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275

관동별곡 상원사 월정사 정선 동해

임금이 상원사(上元寺)에 거둥할 때에 관음 보살이 현상(現相)하는 이상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백관들이 전(箋)을 올려 진하(陳賀)하고, 교서(敎書)를 내려 모반(謀叛)·대역(大逆)·모반(謀反), 자손이 조부모와 부모를 모살(謀殺)하거나 구매(毆罵)한것, 처첩(妻妾)이 남편을 모살한 것, 노비가 주인을 모살한 것, 고의로 사람을 모살한 것, 다만 군령(軍令)과 강도(强盜)를 범한 외에는 죄를 용서하도록 하였다.(乙未/以上幸上元寺, 時有觀音現相之異, 百官進箋陳賀, 下敎赦謀反大逆、謀反、子孫謀殺歐罵祖父母ㆍ父母、妻妾謀殺夫、奴婢謀殺主、謀故殺人、但犯軍令ㆍ盜强外罪。)세조실록29권, 세조 8년 11월 5일 을미 1번째기사 1462년상원사에 거둥할 때 관음 보살이 현상(現相)하자 살인·강도 이외의 죄를 사면하다상원사(上院..

공주 제민천 마을여행

충청도(忠淸道)라 일컫기를 청하며, 경기에 입속(入屬)된 아산(牙山)·평택(平澤)·직산(稷山)·진천(鎭川) 등 고을은 아울러 본도(本道)에 다시 예속시키고, 신설한 신은도(新恩道)를 혁파하소서."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忠公道請復稱忠淸道, 京畿入屬牙山、平澤、稷山、鎭川等官, 竝還隷本道, 革罷新設新恩道。" 傳曰: "可。)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 충청도가 충주와 청주 두 고을을 합처 부른 지명이듯 충공도는 충주와 공주를 합쳐 부른 것이다. 지금은 충청도라는 지명이 익숙하지만 한때 공주를 포함한 충공도가 대명사이기도 하였다. 이곳 공주는 공주목으로 충청지역 4대 고을(충주, 청주, 홍주)에 속하는 큰 고을이었다.특히 충공도가 처음 이름된 것은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

영월 청령포 장릉

전날 성삼문(成三問) 등이 말하기를, 상왕(上王)645) 도 그 모의(謀議)에 참여하였다.’ 하였으므로, 종친과 백관들이 합사(合辭)646) 하여 말하기를, ‘상왕(上王)도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으니, 편안히 서울에 거주(居住)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달 동안 청하여 마지 않았으나, 내가 진실로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처음에 먹은 마음을 지키려고 하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아니하고 계속 잇달아 난(亂)을 선동하는 무리가 그치지 않으니, 내가 어찌 사사로운 은의(恩誼)로써 나라의 큰 법을 굽혀 하늘의 명(命)과 종사(宗社)의 중(重)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특별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상왕(上王)〉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

함양 연암물레방아공원 일두고택 동호정 용추사

경상남도 함양에는 유서깊은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여 수려한 자연환경에 기댄 정자도 유명한데 동호정이 그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함양이라고 하지만 조선시대 안의현이 별도로 존재하였는데 이곳이 주목되는 것은 바로 정조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을 현감으로 보낸 것이다. 젊은 시절 친우의 억울한 죽음으로 과거의 뜻을 접고 백탑파라고 불릴 정도로 백탑, 원각사지십층석탑 주변에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친우들과 신분을 넘어 학문을 탐독하였다. 그것이 바로 변화하는 세계사적 조류를 읽었던 것이고 이들의 학문 경향을 과거 중상학파라고 하였지만 정확히는 이용후생학파라고 한다. '나라에서 가장 볼만한 장관이 광활한 영토나 아름다운 산수 혹은 화려한 누각이나 거대 한 성곽..

충주 탄금대 그리고 문경새재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왜군의 속도는 조선이 방어를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평범한 속보처럼 들이닥쳤다. 그런 전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조선군 최고의 장군인 신립이 새도 넘기 힘들다는 조령 방어진을 치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것이다. 그 결과 기마병의 편전을 통한 기동전을 예상했던 신립은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조총부대 앞에 여지 없이 무너진다. 이날의 패배는 선조가 한양 도성을 버리는 것은 물론 압록강을 건너 명에 넘어가려고 할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가 되었다.임진왜란 최대 격전지였지만 사실 탄금대는 대가야 출신 신라 악성 우륵이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고령 대가야에 살던 우륵은 왜 조령을 넘은 것인가 조령은 경상북도 ..

합천 해인사 고령 지산동고분군 장기리 암각화

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는 대몽항쟁기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고려인들의 호국정신을 담은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사찰로 유명하다.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하는 해인사는 사찰 가람 자체로도 훌륭한 산중사찰이며 규모도 커서 장중함이 있는 우리나라 대표 가람이다. 기록유산으로 훌륭한 대장경판은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되어져 있는데 이 시설은 공기흐름을 이용한 과학적 설계가 돗보이는 건축물로 아무 곳에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특별하다. 조상들의 슬기가 깃든 곳이라 그 자체로도 경외감이 든다. 누가 보더라도 부처를 모신 대웅전 같은 숭배의 공간은 아니나 그 자체로 느껴지는 위엄, 장중함 그 자체이다.이웃한 고령은 대가야의 중심지다. 구지봉 신화가 말해주듯 가야의 지배층은 하늘에 닿아있..

김해 금관가야

가락국기(駕洛國記)문종대(文宗代)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金官) 지주사(知州事)의 문인(文人)이 지은 것으로 이제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註 478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酋長)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註 479,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註 481 18년 임인 3월 계욕일(禊浴日)註 482에 살고 ..

충주 고구려비(중원고구려비)

중원 고구려비로 알려진 충주 고구려비이다. 현재 알려진 고구려비는 단 3기에 불과하고 그중 지역적으로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하는 유일한 고구려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무이한 고구려 유산으로 단비와 같은 것이 바로 중원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이다.이렇게 중요한 유산인데 한 번도 그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한 유산이다. 금석문의 대가 추사 김정희도 몰랐을 정도니까 너무 아쉬운 대목이다. 이른 시기 더 빨리 알려져 더 많은 비문의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 우리 고대사가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길이 열렸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우리 역사의 큰 선물이다.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

대전 지질박물관 화폐박물관 시민천문대

한반도의 중심 대전은 교통의 중심으로 발전하여 대한민국 최첨단 산업의 중심이기도 하다. 대덕연구단지와 카이스트가 위치한 것이 좋은 예이다. 1993년 대전과학엑스포는 이러한 대전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 행사였다. 지금도 대전시 유성구의 대덕연구단지에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시설을 일반이들이 관람이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래도 몇몇 기관에서는 전시관을 운영중이다. 게다가 무료이다. 특히 아이들과 방문하면 좋은 곳이 바로 대전지질박물관과 화폐박물관이다. 인근에 대전시민천문대도 있으니 두루 관람하면 좋다. 화폐박물관 대전시민천문대 과천과학관 흥천산봉수(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