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309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도원수의 공로 성조 때에 많았는데 / 元師功多聖祖朝깃털 서글피 바라보니 하늘에 있네 / 羽毛悵望在雲霄사방에 적병이라 외로운 성 작기만 하고 / 四郊受敵孤城小천 리 밖 근왕병들 한 자루 칼도 아득하네 / 千里勤王一釖遙백면서생이 오히려 세 번 승전을 아뢰니 / 白面猶能三捷奏푸른 바다에 만 척 범선을 누가 염려하랴 / 蒼濤誰慮萬帆飄위엄과 명성이 양강 북쪽까지 떨쳤으니 / 威聲又振楊江北끝내 우리나라 적막하지 않게 하였네 / 終使東韓不寂寥신경준, 독산성에서 옛날을 추억하며〔禿山城懷古〕 고전번역서 여암유고 제1권 시 독산성은 경기도 오산시와 화성시와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에 위치한 백제 시대의 산성으로,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불린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삼존불상 보원사지

인간에서 종교는 큰 울림이다. 이러한 종교가 사람들 저마다 큰 감동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은 많은 다양한 체험에서 이루어지는데 삼국시대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 부처를 아주 생동감있게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만든 것이 바로 서산 마애삼존불상이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이 부처님은 당대 백제인들이 생각한 부처와 불교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적어도 당시 불교는 웅장하고 장엄하고 위엄있는 절대지존이 아닌 우리 곁에 언제나 밝고 친절하게 다가와 주는 존재가 부처였고 불교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대단한 유산 인근에 거대한 사찰터가 남아있다. 고란사라고도 불리는 보원사지다. 서산 보원사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스님들이 사용한 석조 시설의 규모로 볼 때(4톤의 물 저장), 상당한 수..

해미읍성

수많은 읍성이 도처에 있었는데, 현재는 그 원형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곳이 순천의 낙안읍성과 성곽으로 잘 보존된 해미읍성이다. 낙안읍성은 생활도 이루어지고 있는 읍성으로 특별한 곳이다. 해미읍성은 관방유적으로 특기할 곳으로 예전 방어를 위해 성벽에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둘러 탱자성으로도 불렸던 곳인데 탱자나무의 가시가 위험하다고 하여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오히려 탱자나무가 그득했다면 영국이나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고성의 청취를 더 잘 느낄 수 있는 유산이었을텐데 아쉽다.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

관동별곡 상원사 월정사 정선 동해

임금이 상원사(上元寺)에 거둥할 때에 관음 보살이 현상(現相)하는 이상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백관들이 전(箋)을 올려 진하(陳賀)하고, 교서(敎書)를 내려 모반(謀叛)·대역(大逆)·모반(謀反), 자손이 조부모와 부모를 모살(謀殺)하거나 구매(毆罵)한것, 처첩(妻妾)이 남편을 모살한 것, 노비가 주인을 모살한 것, 고의로 사람을 모살한 것, 다만 군령(軍令)과 강도(强盜)를 범한 외에는 죄를 용서하도록 하였다.(乙未/以上幸上元寺, 時有觀音現相之異, 百官進箋陳賀, 下敎赦謀反大逆、謀反、子孫謀殺歐罵祖父母ㆍ父母、妻妾謀殺夫、奴婢謀殺主、謀故殺人、但犯軍令ㆍ盜强外罪。)세조실록29권, 세조 8년 11월 5일 을미 1번째기사 1462년상원사에 거둥할 때 관음 보살이 현상(現相)하자 살인·강도 이외의 죄를 사면하다상원사(上院..

