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중심 선산, 왕릉원이 구리 동구릉이다.
동구릉에는 왕조 개창자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일곱 명의 왕과 왕비, 계비 열 분이 모셔져 있다. 모든 왕릉을 찾아 볼 수는 없었고 함흥의 흙과 억새를 봉분에 올려 고향을 대신케 했다는 건원릉과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 그리고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의 수릉을 살폈다.
보통의 왕릉은 홍살문을 들어서면 옆으로 굽어진 향어로를 따라 정면의 정자각에 서면 뒤편으로 작은 언덕인 강(岡) 위에 곡장을 두른 능상이 있다. 능상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문석인,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 등과 장명등, 망주석, 혼유석 등으로 꾸며진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을 벗어난 성저십리 밖이었지만 지금은 강남 노른자위의 어쩌면 조선 왕릉 능침 중 가장 비싼 곳이 선릉과 정릉, 선정릉이다. 선릉은 성종과 정현왕후의 릉이고 이웃한 구릉에 정릉은 중종의 릉이다. 건원릉, 단종의 영월 장릉과 함께 왕 혼자 묻힌 단릉이다. 이곳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본에 의해 도굴된 유일의 조선 왕릉이다.
사릉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릉이다. 동대문 즉 흥인지문 밖 숭인동 청룡사 동쪽에 솟은 동밍봉(東望峰)은 이곳에 거처한 정순왕후 송씨가 단종을 위하여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올라 동쪽으로 영월을 바라보며,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80이 넘어 죽어 묻힌 곳, 사릉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영조가 1771년(영조 47)에 정업원구기비를 세워 기리는 한편, 산봉우리 바위에도 ‘東望峰’ 을 친필로 새기기까지 하였다는데 전하진 않는다. 정업원은 여말선초기 고려와 조선 왕실 여인들이 비구니로 살며, 노년을 보낸 사찰이다.
문조(文祖, 1809~1830)는 조선 후기 추존왕이다. 이름은 영(旲),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이다. 제23대 왕인 순조의 세자이다. 어머니는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로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趙萬永)의 딸인 풍양 조씨를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인 순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백성을 위하는 정책의 구현에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대리청정을 수행한지 4년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왕으로 추존되어 ‘익종(翼宗)’이라 하였고, 이후 고종 연간 다시 ‘문조(文祖)’라 추숭하였다. 묘호는 ‘문호(文祜)’,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수릉(綏陵)이며, 시호는 효명(孝明)이다.
수릉은 효명세자로 잘 알려진 문조와 그의 비 신정왕후의 능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합장한 단릉이며 1830년 처음 조성된 후 풍수상의 이유로 두 번의 천장을 겪고 지금의 자리에 안치되었다. 처음에는 경종 의릉의 왼쪽 언덕에 조성되었으나 1846년에는 양주 용마봉 아래로, 1855년에는 동구릉 태조 건원릉 좌측인 지금의 자리로 최종 옮겨지게 되었다.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따랐고 능침의 삼계는 외계와 내계로만 구분되었다. 문관은 금관을 쓰고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조복을 입고 있으며 무석인의 경우 세부장식이 매우 섬세하고 독특한 문양으로 된 갑주가 특징이다. 1843년 헌종의 즉위와 더불어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숭되었고 능호도 수릉으로 봉릉되었다. 그 후 3년 째 되던 1846년 1월 수릉의 풍수가 좋지 못해 옮겨야 한다는 신료들의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헌종은 정국이 어수선하다는 이유로 결정을 미루고 있다가 1846년 3월 7일 수릉 천릉이 결정되었다. 산릉도감에서 용마봉이 건원릉에서 멀지 않으므로 옛 석물을 다시 사용하되 난간석, 무석인, 석호, 석양은 전에 없었으므로 새로 설치하기로 하였다. 혼유석은 지나치게 크므로 『국조상례보편』의 제도에 맞게 만들고 표석은 불가피하게 고쳐 제작해야 하므로 세척한 후에 천릉의 일을 고쳐 새겨 넣게 하였다. 1846년 수릉을 천릉한 지 11년째 되던 해 풍수상의 문제로 다시 한 번 천릉하게 되었는데 석물은 전의 것을 옮겨 사용하였다. 1890년 4월 7일 신정왕후가 승하하자 문조가 묻힌 오른족 자리에 합부하기로 결정하였다. 문조릉과 합장릉으로 조성된 신정왕후릉은 왕후릉이 왼쪽에 위치한 일반적인 조선왕릉 제도와 달리 문조의 관 오른쪽에 묻힌 것이 특징이다. 이는 지관들이 혈의 상태가 좋은 곳으로 이곳을 추천했기 때문이다. 지금 수릉에는 1890년 세워진 합봉비와 1902년 고종에 의해 황제 황후로 추숭되고 건립된 추숭비가 세워져 있지만 천릉 당시에는 1835년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숭된 이후 1846년 양주군 비봉면에 세워졌던 천릉비, 1855년 동구릉에 세워진 천릉비를 합해 총 3기의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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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1414~1452)은 조선의 4대 왕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장자로 1414년(태종 14) 10월 3일에 태어났다. 휘는 ‘향(珦)’이며, 자는 ‘휘지(輝之)’이다. 1421년(세종 3) 세자로 책봉받았다. 세종의 병환으로 인해, 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445년부터 여러 가지 정무에 참여하는 등 세종을 보필하였다. 유학 및 천문·역법·산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짧은 재위기간 동안에도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였다. 즉위 후 군제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해 제시하였는데,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이는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사에 골고루 배분하였다. 재위 2년 4개월 만인 1452년(문종 2) 5월 14일에 경복궁 정침에서 훙서하여, 9월 1일에 건원릉의 동남쪽에 장사하였다. 시호는 ‘흠명 인숙 광문 성효(欽明仁肅光文聖孝)’이다.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권씨(權氏)는 영가군의 세족인 증(贈) 의정부 좌의정 권전(權專)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젊은 나이에 현덕빈으로 승하하였다. 이후에 시호를 그대로 추숭하여 ‘현덕왕후(顯德王后)’라 하고, 혼전은 ‘경희전’, 능은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중종 연간(1513)에 소릉을 문종 능침의 좌측으로 이장하여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소릉이라는 옛 칭호를 버리고 문종 현릉과 합하여 칭하게 되었다. 문종과 현덕왕후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단종이다.
