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305

남양주 이왕가 홍유릉 여주 명성황후 생가 신륵사

클레오파트라는 절세미녀가 아니면서도 남들이 그렇게 여기게 만드는 기술이 능할 뿐더러, 총명하고 재치가 풍부한 여자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성도 갖추고 있었을까?우선 그녀는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력이 부족했다.시오노 나나미, 1996, 로마인 이야기5(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한길사, 473쪽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보면 클레오파트라를 볼 때 늘 생각되던 사람이 있다. 명성황후라고 불리는 고종비 중전민씨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권력투쟁을 하면서 민씨척족을 앞세워 세도정치를 하였고 청나라를 등에 업고 백성의 어버이임을 포기한 여자, 그런 여자를 두고 10여 년 전 뮤비와 드라마에서는 민씨로 분한 여주인공이 일제 낭인 앞에서​"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당차게 결기를 보여준 사람, 중전 민씨다..

조선왕릉 동구릉 건원릉 현릉 수릉 선릉 정릉 사릉

조선 왕조의 중심 선산, 왕릉원이 구리 동구릉이다.동구릉에는 왕조 개창자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일곱 명의 왕과 왕비, 계비 열 분이 모셔져 있다. 모든 왕릉을 찾아 볼 수는 없었고 함흥의 흙과 억새를 봉분에 올려 고향을 대신케 했다는 건원릉과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 그리고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의 수릉을 살폈다.보통의 왕릉은 홍살문을 들어서면 옆으로 굽어진 향어로를 따라 정면의 정자각에 서면 뒤편으로 작은 언덕인 강(岡) 위에 곡장을 두른 능상이 있다. 능상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문석인,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 등과 장명등, 망주석, 혼유석 등으로 꾸며진다.조선 시대에는 한양을 벗어난 성저십리 밖이었지만 지금은 강남 노른자위의 어쩌면 조선 왕릉 능침 중 가장 비싼 곳이 ..

여주 효종 영릉

효종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대왕 행장국왕의 휘(諱)는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으로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둘째 아들이고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손자이다. 모비(母妃) 인열 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인데, 향교동(鄕校洞)의 잠저(潛邸)에서 기미년(1619. 광해 11년) 5월 22일 해시(亥時)에 왕을 낳았다. 이날 저녁 흰 운기(雲氣) 세 가닥이 침실(寢室)로 날아 들어와 서쪽 편 창 사이에 엉겨 있었는데 연기 같으면서도 연기가 아니었다. 한참 있다가 흩어졌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왕은 태어난 지 4, 5세에 성품과 도량이 활달하여 우뚝하게 거인(巨人)의 뜻을 지녔다. 놀이를 할 때에도 범상하지 않은 일이 ..

수원 화성행궁

정조의 즉위와 행행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는 이름은 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영조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생부인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즉위하여, 홍국영(洪國榮)을 이용해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화성 야경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본래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인데, 신라가 수성군(水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남정(南征)할 때, 고을 사람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백여 사람이 귀순(歸順)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수주(水州)로 승격시켰으며,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 을사 【곧 송나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 에 이를 파하고, 현종(顯宗) 9년 무오에 다시 지수주사(知水州事)로 삼았다. 충경왕(忠敬王) 12년 신미 【곧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8년.】 에 몽고 군사가 대부도(大部島)에 침입하여 백성을 노략질하니, 섬 사람들이 분함을 못 이겨 몽고 군사를 죽이고 반(叛)하매, 주관(州官)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평..

수원 화성

수원부(水原府)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어필(御筆)로 현판을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 부사(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판관(判官) 한 사람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을 고쳐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호위 대장(扈衛大將)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켰다. 전교하였다."왕위에 오른 이후로 재용을 많이 저축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 왔다. 그런데 다행히 황천에 계신 조종(祖宗)의 말없는 도움을 입어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좋은 자리를 잡아 영원토록 천억만년 끝없을 큰 운세를 정하였으니, 이 땅의 소중함은 실로 주(周)나라의 풍(豊)이나 한(漢)나라의 패(沛)와 같이 ..

세계문화유산 화성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정수인 수원화성의 탄생은 제22대 정조(1752탄생 재위1776-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恨)과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지리적으로 교통이 사방으로 통하는 위치에 있는 수원을 상업 활동이 활발한 경제 신도시로의 건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화성을 축조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영조 즉위부터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붕당 서인 노론이 집권하고 있었다. 영조 즉위 이래 강력한 왕권강화책으로 탕평책을 펼쳤으나 여전히 강력한 기득권을 누리던 노론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 이성(李祘정조의 이름인 祘이 한자독음법에 따라 '산'으로 널리 읽히어 그간 정조..

임진각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하지만 내전의 진정한 비극은 내전에 희생된 사망자 수가 아니다. 진정한 비극은 내전에 희생됨으로써 생겨나는 앙심과 원한과 증오가 오랫동안 이어져, 그 꼬리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데 있다. 그것이 공동체에 얼마나 큰 불이익이 되는지, 따라서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되 도록 피해야 할 필요성이 얼마나 큰지는 '카틸리나 역모사건‘ 당시 37세였던 카이사르가 행한 연설에 이미 나타나 있다.게다가 내전은 부모와 자식, 형제, 친구 사이를 갈라놓는다. 카이사르는 명쾌한 태도와 솔직한 표현력, 그리고 갈리아에서 거둔 화려한 공적으로 수도 로마의 젊은이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원로원 의원인 아버지의 만류도 뿌리치고 카이사르한테 달려가고 싶다고 공언 하는 로마 유력자의 자제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원로..

광명 영회원

명문에서 덕을 길러 / 名門鍾德우리 왕실에 출가했는데 / 俔我京室형황이 점차 멀어지니 / 珩璜漸遠창상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하리오 / 滄桑忍說아득한 천원이여 / 瀰瀰泉源실로 그 무덤에 가까운데 / 實邇其兆주위의 송백이 / 侯松侯柏일찍이 자라지 않았네 / 曾不盈眺내가 이에 도모하여 / 我維圖之봉분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었으며 / 以封以植내가 무덤에 와서 절하고 / 來拜玄扃예주(醴酒)를 가득 따르네 / 崇醴于酌홍재전서 제24권 / 제문(祭文) 6민회빈(愍懷嬪)의 묘소에 친히 제사드린 글1797년 8월 16일 정조는 행행에서 광명 노온사동에 있는 민회빈(愍懷嬪) 묘에 들러 친히 헌작례를 행하고 읊은 제문이다. 억울하게 죽은 그녀가 숙종에서 신원되고 최초로 그 자손인 임금에게 예를 받았다. 물론 정조는 적자는 아..

남한산성 행궁

한산주(漢山州)에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였다.삼국사기 권 제7신라본기 제7 문무왕(文武王)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다(672년 8월)주장성(晝長城)은 지금의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리킨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6 경기도 광주목(廣州牧) 고적조(古跡條)에 다음과 같이 주장성이 남한산성임을 밝히고 있다.일장산성(日長山城). 광주(廣州)에 있는 신라 때의 주장산성(주장성[晝長城]). 문무왕(文武王) 때 축조한 것으로 안에 여섯 곳의 우물터와 흐르는 시내가 있고 둘레가 팔만 육천 팔백 척이고 높이가 이십사 척인 석축으로 된 산성이다.(長山城 卽新羅時晝長山城 文武王所築 內有六井及溪 周八万六千八百尺 高二十四尺 石築)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6 경기도 광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