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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사랑 『백범일지』

달이선생 2018. 4. 7. 12:15

 

민족의 사랑 『백범일지(白凡逸志)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6분. 경교장에서 여러 발의 총탄소리가 들린다. 향년 74세,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가 쓰러졌다. 백범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백범 김구의 죽음을 둘러싸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정작 그를 저격했던 안두희 조차도 다른 이의 손에 죽는 날까지도 그날에 대해서 어떠한 진실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죽음과 함께 모든 진실을 가지고 침묵하여 버렸다.

  김구 선생을 암살 했던 안두희가 당시 특무대장 김창룡(金昌龍, 1920-1956)과 가까웠고 그런 김창룡은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이승만의 신임은 두터웠다. 이승만을 위해서라면  김창룡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과 정적이었던 송진우(宋鎭禹, 1887-1945), 여운형(呂運亨, 1886-1947) 등의 암살배후에는 김창룡이 있었다. 

  굴곡 많은 우리네 역사에서 민족의 주권침탈에 대한 외세, 즉 일본제국주의와 한평생 싸우고 이후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민족의 자주 독립국가 건설에 있어서 모든 사상과 이념을 멀리 하고 오로지 민족의 하나 된 독립국가건설에 매진하였던 김구, 백범은 이렇게 오랜 숙원이자 꿈에서도 죽어서도 보고자 했던 남북이 하나 된 독립국가를 보지 못하였다. 우리도 분단국가로 섬나라처럼 사는 것을 당연스레 살고 있다.

 

 

 

  김구는 1876년 8월 29일 안동김씨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의 방계 후손으로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순영(金淳永)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며 외아들이다. 백범의 어릴 적 이름은 창암(昌巖)이다. 이후 동학에 입도(入道)와 더불어 창수(昌洙)로 고쳤고 그 뒤 한번 더 이름과 호를 바꾸어 오늘의 백범 김구가 되었다. 동학교도가 되어 의병운동을 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진사 안태훈의 보호를 받으며 후조 고능선(고산림)을 사사하고 , 그 뒤 백범의 삶을 180'바꾼 '치하포 왜인 살해사건' 이후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어 유랑하였다가 '망국의 백성에게 힘이란 자고로 교육에 있음'을 자각하고 교육사업에 투신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 투옥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민족적 역량이 모이는 가운데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이하 임정)가 수립되면서 여기에 참여한 김구는 경무국장을 맡았다. 그 뒤 내무총장, 노동부총판, 국무령, 국무위원 등을 거쳐 마침내 1944년 주석의 지위에 올랐으며 많은 인사들이 떠난 임정을 끝까지 지키면서 민족지도자로서 섰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이봉창(李奉昌, 1900-1932) 의사의 '천황암살미수사건'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사의 폭탄투척은 김구가 한인애국단 (韓人愛國團, 1931)을 조직하여 지휘한 임정의 항일독립운동이었다. 『백범일지』에도 김구는 두 의사에게는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다. 특히 윤봉길 의사가 거사 직전에 옷이며, 시계며 새로 사서 복장을 갖추었는데 이때 자기는 새 것이 필요없다며 낡은 백범의 회중 시계를 바꾼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러한 일들을 두고 일부에서는 테러리스트라고 폄하하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당시 한인애국단의 활동이나 의열단(義烈團, 1919)의 활동은 불특정다수를 노리고 이루어지는 서구 광신도 테러나 무슬림 강경파의 테러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들은 무고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피해를 입히고 이슈를 노렸지만 우리네 독립운동가는 달랐다. 우리는 항상 전시에 적국에 대한 군사집단과 지배집단에 대한 항거였다. 일반인에 대한 공격시도가 아니었다. 이는 안중근 의사에서 보여지듯 그 이전부터 초지일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약소국 조선의 항전이었다.

  이밖에 중국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1887-1975)과 함께 군사협정을 맺어 한국독립군의 정규군 및 사관양성을 하여 마침내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1940)을 창설하였고 해방 직전까지 미 CIA의 전신인 OSS와 함께 첩보 작전 및 후방교란을 하다 마침내 국내진공작전을 결행하기 직전에 해방을 맞았다. 이는 우리 임정이 세계2차대전에서 대일선전포구 이후 정식으로 참전을 하여 전승국 지위와 독자정부의 인정을 받고자 했던 야심찬 계획이었으나 아쉽게도 작전 개시에 임박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모두가 수포로 돌아갔고 해방 조선은 극심한 혼란기의 전초가 되었다. 