조선 제5대 국왕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2년(단종 즉위) 5월에 경복궁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산릉은 건원릉의 남동쪽에 조성하였고 능호는 현릉이라 하였다. 능지를 정할 때에는 수양대군, 왕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학랑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1441년(세종 23) 단종을 낳고 병이 위독해져 24세의 나이로 문종보다 먼저 승하하였는데,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다. 이후 단종의 복위 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그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산줄기 언덕에 천장하였다.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원이강릉을 조성한 후에는 정자각을 두 능의 중간 지점으로 이건하였다. 이 때 양릉 사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는데, 능역을 시작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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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는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계비이다. 본관은 양주이다. 아버지는 한원부원군 조창원(趙昌遠)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로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의 딸인 완산부부인이다. 인조와 같은 날인 11월 7일에 태어났다. 인조의 원비 인렬왕후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뜨자 1638년(인조 16)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어 효종의 잠저인 의동본궁에서 가례를 올렸다. 이때 인조는 44세였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대비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로 불렸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 올랐으며 그로부터 5년 후 손자인 현종마저 세상을 떠났다. 장렬왕후는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50년간 인조, 효종, 현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4명의 국왕을 모시고 3명의 국왕을 떠나보낸 경험을 하였다. 또한 스스로 나서서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은 없으나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의 국상 때 대비가 입어야 할 복상 문제가 불거지면서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1·2차 ‘예송논쟁’의 중심에 서야 했다. 숙종이 친히 쓴 「대왕대비행록기」에 의하면 왕후는 나라에 기근이 들면 평소 비축해두었던 자산을 털어 구휼에 힘쓰라고 보탰다고 하며, 어려운 백성을 생각하여 사치스런 생활을 배제하고 행실을 만사 조심하여 왕실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1688년 8월 26일 65세를 일기로 창경궁 내반원에서 세상을 떴다. 장렬왕후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1688)는 어람용으로 외규장각 의궤에 유일하게 전해오고 있으며, 이 책에 수록된 반차도는 섬세한 색채와 자연스런 필치가 돋보여 조선시대 반차도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힌다. 1688년 9월 초3일 ‘자의 공신 휘헌 강인 정숙 온혜 장렬 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貞肅溫惠莊烈王后)’로 시호를 정하였다. 전호는 ‘효사전(孝思殿)’이고 능호는 ‘휘릉(徽陵)’이다.
휘릉은 봉분이 한 기인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장렬왕후가 승하하자 산릉도감 관원들이 차출되었고 휘릉의 실질적인 공사는 12월 16일에 끝나게 된다. 석물 체제는 건원릉을 기준으로 삼아 진행하기로 했다. 또한 정자각의 칸 수는 기존 사례가 일정치 않아 의견을 조정한 끝에 6칸으로 건립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나 실제로는 정면 5칸으로 건립되었다. 휘릉은 건원릉의 상설제도를 따랐기 때문에 석물 규모가 소박하고 능침은 상계, 중계, 하계의 구분이 뚜렷하다. 상설제도는 조선초기의 것을 따랐으나 17세기 후반에 조영된 만큼 제작 양식은 당대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능상의 규모가 비좁아 곡장과 봉분, 각종 석물들의 간격이 좁고 곡장 앞에 배설된 석양, 석호는 볼록한 지형에 놓인 것이 특징이다. 봉분은 위로 약간 비스듬하게 조성되었으며, 왕후 능의 예에 따라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석양과 석호는 뿔, 얼굴, 다리, 꼬리 등 부분적으로 현실감을 살려 조각하고자 한 흔적이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과장이 심하고 석양의 경우 짧은 다리와 불룩한 배로 인해 둔중한 느낌을 준다. 반면, 망주석과 장명등은 어느 정도 현실감 있는 비례를 갖추었고 세부 문양 역시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망주석의 상대석과 하대석의 안상(眼象)에는 연꽃과 모란문양으로 정착되었고, ‘세호’라고 불리는 귀[耳] 역시 상상의 모습이긴 하나 구체적인 동물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장명등은 조선 초기 건원릉 이후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던 8각 장명등이 휘릉을 마지막으로 이후 변화된 양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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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健元陵)에 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이러하였다.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돌보아 치운(治運)을 열어 주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이적(異蹟)을 나타내어 그 부명(符命)을 밝게 하니, 하(夏)나라에서는 현규(玄圭)093) 를 내려 준 일이 있었고, 주(周)나라에서는 협복(協卜)094) 의 꿈이 있었다. 한(漢)나라 이후로 대대로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모두 천수(天授)에서 나온 것이요, 인모(人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공덕(功德)이 이미 높았으며, 부명(符命)도 또한 나타났었다.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것을 주면서 말하기를, ‘공(公)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리라.’ 하였으니, 하(夏)나라의 현규(玄圭)와 주(周)나라의 꿈과 동부(同符)하다고 하겠다. 또 어떤 이인(異人)이 대문에 와서 글을 바치며 이르기를, ‘지리산(智異山) 암석(巖石) 가운데서 얻은 것이다.’ 하였는데, 거기에는, ‘목자(木子)095) 가 다시 삼한(三韓)을 바로잡으리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시켜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더니,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서운관(書雲觀)의 옛 장서(藏書)인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란 것이 있는데, ‘건목득자(建木得子)096) ’라는 말이 있다. 조선(朝鮮)이 곧 진단(震檀)이라고 한 설(說)은 수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지금에 와서야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은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
신(臣)이 삼가 《선원록(璿源錄)》을 살펴보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망성(望姓)097) 이었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은 신라에 벼슬하여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세손(世孫) 이긍휴(李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다. 13세손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조(元朝)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된 뒤, 4세를 습작(襲爵)하였는데, 모두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었다. 원(元)나라의 정치가 쇠퇴하여지자,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서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겼다.
