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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군(始興群) 수암면(秀岩面) 3․1운동과 윤동욱(尹東旭)의 사상(思想)

달이선생 2016. 7. 1. 14:03

 

 

시흥군(始興群) 수암면(秀岩面) 3․1운동과

윤동욱(尹東旭)의 사상(思想)

 

 

 

 

산현동 윤동욱 선생의 생가(손자 윤성준 가옥)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만세운동의 촉발은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침탈에 따른 것으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시작으로 1910년 한일병합으로 식민지배를 확정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고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를 통한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하여 야만적인 탄압과 수탈을 자행한다. 3∙1운동은 바로 이러한 일제에 맞서 자발적이고 거국적으로 이루어진 민족적 저항이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각 지역의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전 계층이 일제에 맞서 항일만세운동을 일을 킨 것이다. 이 글의 주제인 ‘시흥군(始興郡) 수암면(秀岩面)의 3∙1운동’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따른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었고, 윤동욱(尹東旭)은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이 사건의 연구는 시흥군 전체의 3∙1운동 진행과정에서 수암면의 ‘비석거리(碑立洞)’에서 발발한 사건으로 다뤄졌다.

 

  이 글에서는 먼저 시흥지역 3∙1운동의 전개과정과 특징, 수암면 3∙1운동의 배경과 주도 인물, 전개과정 등 전반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윤동욱이 주도한 수암면 3∙1운동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윤동욱의 사상적(思想的) 배경인 가계와 전통을 알아보는 한편, 수암면에서 3∙1운동을 지휘하고 이후 물산장려운동과 서당운영을 통해서 그가 가졌던 사상적 맥락을 파악하였다.

 

 

 

 

시흥군 수암면 3∙1운동의 전개

 

 

수암면 3.1운동도  

소개된 논문에는 3.1운동 당시 수암경찰관주재소의 위치를 현재 안산시 수암파출소 자리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으로 현재 수암동 478-1번지인 안산교회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는다.

아울러 유익수 지사가 인솔한 성포리 주민 30여명이 홍순칠 지사와 만나 태극기를 건너 받았던 도살장을 포함하였다.(2019.3.30)  

 

  3월 30일 수암면 내의 18개 리의 주민 약 2천 명이 수암경찰관주재소의 서쪽 밭에 모여서 대형의 태극기 2기를 세우고 각자는 작은 기를 소지하여 “수암주재소, 면사무소를 불태우자!”라고 외치면서 동 관서에 몰려가 자주 만세를 외치는 불온한 행동을 하므로 자신들이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여전히 이에 순응하지 않으므로 거짓 사격태세를 취하여 겨우 해산시켰다.

  이날의 긴박하였던 상황이다. 전날 조선독립운동을 개시한다는 비밀통문이 돌아 이를 전해들은 수암면의 19개 동리 주민들이 각각의 지휘자의 인솔 또는 자발적으로 비립동(碑立洞)으로 모여 들었다. 오전 10시가 안된 시각, 수암면 남쪽 밭(비립동)에 1천 2,3백 명이 모였다. 와리에서 홍순칠이 동리 허치선(許致善)에 집에 모여 소작인 30인을 인솔하여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가지고 도착했고,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줬다.

  오전 10시경 홍순칠은 전날 동참하기로 한 소작인들이 금일 모였는지 인원조사를 했다. 이는 후일 불참자를 문책할 자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 시각 류익수는 성포리 구장이 “이 군중 속에는 난폭한 자도 있으니 만일 주재소 등에 폭행을 가하면 곤란하니 당신이 좀 조정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주민 30명을 인솔하여 도살장에 도착하였다. 성포리 구장은 홍순칠이 만든 태극기를 류익수에게 건넸다. 윤동욱이 화정리에서 능곡리 주민에게 비립동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도착했다. 화정리 구장 김병권도 주민 30여 명을 뒤따라 도착하였다. 이 사이 주민은 2천 여 명으로 불어 있었다.

