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5일 정동을 갔다.
서울 정동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중심지로 황궁 덕수궁이 위치한 곳이다. 이곳 주변으로 당시 서구열강의 공사관이 즐비하였다. 특히 1896년 아관파천이 단행되었던 러시아 공사관 터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정동 나들이는 경성재판소(1928)로 쓰였고, 이후 대한민국 대법원으로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관람을 위해 찾은 길이다. 이곳이 예전 법원이었기 때문에 대한문(덕수궁 정문) 서측 골목 담장으로 이어진 길은 연인이 헤어진다는 속설이 만들어진 ‘덕수궁 돌담길’로 이 길이 가정법원으로 이어졌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동 일대는 새로운 중심지로서 다양한 역사가 깃든 옛터가 존재한다. 그중 가장 이른 시기의 이야기는 바로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환궁하여 불탄 궁궐을 대신하여 월산대군의 사저를 임시 거처로 사용한 행궁, 즉 덕수궁에서 시작한다. 1611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경운궁이 되고 이후 서모 인목대비가 폐비되어 유폐된 서궁이다. 이런 곳이 대한제국 시절 대대적으로 중수되고 이어 순종이 아버지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면서 덕수라는 존호를 올려 덕수궁이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일컬어 양난이라고 한다. 양난 이후 조선 사회는 급격한 정치적, 사회적 위기에 빠진다. 따라서 조선의 위정자들은 위급한 나라를 단속하고 다시금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예학’, 즉 예학을 세우고 예학 정치에 따른 첨예한 붕당 간 대립을 하였던 예송논쟁이다.
예송논쟁이 조선 조야에 화두가 되기 전 예학을 통한 조선의 법통을 강화한 대표적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사계 김장생과 그 아들 신독재 김집이다. 광산 김씨인 이들은 조선 후기 대표적 명문가로 발돋움하였다. 이들이 충청남도 연산으로 낙향하여 양성당(돈암서원)을 세워 기호학파를 일궜다. 이들 지역의 대가를 지칭할 때 송시열이 지은 회덕향안 서문을 통해서 삼대족으로 김장생, 김집의 연산김씨(광산), 윤선거, 윤증의 노성윤씨(파평), 송준길을 포함한 자신의 회덕송씨(은진)를 들었다. 그래선지 지금도 지역 사람들은 예학의 대가 답게 제례준칙을 잘 세운 김장생 집안이 있는 연산에 가서는 제사 자랑 말고, 회덕에 가면 집자랑 말며, 노성에서는 묘자랑 말라는 이야기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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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향하기 전 사계가 살았고 아들 김집이 난 곳이 이곳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즉 덕수궁 돌담길 옆이다.
돌담길을 올라 끝나는 곳에 정동제일교회가 바라다보이며 로타리가 나오는데 그 서측 오르막이 예전 법원으로 쓰인 서울시립미술관이다. 외관은 법원의 성격상 고풍스런 분위기의 돌집이다. 직선의 느낌이 강한데 평면도상 날‘일(日)’자의 건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철거된 조선총독부와 같다.
미술관 전시는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 화가로 그만큼 작품의 선호가 큰 천경자 화백의 전시가 한창으로 그와 그 제자들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입장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의 전시이나 무료이다.
물든 단풍 사이로 언덕을 내려와 로타리에 이르면 ‘광화문 연가’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이영훈을 기리는 것이 있고 그 옆으로 고풍스런 빨간벽돌의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이곳은 숱한 개신교의 역사와 이야기가 전한다. 그중 아펜젤러 선교사와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민족대표 34인) 박사의 이야기가 특별하다. 1919년 4월 경기도 남부 수원, 지금의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 향남면에서 대규모 3.1운동이 일어나고 일제의 극악한 탄압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는다. 때문에 이곳의 폐해를 세계에 알린 곳이 정동교회다. 특히 감리교 신자의 연락을 받은 스코필드 박사는 우정읍과 장안면 3.1운동인 ‘삼괴의 4.3항쟁’의 피해조사를 위해 수원역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감리교회인 수촌교회(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소재)를 향하던 중 제암리 교회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것을 확인하는데, 바로 4.15 제암리 학살사건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경악하고 직접 조사한 자료를 모아 세계 만방에 알린 곳이 바로 이곳 정동제일교회였다.
발길을 돌려 조금 위로 옮기면 지금은 미대사관저로 구분되어 있지만 원래는 덕수궁 내의 중요 전각으로 고종이 1907년 퇴위할 때까지 머물렀던 중명전이 있다. 망국의 조선, 대한제국의 종막을 고했던 현장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다.
특히 이곳이 고종 거처로 쓰인 이유는 바로 정동 일대 가장 높은 언덕에 러시아공사관이 있었고 아관파천(1896)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듬해 고종은 아예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경운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는데, 망국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현재 언덕 위 대단한 규모의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대부분 없어지고 종탑 같은 흰색 망루만 서있다. 아관파천 후 열강의 이권 침탈은 가속화하였다. 역설적으로 이때 조선은 자주와 독립을 표방하고 중립국을 목표로 대한제국이 선포되는 것이다.
중명전을 나와 이르는 골목 맞은편은 이화여자고등학교로 이화학당의 자리이다. 원래 장소에서 옮겨진 정문인 솟을대문과 아울러 궁궐, 관아, 향교와 같은 위상과 격이 높은 건물 앞에 있는 ‘하마비’(대소인원개하마)가 있다. 놀라운 모습이다. 차별의 명사인 여성, 그 여성을 교육하는 학당의 정문이 솟을대문이고 더욱이 그 앞에 하마비가 있다는 것은 파격 그 자체이다. 면밀하게 살피지는 않았지만 단순 여성교육기관에 방점을 찍은 것보다는 서구열강, 그들을 대변하는 선교사가 세운 시설로 선교사를 우대한 측면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종과 중전 민씨 등 집권세력은 서구열강의 힘을 빌어 국권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해 이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서구 선교사에 대한 신뢰와 우대가 대단하였다.(양대인자세[洋大人藉勢]) 이러한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은 하나 그래도 이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였던 조선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은 사실이다.
다시 로타리로 나와서 우측 골목으로 미대사관저와 맞은편으로 덕수궁 서양식 궁궐인 존덕정이 바라다보인다.
여기는 이영훈 작곡가의 추억이 깃든 곳이다. 우연케도 신도림 디큐브시티점에서 뮤지컬 ‘광화문연가’를 봤다. 여기에서 시작된 그이의 이야기로 그가 작곡한 곡들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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