지정(至正) 신축년에 홍건적(紅巾賊)이 고려의 서울[王京]을 함락하니,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고, 군사를 보내어 싸워 이겨 수복(收復)하였는데,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첩서(捷書)를 올렸다. 이듬해 임인년에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를 쳐서 패주(敗走)시켰고, 또 이듬해 계묘년에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았다. 공민왕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 여러 번 벼슬이 올라 장상(將相)에 이르러 중외(中外)에 출입하였으나, 경사(經史)를 읽기를 좋아하여 부지런히 읽고 게으르지 않았으니, 세상을 구제하는 도량(度量)과 호생지덕(好生之德)은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훙(薨)하자 이성(異姓)098) 이 왕위에 오르니, 권간(權奸)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여 조정의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해적(海賊)이 나라 안 깊숙이 들어와 군현(郡縣)을 불지르고 약탈하였다.
홍무(洪武) 경신년에 우리 태조께서 운봉(雲峰)에서 싸워 이겨, 동남 지방이 편안하여졌다. 무진년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간(權奸)들을 주륙(誅戮)할 적에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살아난 자가 자못 많았다. 최영이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서 우군 도통사(左軍都統使)의 절월(節鉞)을 주어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렀을 때, 앞장서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정의(正義)에 의한 깃발을 돌이켰다. 군사가 강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섬을 휩쓸어 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최영을 잡아서 물리치고, 대신 명유(名儒) 이색(李穡)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간(權奸)들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광패(狂悖)한 자들이 중국과 흔극(釁隙)을 만들어, 위망(危亡)이 눈앞에 닥치고 화란(禍亂)이 헤아리기 어려웠었는데, 우리 태조의 돌이킨 힘이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위태하였을 것이다. 이색(李穡)이 말하기를, ‘지금 공의 의거(義擧)는 중국을 높인 것인데, 집정 대신(執政大臣)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불가(不可)합니다.’ 하고, 날을 받아 명나라 서울로 가려 하매, 태조가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099) 를 골라 이색과 함께 조현(朝見)하게 하였더니, 고황제(高皇帝)가 가상(嘉賞)히 여겨 돌려보냈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가 이성(異姓)100) 이 왕이 된 것을 문책하였으므로, 태조께서 여러 장상(將相)과 더불어 왕씨(王氏)의 종친(宗親)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선택하여 왕으로 세우고, 마음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용관(冗官)을 도태시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기뻐하였다. 공(功)이 높아지자 시기(猜忌)를 받아, 참소(讒訴)와 간계(奸計)가 번갈아드니, 정창군(定昌君)이 자못 의혹하였다. 태조(太祖)는 지위가 성만(盛滿)101) 하다고 하여 노퇴(老退)하기를 청하였으나, 사퇴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쪽 지방에 행차하였다가 병을 얻어 돌아왔는데, 이 틈을 타서 모해(謀害)하는 자들이 일을 더욱 급박하게 만들었다. 우리 전하(殿下)가 시기에 응해 변(變)을 제압하여, 모든 모해(謀害)가 와해되었다.
홍무(洪武) 임신년 가을 7월 16일에, 전하가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 52명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왕으로 추대(推戴)하니, 신료(臣僚)들과 부로(父老)들이 모의하지 아니 하고도 모두 뜻을 같이하였다. 태조(太祖)가 정변(政變)을 듣고 놀라 일어나서 두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 집의 섬돌을 내려오지 아니하고 한 집안을 나라로 화(化)하게 하였으니,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계도(啓導)하여 돕지 아니 하고서야 누가 능히 이같이 할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을 중국에 보내어 주문(奏聞)하니, 황제가 조(詔)하기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을 높였고,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이 사람마다 각각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이는 상제(上帝)의 명(命)이다.’ 하였다. 또 칙명(勅命)하기를, ‘나라 이름은 무엇으로 고쳐 호칭하려 하는가?’ 하였으므로, 즉시 예문 학사(藝文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주청(奏請)하니, 또 조(詔)하기를, ‘조선(朝鮮)이란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근본으로 하여 지었으면 좋겠다. 하늘을 몸받아 백성을 기르고, 길이 후사(後嗣)를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의 위엄(威嚴)과 명성(名聲)과 의열(義烈)이 천자(天子)에게까지 높이 들려서 황제(皇帝)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고명(誥命)을 청하자 문득 유음(兪音)을 받게 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을 지난 갑술년 여름에 나라를 모함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친아들을 보내어 입조(入朝)시키라고 명하였다. 태조께서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사리(事理)에 통달하여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命)에 응하게 하였다. 명나라에 이르러 부주(敷奏)한 것이 황제의 뜻에 맞으니,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그해 겨울 11월에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종묘(宗廟)를 세웠으며, 일찍이 4대(四代)를 추존(追尊)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으로, 배위(配位)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로,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정비(貞妃)로, 황조(皇祖)를 도왕(度王)으로, 배위 박씨(朴氏)를 경비(敬妃)로, 황고(皇考)를 환왕(桓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의비(懿妃)로 하였다. 예악(禮樂)을 닦고 제사하는 일을 삼가며, 장복(章服)102) 을 정하여 관등(官等)의 위의(威儀)를 구분하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며, 봉록(俸祿)을 후하게 하여 선비를 권장하고, 소송(訴訟)을 바르게 판결하며, 수령(守令)을 신중히 뽑았다. 피폐한 정치를 모두 개혁하고, 여러가지 업적이 빛나니, 해구(海寇)가 와서 복종하고, 온 나라 안이 평안하여졌다. 우리 태조(太祖)의 높고 넓은 성덕(盛德)은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지용(智勇)·총명(聰明)·신무(神武)·웅위(雄偉)의 임금이라고 하겠다.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이 표문(表文)의 글 때문에 중국 조정의 견책(譴責)을 받게 되자, 명(命)을 거역하려고 음모하여, 무인년 가을 8월에 우리 태조(太祖)가 편찮은 틈을 타서 어린 얼자(孽子)103) 를 끼고 자기의 뜻을 펴 보려고 하였는데, 우리 전하가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이들을 섬멸하여 없애고, 적장(嫡長)이라 하여 상왕(上王)104) 을 세자(世子)로 세우도록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은 까닭으로 상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상왕은 계사(繼嗣)가 없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것이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고 하여, 곧 세자로 책립(冊立)하였다. 경진년 가을 7월 기사일에 태조(太祖)에게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호(號)를 올렸다.
