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병인박해와 수원 북수동 성당 등

달이선생 2024. 10. 16. 16:41

2024년 10월 13일 수원 종로사거리 일대를 찾았다.

보통 이곳은 화성행궁을 복원하여 화성행궁광장과 북편 신세대들에게 소위 인싸인 인기 있는 행궁동을 찾는 것인데, 모처럼 종루 인근 천주교 북수동 성당과 감리교 종로교회와 팔달산 아래 신작로로 명명된 향교길을 걸으면서 수원지역에 있었던 종교적 자취를 생각한다. 2000년대 이전 수원역에 애경백화점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남문으로 불리며 수원은 물론, 용인, 화성, 오산, 안산 등 주변 지역에서 모이는 패션의 일번지이자 문화와 유흥의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침체기를 거쳐 화성행궁 복원과 더불어 행궁동 문화의 거리로 되살아난 수원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일찍이 정조가 수원에 신읍치를 현 융건릉이 위치한 화산 아래 구읍치를 지금의 화성행궁으로 옮기면서 유교의 제사와 교육을 하던 향교와 무속의 중심인 성황사가 팔달산 아래로 옮겨졌다. 반면에 신라 때 세워진 갈양사를 재건하여 용주사로 이름하였다. 이웃한 화성시 황계동에는 성황산이 있는데, 주민들은 이 산을 용남굴로 부르며 신성시한 곳으로 이곳의 많은 무속인들이 신읍치를 계기로 팔달산으로 대거 옮겨갔다. 화성시 황계동의 뒷산은 수원의 진산으로 1읍치 1성황사를 확정할 때 수원의 성황사가 되어 고려로부터 정조 시기까지 무속의 중심된 곳이었다. 2000년대 초까지만해도 팔달산과 그 아래 행궁동 등 이 일대에 무속 만자기가 펄럭이며 많은 무속인과 점집이 즐비했다.

그리고 이른 시기의 중요한 종교 유적은 불교다. 과거 수원부 전체로 볼 때, 가장 중심된 사찰은 융건릉의 원찰인 조계종(2교구 본사)의 중심 사찰 용주사(화성시 송산동)가 있고 수원시내는 봉녕사, 그리고 사찰은 없으나 고려 중기에 제작된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상을 통해 지역 내 불교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과거 수원부의 경내는 아니나 지금은 수원시내에 속한 광교산 자락의 창성사지가 있다. 특히 창성사지는 최근에 발굴이 이루어졌고(한신대) 사찰터와 더불어 진각국사탑비(고려 우왕 때 이색이 짓고 혜잠이 글씨 건립)로 인해 규모와 위상이 높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서세동점의 시기 서학은 종교적 색채를 더해서 수원지역에 전파되었고 특히 수원은 인천, 서울을 통해 들어와 수원을 거쳐 충청도를 잇는 근거지였다. 수원의 대표적 천주교 유적은 북수동 성당이다. 1891년 왕림(갓등이) 본당의 공소로부터 출발하였다.(현 왕림성당, 수원 가톨릭대학교) 수원시 남서쪽 30리 지점의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는 1839년 기해박해 이래로 신자들이 숨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신유박해(1801), 기유박해(1839)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박해에 의한 순교자가 없다가 병인박해(1866) 이후로 순교자가 나와 수원 출신자 및 연고자를 포함하여 77명에 이른다. 병인박해 때 수원은 경기남부 지역의 천주교도를 재판하고 처형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당시 천주교 전교가 잘되지 않는 지역으로 알려졌다.

 

수원의 주요 순교 현장으로는 재판이 이루어진 수원판관의 집무처인 이아의 동헌 화청관이 있고 판관은 박해를 조사 보고하였다. 북수동 성당과 종로교회의 자리는 당시 군 사령부에 해당하는 화성유수 중영(中營)으로 토포청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재 성당 표석에서 북수동 유적을 ‘포도청’으로 소개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당시 병인박해를 주도했던 토포청을 이르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당시 수원유수 이경하가 병인박해가 한창인 한양에서 포도청의 포도대장으로 극렬하게 활동하였던 인물이기에 수원 사람들에게 이렇게 구전된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죄인들을 잡아 가둔 곳인 감옥 현초옥이 있다. 1790년대 축조된 화성유수부의 형옥을 이은 것으로 초가 6칸, 담장 40칸 규모였다. 사형이 집행된 곳은 중영과 더불어 동남각루가 있다. 화성성곽의 시설인 동남각루는 남수문 동쪽 언덕 위에 위치하며 천주교인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성문에 효수하고 몸뚱아리는 성벽 아래 언덕으로 굴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병인박해를 보여주는 북수동 성당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성당내 야외에 공개된 교수형 형구돌이 대표적이다. 이 형구돌은 성당 사무장이었던 이원규(시몬)의 집에서 행궁 복원 사업으로 집이 헐리자 나왔는데, 그 쓰임새는 구멍 가운데로 밧줄을 연결해서 천주교인들 목에 걸고 잡아당겨 처형하던 기구였다.(북수동 성당 정원석 회장 구술 : 양훈도 2019, 경기도 근현대 생활문화Ⅱ. 경기학센터 참조) 관련한 자료로 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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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

