 끝내고 검박하고 내향적인 조선을 만들고 이끈 사람들이다. 그 길에 정암 선생은 실천적 지도자로 사림을 이끈 영수였다. 그를 배향한 서원이 삼곡서원이다.

답사 당일 입구를 잘못 들어 하마비를 확인하지 못해 네이버 지도 캡처로 대신한다.

출처 : https://blog.naver.com/jnh1955/221609184535

심곡서원(深谷書院)을 중건할 때의 상량문 용인(龍仁)에 있는 선생의 묘 곁에 있다.(深谷書院重建上梁文 在龍仁先生墓傍)
사람의 도에 있어서는 스승을 높이 받들고 학문을 강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것이 없으며, 문(文)이 여기에 있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영혼을 모실 장소를 새롭게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계책을 합하고 순하게 협조하여 예전의 집에 광채를 더하게 되었다.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선생께서는 도통(道統)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종주로 삼고, 학통(學統)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게 전해 받았다. 집 안에 거처하고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천연히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품성으로 하였으며, 덕을 진보시키고 학업을 닦을 때에는 스스로 성현이 될 것으로 기약하였다. 학문의 연원은 일찌감치 한훤당(寒暄堂)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실천하는 것은 날마다 진실에 나아갔는바,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고 사림(士林)들이 의지하는 바이다. 그러니 어찌 오직 의리의 정미한 사이에서만 살피지 않는 일이 없었겠는가. 대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즈음에도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중종(中宗)께서 교화를 새로이 펼 때를 당하여 한나라 조정에서 선비를 천거하던 것과 같은 거조가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불차탁용(不次擢用)의 예로 대접하였으나, 겸손하게 사양하고서 대과(大科)를 통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이에 서로의 뜻이 꼭 들어맞아서 하는 일마다 모두 환히 빛나게 되자, 드디어 등용하고서 강기(綱紀)를 책임지는 자리를 맡겨 주었다. 밝은 임금께서 총애하여 장차 가뭄이 들었을 때에 임우(霖雨)가 되게 하고 국을 끓일 적에 염매(鹽梅)가 되게 하려고 하였으며, 선생의 마음은 당우(唐虞) 시대보다도 더 뛰어난 시대로 만들어 임금으로 하여금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이 되게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필부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집집마다 정표(旌表)하여 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뭐가 어려웠겠는가.아, 우리 도가 행해지지 않음이여, 참언의 망극함이 애통하다. 동도처사(東都處士)는 걱정스러워 진췌(盡悴)의 시를 읊조렸고, 남국소인(南國騷人)은 맘 슬퍼서 초혼(招魂)의 부(賦)를 읊었다. 그러나 공론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백 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으며, 사문(斯文)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오히려 일맥(一脈)에 의지하였다. 이에 청오(靑烏)의 옛 자리를 택하였으며, 이어 백록(白鹿)의 새로운 규모를 회복하였도다. 남쪽을 향한 자리에 위패를 모셨으니 두 기둥 사이에 앉은 꿈에 완연히 부합되었고, 가을 하늘의 기운이 상쾌하니 아성(亞聖)의 자태를 상상할 수 있겠다.도는 참으로 세상을 따라서 더러워지거나 높아지는 법이고, 일은 혹 때를 인하여 거행되거나 폐해지는 법이다. 병화(兵禍)의 뒤끝이라 쓸쓸해졌으며, 현송(絃誦)의 장이 적막해졌다. 조두(俎豆)의 의용에 있어서 오래도록 중정(仲丁)의 예가 폐해졌으며, 스승과 제자 사이에 학문을 함에 있어서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는 정성이 부족하였다. 유학(儒學)의 풍조가 이로 인해 척박해졌으며, 선비들의 공론이 상심하여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경영하여 새로 건립하매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매 낮아 축축한 곳을 버리고 상쾌하고 밝은 곳으로 나아갔으며, 공을 꾸미고 일을 헤아리매 승묵(繩墨)을 엄격히 하고 규모(規模)를 바르게 하였다. 당실(堂室)에 오르면 우러르는 마음이 더욱더 부지런해지고, 간책(簡策)을 보면 묻고 답하는 의리가 그 안에 있다. 이는 실로 후생들이 성현을 우러르고 도를 지키려는 뜻인 것이며, 또한 역시 성대한 조정에서 학문을 일으키고 문을 숭상하는 공인 것이다. 장차 긴 대들보를 올리고자 하여 길한 날짜를 가리었다. 송(頌)은 적이 진(晉)나라의 장로(張老)를 본받고자 하나, 재주는 도리어 초(楚)나라의 양춘곡(陽春曲)에 부끄럽다.
어기영차 대들보의 동쪽 향해 떡 던져라 / 兒郞偉抛梁東
아름답게 선비 풍모 떨쳐져서 맘 기쁘네 / 喜見彬彬振士風
제자들아 남들이 안 알아줌을 걱정 말라 / 弟子莫憂人未識
누가 힘써 학문하고 공 이루지 못했으랴 / 也誰勤學不成功