11월 계유일에 상왕도 또한 병 때문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詔)와 인(印)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封)하고, 이어서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면 구장(袞冕九章)을 하사하였으니,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우리 전하가 양궁(兩宮)105) 을 봉양(奉養)하는데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영락(永樂) 무자년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께서 승하하니, 춘추가 74세이고, 재위(在位)가 7년이며, 늙어서 정사를 보지 않으신 지 11년이다. 갑자기 활과 칼만 남기시니,106) 아아,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 애모(哀慕)함이 망극(罔極)하여 거상(居喪) 중에 예(禮)를 다하였다.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호(號)를 올리고, 이해 9월 초9일 갑인일에 성동(城東) 양주(楊州)의 경내 검암산(儉巖山)에 장사하고, 능(陵)을 건원릉(健元陵)이라 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황제가 놀라고 슬퍼하여 파조(罷朝)107) 하고, 곧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108) 의 예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왕은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며 선(善)을 좋아하였으니, 천성에서 나온 것이며, 천도(天道)를 공경하여 순종하고, 의(義)을 들어 충성을 다하여 공순히 사대(事大)하기를 힘쓰며, 한 지방의 백성을 보호하고 긍휼(矜恤)히 하니,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 충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겨 다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내렸다. 왕의 뛰어난 공덕(功德)은 비록 옛날 조선의 어진 임금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으리라.’ 하고,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諡號)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칙유(勅諭)하고 부의(賻儀)를 특별히 후하게 내렸다. 남달리 사랑하는 은전(恩典)을 극진히 하여 유감(有感)됨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 태조(太祖)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이어받드는 효성이 전후(前後)에 서로 이어서, 천심(天心)을 잘 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종(始終)의 즈음에 있어 하늘과 사람이 위 아래에서 돕는 것이 이처럼 지극함을 얻은 것이니, 아아, 거룩하도다!
수비(首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의 세가(世家)로서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 휘(諱) 한경(韓卿)의 딸인데, 먼저 훙(薨)하였다. 처음에 시호(諡號)를 절비(節妃)라고 하였다가, 뒤에 승인 순성 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의 호(號)를 더하였다. 6남 2녀를 낳았는데, 상왕(上王)이 둘째이고 전하가 다섯째이다. 맏이는 이방우(李芳雨) 진안군(鎭安君)인데 먼저 졸(卒)했고, 세째는 방의(芳毅) 익안 대군(益安大君)인데 역시 먼저 졸(卒)하였다. 그 다음 네째는 이방간(李芳幹) 회안 대군(懷安大君)이고, 여섯째는 이방연(李芳衍)인데 과거에 올랐다가 곧 죽으니 원윤(元尹)을 증직(贈職)하였다. 장녀(長女)는 경신 궁주(慶愼宮主)인데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다. 같은 이씨가 아니다. 다음은 경선 궁주(慶善宮主)인데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차비(次妃)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처음에 현비(顯妃)를 봉하였으나 먼저 훙(薨)하자, 시호(諡號)를 신덕 왕후(神德王后)라고 하였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長男)은 이방번(李芳蕃)이니 공순군(恭順君)을 증직하였고, 다음은 이방석(李芳碩)이니 소도군(昭悼君)을 증직하였다. 딸은 경순 궁주(慶順宮主)이니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모두 먼저 졸(卒)하였다. 상왕(上王)의 비(妃)는 김씨이니, 지금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였으며, 증 문하 시중(門下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로서 자식이 없다.
우리 중궁(中宮)은 정비(靜妃) 민씨(閔氏)인데,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시(諡) 문도공(文度公) 민제(閔霽)의 딸이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세자(世子) 이제(李禔)이고, 다음은 이호(李祜)108) 효령 대군(孝寧大君), 다음은 이도(李祹)109) 충녕 대군(忠寧大君)이며, 다음은 어리다. 장녀는 정순 궁주(貞順宮主)이니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 궁주(慶貞宮主)이니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경안 궁주(慶安宮主)이,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복근(福根) 봉녕군(奉寧君), 다음은 덕근(德根) 원윤(元尹)이다. 익안 대군(益安大君)은 증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석근(石根) 익평군(益平君)이다. 회안 대군(懷安大君)은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맹중(孟衆) 의령군(義寧君)이다.
신이 역대(歷代)의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을 보건대, 덕업(德業)의 성대함과 부명(符命)의 신기함이 간책(簡冊)에 밝게 나타나서 그 빛이 끝없이 흐르는데, 우리 조선이 일어남에 거룩한 덕과 신령한 부명(符命)이 옛날보다 빛남이 있다. 이는 마땅히 이미 그 위(位)를 얻고 또 수(壽)를 얻었으니, 넓은 기업(基業)을 더 높이고 큰 복조(福祚)를 이어받아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리다. 신 권근(權近)이 외람되게 비(碑)에 새길 글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덕(盛德)을 드러내서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지 않으리오! 그러나 신은 글재주가 비졸(鄙拙)하여 성(盛)하고 아름다운 덕(德)을 드러내서 밝은 뜻을 남김없이 칭송하기에는 부족하와, 삼가 공훈(功勳)과 덕업(德業)이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것만을 찬술(撰述)하고, 감히 손으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드리노라. 그 글[詞]은 이러하다.
