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는 대몽항쟁기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고려인들의 호국정신을 담은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사찰로 유명하다.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하는 해인사는 사찰 가람 자체로도 훌륭한 산중사찰이며 규모도 커서 장중함이 있는 우리나라 대표 가람이다. 기록유산으로 훌륭한 대장경판은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되어져 있는데 이 시설은 공기흐름을 이용한 과학적 설계가 돗보이는 건축물로 아무 곳에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특별하다. 조상들의 슬기가 깃든 곳이라 그 자체로도 경외감이 든다. 누가 보더라도 부처를 모신 대웅전 같은 숭배의 공간은 아니나 그 자체로 느껴지는 위엄, 장중함 그 자체이다.
이웃한 고령은 대가야의 중심지다. 구지봉 신화가 말해주듯 가야의 지배층은 하늘에 닿아있다. 내세의 공간인 무덤들이 산꼭대기에 있다. 이 특징이 가야의 내세관이고 대가야 역시도 고분들이 산위로 펼쳐진다. 바로 지산동 고분군이다.
특기할 것은 대가야는 전기 금관가야에 이어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끈 국가로 대표적인 인물이 우륵이다. 우륵은 대가야를 멸망시킨 진흥왕의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하였던 가야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당시 우륵의 처지는 대가야의 터전인 고령을 떠나서 집단으로 충주로 옮겨진 터였다. 가야의 악성이 중원의 탄금대에 자취를 남긴 이유이다.
그리고 바로 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장기리 암각화에 갔다. 밭 전(田)자 등 문자와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문자 이전 문자의 쓰임으로 상징화된 암각화로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지만 당대만 국한되지 않고 후세까지 이야기와 상징이 더해진 신성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가야산해인사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 장경판전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가유산포털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高靈 池山洞 古墳群)
고령은 대가야의 옛 지역으로서 현재 무덤이 수백 기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지산동 무덤들은 겉모습이 확실하고 봉분이 비교적 큰 무덤에 한하여 번호를 매겨 지금은 72호 무덤까지 정해져 있다.
이들 무덤의 겉모양들은 모두 원형의 봉토를 하고 있고, 봉토의 규모에 따라서 대형·중형·소형무덤으로 구분한다.
주로 대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위쪽에 많이 있으며 중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중간 정도에 모여 있고, 작은무덤들은 대형무덤과 중형무덤 주위나 그 밑에서 발견이 된다.
내부구조는 돌널무덤(석상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석실묘)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데, 돌널무덤의 경우 청동기시대 돌널무덤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한 봉분 안에 여러 무덤이 나타나는 것은 가족무덤의 성격이라기 보다 딸려묻기(순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대형무덤에서 많은 양의 토기와 함께 금동관·갑옷 및 투구·칼 및 꾸미개 종류가 출토되고 있으며, 4∼6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포털
고령 장기리 암각화(高靈 場基里 岩刻畫)
20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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