어기영차 대들보의 서쪽 향해 떡 던져라 / 兒郞偉抛梁西큰
도 하늘 같건마는 사람 절로 미혹되네 / 大道如天人自迷
성현되는 참된 길을 알고 싶을 경우에는 / 欲識聖門眞路脈
현관 문의 일환니를 일찌감치 뚫으시게 / 玄關早透一丸泥

어기영차 대들보의 남쪽 향해 떡 던져라 / 兒郞偉抛梁南
도가 바로 눈앞 있어 마치 의참한 것 같네 / 道在眼前如倚參
군자들은 예전부터 항상 자중하였거니 / 君子由來恒自重
하늘에다 땅과 함께 삼재가 되었다네 / 才將天地竝爲三

어기영차 대들보의 북쪽 향해 떡 던져라 / 兒郞偉抛梁北
대우께선 그 당시에 촌음조차 아끼셨네 / 大禹當年寸陰惜
해와 달은 말달리듯 잠시도 안 멈추거니 / 日月如馳不少留
세월이 안 기다려 줌 슬퍼한들 무슨 소용 / 傷悲歲莫知何益

어기영차 대들보의 위를 향해 떡 던져라 / 兒郞偉抛梁上
구부려서 인문 보고 우러러서 천상 보네 / 俯察人文仰天象
삼광 오악 발산하는 정결한 빛 일렁이니 / 三光五岳盪精光
남아 장부 가슴속엔 도량 있어야만 하네 / 男子胸中要器量

어기영차 대들보의 아래 향해 떡 던져라 / 兒郞偉抛梁下
밭 갈면서 버려진 들 없다고는 말을 말라 / 耦耕莫道無閒野
혀를 보습으로 삼고 종이를 밭 삼았거니 / 舌爲耒耟紙爲田
《서경》 속에 삼모 있고 《시경》 속에 이아 있네 / 書有三謨詩二雅