‘하늘이 이 백성 낳으시고 사목(司牧)110) 을 세워, 기르고 다스리실 제 유덕(有德)한 이 돌보시네. 하늘이 순순(諄諄)히 말하지 않건마는 명(命)은 혁혁(赫赫)하게 나타나 있나니, 우(禹)임금은 현규(玄圭)를 내려 주고, 주(周)나라의 꿈은 협복(協卜)일세. 우리 조선 처음 왕업(王業)을 여실 제,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으니, 부록(符籙)이 먼저 정해지고, 천명(天命)이 아주 분명하였네, 고려 운수 이미 다하매, 임금은 어둡고 재상은 혹독하여, 농사철에 군사 일으켜 중국(中國)과 흔극(釁隙)을 일으켰네, 우리 군사 의(義)의 깃발 돌이키니, 죄인(罪人)들 복죄(伏罪)하여 벌받았네. 충성이 위에 들려 황제 마음 기뻐하였네. 천운(天運)이 돌아오고 여정(輿情)이 절박(切迫)하여, 대업(大業)은 이미 이룩되었건만, 저자[市肆]는 바뀌지 아니하였네. 고황제(高皇帝) 조(詔)하기를, 「그대 나라를 세웠으매, 백성들 병화(兵禍) 없고 하늘이 준 기쁨 즐기네.」 하였고, 이어서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회복하여 주었네. 땅을 골라 도읍(都邑)을 정하니 한강의 북쪽이라. 범이 웅크린 듯 용이 도사린 듯, 왕기(王氣)가 쌓인 바라. 궁실(宮室)은 높디 높고 종묘(宗廟)는 의젓하네. 임금 어진 마음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고, 정사는 아름답고 생각은 화순하여, 온갖 제도 갖춰지고 모든 교화(敎化) 흡족하네. 정사에 지치시어 적사(嫡嗣)에게 선위(禪位)하니, 공 있는 이에게 양보하셨네. 밝고 밝은 우리 전하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화란(禍亂)을 두 번이나 평정하니, 그 경사 지극히 돈독하네.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니, 대명(大命)을 사양하기 어려워 신기(神器)111) 를 부탁받았네. 양궁(兩宮)을 공경히 받드니, 경건하고 공순함이 더욱 지극하도다. 효제(孝弟)가 신(神)에 통하여, 상제(上帝)의 돌보심이 더욱 우악(優渥)하네. 태조의 상(喪)을 만나 근심에 잠겨, 애모(哀慕)의 슬픈 정 몸부림치네. 황제가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곡(弔哭)하고 태뢰(太牢)로 제사하며, 칙명(勅命)하여 후부(厚賻)하고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주어 포장(褒奬)하니, 휼전(恤典)은 온전히 갖추어졌네. 하늘의 도우심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어, 큰 복이 길이 이어지고, 자손이 번창하여, 종사(宗祀)가 유구(攸久)하여 하늘처럼 무궁하리라.’"
이 글은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다. 정승(政丞) 성석린(成石璘)이 쓰고,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구(鄭矩)가 전액(篆額)을 쓰니, 성석린에게는 안마(鞍馬)를, 정구에게는 말 1필을 하사하였다.
(立健元陵碑。 文曰:
天眷有德, 以開治運, 必先現異, 彰其符命。 夏有玄圭之錫, 周有協卜之夢, 由漢以降, 代各有之。 皆由天授, 非出人謀。 惟我太祖大王之在龍淵也, 勳德旣隆, 符命亦著。 夢有神人執金尺, 自天降而授之曰: "公宜持此正國。" 夏圭周夢, 可同符矣。 又有異人來門獻書云: "得之智異山巖石之中, 有木子更正三韓之語。" 使人出迎則已去矣。 書雲觀舊藏秘記, 有九變震檀之圖, 建木得子。 朝鮮卽震檀之說, 出自數千載之前, 由今乃驗, 天之眷佑有德, 信有徵哉! 臣謹按璿源李氏, 全州望姓。 司空諱翰仕新羅, 娶宗姓之女。 六世而至兢休, 始仕高麗, (十三)〔十八〕 世而至皇高祖穆王, 入仕元朝而長千夫, 四世襲爵, 咸能濟美。 元政旣衰, 皇考桓王還仕高麗。 恭愍王 至正辛丑, 紅寇陷王京, 恭愍南遷, 遣使克復。 我太祖先登獻捷。 明年壬寅, 擊走胡人 納哈出, 又明年癸卯, 却逐僞王塔〈思〉帖木〈兒〉, 恭愍恃倚益重, 累官至將相, 出入中外。 樂觀經史, 亹亹無倦, 濟時之量、好生之德, 出於至誠。 恭愍薨, 異姓竊位; 權奸擅國, 濁亂朝政; 海寇深入, 焚掠郡縣。 洪武庚申, 我太祖戰捷雲峯, 東南以安。 戊辰, 侍中崔瑩誅戮權奸, 過於慘酷, 賴我太祖, 全活頗多。 瑩以太祖爲侍中, 仍授右軍都統節鉞, 逼遣攻遼。 師次威化島, 倡率諸將, 仗義旋旆, 師旣登岸, 大水沒島, 人皆神之。 執退瑩, 代以名儒李穡爲左侍中。 方是時也, 權奸濁亂, 狂悖構隙, 危亡岌岌, 禍亂莫測, 非我太祖轉移之力, 一國殆矣。 穡曰: "今公擧義以尊中國, 然非執政親朝, 則不可", 剋日如京, 太祖爲擇諸子, 以今我主上殿下, 與穡偕朝, 高皇帝嘉賞而遣。 己巳秋, 帝責異姓爲王, 太祖與諸將相, 選立王氏宗親定昌君 瑤, 盡心輔政, 革私田汰冗官, 群情胥悅。 功高見忌, 讒慝交構, 定昌頗惑焉。 太祖以盛滿, 請老而不得謝。 會因西行, 遘疾而還, 謀者益急, 我殿下應機制變, 群謀瓦解。 