  이때 순사가 와서 “해산하라 그러지 않고 읍내로 갈 때는 발포할 지도 모른다.”고 협박하자 모인 주민들끼리 해산하자는 자도 있고 하지 말자는 자도 있어서 한때 분규가 야기되었다. 그 때 부곡리의 류익수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읍내 쪽으로 가니 군중도 눈사태가 난 듯이 뒤따랐다. 류익수는 홍순칠이 읍내에 가서 만세를 부르라고 선동하고 군중들이 읍내로 가려고 초조해하였으므로 자신이 부득이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을 지휘하여 읍내로 나아간 것이다. 화정리 구장 김병권도 동네 사람들이 폭행 등을 하지 않도록 감독하며 뒤따랐다.

  이때 윤동욱이 선두에 서서 군중의 기세를 돋우고 주재소, 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흥분한 군중들이 수암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자 윤동욱은 “여러분 우리가 독립되면 관공서는 우리 국유재산이니 털끝만큼도 상하게 마라”고 하며 무마시켰다.

  보통학교 앞에서 윤동욱은 순사 임건호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고 하였으나 불응하였다. 이렇게 한 것은 관리가 만세를 외치면 시위운동을 인정하는 것으로 일면 독립운동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하여서 순사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한 것이다. 이봉문도 동참하여 군중을 솔선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날 시위는 수암주재소, 보통학교, 면사무소, 공자묘(향교)로 몰려가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순사들이 줄기차게 해산을 종용하고 사격자세로 대열을 위협하는 가운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윤병소의 지도 아래 모두 자진해산하였다. 오후 10시경 이봉문은 수암리 음식점에서 2, 3명과 함께 술을 마시며, 수암리 구장이 이날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 화제가 되자 그것이 못마땅하여 이들과 함께 구장 집에 몰려갔는데 구장은 이미 피하고 없었다.

 

 

 

도살장 터

 유익수 지사가 성포리 주민 300명을 인솔하여 홍순칠 지사와 만나 태극기를 받아 순사가 있는 읍내, 비석거리로 나아간 곳이다.

 

 

비석거리(비립동, 위), 안산군 송덕비(아래)

 비석거리는 역대 안산군수 송덕비가 서있던 자리로 비립동이나 비석거리로 불린 장소이다.

 안산관아로 오르는 길목으로 장이 서는 읍내였다. 3월 30일 만세운동 당시 이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이루어졌다.

송덕비는 여러 곳으로 옮겨지다가 현재는 안산 객사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비군 중 군수 이문훤 영세불망비(맨 오른쪽, 1636년 안산군수로 부임하여 사옹원 안산어소 설치로 요역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군민이 의견을 수렴하여 상소하였다가 파직)는 당시에 비립동에 서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수암면사무소 터

2009년 안산객사에 위치했던 수암면사무소는 안산관아 건물을 일제가 강점 이후 면사무소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수암경찰관주재소 터 

당시 수암경찰관주재소 터로 현재는 안산교회가 위치한다.(안산시 수암동 478-1)

안산시에서는 향후 이곳에 안산시 3.1운동 기념탑을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안산공립보통학교 터

2009년 1899년 안산군수 남계술(선정비가 시흥시 목감동 남왕마을 우물터에 있었는데, 현재 시흥시 목감동 주민센터 앞에 있다.)이 군립 소학교를 설립하였고,

3.1운동 당시 공립보통학교로 이 앞에서 윤동욱 지사가 조선인 순사 임건호에게 조선인으로서 3.1운동에 동참하라고 설득하였다.

 

 

향교 터

삼일운동 관련 재판기록에 공자묘로 기록된 안산향교 터이다. 안산시에서는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발굴하였고, 향후 복원계획이 있다.

 

 

   이후 일제는 4월 5일 주동자 일제검거를 실시하여 지목된 류익수, 윤병소, 홍순칠, 윤동욱, 김병권, 이봉문 등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경성지방법원에「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회부되어 5월 27일 1심 판결에서 판사 카가미(鏡一以)는 <표 5>와 같이 모두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에 재심되어 형사 제4부 판사 이토 준키치(伊東淳吉)는 원판결을 취소하고 이의신정을 받아들여 <표 5>와 같이 징역형과 태형으로 감형하였다.

 

 

 

 

 

안산시 수암동 '비석거리 3.1운동 기념비'

 2014년 8월 15일 안산시민과 안산지역사연구모임의 노력으로 건립되었다.