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 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구돌 혹은 형구틀이라고도 불린다. 이 형구돌을 제보한 사람은 조재경(1963, 하중동, 민족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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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부계록에 따라 수원지역 병인박해를 살펴보면 1866~1873년까지의 희생자는 모두 77명이다. 당시 책임자는 수원유수 이경하(1811~1891)로 흥선대원군의 측근으로 왕실과는 신정왕후 조대비의 인척이었다. 조대비는 종계상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다. 병인박해 당시 이경하는 포도대장으로서 천주교 신자 학살에 적극적이어서 서울 낙동에 살아 ‘낙동의 염라대왕’으로 불렸다. 수원유수로는 1866. 10.~1869.9. 재임하며, 서울과 달리 선참후계령(먼저 참하고 뒤에 계하라)에 따라 조용히 천주교 박해를 처리하였다.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로는 판관 류승근과 정기명이 있다. 그중 정기명은 천두교인을 상대로 1차 신문을 하는 위치로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판별하는 추죄자로서 토색(討索, 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는 하는 짓)질을 잘하였다. 특히 천주교 신자인 지다두가의 재산을 강탈한 것이 유명하였다.

(고종이) 수원중군 윤희수 …등에게 명하기를, ”현직의 기한이 한번 만료되었지만 그대로 잉임하라“고하였다. 병조에서 계언하기를, ”수원유수 이경하가 올린 장계를 보니, (그 장계) ‘중군 윤희수가 절도를 막자 도둑이 없어지고, 사류(천도교도)를 다스리자 천주교 신자의 자취가 거의 사라졌으므로 임기가 다 되었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현직에 그대로 머물러있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이에 윤허하다.

일성록 고종5년(1868) 12월 4일조

 

이경하 막하에서 판관 정기명과 중군 윤희수는 토색질을 하며, 병인박해기 수원 형옥이 천주교 신자들의 원성과 고통, 신음과 탄식으로 가득찬 죽음의 장소로 만들었다. 다산 정약용이 말한 ‘현세에 존재하는 지옥’인 것이다.

감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옥이다. …옥중의 온갖 고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그중의 큰 것을 들면 모두 다섯 가지 고통이 있다. 첫째가 칼, 수갑의 고통이요, 둘째가 토색질 당하는 고통이요, 셋째가 병들어 아픈 고통이요, 넷째가 추위와 주린 고통이요, 다섯째가 오래 머무는 고통인데, 다섯 가지가 줄기가 되어, 천 가지 만 잎의 고통이 여기서 갈려 나오는 것이다. 사형수는 장차 죽을 것인데 먼저 이 고통을 당하여야 하니, 그 정상이 슬픈 것이요, 경범자는 그 죄가 중하지 않은 데도 같이 이 고통을 받고, 원통한 죄수는 잘못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이 고통을 당하여야 하니, 세 가지가 모두 슬픈 일인데 백성의 목민관이 된 사람으로서 어찌 살펴보지 않을 것인가? …
목민심서 10권 형조육조 휼인

(원재연, 2010, 수원 화성의 천주교 사적지 재조명, 숨어있는 수원유적 재발견 제7회 수원학연구소(수원문화원 부설) 정기학술세미나 참조)

 