洪武壬申秋七月十六日, 殿下與大臣裵克廉、趙浚等五十二人, 倡義推戴, 臣僚父老, 不謀僉同。 太祖聞變驚起, 牢讓再三, 勉登王位。 不下堂陛而化邦國, 非天啓佑有德, 疇克如玆! 卽遣知中樞院事趙胖奏聞, 帝詔曰: "三韓之民, 旣尊李氏, 民無兵禍, 人各樂天之樂, 乃帝命也。" 繼又有勑: "國更何號?" 卽遣藝文學士韓尙質奏請, 又詔曰: "維朝鮮之稱美,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 繇我太祖威聲義烈, 升聞于上, 簡在帝心, 故當請命, 輒蒙兪音, 豈偶然哉! 越三年甲戌夏, 有構國家者, 帝命遣親男入朝。 太祖以我殿下通經達理, 賢於諸子, 卽遣應命。 旣至, 敷奏稱旨, 優禮賜還。 其冬十一月, 定都于漢陽, 營宮室、建宗廟。 嘗已追尊四代, 皇高祖爲穆王, 配李氏爲孝妃; 皇曾祖爲翼王, 配崔氏爲貞妃; 皇祖爲度王, 配朴氏爲敬妃; 皇考爲桓王, 配崔氏爲懿妃。 修禮樂而毖祀事, 定章服而辨等威。 興學以育材, 重祿以勸士。 辨析詞訟, 愼簡守令。 弊政悉革, 庶績惟熙。 海寇來服, 四境按堵。 我太祖巍蕩盛德, 眞所謂天錫智勇聰明神武雄偉之主也。 奸臣鄭道傳, 以表辭獲譴帝庭, 陰謀拒命。 戊寅秋八月, 乘我太祖不豫之隙, 欲挾幼孼, 以肆己志。 我殿下炳幾殲除, 以嫡以長, 請建上王爲世子。 九月丁丑, 太祖以疾未瘳, 禪于上王。 上王未有繼嗣, 且謂開國定社, 咸我殿下之績, 乃冊爲世子。 庚辰秋七月己巳, 獻太祖以啓運神武太上王之號。 冬十有一月癸酉, 上王亦以疾禪位于我殿下, 遣使請命。 永樂元年夏四月, 帝遣都指揮使高得等, 奉詔印來封我殿下爲國王, 繼遣翰林待詔王延齡等, 來賜殿下袞冕九章, 秩視親王。 我殿下奉養兩宮, 誠敬備至。 永樂戊子五月二十四日壬申, 太祖晏駕, 春秋七十四歲。 在王位七年, 老不聽政十有一年, 弓劍忽遺, 嗚呼痛哉! 我殿下哀慕罔極, 諒闇盡禮。 奉冊寶上太祖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之號。 以是年九月初九日甲寅, 葬于城東楊州治之儉巖山, 陵曰健元。 及訃聞, 皇帝震悼罷朝, 卽遣禮部郞中林觀等, 賜祭以太牢。 其文略曰: "惟王明達好善, 出於天性, 敬順天道, 效義攄忠, 恭謹事大, 保恤一方之民。 我皇考深嘉忠誠, 賜復國號曰朝鮮。 王功德之著, 雖古朝鮮之賢王, 無以過也。" 又賜誥命, 諡曰康獻。 又勑殿下賜賻特厚, 寵異之典, 備極無憾。 蓋我太祖畏天之誠, 殿下繼志之孝, 前後相承, 克享天心, 故於始終之際, 大獲天人上下之助如此其至, 嗚呼盛哉! 首妃韓氏, 安邊世家, 贈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諱卿之女, 先薨。 初諡節妃, 後加諡承仁順聖 神懿王后。 誕六男二女, 上王居二, 我殿下居五。 長曰芳雨, 鎭安君, 先卒。 次三芳毅, 益安大君, 亦先卒。 次四芳幹, 懷安大君。 次六芳衍, 登科不祿, 贈元尹。 女長慶愼宮主, 下嫁上黨君 李佇, 非一李也。 次慶善宮主, 下嫁靑原君 沈淙。 次妃康氏, 判三司事允成之女, 初封顯妃, 先薨, 諡神德王后。 誕二男一女, 男長芳蕃, 贈恭順君, 次芳碩, 贈昭悼君。 女慶順宮主, 下嫁興安君 李濟, 亦非一李也。 皆先卒。 上王妃金氏, 今封王大妃, 贈門下侍中天瑞之女, 無嗣。 我中宮靜妃 閔氏, 驪興府院君諡文度公諱霽之女。 誕四男四女, 長男世子禔, 次祜 孝寧大君, 次 【今上諱。】 忠寧大君, 次幼。 女長貞順宮主, 下嫁淸平君 李伯剛, 亦非一李。 次慶貞宮主, 下嫁平壤君 趙大臨; 次慶安宮主, 下嫁吉川君 權跬; 次幼。 鎭安娶贊成事池奫之女, 生二男, 長曰福根 奉寧君, 次曰德根元尹。 益安娶贈門下贊成事崔仁㺶之女, 生男曰石根, 益平君。 懷安娶門下贊成事閔璿之女, 生男曰孟衆, 義寧君。 臣觀歷代受命之君, 德業之盛, 符命之神, 輝映簡冊, 流光罔極。 今我朝鮮之誕興也, 盛德貞符, 于古有光, 是宜旣得其位, 又得其壽, 峙洪基流景祚, 與天地而久長矣。 臣近濫承勒碑之命, 敢不竭精鋪張盛德, 以垂耿光! 然臣筆力鄙拙, 不足以發揚盛美, 稱塞明旨, 謹撰勳德之在人耳目者, 敢拜手稽首而獻銘。 其詞曰: 天生斯民, 立以司牧。 迺長迺治, 迺眷有德。 非天諄諄, 有命赫赫。 禹錫玄圭, 周夢協卜。 惟我朝鮮, 肇基王迹。 夢有神人, 授以金尺。 符籙前定, 天命昭晣。 麗運旣終, 君昏相酷。 農月興師, 大邦構隙。 我師義旋, 罪人斯得。 忠誠上聞, 帝心載懌。 曆數有歸, 輿情斯迫。 大業旣成, 市肆不易。 高皇曰咨, 惟爾有國。 民無兵禍, 樂天之樂。 繼賜國號, 朝鮮是復。 相地定都, 于漢之北。 虎踞龍盤, 王氣攸積。 宮室崇崇, 宗廟翼翼。 仁深好生, 治蔚思輯。 百度俱修, 萬化斯洽。 乃倦于勤, 傳付聖嫡。 乃讓于功, 惟世惟及。 明明我后, 有幾必燭。 禍亂再平, 其慶克篤。 開國定社, 咸我之績。 大命難辭, 神器有托。 祗奉兩宮, 虔恭愈恪。 孝弟通神, 帝眷尤渥。 遭喪惸惸, 哀慕踴擗。 帝聞震悼, 遣使弔哭。 太牢有祀, 厚賻有勑。 美諡褒嘉, 恤典備飭。 自天佑之, 終始不忒。 景祚緜緜, 子孫千億。 宗祀攸長, 與天罔極。
吉昌君 權近所製也。 政丞成石璘書, 前判漢城府事鄭矩篆額。 賜石璘鞍馬, 矩馬一匹。)
태종실록17권, 태종 9년(1409) 윤4월 13일 을묘 6번째기사
건원릉에 비석을 세우다. 비문은 권근의 찬
기보(祁保) 등이 회암사(檜巖寺)로부터 오다가 역로에서 건원릉(健元陵)을 구경하고 돌아오니, 세자가 동교(東郊)에 나아가 영접하였다. 기보 등이 능침(陵寢)의 산세(山勢)를 보고 탄미(歎美)하였다.