 

 

윤동욱의 사상적 배경과 민족운동

 

1) 생애

  윤동욱(尹東旭)은 시흥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자(字)는 경재(敬載), 호(號)는 학은(鶴隱)이다. 1891년(고종 28) 9월 1일에 안산군(安山郡) 초산면(草山面) 궤곡리(樻谷里, 현 시흥시 산현동 369번지, 깨꼴)에서 아버지 윤승덕(尹承德)과 어머니 이덕필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2살(1902. 4)에서 21살(1911. 12)까지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29세) 3월 30일 마을고개 넘어 화정리에 갔다가 수암리 비석거리에서만세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최선두에서 지휘하고 평화적으로 시위를 이끌었다. 조선인 순사 임건호에 게 만세를 부르도록 강요하였다. 만세운동이 해산한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주동자 검거에서 피체되어 서대문감옥에 송치되었다. 5월 27일 보안법 위반으로 홍순칠 등 피체된 사람들과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어 징역 8월이 구형되었다. 이후 부친의 노력으로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笞刑) 90도(형공제581호)로 감형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윤동욱은 대대로 살아오던 깨꼴에서 북쪽인 이웃한 골월로 이사하였다. 이어 1923년 10월부터 1942년 5월까지 시흥군에서 물산장려운동 전개하였으며, 1943년부터 해방 때까지(45년 5월) 서당을 열어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이후에는 10월부터 1950년 3월까지 산현리의 구장을 맡아보면서 농사에 전념하였다.

 

 

산현동 '항일애국지사 학은 윤동욱 선생 기념비' 묘 아래 위치

2009년 시흥문화원에서 윤동욱 지사를 ‘시흥의 인물’로 선정하고

‘윤동욱 선생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2009년 11월 23일부터 시민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이듬해 2010년 3월 1일 산현동 묘소 앞에서 ‘항일 애국지사 학은 윤동욱 선생 기념비’를 건립하고 제막

 

 

 

 

 '독립지사 윤동욱 기념비' 시흥시 목감동(조남동) 산현공원 후문 위치

2019년 3월 29일  기념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건립일은

수암면 3.1운동(비석거리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만세운동일 일어난 3월 30일로 하였다. 

 

  1968년 77세를 일기로 시흥군 수암면 산현리 자택(279번지)에서 타계하였다. 묘소는 선대 윤민헌을 모신 선산 아래 위치한다.(시흥시 산현동 산 53-2, 깨꼴) 부인은 안동 김씨이며, 슬하에 윤상렬(尹詳烈), 윤범렬(尹範烈)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1995년 시흥시 향토사료실 전문위원 이승언(한기)과 윤성준은 수암면 3∙1운동의 주역인 윤동욱의 공적을 찾아 국가보훈처에 신고하여 정부는 1996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숭고한 애국정신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하여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태형의 처벌과 종사(宗事)

  수암면의 3∙1운동 이후 윤동욱의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손자 윤성준의 따르면, 윤동욱은 3∙1운동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1심과 2심에서 각각 징역 8월과 태형 90도를 선고 받았다. 징역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부친 윤승덕이 돈을 들여 줄을 되었기 때문이다. 태형을 받게 되자 해방 이후 윤동욱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그러나 윤동욱이 받은 태형은 형기 못지않은 큰 고초였다.

“어려서 할아버지가 옷 입으시는 것을 보면 뒤(엉덩이)를 이렇게 보는데 엉망이야”, “할아버지가 그렇게 매질을 당하고 서울서 집까지 작은 할아버지 메고 오느라 혼났다고 해”

  윤성준이 기억하는 윤동욱의 모습이다. 태형은 “태를 맞으면 절대 걸을 수 없고 사람의 등에 업혀 나오며”, “태 90에 죽음이 아니면 폐인”이 될 정도였고 외국인 선교사들도 “경찰, 감옥서에서 행해지는 태형의 잔인함은 도저히 조선인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윤동욱이 받은 태형은 결코 징역형에 비해 가벼운 처벌이 아니었다.

