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을 답사하였다. 함안 칠원은 처가이다. 아내와 아들 지환이, 시환이와 함께하였다. 칠원읍에는 칠원천변으로 중생대 화석이 발견되었다. 함안 용산리 백악기 새발자국 화석산지다. 화석 보존과 관람 시설에 힘을 들였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화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칠원은 성리학자 주세붕 일족인 상산 주씨가 많이 세거하여 그들의 자취가 여럿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영조 때 유생으로 정조 때 충신 정려된 주재성의 무기리 주씨고가(종택)와 무기당(조선후기 연당, 정자), 그리고 중추원 의관을 지낸 주시성의 혜율각이 있다. 그는 친족 민 주민 구휼에 힘썼으며, 비밀리 독립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보다 앞서 무신년에 칠원(漆原) 사람 주재성(周宰成)이 김해(金海)의 군기(軍器) 가운데 밥을 짓는 솥[炊釜]에 뚜껑이 없는 것을 보고 스스로 4백 개를 준비하여 바쳤으나 병사(兵使)가 이를 받지 아니하였는데, 김재로(金在魯)가 감사가 되었을 적에 이를 받자고 계청(啓請)하였으나, 묘당(廟堂)에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날 김재로가 또 경연에서 아뢰어서 이것을 받게 되었으니, 의논하는 자들이 이것을 깊이 애석하게 여겼다.(先是, 戊申漆原人周宰成見金海軍器中炊釜之無蓋, 自備四百以獻, 兵使不受。 及金在魯爲監司, 啓請受之, 廟堂不許。 是日, 在魯又筵白而受之, 議者深惜之。)
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1735) 윤4월 28일 정유 2번째기사
김재로가 칠원인 주재성이 바치고자 하는 솥두껑을 받아들이자고 청하다
주재성은 신재 주세붕의 방계 후손으로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이를 막았고(국담주공행장, 성재집 성재선생문집속편권지6 행장 허전 : 성호학파를 이은 학자) 이에 대한 공로로 정조 대 충신 정려되었다.(지금 주재성이 무신년 당시의 행적은 장계에 분명히 기재하여 여러 차례 성상께 올렸습니다. 의병을 일으키고 인을 이루는 것은 옛 선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이니, 삼품의 관직을 증직하는 것도 높이고 보답하는 도리로는 부족합니다.-승정원일기 1530책. 탈초본 83책. 정조 7년 4월 6일)














무기연당
주재성은 연못 이름을 국담(菊潭)이라하고 가운데 석가산을 쌓았다. 이 국담을 호로 삼았다. 연못가의 사당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유유자적하였다. 연못가에는 후대에 풍욕루(風浴樓)와 하환정(何換亭)을 지었고 최근에 충효사(忠孝祠)를 지었다. 연못가를 둘러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어 영귀문(詠歸門)이라 하였다. 비교적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후기의 누정(연당)이다. 무기연당( 舞沂蓮塘)은 연꽃이 물에서 춤추고 있는 못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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