 

 

 

 

 

 

 

  

『백범일지(白凡逸志)』를 쓴 것은 어느 누가 그를 위해 쓴 전기나 평전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김구 자신이 친히 쓴 자서전이다.

 

 

 

  『백범일지』의 구성은 각각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 있다. 시기상으로는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부터 백범의 가계와 유아기, 청년기를 이야기와 대군주폐하로 이야기된 고종의 대은을 입고 이름을 알리게 되었던 국모시해 사건에 대한 응징인 '치하포 사건'과 그 이후 감옥에서 탈옥하여 승려로서 떠돌던 일, 동학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하고 교육사업에 투신하고 다시금 일제에 의해 날조된 비밀결사 신민회 탄압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투옥, 그리고 출옥 후 임정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 상권의 주된 줄거리이다.

 

  하권의 내용은 상해 임정에서부터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의 독립의거 계획 및 실천과 함께, 세계 2차 대전(태평양전쟁, 일제는 대동아전쟁이라 부른다.)이 막바지를 치달으면서 대일선전포고와 함께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을 진작 시키면서 앞으로 다가올 해방과 함께 임정이 독립국가 건설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나설 정당성 및 대표성을 가져가기 위해 노력하였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백범일지』는 백범이 ‘출간사’에서 밝혔듯이 상권과 하권의 입장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는 백범의 유서 즉, 선생의 유훈(遺訓)으로 친필(親筆)이었다. 특히 ‘인․신 두 아들에게’ 대한 이야기와 ‘하권을 쓰고 나서’라는 부분에서 김구의 아들들과 나라사랑에 대한 구구절절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출간사’ 및 ‘나의 소원’ 을  추가로 넣어 단순한 유언에 그치지 않고 해방이후 민족사의 거취에 대한 혜안을 밝히며 그 시대적 상황 파악과 함께 앞으로 우리나라와 민족에 대해서 자주독립과 문화강국에 대한 전망은 백범의 애뜻한 나라사랑을 읽을 수 있고 그 생각과 바람이 매우 절실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1928년 3월 처음 『백범일지』 상권을 집필하였을 당시 백범선생에 있어서 정말 힘든 시기였다. 국내 일제의 식민통치는 무단통치에서 간교한 문화정치를 거쳐 점차 군부에 의한 침략 전쟁이 가속화되는 파쇼체제가 되어 국가 총동원의 시기가 대두되는 과도기였다. 당시 일제의 국력은 조선을 넘어 만주까지 확대하며 날로 그 기세를 높이며 조선의 독립은 점차 불투명해졌다. 또한 독립운동가 일각에서는 임정에 참여했던 춘원 이광수가 변절하고  기미독립선언서의 초안을 했던 육당 최남선 등 민족지식인들의 이반(離反)이 속출하였다.

 

  또한 임정에서는 1차 대전 이후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따라 파리강화회의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외교독립론을 주창하고 추진했던 것이 그 성과가 미미하였다. 이렇게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이 가중되는 사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독단으로 구미위원부 활동을 꾸려 국제연맹에 위임 통치 청원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은 당시 외교실패에 대한 임정의 불신 와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임시정부가 발칵 뒤집어진다. 특히 창조파(무장독립을 주장하는 계열)는 이승만의 이런 처사에 극렬하게 반대하며 임정의 개편 논의가 진행되었고 그들과 의견을 달리했던 개조파(실력양성론과 외교독립운동 계열) 등으로 나뉘며 각기 입장 차를 모으지 못하고 결국 많은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떠난다.

 

  때문에 임정의 존재는 무의미하게 되고 총체적인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역할이 어려워졌다. 이후 임정은 심각한 침체와 더불어 다른 돌파구가 필요 했다.