  이처럼 3∙1운동에 참여한 많은 조선인들은 윤동욱과 마찬가지로 군대와 헌병경찰에 붙잡혀 갖가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행해진 가장 가혹한 처벌이 태형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3월 18일 제령 제12호「범죄즉결례중개정」, 제13호「조선태형령」을 공포하고 3월 25일 조선총독부령 제40호「경찰범처벌규칙」을 공포하여 시행하였다.(4. 1) 특히「조선태형령」은 조선인에게만 적용한 법으로 ‘3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구류에 처할자’, ‘100원이하의 벌금이나 과료에 처할 자’로서 검사나 즉결관서의 장이 그 정상(情狀)에 따라 태형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태형은 볼기를 때리는 것으로 태 30을 기준으로 1일 1회 집행하도록 했다. 일제는 태형으로 절대적인 공포분위기의 조성과 최고의 ‘소송경제’라는 이중효과를 거두었다. 태형의 집행은 감옥이나 즉결관서에서 은밀히 집행하도록 하여 헌병경찰은 태형을 가장하여 합법적으로 고문을 할 수 있었다. 「조선태형령」은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를 표방함에 따라 1920년 4월 1일 폐지되었다.

  이처럼 윤동욱이 받은 태형은 매우 혹독한 처벌이었다. 이후 후유증을 안고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특히 종사(파평윤시 종중 일)를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중략)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의 3∙1운동은 옛 안산의 중심 비석거리에서 당시 주민 2천여 명이 참여하는 시흥지역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 당시 만세운동의 주도자는 윤동욱, 홍순칠, 윤병소, 이봉문 등 전통적인 유학층과 구장 김병권 등이 사전에 비밀통문을 돌리며 적극적인 주민 동원과 사전준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만세운동의 역사적 배경에는 소래산, 대부도의 대몽항쟁과 하우명, 이상기로 대표되는 충효사상, 강희맹과 이후 사류들의 경학중심의 동향에서 경세치용, 양명학이 발전하고, 1797년 정조의 행행으로 권농사를 조직하는 등, 당대 문화주역이라는 시흥지역민의 자부심이 있었다. 따라서 구한말 일제침략의 위기 상황에서 인천과 서해안 등지를 거점으로 하는 항일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민족주의자들은 ‘선실력양성론’을 바탕으로 국채보상운동(목암리 등)과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황등천면, 와리 등에 사립학교설립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결국 1910년 경술국치로 식민지로 전락한 가운데, 일제가 토지조사사업 등,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는 속에서 봉건잔재인 지주소작제가 식민지 지주제로 강화되었고 당시 93%에 달하던 수암면의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하였다. 더욱이 면사무소와 주재소는 이러한 일제의 무단통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일제에 맞서 그 하부기관인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수암면 3∙1운동을 지휘하였던 윤동욱과 지도부는 비폭력 운동을 주지하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이면에서는 촌철(寸鐵)조차도 갖지 못했던 당시 사회적 조건에서 우리 민족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저항수단이 비폭력 운동이었다.

 

 

산현동 윤민헌 선생 묘(향토유적 제16호)와 영충사(불천위 영평위와 윤지완 사당)

 

 

 

 

 

산현동 윤민헌 선생 묘갈(향토유적 제16호)

 

  이러한 비폭력 운동을 주도하였던 윤동욱은 산현동에 대대로 세거한 안산의 명문가였다. 특히 그의 직계 선대 윤민헌(1562-1628, 공조참의 역임)이 우계(성혼)를 사사하고 아들 윤강, 손자 윤지완(숙종묘 배향공신)에 이르며 가문의 준절을 이었다. 따라서 윤동욱은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선대부터 이어져 온 준절을 바탕으로 애국계몽운동의 ‘선실력양성론’에 따라 비석거리에서 비폭력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일제에 피체되어 가혹한 태형을 당했다. 이후 물산장려운동과 서당을 여는 등 일제에 맞서 민족실력양성운동에 적극 매진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996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고, 시흥시에서는 2009년 ‘시흥의 인물’로 선정하여 그의 업적을 기려 선양하고 있다.

 

 

시흥시청 로비에 부조 흉상

 

 

시흥문화원 다목적홀의 시흥의 인물 사진

 

  윤동욱의 정신은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선대부터 이어져 온 준절을 바탕으로 한말 애국계몽운동과 3·1운동의 비폭력 정신(상생), 민족독립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 나아갔던 애국애족애향의 시흥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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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경기도문화원연합회, 2015『京畿鄕土史學』第20輯에 수록된 「시흥군(始興群) 수암면(秀岩面) 3․1운동과 윤동욱(尹東旭)의 사상(思想)」논문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하시면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경기도메모리(https://memory.library.kr/) DB

https://memory.library.kr/items/show/51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