공주 제민천 마을여행

충청도(忠淸道)라 일컫기를 청하며, 경기에 입속(入屬)된 아산(牙山)·평택(平澤)·직산(稷山)·진천(鎭川) 등 고을은 아울러 본도(本道)에 다시 예속시키고, 신설한 신은도(新恩道)를 혁파하소서."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忠公道請復稱忠淸道, 京畿入屬牙山、平澤、稷山、鎭川等官, 竝還隷本道, 革罷新設新恩道。" 傳曰: "可。)중종실록1권, 중종 1년(1506) 9월 5일 신사 충청도가 충주와 청주 두 고을을 합처 부른 지명이듯 충공도는 충주와 공주를 합쳐 부른 것이다. 지금은 충청도라는 지명이 익숙하지만 한때 공주를 포함한 충공도가 대명사이기도 하였다. 이곳 공주는 공주목으로 충청지역 4대 고을(충주, 청주, 홍주)에 속하는 큰 고을이었다.특히 충공도가 처음 이름된 것은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

영월 청령포 장릉

전날 성삼문(成三問) 등이 말하기를, 상왕(上王)645) 도 그 모의(謀議)에 참여하였다.’ 하였으므로, 종친과 백관들이 합사(合辭)646) 하여 말하기를, ‘상왕(上王)도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으니, 편안히 서울에 거주(居住)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달 동안 청하여 마지 않았으나, 내가 진실로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처음에 먹은 마음을 지키려고 하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아니하고 계속 잇달아 난(亂)을 선동하는 무리가 그치지 않으니, 내가 어찌 사사로운 은의(恩誼)로써 나라의 큰 법을 굽혀 하늘의 명(命)과 종사(宗社)의 중(重)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특별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상왕(上王)〉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

함양 연암물레방아공원 일두고택 동호정 용추사

경상남도 함양에는 유서깊은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여 수려한 자연환경에 기댄 정자도 유명한데 동호정이 그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함양이라고 하지만 조선시대 안의현이 별도로 존재하였는데 이곳이 주목되는 것은 바로 정조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을 현감으로 보낸 것이다. 젊은 시절 친우의 억울한 죽음으로 과거의 뜻을 접고 백탑파라고 불릴 정도로 백탑, 원각사지십층석탑 주변에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친우들과 신분을 넘어 학문을 탐독하였다. 그것이 바로 변화하는 세계사적 조류를 읽었던 것이고 이들의 학문 경향을 과거 중상학파라고 하였지만 정확히는 이용후생학파라고 한다. '나라에서 가장 볼만한 장관이 광활한 영토나 아름다운 산수 혹은 화려한 누각이나 거대 한 성곽..

충주 탄금대 그리고 문경새재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왜군의 속도는 조선이 방어를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평범한 속보처럼 들이닥쳤다. 그런 전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조선군 최고의 장군인 신립이 새도 넘기 힘들다는 조령 방어진을 치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것이다. 그 결과 기마병의 편전을 통한 기동전을 예상했던 신립은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조총부대 앞에 여지 없이 무너진다. 이날의 패배는 선조가 한양 도성을 버리는 것은 물론 압록강을 건너 명에 넘어가려고 할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가 되었다.임진왜란 최대 격전지였지만 사실 탄금대는 대가야 출신 신라 악성 우륵이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고령 대가야에 살던 우륵은 왜 조령을 넘은 것인가 조령은 경상북도 ..

합천 해인사 고령 지산동고분군 장기리 암각화

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는 대몽항쟁기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고려인들의 호국정신을 담은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사찰로 유명하다.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하는 해인사는 사찰 가람 자체로도 훌륭한 산중사찰이며 규모도 커서 장중함이 있는 우리나라 대표 가람이다. 기록유산으로 훌륭한 대장경판은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되어져 있는데 이 시설은 공기흐름을 이용한 과학적 설계가 돗보이는 건축물로 아무 곳에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특별하다. 조상들의 슬기가 깃든 곳이라 그 자체로도 경외감이 든다. 누가 보더라도 부처를 모신 대웅전 같은 숭배의 공간은 아니나 그 자체로 느껴지는 위엄, 장중함 그 자체이다.이웃한 고령은 대가야의 중심지다. 구지봉 신화가 말해주듯 가야의 지배층은 하늘에 닿아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