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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

달이선생 2019. 4. 1. 11:18

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

   

 

 

 

 

   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구돌 혹은 형구틀이라고도 불린다. 이 형구돌을 제보한 사람은 조재경(1963, 하중동, 민족문제연구소 안산시흥지부 회원, 문화원회원)이다 3월 29일 목감지구 산현공원 삼일운동 유공자 윤동욱 지사 기념비 제막식에서 전시관 뜰에 있는 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형구틀에 대한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동안 이 돌의 쓰임새를 놓고 절구, 혹은 주춧돌, 석조 등 의견이 분분하였었다.

형  구돌은 편마암 재질의 크기 가로 48, 세로 54, 원추형 구명이 뚫려있어 앞쪽 구멍 지름 11, 뒤쪽 홈 지름 22cm이다.

  이 형구돌은 원래 시흥시 산현동 묘재(양회다리)마을 151번지 이석우 댁에 안산관아 여러 석재(수암면사무소 주춧돌, 그 전 안산관아 건축 부재)와 같이 있었다. 목감동 택지개발로 형구돌을 포함하여 석재들을 시흥문화원에 기증하여 보관하고 있다.

 

 

 

 

 

 

 

 

출처 : 시흥시, 기전문화재연구원,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2000)

 

 

출처 : 시흥문화원, '시흥의 생활유물 자료집'(2010)

 

출처 : 시흥문화원, '시흥문화' 11(2009. 2)

 

 

   이석우 씨 집안은 현재 시흥역사자료전시관에 전시 중인 효자 이상기(李相夔) 정려문과 관계가 깊다. 바로 안산의 효자 이상기의 후손이다. 정려문은 원래 대문에 위치하였었다. 이들 일가에 대한 시흥시 자료는 18, 19세기 준호구가 시흥시향토사료실에서 번역 보관하고 있고 책으로 펴냈다. 준호구인 고문서 12점은 이상기의 증손자 이목형의 호수로 등장하는 영조 38(1762)부터 이목형의 현손 이재용이 호수로 등장하는 고종 28(1891)까지이다. 이를 통해 이 집안의 가세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상기가는 아들 이민호(李敏好, 1668~1743)가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 길에 나아가 크게 번창하면서 한양살이를 하고 이후 이병황(이상기의 증손자 이목형의 손자) 1848년에 안산 선영으로 낙향하여 재지사족화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세는 한양살이 때 노비가 무려 100구 이상 최대 170여 구가 있었으나 안산군으로 낙향하면서 최대 5명을 넘지 못하였다. 다만 19세기에 들어오면 준호구에 외방 및 도망 노비를 기재하지 않고 솔거노비만 기록하는 특징이 있다.

 

   준호구에 따르면 이상기는 본관은 전주이고 안산군 초산면 산현리(지금의 시흥시 산현동) 출신으로 17세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안산군읍지(安山郡邑志)(1842) 충효열 조에

 

효자 증 이조 참의(贈吏曹參議) 행 남대 지평(行南臺持平) 이상기(李相蘷) : 완산인(完山人)이다. 그 아버지가 병이 나자 대변을 맛보았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종신토록 효성이 지극하였다. 숙종(肅宗) 계해년(1683, 숙종 9)에 정려하라고 명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이후 편찬된 안산군읍지에 이어지고 있어 이상기는 안산을 대표하는 효자였다. 시흥역사자료전시관의 뜰로 오기 전에 위치하였던 묘재마을은 전주이씨 익양군의 후손 성흥군 이응순이 입향조인 이석우 집안의 세거지로 대가 많지 않았으나 이들 마을 일대를 거의 소유한 유지였다.

 

 

출처 : 시흥문화원, '시흥의 생활유물 자료집'(2010)

 

   어떤 경로로 안산관아의 석재와 형구돌을 입수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집 정원 한 켠에 있었다는데 형구돌의 정확한 쓰임새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 거 같다. 교수형 형구돌을 집안에 정원 석재로 쓰는 건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산군 관아에는 교수형 형구돌이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병인양요 당시 안산군의 직접적인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안산군에 인접한 인천지역이 천주교가 일찍부터 전래된 지역으로 한국 최초 영세를 받은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선대의 세거지가 인천이며, 이 이승훈 역시 죽은 곳이 소래산 인근이었다는 설(부천 향토사가 양경직)도 전해지고 있고 참수되고 반주골(지금의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에 묻혔다. 또 이승훈의 아들 이택규와 이신규도 이곳 지역에서 나고 자랐으며, 천주교도라는 명목으로 참형 당하였다. 그리고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백서(帛書)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도 인천지역인 강화도 월곶리 출신이고, 신유사옥 당시 철종(哲宗)의 조부 이인(李䄄)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사사당한 것도 강화였다.

   더욱이 1838(현종 4) 10월에는 정바오로라는 사람이 조상의 위패를 부수어 버린 사건이 일어났는데 인천부사 이형원이 이명원을 주동자로 파악하고 처리한 사건도 있었다. 이렇듯 안산과 인접한 인천과 강화지역은 천주교 포교와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병인양요 후에 대원군은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면서 양이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처형지로 서울과 해안지방에서 이루어졌는데, 따라서 인천지역에서도 대대적인 천주교도 색출과 가혹한 박해가 벌어지면서 해안가 군현이었던 안산관아까지 그 처리가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안산은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 광주 첨성촌에 거주 : 현재 안산시 일동)의 문인으로 성호학파 좌파 권철신, 이병휴 등이 서학을 받아들여 신앙으로 삼았다. 이밖에 안산의 진산인 수리산에는 기해박해로 순교한 최경환이 다락골(수리산 담배촌)에 거주하며 주민들과 신앙을 이어간 성지이며, 이곳에 여러 신자들은 병인박해 때 홍주로 끌려가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안산군읍지(安山郡邑志)

시흥시, 고서 고문서로 보는 조선시대 시흥, 2006

경기도문화원연합회, 경기향토사학8, 2003

시흥문화원, 시흥의 생활유물 자료집, 2010

인천시사1, 20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