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고구려의 하늘을 열다 졸본(환인)

달이선생 2024. 10. 25. 15:53

2009년 6월 10일 고구려의 첫 수도 홀(졸)본에 갔다. 현재의 환인(환런)이다.

중국 비류강변의 환인은 고구려의 첫 수도이다. 현재 이곳은 만주족 자치현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고조선에 속한 사람들이 숙신이었고 고구려시대에는 말갈인 오늘의 만주족이다. 2009년은 스마트폰이 없고 일반인들이 즐겨 쓰는 삼성 디카로 촬영을 하다보니 잘 흔들리고 특히 강화도 마니산 같이 구름과 안개에 수시로 휩싸이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사진이 선명하지 못하다.

 

 

 

검은 구름이 골령을 덮어 / 玄雲冪鶻嶺

산이 뻗쳐 연한 것이 보이지 않고 / 不見山邐迤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들려 / 有人數千許

나무 베는 소리와 방불하였다 / 斲木聲髣髴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 王曰天爲我

그 터에 성을 쌓는 것이라 한다 / 築城於其趾

홀연히 운무가 흩어지니 / 忽然雲霧散

궁궐이 우뚝 솟았다 / 宮闕高𡿔嵬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병서(幷序) /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고구려의 하늘이 열리는 것처럼 홀연히 나타나 얼굴을 드리운 오녀산성의 느낌은 이규보의 시와 같았다. 그리고 이내 구름과 안개로 다시 가리우는 이곳은 신령함 그 자체였으니 이규보의 이야기처럼 "환(幻)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시작을 알리는 시조 주몽의 이야기는 걸작이다.

 

 

"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 我是天帝子, 何伯外孫 )"

-삼국사기卷第十三髙句麗本紀 第一 東明聖王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나라를 구가했던 고구려의 시작을 알리는 시조 동명성왕의 당당한 어조이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668년 보장왕 27년 원 고려는 망하나 대씨 고려 발해가 서고, 조선과 고려를 시조로 삼은 북방 유목민족의 부침과 마침내 궁예의 후고구려로 이어져 왕건의 고려, 그리고 조선. 오늘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翩翩黃鳥(편편황조) 펄펄 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정답구나.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울사 이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구려 2대왕인 주몽의 장자, 유리왕의 유명한 애련시다. 아직은 작은 국가 고구려가 이곳 홀본에서 예맥족을 근간으로 북부여, 원주민 송양세력, 해씨 세력, 조선이 망하고 한사군 세력이 잔존하던 시기의 상황이 유리왕의 사랑으로 빗대어진 시대상이 읽히는 작품이다. 한족인 계비 치희와 결합과 결별은 고구려의 숙명이었다. 고구려가 성장하는 발판이었지만 언젠가는 이를 넘어서야 했던 고구려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한족, 즉 중국문명의 그것이 아니라 고구려 그 자체로의 존립을 의미한 것이었고 결국 이는 무수히 일어서고 쓰러졌던 많은 나라 가운데 우리 민족 국가가 당당히 역사의 주역으로 중국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던 그 사실을 보여주는 서사시인 것이다.

이곳 환인에서 그 누구보다 큰 영감을 받았고 이를 곱씹은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 이 사람. 바로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 ~ 1936)다.

 

 

이곳 고토, 다물을 찾아 구석구석 다니며 고구려의 유적을 살피고 확인하면서, 망한 조선의 쓰라림은 옛적 고구려의 기상과 영광이 흥분의 소용돌이로 휘몰아쳤을 단재 선생이었다. 그런 그가 역작으로 남긴 것이 바로 조선상고사였다. 이를 집필한 단재 신채호, 고구려의 유적은 경주에서 보던 그것 하고는 달랐다.

천장비사의 보고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던가 인력과 물력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일일지간, 그 외부에 대한 조천한 관찰이지만,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의 여하가 안전에 활현하여'당지에 집안현의 일람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독함보다 낫다'는 단안을 내리었다.
조선상고사 총론 중

 

이곳의 고구려 흔적을 보고 그 장대함을 연구하고자 하였으나 연구 비용이 없어 한탄했던 단재가 남긴 글인데, 의미심장한 것은 삼국사기를 많이 읽어 봐야 고구려 유적 보는 것만도 못하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 있어서 고구려의 역사는 한줄기 빛이었고 희망이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제1장, "역사의 정의(正義)와 조선역사의 범위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서사를 두고 헤겔 변증법의 아류로 폄하하는 여느 철학자들이 있는데, 단순한 철학적 명제만 가지고 단언하는 무도함에 치를 떤다. 이미 우리는 역사를 통해 사상의 한계성과 인간 본연의 특성에 따라 인간해방이 허울 뿐이 이상임을 알고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해 혁신도 하지만 철저한 타락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단재는 양반이었고 영웅주의적 서사로 민족독립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구려를 보았고 러시아혁명을 보면서 자신을 감싸고 있던 일대 생각의 변혁을 이루었다. 이러한 생각을 문자로 단순히 아류라고 평하는 그들은 단재와 같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기희생으로 실천할 수 있었는가 반문한다
쉽게 말해서 우리 스스로 물어보자 "강남에 살고 싶은가?"
아류가 아니라 인간해방으로 나아갔던 지식인의 혁명적 사고전환이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
그리고 단재는 이 고구려를 보고 고구려의 조의선인을 통해 신라의 화랑으로 이어지는 낭가사상을 정립하여 독립운동의 근간 사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단재 선생의 중심이었다. 내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https://blog.naver.com/leelove97/223588583466
 

