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305

함암 용산리 백악기 새발자국 화석산지 함안 무기연당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을 답사하였다. 함안 칠원은 처가이다. 아내와 아들 지환이, 시환이와 함께하였다. 칠원읍에는 칠원천변으로 중생대 화석이 발견되었다. 함안 용산리 백악기 새발자국 화석산지다. 화석 보존과 관람 시설에 힘을 들였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화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칠원은 성리학자 주세붕 일족인 상산 주씨가 많이 세거하여 그들의 자취가 여럿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영조 때 유생으로 정조 때 충신 정려된 주재성의 무기리 주씨고가(종택)와 무기당(조선후기 연당, 정자), 그리고 중추원 의관을 지낸 주시성의 혜율각이 있다. 그는 친족 민 주민 구휼에 힘썼으며, 비밀리 독립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보다 앞서 무신년에 칠원(漆原) 사람 주재성(周宰成)이 김해(金海)의 군기(軍器) ..

신재 주세붕 사당 함안 무산사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을 답사하였다. 함안 칠원은 처가이다. 아내와 아들 지환이, 시환이와 함께하였다. 주세붕의 영정을 봉안한 문중 사당이자 종학당인 무산사(武山祠)를 찾았다. 무산사는 주세붕 선생 고향 칠서 무릉리에 숙종 24년(1698)에 건립되었다. 이어 1919년 무산사 옆에 종학당인 무산서당을 세워 교육에 힘썼는데 6.25한국전쟁 때 불타고 이후 재건되었다. 함안군은 이를 기념하여 무산사부터 칠원읍까지의 도로를 ‘신재주세붕로’라는 명예도로로 명명하였다. 주세붕은 우리나라 서원을 최초로 건립한 인물로 그가 세운 서원은 영주가 고향인 성리학자 안향이다. 고려 충렬왕의 충신으로 원나라에서 처음 성리학을 도입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안향이 처음 공자 초상을 모신 곳이 바로 강화 교동도에 위치한 교동향교..

심양 고궁

통화에서 이어지는 서간도 일대는 만주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곳곳에 그들이 신성시하는 버드나무가 가로수로 펼쳐져 있고 그들 농가 한켠에는 고구려의 2층 창고인 부경에 옥수수가 그득하다. 버드나무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하백의 딸 유화부인의 상징이다. 청나라 이후 정립된 그들의 태초 신화는 결국 우리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더욱이 그들의 삶은 고구려의 생활문화인 부경이 남아 동화든 어쨌든 반농반목의 여진족의 지금의 만주족의 고유 생활문화로 남아있다.심양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땅이었다. 원나라 시절에는 원으로 끌려온 고려 유민들이 집단을 이루어 원나라에서 고려왕을 심양왕에 봉하였고 입성책동을 야기했던 부원배의 상징이다. 최영과 이성계 장군이 요동정벌을 단행했고 조선 후기 163..

장성

장성에 가보지 않은 자는 사내 대장부라 할 수 없다.(不到长城非好汉)마오쩌둥(毛泽东)드넓은 중국, 장성 너머는 중국이 아니다. 중국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지금도 장성을 확대하고 있다. 들리는 말로는 동으로는 우리나라 평양성까지 확장할 기세다. 만리장성은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다. 우리나라 고구려와 고려 때 천리장성이 있듯이 중국에는 그보다 훨씬 크고 긴 만리장성이 있다는 인식이나 만리장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리장성의 대표적 조망대는 예부터 사신들이 본 북경 인근 팔달령 구간이다. 진시황제 때 각 제국이 쌓은 장성을 연결한 것이 시초로 지금의 모습은 명나라 때 완비된 모습이다. 이후에는 청왕조가 몽골과 국혼을 맺어 동맹 관계에 있었기에 방어적 관방 시설과는 거리가 멀었다.팔달령 장성은 명대 이후 각국..

서울 시티투어 2011

오래전 이야기다. 청년인 내가 고등학교 학생들과 만남이었다. 지금은 그들도 20대 청년이 아닌 30대 장년이 되었다. 나는 중년이 되고 경기도 화성시 병점에 위치한 안화고등학교에서 '2011 경기 청소년 세계시민 프로젝트 동아리 운영'의 일환으로 '화성대장정'이라는 동아리가 꾸려졌다. 담당교사는 사회과 부장교사이신 한승유 선생님이 맡아 진행하였다. ○ 기 간 : 2011.08.01 ~ 2011.12.31○ 장 소 : 화성시 일원(중심 안화고등학교)○ 참여 : 학생 7명, 지도교사 1명■ 화성 대장정을 위한 추진단- 화성 대장정 대표- 민경준, 서문진- 화성 대장정 동아리 구성원- 어영민, 이준선, 송요한, 안득모, 정명배- 지도교사- 한승유- 도움 역사문화탐방강사-이병권 ○ 주요 사업내용■ 「화성 대..