삼가 바라건대, 대들보를 올린 다음에는 도서(圖書)는 깨끗하여 아름다워지고 잠리(簪履)들은 편안하고 안온하여져, 모범을 따르고 지켜서 사람들이 사도(師道)의 좋음을 알게 하고, 학업을 공경히 하면서 여럿이 모여 즐겨서 선비들이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병통이 없게 하소서. 공고하기는 태산(泰山)이나 황하(黃河)와 같이 나란히 오래가고, 밝고 환하기는 해나 달과 더불어서 함께 밝게 빛나, 후진들이 공경하고 공경하며 엄숙하고 엄숙하게 하소서.(人之有道也。莫尙尊師講學之方。文不在玆乎。宜新揭虔妥靈之所。僉謀協順。舊觀增光。文正公靜庵先生。道宗鄒魯。學傳程朱。居家事親。天然孝友之性。進德修業。自以聖賢爲期。淵源夙接於寒暄。踐履日就於眞實。神明可質。士林攸依。豈惟義理精微之間。無事不察。蓋於視聽言動之際。非禮勿爲。當中廟更化之辰。有漢庭薦士之擧。朝家則待以不次。謙遜而進由大科。爰契合而動皆昭融。遂登庸而畀以綱紀。明主之眷。將擬旱作霖雨 a077_204c羹作鹽梅。先生之心。欲使出爲唐虞君爲堯舜。庶幾無匹夫不獲。何難致比屋可封。嗟吾道之不行。痛讒言之罔極。東都處士。憂傷殄瘁之詩。南國騷人哀怨招魂之賦。公論復起。不待百年。斯文再興。尙賴一脈。迺卜靑烏之舊地。仍恢白鹿之新規。南面專祠。宛符兩楹之夢。秋天爽氣。想像亞聖之姿。道固隨世而汚隆。事或因時而擧廢。蕭條兵燹之後。寂莫絃誦之場。俎豆儀容。久輟中丁之禮。師生問學。多乏爲己之誠。儒風以之澆漓。士論莫不傷歎。經營重建。遠邇咸輸。舍舊圖新。去卑湫而就爽 a077_204d塏。賁功程事。嚴繩墨而正規模。升堂室則瞻仰之懷逾勤。視簡策則答問之義斯在。玆實後生景賢衛道之志。抑亦盛朝興學右文之功。將擧脩梁。載涓吉日。頌竊效於晉人張老。才顧慙於楚曲陽春。兒郞偉抛梁東。喜見彬彬振士風。弟子莫憂人未識。也誰勤學不成功。兒郞偉抛梁西。大道如天人自迷。欲識聖門眞路脈。玄關早透一丸泥。兒郞偉抛梁南。道在眼前如倚參。君子由來恒自 a077_205a重。才將天地竝爲三。兒郞偉抛梁北。大禹當年寸陰惜。日月如馳不少留。傷悲歲莫知何益。兒郞偉抛梁上。俯察人文仰天象。三光五岳盪精光。男子胸中要器量。兒郞偉抛梁下。耦耕莫道無閒野。舌爲耒耟紙爲田。書有三謨詩二雅。伏願上梁之後。圖書靜嘉。簪履安穩。循模守範。人知師道之賢。敬業樂群。士無自暴之病。鞏固指山河而等久。文明與日月而俱昭。有來欽欽。其永肅 a077_205b肅。)
출처 : 청음집 제14권 / 상량문(上樑文) 2수(二首)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