 

  이런 참담한 현실에서 상권이 집필된 것이다. 기한 없는 지루하고도 막연한 임정생활과 점차 대륙에 야욕을 가지고 침략을 서두르는 일본, 김구의 처지는 눈앞의 미래마저 확신 할 수 없는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기약 없는 이 일에 자신이 버리다시피 한 가족에 대한 회의가 들었던 백범, 김구는 지금껏 자신이 해왔던 이 일들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음을  두아들에게 밝히며 참담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백범은 인, 신 두아들에게 아비의 하는 일에 대해서 가장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조국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의미한 그런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다. 암울한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 민족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 『백범일지』를 통해 두 아들에게 더욱 비중 있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들들이 알아주기를 원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였지만  백범은 그 누구보다도 두아들에게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이야기 하고 이해받기 원했다.

 

  이렇듯 상권의 출발은 백범이 처한 위기와 정체에서 두 아들에 대한 사랑과 신념으로 이루어진 집필활동이다.

 

반면 하권의 시작은 마찬가지로 아들들에 대한 유서(遺書)적 의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더욱 확대된 의지가 피력이 된다. 이는 ‘출간사’에 밝혔듯 이 『백범일지』가 읽히기 원하는 대상의 확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상권을 쓸데 무력감의 위기는 그 시절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 거두어준 쾌거로 말미암아 임정의 대내외적인 홍보와 미주한인(美駐韓人)에 대한 점진적이고도 지속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는 중국국민당이나 그밖에 나라와 함께 임정의 새발판이 되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특히 백범은 자신이 지키는 임정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있는 미주한인들에게 고마움이 컷고 이 글이 미주한인들에게 보이길 원한다고 쓰고 있다.

 

  이렇듯 변화하는 정세 속에 임정은 세계 2차 대전에서 중국국민당의 후원을 받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대외적으로는 미․영․소 3개국에 대한 임정의 대한 교전국 지위로 승인을 요구하는 적극적 독립운동 활동 시기가 하권의 집필에서 나타나고 있다. 

 

  『백범일지』는 상하권의 단순한 회고록에서 끝나지 않고 민족사전망인  ‘출간사’ 와 ‘나의 소원’을 첨부하여 『백범일지』를 지침서의 성격을 더하였다. 이때의 『백범일지』 의미는 해방정국 하에서 타의적 의사결정에 의한 신탁통치, 미․소의 진군이 빚은 분단을 깨고 좌․우익의 이념적 분할과 정치적, 물리적, 분단을 막고 앞으로 통일된 독립국가 건설과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 세계사에 있어서 우리가 인류에게 미쳐야할 사명감 및 진로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백범 김구의 민족주의자로서의 성격을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책의 각 부분에서 각 시대의 분위기와 백범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여 당시 집필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백범일지』 각 부분에 대한 의미도 살펴보았지만 어디까지나 이 『백범일지』의 묘미는 김구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나는 일화가 아닐까한다.

 

  책의 서두에서 자신의 출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상놈 중에 상놈”이라고 했던 부분은 그가 얼마나 자신에게 처한 신분적 제약을 자각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행동이 얼마나 힘들고 눈물겨웠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에도 백범은 조선의 봉건잔재들인 반상제를 강하게 비판하고 양반이나 상놈이나 깨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신분제의 풍토에 대한 극렬한 비판을 했다. 선생의 양친은 그의 이런 성정을 깊이 이해하고 그에게 배움으로써 신분을 넘어 인간답게 살길을 처음으로 열어준다.

 

  또한 그 배움의 길에서 백범이 진정한 스승으로 받들었던 후조 고능선(後凋 高能善, 1842-1922)을 통하여 당시의 위정척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는 백범에게 너무나 귀한 말씀이었으며 진정으로 그는 스승에 대하여 극진함과 존경심을 가진다. 이 시기는 갑오의려인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진사 안태훈(安泰勳)에게 의탁하였던 시기로 그 일가와 연을 맺었던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리고 백범은 존경하는 스승의 손자사위로 제안을 받아 매우 기뻐한다. 존경하는 스승의 제자가 된 것도 큰 은혜였는데 그 분의 손자사위가 된다는 것에서 백범의 기대의 찬 모습이 지금 우리 마음과도 비슷하고 그 솔직함으로 인간적인 김창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헌병주재원이랑 살림을 차린 처형과 장모를 사람 꼴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모습이며 ‘치하포 사건’으로 인한 영웅 아닌 영웅으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몸둘 바 모르며 눈물겨워 하는 모습, 교육자로 시작한 일에서는 “망국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내가 교사이니 당치 않다.”고 겸손해 하던 모습은 모두가 인간적인 백범을 느끼게 한다.