"어찌 이와 같은 천작(天作)의 땅이 있는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일 것이다.“
(祁保等自檜巖寺, 歷觀健元陵而還, 世子出迎于東郊。 保等見陵寢山勢, 歎曰: "安有如此天作之區乎? 必是造山也。")
태종실록16권, 태종 8년(1408) 10월 6일 경진 2번째기사
기보 등이 회암사에서 돌아오면서 건원릉을 구경하고 능침의 산세를 탄미하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기보)이 건원릉을 방문하고 산세가 도저히 자연적일 수 없다고 감탄했던 천하명당 동구릉, 조선왕조 500년이 이로 시작됐다. 이러한 건원릉의 가장 큰 특징이 능 봉분 위에 잔디인 때를 입히지 않고 함흥의 억새, 즉 청완을 입힌 것이다. 보통 왕릉을 관람할 때 능침을 개방하지 않아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태조의 릉인 건원릉의 봉분은 억새가 피어있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동경연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건원릉(健元陵) 사초(莎草)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본릉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까지 뻗어 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북도(北道)의 청완(靑薍)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 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보았는데, 모두들 나무 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사초가 만약 부족하면 다른 사초를 쓰더라도 무방하다고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 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
하였다.
(乙亥/上晝講《書傳》于資政殿。 同經筵洪瑞鳳曰: "健元陵莎草, 無修改之時, 而今見本陵所報, 則陵前雜木着根, 漸近隨生。 太祖遺敎以北道靑薍爲莎草, 故至今莎草甚茂, 異於他陵, 今聞木根如此。 昨與大臣相議, 則皆以爲: ‘木根則不可不去, 而莎草若不足, 則雖用他莎草無妨’ 云。" 上曰: "寒食拔去蓬艾時, 不拔木根, 旣大之後, 乃欲盡改陵上, 甚不可也。 今若掘其土, 而斫其根, 還塡其土, 則其根必自死。 自古此陵不改莎草者, 其意有在, 不可改也。“)
인조실록20권, 인조 7년(1629) 3월 19일 을해 1번째기사 명
홍서봉이 건원릉의 사초에 대해 아뢰다
인조의 물음에 대신 홍서봉의 이야기를 통해 태조 건원릉의 봉분에 심어진 것이 억새, 함흥의 억새임이 확인된다. 이러한 건원릉의 능침에 올라 억새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국가유산청 동구릉관리소에서는 매년 한식날 '청완 예초' 행사를 진행한다. 건원릉 고유제도 전주이씨 종약원에서 진행하는 전통 행사다.
선정릉
조선 제9대 국왕인 성종(成宗, 1457~1494)은 조부가 세조(世祖, 1455~1468)이며, 부친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사후에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 모친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이다. 1469년 예종의 뒤를 이어 13세에 경복궁에서 즉위하여 25년간 재위하였다. 휘는 ‘혈’이다. 시호는 ‘성종 강정 인문 헌무 흠성 공효 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이후 대한제국기 동안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인 ‘강정(康靖)’을 폐기하고 ‘성종 인문 헌무 흠성 공효 대왕(成宗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으로 고쳤다. 1461년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74년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아들이 없이 죽자 1476년 판봉상시사 윤기견(尹起畎)의 딸 숙의 윤씨(淑儀尹氏: 연산군의 생모)를 왕비로 삼았으나,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1479년 폐위하였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집성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1485년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조정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의 자손을 관리 등용에 제한하는 법을 공포했으며, 1487년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후손을 녹용하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하는 등 법률과 국방, 학문양성 등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1494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훙하였다. 이듬해 1495년 시호와 묘호를 의논하여 시호는 ‘인문 헌무 흠성 공효(仁文憲武欽聖恭孝)’라 하고 묘호는 ‘성(成)’이라 하며, 능호는 ‘선(宣)’, 전호는 ‘영사(永思)’라 정하였다.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킨 군주였으며, 묘호가 후일 성종으로 정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조선시대에는 광주부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행정구역상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는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다. 성은 윤씨, 본관은 파평이며 중종의 모친이다. 부친은 신창현감을 지낸 윤호(尹壕)이다. 1462년 6월 25일에 탄생하여 1480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실록』에 의하면 정현왕후가 생전에 자신의 인생을 언문으로 기록한 것을 중종이 요약하여 예조에 내렸다고 한다. 이 글에 의하면 정현왕후의 이름을 부친 윤호가 신창현감으로 있을 때 그 고을 관아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창(昌)’자를 가지고 ‘창년(昌年)’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1473년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에 봉해졌고, 1479년 성종의 두 번째 부인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1497년에 ‘자순(慈順)’, 1505년에 ‘화혜(和惠)’라 존호되었다. 불교에 독실하여 성종 승하 후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찰이었던 견성사를 선릉의 원찰로 삼았다. 1530년 8월 22일 경복궁 동궁에서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8월 27일 중종이 대신들과 의논하여 혼전의 이름을 ‘효경(孝敬)’, 시호를 ‘정현(貞顯)’이라 정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 휘호를 ‘소의 흠숙(昭懿欽淑)’이라 올렸고, 마침내 10월 29일 선릉 왼쪽의 축좌(丑坐) 미향(未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당시에는 별도로 능의 이름을 짓지 않고 ‘새 선릉[新宣陵]’이라고 하였다.