용인현 심곡서원 강당 기(龍仁縣深谷書院講堂記)
지난 인종(仁宗)ㆍ명종(明宗) 두 조정(朝廷) 이래로 선생(조광조(趙光祖)를 일컬음)의 도(道)가 세상에 크게 밝아져서 비록 부인네나 아이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외고 그의 덕을 칭송(稱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후에는 비록 말을 잘하는 선비가 있어도 다시는 말을 덧붙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태학(太學) 유생(儒生) 강유선(康惟善)의 소장(疏章)이 바로 원한(寃恨)을 풀고 도를 밝힌 첫 번째의 문자(文字)였으나, 선생의 연원(淵源)을 논한 것은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그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을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삼은 것은, 대개 포은이 맨 처음 정주(程朱)의 학설로 우리나라를 계도(啓導)했는데, 그가 종횡(縱橫)으로 설화(說話)한 것이 이학에 부합하여 어김이 없었으니, 그를 이학의 조종이라 이른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야은(冶隱 길재(吉再))이 포은한테서 전해 받은 학문을 사예(司藝) 김숙자(金叔滋)가 그의 아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전수(傳授)해서 김 문경공(金文敬公 문경은 김굉필(金宏弼)의 시호)에게 내려왔다가 드디어 선생에게 미쳐 왔다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 되지 못한 듯하다. 선현(先賢)이 주고받은 계통(系統)을 후학(後學)이 감히 논의할 바 아니나, 여러 노선생(老先生)의 언론(言論)과 선생의 풍지(風旨)로써 본다면, 중간 두어 분은 다만 그 단서(端緖)를 계발(啓發)했을 뿐이고, 오직 문경공에게서 수학(受學)했음만이 속일 수 없는 일이다.대개 선생은 특출한 자질을 가지고 문명(文明)한 기회를 만나서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 없이 홀로 도의 묘리(妙理)를 깨쳤다. 염락관민(濂洛關閩)의 학문을 말미암아서 위로 《대학(大學)》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중용(中庸)》의 논지(論旨)를 구했는데, 규모(規模)가 정대(正大)하고 공부가 엄밀(嚴密)하여 순수한 성현의 도이고 제왕(帝王)의 법이었다. 비록 한 시대에 시행되지는 못했으나, 후세에 전해서 더욱 오래되어도 폐단이 없을 만하였다. 아, 이것이 어찌 인력(人力)의 간여할 바이겠는가. 하늘이 실상 계시(啓示)한 것이다. 조정에서 이미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토록 했으니, 그를 보답함이 매우 지극하였다. 그런데 서울과 외방 선비들이 또 그의 무덤 곁에 사당을 세우고 신위를 봉안했으나, 강당(講堂)은 미처 짓지 못하였다가 그후에 장보와 진신이 다시 의논하고 재목(材木)을 모아, 기해년 3월에 시작해서 신축년 2월에 준공하였다. 이리하여 공부하고 휴식하는 장소가 대략 완비되었다. 선생의 5대손인 지금 삼수 군수(三水郡守) 위수(渭叟)가 여러 학생을 위해서 나에게 기(記)를 청했다.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선생이 우리나라에 탄생한 것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송 나라에 태어난 것과 같다. 어찌 반드시 구슬을 꿰듯이 차례로 주고받아야만 이 도학(道學)의 전통(傳統)이 되는 것이랴. 무릇 후인으로서 이 강당에 오르는 자는 한갓 선생의 용색(容色)과 성음(聲音)만을 상상하지 말고 반드시 선생의 학문한 바를 강구(講究)해야 할 것이다. 대저 선생의 학문은 가깝게 정주 학문의 정맥(正脈)을 종주로 삼고 위로 수사(洙泗 공자의 연원을 일컬음)의 오묘한 지의(旨意)를 구한 데에 불과하였다. 대저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왔으나,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는 것은 선생이 매우 부끄러워하던바였는데, 하물며 겉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버릇이겠는가.일찍이 들으니, 서원을 설치한 것은 송 나라 때에 가장 성했고, 서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를 권장(勸奬)한 말로는 장남헌(張南軒 장식(張栻))의 악록기(岳鹿記)만큼 구비한 것이 없다 한다. 