단재 신채호 선생 묘 및 사당

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로 혁명가이다. 역사를 공부하며 스승으로 가슴에 새기고 숱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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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해를 갈고 나니
칼날은 푸르다마는
쓸 곳을 모르겠다
춥다 한들 봄추위니
그 추위 며칠이랴
자지않고 생각하면
긴 밤만 더 기니라
푸른 날이 쓸 데 없으니
칼아
나는 너를 위하여 우노라
-단재 신채호, 절명시(1936, 여순감옥)


단재 선생처럼 고구려의 옛땅을 실제로 보지 못했으나 고려의 석학 이규보(李奎報·1168~1241)도 김부식과 달리 고구려의 실체를 더 우러러 보게 되었다. 그는 동명왕편을 쓰면서 구삼국사, 동명왕본기를 보고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 계축년(1193, 명종 23)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나 환(幻)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 반복하여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幻)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하물며 국사(國史)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 김부식(金公富軾) 공이 국사를 중찬(重撰)할 때에 자못 그 일을 생략하였으니, 공은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닌가?(越癸丑四月。得舊三國史。見東明王本紀。其神異之迹。踰世之所說者。然亦初不能信之。意以爲鬼幻。 及三復耽味。漸涉其源。非幻也。乃聖也。非鬼也。乃神也。況國史直筆之書。豈妄傳之哉。金公富軾重撰國史。頗略其事。意者公以爲國史矯世之書。不可以大異之事爲示於後世而略之耶)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병서(幷序) /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고구려는 구려, 골, 성을 뜻하는 말에서 시작하여 고자가 붙고 고려로 이어진 이름이다. 성을 잘 쌓는 민족이라는 특징은 일찍이 요하문명인 홍산문화에서 기원을 찾고 이어 고조선으로 이어지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진다. 이렇듯 성과는 뗄레야뗄 수 없는 고구려는 일찍이 이성체제로 시작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첫 수도 환인에서 주몽은 송양 세력을 접수하고 홀(졸)본을 수도로 하였는데 이때 평지에는 하고성자를 쌓고 오녀산성이라고 불리는 홀승골성을 배후의 산성으로 삼았다. 이러한 이성체제는 국내성으로 천도하여서도 이어져 산성인 환도산성을 갖췄고 427년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평지에 안학궁을 바깥으로 평양성을 둘렀으며, 배후에 대성산성이 이성체제를 형성하였다.

지금 홀승골성 아래로는 환인수고라는 장대한 저수지가 비류수(혼강)를 막아 형성(1958)되었는데 지천으로 환도산성 아래 무덤떼처럼 700여기 넘는 고분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 상고성자 무덤떼가 고구려 초기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를 수도 있는 무덤군이 남아있다. 고성자는 옛성이 있던 곳을 이르는 명칭이다.

덧붙여 오녀산성 이야기는 당나라 때 5자매의 이야기로 발해의 관리 퉁금창이 이곳에 부임하였는데 그 아들 퉁우가 차녀 춘련을 겁탈하려고 횡포를 부리다가 5자매의 모친과 동네 사람 모두를 죽이는 참극이 발생한다. 5자매는 무예가 뛰어나서 바로 여병을 데리고 올자산(흘승골성)에 올라 오빼 대강의 남병이 이웃한 연간산에 진을 치고 5자매는 쳐들어 온 퉁우를 처단하지만 이후 발해국왕이 보낸 1천기의 정병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는다. 오빠 대강이 이 발해군을 모두 물리쳤지만 남은 것은 5자매를 포함한 시신이었다.

환인에서 의미있는 고분으로 벽화가 그려진 굴식돌방 무덤인 미창구장군묘가 있다. 5세기 전후로 조성된 것으로 둘레가 150미터에 이른다. 그래서 시조 추모 동명왕릉을 상징적 조성, 혹은 산상왕과 왕위경쟁한 발기의 릉으로 추정한다. 더욱이 벽화에 그려진 임금 왕자 무늬는 무덤의 격을 한층 더한다.

환인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위 고구려 초기 무덤떼인 상고성자 유적과 미창구장군묘에 대한 기록 등은 2015년 도올 선생의 기행문을 참고하여 남긴다. 선생의 식견에 선생의 발자취에 영감을 받아 책을 전사하였다.

이후 오녀산성은 몽골제국 성립 이후 원이 쇠퇴하면서 1370년 1월 요동정벌을 단행했던 고려의 군대가 원의 잔당을 물리치고 점거했던 역사적 현장이다. 이때 이곳에서 편전을 날리며 고려의 기상을 드높혔던 이가 바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였다. 이때 이곳의 수장이 고려 출신 이오로테무르로 동녕부동지로 3백호와 함께 귀순하여 이성계 휘하가 되고 이원경으로 환명한다. 대대로 함경도 길주에 세를 이어오다 세조 때 손자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며, 멸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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