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309

광주 조선백자 요지

도요지는 그릇이나 자기를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남종면·중부면·퇴촌면 등 광주시 일대에는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흙이 나오며, 나무와 물이 풍부하다. 제품의 공급지인 서울과 가깝고 한강을 이용한 운반의 편리성으로 인해, 조선 영조 28년(1752) 궁중음식을 담당하던 사옹원의 분원으로 지정됐다. 그 후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130여 년 동안 285개소의 가마터가 이 일대에서 번창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국가 사정이 어려워지자, 분원리 가마터는 개인에게 경영권을 주게 되었다. 그 후 여러 계층의 수요와 요구에 따라 자기의 모양과 무늬가 다양해졌으며, 청화백자의 중심지로 발전했다.가마터의 구조는 오름가마이며, 계단식가마도 확인되었다. 여러 모양과 무늬를 새긴 자기들이 출토되었고, 글씨가 새겨진 도자..

예산 수덕사

『擇里志』 내포(內浦)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제일 좋은 곳이다. 공주에서 서북편으로 이백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伽倻山)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大澤)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했는데, 곧 서해(西海)가 쑥 들어온 곳이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들 가운데 또 큰 개(浦) 하나가 있다. 개는 유궁진(由宮津, 삽교천 지역)이라 하며, 밀물이 가득 차지 않으면 배를 이용할 수가 없다. 남쪽은 오서산(烏棲山)이 막아, 다만 산 동남편으로 공주와 통할 뿐인데, 오서산은 가야산에서 온 산맥이다.가야산의 앞뒤에 잇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년 병자년 남북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

국립중앙박물관은국립박물관이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1915년 12월 1일 경복궁 안에서 개관)을 인수하여 12월 3일 처음 개관하였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26년 6월 20일에 경주분관, 1939년 4월 1일에 부여분관을 각각 개관하였다. 지방에서는 지역 유지들에 의하여 개성부립박물관(開城府立博物館, 1931년 11월 1일), 평양부립박물관(1933년 10월), 공주박물관(1938년 10월 1일)을 개관하였다.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박물관은 대한제국 황실이 1909년 11월에 서울 창경궁에 개관한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이다. 제실박물관은 1911년 2월 1일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 1938년 4월 이왕가미술관, 해방 이후 1946년에 덕수궁미술관으로 개편되었다가 ..

함안 주세붕 선생 묘역

동지중추부사 주세붕(周世鵬)이 졸(卒)하였다.세붕은 영남 사람이다.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학문과 덕업(德業)을 닦고 어진 이와 선한 일을 좋아하며 자기 자신을 부족하게 여겼고, 매양 선현(先賢)들의 격언이나 좋은 글을 보게 되면 반드시 창이나 벽에 붙여놓고 끊임없이 외었다. 장사와 제사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로 법칙을 삼았고, 선영(先塋)이 나지막한 산의 기슭에 있으므로 후세에 논밭으로 변할까 염려되어 묘역(墓域) 둘레에 기와와 돌을 모아 묻어 놓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그 효성이 순실하고 지극했다.여러 고을의 원이 되었고 한 도의 관찰사가 되었었는데, 고무 격려시킬 것을 생각하여 교화를 존숭했고 상례의 격식에 매달리지 않았다. 백성들을 권면할 적에는 효제(孝悌)와 농..

함암 용산리 백악기 새발자국 화석산지 함안 무기연당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을 답사하였다. 함안 칠원은 처가이다. 아내와 아들 지환이, 시환이와 함께하였다. 칠원읍에는 칠원천변으로 중생대 화석이 발견되었다. 함안 용산리 백악기 새발자국 화석산지다. 화석 보존과 관람 시설에 힘을 들였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화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칠원은 성리학자 주세붕 일족인 상산 주씨가 많이 세거하여 그들의 자취가 여럿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영조 때 유생으로 정조 때 충신 정려된 주재성의 무기리 주씨고가(종택)와 무기당(조선후기 연당, 정자), 그리고 중추원 의관을 지낸 주시성의 혜율각이 있다. 그는 친족 민 주민 구휼에 힘썼으며, 비밀리 독립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보다 앞서 무신년에 칠원(漆原) 사람 주재성(周宰成)이 김해(金海)의 군기(軍器) ..