병인박해라는 피비린내가 지나고 프랑스와의 1886년 한불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은 합법화되었다. 이때 산간벽지의 공소들이 본당으로 승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본당으로 승격한 것이 1888년 7월 설정된 왕림(갓등이) 본당이다. 천주교도 처형의 집행 장소로 인해 수원 성안의 미미했던 교세는 공소가 생기면서 차츰 활기를 얻어 1904년 성안의 유력한 인사들이었던 차재형·나기원·최동필·이규채 등이 나서서 왕림 본당의 알릭스(J. Alix, 한약슬) 신부와 협의하여 남수리에 있는 황학정(黃鶴亭)의 정자와 대지 800평을 사들여 성안 일반인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25칸 짜리 한옥에 화양학교(華陽學敎)를 개설하고, 한편에 ‘천주당(天主堂)’ 간판을 걸고 공소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지금의 수원포교당 화광사가 위치한 곳이다. 남수리 황학정은 성당의 기능보다 화양학교의 기능이 우선했다. 이에 알릭스 신부는 1906년 북수리에 있는 세칭 팔부자 거리의 기와집 두 채와 행랑채로 이루어진 번듯한 한옥을 사들여 대지 약 300평 규모의 한옥을 새로운 성당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1932년 북수리 한옥을 헐고 75평 연와조 고딕식 성당을 준공하여 천주교 성당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수원교구는 2000년대 들어 북수동 성당 자리를 수원 순교성지로 선포하고 성지 전담신부를 발령하는 등 성역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화성유수 중영이 위치하여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던 순교지로 알려진 수원종로교회는 수원 지역의 최초 교회이자 감리교 교회이다. 수원 지역에 개신교가 처음 유입된 것은 1893년(고종 30) 동탄면 장지리에 위치한 장지내 교회(현 장천교회)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1885년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온 감리교회는 1880년대는 인천과 서울을 근거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1890년대는 평양, 원산과 함께 수원에 선교거점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수원 성안에 자리 잡은 것은 1902년 서울 이남의 선교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1901년 미북감리회 스크랜턴(Scranton) 선교사는 김동현(金東鉉)을 통해 화성 안에 가옥을 구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구입하려는 가옥이 화령전 북쪽으로 화령전과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화성유수부는 신성모독으로 이단의 교당을 짓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김동현을 감옥에 가두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해당 거래를 되물리고 1901년 10월 김동현은 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화성부는 그 타협안으로 성안의 몇 군데를 추천하였고, 이에 수원·공주 순회구역장이었던 스웨어러(W. Swearer, 서원보)는 이명숙(李明淑)을 통해 북문 안 보시동의 13칸짜리 초가를 구입하여 성안 선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1902년 2월 17일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신자로 등록함으로써 수원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베크(Berk. S. A, 白瑞岩)의 도움으로 15명으로 매일학교를 개설하였다. 지금의 삼일학교와 매향학교의 시작이다.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1908년 수원교회를 중심으로 ‘수원지방’이 조직되어 1912년에는 수원지역 뿐만 아니라 제천·음성을 포함한 충북지역과 여주·이천 등의 경기 동부, 그리고 남양·안산 등 경기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수원교회는 교세확장에 따라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였는데, 1913년에 함석지붕의 예배당 40평을 신축하였다. ‘수원종로교회’는 지금의 북수동 자리로 화성유수부의 군사적 근거지였던 중영(中營) 바로 옆이었다.

이러한 감리교는 3.1운동 당시 수원지역 내 감리교 9개소 예배소가 위치하였고 특히 삼괴의 4.3항쟁인 우정장안면 3.1운동에는 그 신자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더욱이 3.1운동 관련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 지사, 김세환 지사, 임면수 지사가 모두 종로교회 신자였다.

화홍문 아래 수원천변으로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옆에 위치한 동신교회는 수원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기독동신회는 구약과 신약성서 이외에 특별히 믿는 것이 없으며 성서 그 자체를 믿으며, 교회제도는 필요 이상의 조직을 하지 않으며 목회제도가 없다. 행정상 필요한 임원을 선출하여 위임할 따름이다. 따라서 특별한 사제를 두지 않고 신자 모두가 사제로 계급의식이 없는 형제자매의 신앙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1830년경 영국에서 일어난 플리머드 형제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플리머드 형제단 소속의 영국인 선교사 H.G 브랜드가 1888년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하자 이에 동참했던 노리마츠 마사야스(乘松雅休, 1863~1921)가 한국에 전도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는 1900년 8월 9일 부인과 첫돌이 채 안된 아들을 안고 수원을 찾아왔다. 기독교 선교를 위한 것으로 일본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 선교 사례이다. 처음 1900년 9월 성안 북수동(장안동)에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여 수원에 정착함으로써 수원에 영주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노리마츠를 특별히 기억하게 하는 것은 그가 여타의 일본인과 다른 생각과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느 일본인들과 달리 한복을 입고 식기와 집도 한국식으로 생활하면서 아들에게도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고 한국어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성서강론소(聖書講論所)’로 하여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09년 8월 김태정(金泰貞)이 수원천변 토지를 기부하고 신자들의 헌금과 협력으로 한옥의 집회소를 지어 ‘수원 성서강당(水原聖書講堂)’이라 이름 붙였다. 1917년 일제 당국의 요청에 따라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로 종교단체 등록을 하였다. 1921년 노리마츠가 일본에서 죽었지만 그의 뼈는 이듬해 광교산 묘지에 묻혔고 그를 기념하는 비석이 동신교회 안에 서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었다.