세밀(細密)하기로는 음식(飮食)ㆍ기거(起居)의 절차. 비근(卑近)하기로는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실상과, 현미(玄微)하기로는 천리와 인욕의 즈음까지 거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따로 할 말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회옹(晦翁)은 오히려 ‘하학(下學)들의 공부에 대해서는 궁구하지 못했다.’ 하여 반드시 발(發)하기 전에 수양하고 발하는 즈음에 살펴서 선(善)은 확충(擴充)시키고 악(惡)은 이겨서 없애도록 하였다. 대저 두 부자(夫子)의 설은 곧 선생이 복습(服習)해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학문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이것을 버리고는 딴말이 있을 수 없다.선생의 유사(遺事)로서 여러 글에 빠진 것이 있다. 선생이 문경공을 따라서 희천(煕川)에 갔을 때 나이가 겨우 17세였다. 문경공이 맛좋은 음식 한 가지를 구해서 모부인(母夫人)에게 보내려고 하는데 간수하는 자가 소홀히 하여 솔개가 움켜가 버리므로 문경공의 꾸중 소리와 기색이 자못 엄숙하자 선생이 앞에 나아가서,“선생께서 봉양하려는 정성은 진실로 지극하지마는, 군자(君子)의 말과 기색은 잠시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하므로, 문경공이 듣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으로 걸어서 선생의 손을 잡으면서,“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고, 네가 실상 나의 스승이다.”하고는, 종일토록 칭찬해 마지않았다.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진실로 고금에 뛰어났지마는, 문경공의 선에 복종(服從)하는 도량(度量) 또한 선생과 서로 계발(啓發)된 바 있었다. 희천의 고로(古老)가 지금까지 이 일을 미담(美談)으로 전하는데, 이것을 이 당에 게시(揭示)함이 마땅하므로 아울러 나타내었다.숭정 기원 후 계축년(1673, 현종14) 10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粤自仁,明兩朝以來。先生之道。大明於世。雖婦人孺子。莫不誦其名稱其德。後雖有能言之士。更無容贅其辭矣。惟太學生康惟善之疏。是伸冤明道第一文字。而論先生源派者。未免有可疑。其以圃隱爲東方理學之宗者。蓋圃隱始以程朱之說。啓牖東土。其橫豎說話。直契無違。則其謂之理學之宗者。不亦宜乎。至其以金司藝叔滋爲傳圃隱之學於冶隱。以授其子畢齋。以至於金文敬公而遂及於先生。則竊恐不得爲不易之定論也。先賢授受之統。非後學所敢 a113_079c議。然竊以諸老先生之尙論及以先生言論風旨觀之。則竊謂中間數君子特以發其端而已。惟受學於文敬公者。不可誣也。蓋先生負特立之姿。膺奎明之會。不由師傳。獨契道妙。由濂洛關閩之學。上求乎大學,語,孟,中庸之旨。規模正大。工夫嚴密。粹然聖賢之道。而純乎帝王之法矣。雖未能行之於一時。而傳之於後者。可以愈久而無弊矣。嗚呼。此豈人力之所與哉。天實啓之也。朝廷旣從祀文廟。則其崇報也極矣。而京外章甫又卽丘墓之傍。建祠妥靈。而講堂則未遑也。其後章甫搢紳。又合謀鳩材。經始於己亥三月。 a113_079d訖功於辛丑二月。藏修游息之所。於是略備矣。而先生五世孫今三山使君渭叟爲諸生求記於余。余以爲先生之生於我東者。實如濂溪之於宋朝也。豈必授受次第如貫珠。然後乃爲道學之傳哉。凡後人之登斯堂者。不徒想像乎先生之容色聲音。而必須講求乎先生之所學。夫先生之所學。不過近宗乎程朱之正脈而上求乎洙泗之妙旨而已。夫出口入耳。有名無實者。固先生之所深恥也。況於浮靡藻繪之習哉。蓋嘗聞書院之設。莫盛於宋朝。其勸戒院士之說。莫備於張南軒嶽麓之記矣。細而飮食起居之節。近 a113_080a而事親從兄之實。微而天理人欲之際。無不畢擧。則可謂無餘蘊矣。而晦翁猶以爲未究乎下學之功。而必使養之於未發之前。察之於將發之際。善則擴充之。惡則克去之。夫二夫子之說。卽先生之所服習而受用者也。然則欲求先生之學者。捨是宜無他說也。抑先生遺事。有逸於諸書者。先生從文敬於煕川之時。年僅十七矣。文敬得一美味。將奉送母夫人。守者不謹。爲鴟鴉所攫。文敬聲氣頗厲。先生進曰。先生奉養之誠則誠至矣。而君子辭氣。不可須臾放過也。文敬不覺膝前執手曰。我非汝師。而汝實吾師也。終日 a113_080b嘖嘖。先生資質之美。固度越古今。而文敬服善之量。亦有所相發於先生矣。煕川遺老至今傳爲美談。此宜揭於斯堂。故並著之。時崇禎癸丑十月日。恩津宋時烈記。)
출처 : 송자대전 제143권 / 기(記) 용인현(龍仁縣) 심곡서원(深谷書院) 강당 기(講堂記)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