신재 주세붕 사당 함안 무산사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을 답사하였다. 함안 칠원은 처가이다. 아내와 아들 지환이, 시환이와 함께하였다. 주세붕의 영정을 봉안한 문중 사당이자 종학당인 무산사(武山祠)를 찾았다. 무산사는 주세붕 선생 고향 칠서 무릉리에 숙종 24년(1698)에 건립되었다. 이어 1919년 무산사 옆에 종학당인 무산서당을 세워 교육에 힘썼는데 6.25한국전쟁 때 불타고 이후 재건되었다. 함안군은 이를 기념하여 무산사부터 칠원읍까지의 도로를 ‘신재주세붕로’라는 명예도로로 명명하였다. 주세붕은 우리나라 서원을 최초로 건립한 인물로 그가 세운 서원은 영주가 고향인 성리학자 안향이다. 고려 충렬왕의 충신으로 원나라에서 처음 성리학을 도입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안향이 처음 공자 초상을 모신 곳이 바로 강화 교동도에 위치한 교동향교..

심양 고궁

통화에서 이어지는 서간도 일대는 만주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곳곳에 그들이 신성시하는 버드나무가 가로수로 펼쳐져 있고 그들 농가 한켠에는 고구려의 2층 창고인 부경에 옥수수가 그득하다. 버드나무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하백의 딸 유화부인의 상징이다. 청나라 이후 정립된 그들의 태초 신화는 결국 우리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더욱이 그들의 삶은 고구려의 생활문화인 부경이 남아 동화든 어쨌든 반농반목의 여진족의 지금의 만주족의 고유 생활문화로 남아있다.심양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땅이었다. 원나라 시절에는 원으로 끌려온 고려 유민들이 집단을 이루어 원나라에서 고려왕을 심양왕에 봉하였고 입성책동을 야기했던 부원배의 상징이다. 최영과 이성계 장군이 요동정벌을 단행했고 조선 후기 163..

장성

장성에 가보지 않은 자는 사내 대장부라 할 수 없다.(不到长城非好汉)마오쩌둥(毛泽东)드넓은 중국, 장성 너머는 중국이 아니다. 중국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지금도 장성을 확대하고 있다. 들리는 말로는 동으로는 우리나라 평양성까지 확장할 기세다. 만리장성은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다. 우리나라 고구려와 고려 때 천리장성이 있듯이 중국에는 그보다 훨씬 크고 긴 만리장성이 있다는 인식이나 만리장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리장성의 대표적 조망대는 예부터 사신들이 본 북경 인근 팔달령 구간이다. 진시황제 때 각 제국이 쌓은 장성을 연결한 것이 시초로 지금의 모습은 명나라 때 완비된 모습이다. 이후에는 청왕조가 몽골과 국혼을 맺어 동맹 관계에 있었기에 방어적 관방 시설과는 거리가 멀었다.팔달령 장성은 명대 이후 각국..

서울 시티투어 2011

오래전 이야기다. 청년인 내가 고등학교 학생들과 만남이었다. 지금은 그들도 20대 청년이 아닌 30대 장년이 되었다. 나는 중년이 되고 경기도 화성시 병점에 위치한 안화고등학교에서 '2011 경기 청소년 세계시민 프로젝트 동아리 운영'의 일환으로 '화성대장정'이라는 동아리가 꾸려졌다. 담당교사는 사회과 부장교사이신 한승유 선생님이 맡아 진행하였다. ○ 기 간 : 2011.08.01 ~ 2011.12.31○ 장 소 : 화성시 일원(중심 안화고등학교)○ 참여 : 학생 7명, 지도교사 1명■ 화성 대장정을 위한 추진단- 화성 대장정 대표- 민경준, 서문진- 화성 대장정 동아리 구성원- 어영민, 이준선, 송요한, 안득모, 정명배- 지도교사- 한승유- 도움 역사문화탐방강사-이병권 ○ 주요 사업내용■ 「화성 대..

자주독립의 현장 독립문 탑골공원 서대문형무소

최제우가 개창하고 최시형이 중창한 동학은 이용구, 송병준의 일진회와 결별하고 애국계몽운동 계열을 중심으로 해월의 처남이자 제자인 동학 3대 교조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 ~1922)가 천도교로 개창하였다. 천도교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3.1독립운동을 전국적이고 전민족적 운동으로 촉발시킨 중심된 저력이었다. 당시 천도교는 전국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3.1운동에 들어가는 기금을 중앙대교당 건립비용 모금인양 충당하여 3.1운동을 지원하여 우리 민족운동사에 큰 족적을 내었다. 당시 수원군의 천도교 교세는 각지에 전교실이 위치하고 1909년 8월, 1911년 전국 천도교 교구 성미 실적 1등 표창, 1912년 1,2등으로 표창되고 성미 모금에서도 1등이었다. 특히 3.1운동 당시 천도교가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