 

미 북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 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였다. 영국성공회는 코르프(C. J. Corfe, 1865-1921, 高要翰) 초대 주교가 1890년부터 1904년까지 15년간 한국에 처음으로 성공회를 전파하였다. 그의 재직 중 마지막 사업으로 벌인 것이 서울·인천·강화 다음에 네 번째로 수원지방의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수원지역은 1904년 서울에서 파송된 송 전도사가 수원천 윗버드내(상유천)에서 전도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수원군 안용면 장지리(현 공군비행장)에 최초의 성공회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듬해 1905년 초대 관할사제로 브라이들(Bridle, 부재열) 신부가 부임하면서 수원 매교동 가옥을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이듬해 1906년 현재 위치인 교동 11번지 일대 4,000여 평을 매입하면서 교동시대를 열었다. 매입한 땅에 철조망을 치고 전통 가옥을 성당으로 사용하였음을 1907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사진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후 1908년 성당을 신축하고 남녀 80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진명학교(進明學校)를 1908년 5월 16일 개교, 교육을 통한 전교활동을 시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1910년대 당시 교회 규모는 사제 2명, 전도사 7명, 신자 700명으로 나타나고 있어 당시 성공회의 발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1913년 서울에서 성 피득 보육원을 수원으로 이전하여 운영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한국성공회에서 유일하였던 성피득 보육원은 1898년 서울에서 설립되어 1913년 수원교회 안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1928년 9월 28일 진명학교는 진명유치원(進明幼稚園)으로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1943년 일제에 의하여 폐원되었다. 초창기 진명유치원 원장은 의사였던 신현익(申鉉益)이었다.

민족운동에 대한 사실로 1907년 수원 성공회 선교사 부재열이 수원(화성)지역 성공회 교도들과 국채보상을 위해 120원 40전을 출연하였다.(대한매일신보)

개성 호수돈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E. 와그너(Wagner)는 ‘한국의 아동생활(Children of Korea)’(1911)이라는 책에서 “한국에서의 전도의 성공은 너무나 놀라워 그 업적은 전도의 기적이라 불리고 있다. 은자의 나라에 지금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형제 자매들이 2백만이 넘는다”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기독교가 전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의 곳곳에는 초가집의 교회와 교회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천주교를 비롯한 개신교는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가 되었다.

수원에 있는 천주교 성당, 종로교회, 동신교회, 성공회 교당 등은 모두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해방 이후 새롭게 지은 건물들이다. 시멘트로 지어진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100년 혹은 200년 뒤 우리시대를 보여줄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는 부족하여 안타깝다.(수원박물관 한동민 참조)

 

이밖에 수원은 동학과 천도교의 세가 높은 곳이었다. 1884년 2월 경기 접주 이창선 밑 수원 안승관은 간부로 활동하고 이후 기호대접주로 임명될 정도로 동학의 위세가 대단하였다. 특히 1894년 동학의 봉기에서 5천명의 농민군이 수원 권역을 접수하고 관아로 압박하는 등 손병희 휘하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후 의병, 서해안연변 남양 일원에서 수적과 활빈당 활동으로 이어졌고 애국계몽운동 계열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천도교로 이어졌다.

당시 천도교 교세는 수원군 각지에 전교실이 위치하고 1909년 8월, 1911년 전국 천도교 교구 성미 실적 1등 표창, 1912년 1,2등 표창되었다. 성미 모금에서도 1등이었다. 특히 3.1운동 당시 천도교가 재정을 확보한 방법으로 특별성미를 모금하였는데, 손병희가 1918년 종령을 선포하여 현 중앙 대교당 건축비용 충당이 명목으로 모금하자 이에 수원지역은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수촌리 백낙렬 등이 적극적으로 헌납하였다.

이처럼 수원지역에서 천도교는 근대교육과 3.1운동을 적극 참여한 곳으로 천도교 강습소가 중심에 있었다. 수원교구 교리전문강습소가 설립되고 성호면 종학강습소 이어 지역내 제309강습소 등 7개 강습소(제암동, 압정면 사기촌, 장안면 장안리)가 생길 정도로 활발하였다. 특히 3.1운동 당시 삼괴의 4.3항쟁인 우정,장안면 3.1운동 당시 8개의 전교실과 신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때 수촌리 구장 백낙렬은 동학교도이자 천도교 순회교사로 3.1운동을 이끌었고, 제암리 안정옥, 고주리 김흥렬도 대표적인 3.1운동 순국지사(4.15 제암리학살사건)이자 천도교 순회교사이다.(이동근, 2011, 수원지역 동학의 전파와 천도교의 발전, 수원학, 수원박물관 참조)

병인박해를 보여주는 북수동 성당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성당내 야외에 공개된 교수형 형구돌이 대표적이다. 이 형구돌은 성당 사무장이었던 이원규(시몬)의 집에서 행궁 복원 사업으로 집이 헐리자 나왔는데, 그 쓰임새는 구멍 가운데로 밧줄을 연결해서 천주교인들 목에 걸고 잡아당겨 처형하던 기구였다.(북수동 성당 정원석 회장 구술 : 양훈도 2019, 경기도 근현대 생활문화Ⅱ. 경기학센터 참조) 관련한 자료로 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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