자주독립의 현장 독립문 탑골공원 서대문형무소

최제우가 개창하고 최시형이 중창한 동학은 이용구, 송병준의 일진회와 결별하고 애국계몽운동 계열을 중심으로 해월의 처남이자 제자인 동학 3대 교조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 ~1922)가 천도교로 개창하였다. 천도교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3.1독립운동을 전국적이고 전민족적 운동으로 촉발시킨 중심된 저력이었다. 당시 천도교는 전국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3.1운동에 들어가는 기금을 중앙대교당 건립비용 모금인양 충당하여 3.1운동을 지원하여 우리 민족운동사에 큰 족적을 내었다. 당시 수원군의 천도교 교세는 각지에 전교실이 위치하고 1909년 8월, 1911년 전국 천도교 교구 성미 실적 1등 표창, 1912년 1,2등으로 표창되고 성미 모금에서도 1등이었다. 특히 3.1운동 당시 천도교가 재..

오산 외삼미동 고인돌 금암리 지석묘군

지석묘(支石墓)는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 유적이다. 흔히 고인돌 하면 선사시대의 원시인을 떠올리기도 한다.(고인돌이 다수 분포된 고창에서 고인돌 축제를 하는데 원시인을 모델로 한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으로 원시인이 살던 시대는 사람들 사이가 평등했기 때문에 고인돌과 같은 돌로 만든 큰 무덤이 나오지 않는다.이처럼 고인돌을 만드는 것은 계급이 존재하고 특정 지배층이 자신의 무덤을 크게 만들어 권위를 상징하는 정치적, 경제적 우월성을 대변한다.후한서 동이전 한조에 따르면 삼한시대 이전 수원은 한강 이남의 토착세력인 진국(辰國BC400년경)의 독자적인 지배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후 삼한시대(원삼국시대로 기원전 후에서 BC300년경까지) 마한이 54국, 진한과 변한이 각각 ..

경기도의 명품 고인돌 계수동 조남동 가학동 선부동 지석묘

가학동, 조남리(성혈), 계수동 평양지방 1만 4천 기 고인돌고인돌 분포 멀리 산동, 요동, 규슈북 2만, 남 3만 기 확인시기 2~3천년전오덕형(五德) 沈村형, 墨房형 남북방구분(남한 한강을 경계로) 전남 나주 북방식 발견 평북 태천 남방식 발견 퇴색이에 반해 주요한 특징으로 1970년 석광준 '우리나라 서북지방 고인돌에 관한 연구' 황해북도 연탄군 오덕리 전형, 황주군 침촌리 전형평남 개천군 묵방리유물의 멋 미술사 기원전 10세기 미만 북 30세기 단군릉 용곡리 고인돌떼 넓적한 바윗덩어리귀일리 고인돌 별자리이냐 성혈인가(여성 생식기 모양으로 구멍을 파면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던 샤먼의 전통 남원, 순창) 별자리 1996년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공동 ' 조선기술발전사' 일본..

서울 암사동선사유적지

한반도 중심의 한강에는 오래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그 역사를 말해주는 곳이 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 유적이다. 경기도 연천의 선사유적이 구석리를 대표한다면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곳은 이곳 암사동이다. 물론 구석기 유적은 아주 드물고 그 유적 자체도 흔적에 불과하여 별로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어렵지만 그래도 신석기 시대가 되면 인간이 물질문명의 최소 단계인 집을 짓고 음식을 조리하는 등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비로서 나온다. 따라서 암사동 말고도 신석기 유적은 전국에 많이 있다. 수원과 가까운 시흥시의 오이도선사유적도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 조개패총 유적이다. 2011.4.9.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한반도 중부에서 중요한 강은 한강이지만 그 한강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강이 있는데 바로 한탄강이다. 한반도 중부이자 경기도 북부의 젖줄인 한탄강은 너른 화성암 현무암 퇴적대지를 관통하는 강으로 예전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맷돌을 최고급으로 쳤다. 이렇듯 한탄강은 지질적인 특성은 물론, 고고학적으로 동아시아 최초의 주먹도끼(아슐리안 형)가 1978년 미군 그렉 보웬에게 발견된 역사적 현장이다.전곡리 선사유적은 1978년 한탄강 변에서 당시 동두천주둔 미군인 그렉 보웬(Bowen G.)에 의하여 처음 발견되었다. 그는 수습한 석기를 기록한 보고서를 세계적인 선사고고학 전문가였던 프랑스의 프랑수와 보르도 교수에게 보냈고 보르도 교수는 당시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이었던 김원룡 교수를 소개했다. 이 과정을 거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