선릉은 왕과 왕후 능이 하나의 정자각 뒤로 각기 다른 언덕에 별도의 봉분을 배치한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되었다. 동원이강릉은 주로 조선 전기에 많이 조성되었다. 1494년 12월 24일 성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듬해 4월 6일에 선릉에서 장례가 거행되었다. 한 때 풍수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천장해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종의 국장이 있은 후 36년 뒤인 1530년 정현왕후가 승하하자 보름 만에 장지를 정하였고 상사는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와 성종 비 공혜왕후의 부묘의 예에 따라 진행하였다. 당시에는 능 이름을 새로 정하지 않고 성종의 능과 구분하기 위해 ‘새 선릉(新宣陵)’으로 불렀고 이후로도 정현왕후의 능은 별도의 능호를 정하지 않고 성종 능과 더불어 선릉으로 통칭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릉은 왜적들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1593년 4월 13일 왜적이 선릉을 파헤쳐 재궁에 이르렀다는 경기도 관찰사 성영의 보고가 있었고 4월 24일 광중은 이미 비어서 무참히 도굴 당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에 곧바로 개장도감(改葬都監)을 설치하여 선릉을 수리하였다. 성종의 능이 조성되었을 당시에는 그 주변에 있던 견성사가 선릉의 원찰로 이용되었다. 연산군은 정현왕후의 뜻에 따라 1498년 견성사를 중창하고 이어 선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 사찰명을 봉은사로 바꾸고 다시 창건하기에 이르렀다. 명종대 이후 봉은사는 선릉과 정릉 두 왕릉을 보호하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조포사로서 역할을 하였다. 숙종 재위 기간에 선릉의 석물과 정자각을 보수하였는데 현재 전해져 오는 선릉 정자각 중건상량문은 이 때의 낙성을 기념하여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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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中宗, 1488~1544)은 조선 제11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이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이다. 원비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이다. 제1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며,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 9월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킨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연산군 때의 여러 가지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홍문관을 강화하고 유교적 도덕규범인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유능한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의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존 세력의 반발을 가져와 조광조 일파를 숙청한 기묘사화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사회면에서는 유교주의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감에 따라 『소학』,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1514년),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1533년) 등을 간행해 국민 교화에 힘썼다. 1541년에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을 풍기군수에 제수하였고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은문을 세우는 등 유교주의적 도덕윤리를 정착시켜 나갔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해 많은 구리활자를 주조하여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에 긴요하게 요청되던 각종 서책의 편찬이 활발해져 『사성통해(四聲通解)』, 『속동문선(續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간행되었다. 국정운영을 위한 기틀 마련에도 힘써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속록(大典續錄)』 등을 편찬하였고 1540년에는 역대 실록을 등사해 사고에 비치하였다. 또한 1542년 근정청을 설치해 『대전속록』 이후 새로 반포된 법령을 모아 1544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완성, 반포해 법률제도의 확립에 공헌하였다. 이처럼 중중연간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점으로, 신진사림과 훈구파의 대립이라는 정치적인 모순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제도가 완비되고 조선 성리학의 기틀이 정착되어 가던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1544년 11월 15일 세자인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재위 39년 만에 승하하였다. 1545년 1월 5일 시호는 ‘공희 휘문 소무 흠인 성효 대왕(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으로, 능호를 ‘희(禧)’로, 전호는 ‘영경(永慶)’으로 정하였다. 묘호는 본래 ‘중종(中宗)’으로 정하였으나, 1월 6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을 일으킨 공을 인정하여 다시 ‘중조(中祖)’로 고칠 것을 논의하였고 결국 성종을 계승했다는 의미에 비중을 두어 고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본래 제1계비인 장경왕후 희릉 오른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나, 1562년 제2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천릉되었다.
정릉은 선릉과 가까운 능역에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중종은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3명의 비를 두었지만,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누구하고도 합장릉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종이 승하했을 당시인 1545년 2월 3일에는 경기도 고양에 있는 장경왕후의 희릉 오른쪽에 묻혔고 능호도 장경왕후 윤씨의 능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는 중종이 생전에 희릉 옆에 묻히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장경왕후의 소생인 인종이 보위를 이어받았으므로 중종을 희릉 곁에 모시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후 1545년 윤1월 22일 능호를 정릉으로 바꾸고 15년이 지난 1562년 9월 4일 지금의 자리로 천장하게 되었다. 천릉하기 전 산릉도감에서 명종에게 능호는 정릉이라는 호칭은 그대로 하되, 왕후의 능은 다시 희릉(禧陵)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아뢰자, 그대로 시행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릉 또한 선릉과 마찬가지로 왜적의 침입을 피할 수 없었다. 정릉이 선릉과 인접해 있었으므로 접근하기가 쉬워 함께 도굴되었던 것이다.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하자 1593년 8월 15일 중종의 의복만 묻고 다시 능을 조성하였다. 정릉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 가는 형식을 잘 보여주는 능이다. 특히 문무석인으로 대표되는 석인은 아담하면서도 평면적인 선을 구사했던 15세기의 석물조각과 달리 규모가 거의 3미터에 가깝게 육중해졌을 뿐 아니라 조각선이 굵고 신체의 부분 부분에 과장된 표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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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본관은 여산, 성은 송(宋)씨, 부친은 판돈녕부사 송현수(宋玹壽)이다. 단종의 비로 1454년(단종 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21년(중종 16) 6월 4일에 승하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조의 찬역으로 단종이 왕위를 내놓고 상왕이 되자, 왕비도 ‘의덕 왕대비(懿德王大妃)’로 봉해졌다. 이후 1457년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왕비도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되면서, 정순왕후로 추복되었다. 시호를 ‘정순(定順)’, 휘호는 ‘단량 제경(端良齊敬)’, 능호는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정순왕후는 살아있을 때에도 성내에 거처하지 않고, 동교에 거처하면서 노릉(추복되기 전 단종의 능)을 멀리서 바라보기를 원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동문 밖에 집을 지어주고 영빈 정동이라 불렀다. 그러나 따로 초가집 두어 칸을 짓고서 거처하며 소복 차림으로 소식하며 평생을 마쳤다고 한다.
사릉(思陵)은 단릉 형식이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정순왕후도 부인으로 강봉된 상태에서 승하하여 능이 아닌 묘로 조성되었다. 묘는 양주 건천면에 위치한 단종의 생질인 해평부원군 정미수의 선산에 자리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장릉과 함께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하여 단출하다. 처음에 단종은 영월에 장사지냈고, 왕후는 양주에 장사지냈다. 이때 그전대로 증수하고, 인산의 제도에 따랐다. 이듬해 3월 초1일에 대왕의 능을 봉하고, 2월 20일에 왕후의 능을 봉하였다. 사릉의 홍살문의 축과 정자각, 봉분의 축이 일치하는 직선형 배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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