 

  백범의 인간적인 모습이외 우리에게 남겨지는 가슴 진한 이야기는 우리네 정서인 바로 어머님에 대한 효심(孝心)이다. 허구 헌 날 철창을 드나드는 자식의 옥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가 아들이 중년이 되고 자신은 백발노인이 되어서까지 만리타향 임정에서 하루살이를 하는 아들을 위해 친히 살림살이를 이끌어 주신 것, 이를 깊이 감사하며 어머니에 대한 정(情)과 사랑을 토로하는 모습은 여러 해전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도덕 교과서의 일화를 생생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언제나 당신이 당당함으로 아들의 당당함을 이끌었던 백범의 모친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라는 내용에서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라고 쓰고 기뻐하는 것에서 김구 모친의 엄한 자식사랑과 백범이 모친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너무나 큰 감동이었다. “이제사 큰일을 하니 존대를 해주겠다.”는 어머니의 모습은 민족지도자로서의 백범 김구가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한다.

 

  또한 말년에 분단주의자로부터 위해(危害)를 당하여 운명을 달리하였지만 백범처럼 많은 사람들의 은혜를 입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치하포 사건’에서 고종의 변호로 목숨을 유지한 것이며 김주경의 옥바라지, 백범이 받은 은인의 덕(德)은 정말 헌신적인 것이었다.

 

  『백범일지』는 김구 일생의 자서전이지만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김구의 정치적 소신과 민족에 대한 지침서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출간사’ 및 ‘나의 소원’ 부분에서 언급하듯 그의 정치철학과 민족에 대한 바람들에서 엿 볼 수 있다.

 

  백범은 이 글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임무를 말한다. 완전한 자주독립과 전인류적 박애사상을 창출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정치는 법치주의에 따라 법의 규정으로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자유를 통하여 일반대중은 언론을 자유롭게 세우고 투표로써 다수의견을 존중하는 정치성과 국론을 결정해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어디까지나 주권은 백성에게 있다는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을 말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을 위하여 한민족이 중심적 역할을 하라고 당부한다. 이와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철학에 기초한 교육을 통하여 올바른 사상을 정립하여 종국엔 문화강국으로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정(民主政)에 대한 백범의 철학은 단호하다. 다원주의를 인정치 않고 개인의 자유를 제한, 박탈하는 국가주의적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는 철저히 배격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을 위시한 민주주의의 대한 무조건적 옹호 또한 아니다. 다만 백범은 어디까지나 현대에서 민중들에게 그나마 제일 그 순기능이 올바르게 작용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상대적 비판이며 백범은 미국 또한 완성된 정치체제가 아니니 우리의 역사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미국 및 다른 나라에서도 취할 것이 있으면 취하여 문화강국이 될 수 있도록 나아가고 일반대중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국가를 말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백범일지』가 전하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내가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백정 범부’에서 지어진 김구의 호(號)가 밝히듯 천하면 천할 수 있는 당시의 천민 백정부터 일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백범자신의 나라사랑정도는 이들에게도 특별한 것이 아닌, 나만큼 만이라도 해서 독립국민이 되야 하며 누구나 쉽게 나라를 위할 수 있길 바란다고 한 뜻에서 김구의 깊은 고뇌와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김구의  호를 보며 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과 민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세, 그리고 앞으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금 생각한다. 또한 『백범일지』를 통해 얻은 이 소중한 마음의 감회를 가슴속 깊이 세긴다.

 

  민족주의자로 일제하에 독립운동과 해방정국에서는 남북협상 등, 자주민족국가 건설을 눈감는 그날까지, 민족을 위해 애쓴 김구, 선생님의 민족사랑이 베어 있는 『백범일지』를 보고 글을 남기는 지금,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거인이셨던 선생님의 삶을 회고 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구의 ‘나의 소원’에서 처음에 말하고 있는 이 시를 마음에 새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의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이 글은 도진순 교수가 옮긴 『백범일지』 를 읽고 썼던 독후감으로 10여 년이 더 된 글이다. 효창공원을 찾아 꼭여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작년 봄에야 묘와 사당을 들러 참배하였다. 아쉽게도 기념관 전시실은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늘 가슴 속 한켠이 무거웠는데 이제야 짐을 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