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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8월 행행과 정조사적 고찰

달이선생 2015. 12. 24. 10:26

1797년 8월 행행(行幸)과 정조사적(正祖史蹟) 고찰(考察)

-시흥지역을 중심으로-

 

 

 

(안산객사-안산시 수암동 위치, 1797년 8월 행행 당시 정조가 유숙하였다.)

 

   1797년 8월 행행은 조선 후기 진경문화를 바탕으로 문예부흥을 일으키고 세종 이후 학문군주라는 칭송과 함께 조선 시대 그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한 애민군주 정조(正祖, 1752(영조 28)∼1800(정조24)) 의 행행으로 시흥지역(현재의 경기도 시흥시권역)에서는 그 숱한 일화를 행행을 통해 미담을 만들고 그 이야기들이 지역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특히 정조의 행행은 ‘백성에게 행복을 주는(行幸)’ 것으로 백성의 어려움은 선왕 영조(英祖, 1694(숙종 20)∼1776(영조 52))보다 유연하고 개방적으로 정조가 친히 백성들에게 민원을 청취하는 것은 물론 가전상언(駕前上言)과 위외격쟁(衛外擊錚)을 통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소하여 주었다. 이러한 정조행행의 행행은 백성들은 관광(觀光)이라 불렀으며, 숙종 이후 탕평군주들이 소민보호와 함께 민국정치를 실현하였던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특히 정조가 군민일체론, 군주분신론을 정립하고 추구한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대왕 능행로 출처 : 수원과 함께하는 능행차길 체험순례(www.sulye.co.kr/beta/history4.html )

 

  1797년 8월 행행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한을 풀고 왕으로 추존하기 위한 정조의 구상을 상징적으로 시사한 사건이었다. 당시 행행에서 김포 장릉을 거쳤던 이유가 인조가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였듯이 정조도 조선의 중흥을 이끌고 백성의 지지를 받는 자신감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존하려던, 이른바, 1804년의 ‘갑자년 구상’을 1797년 8월 행행으로 시도되었다. 그 결과 현륭원을 가던 기존의 경로를 벗어나 시흥지역을 거쳐 갔기 때문에 시흥지역은 큰 은혜가 되었다. 이와 같은 당시 행행에서 시흥지역을 거친 경로는 실록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처음으로 현재의 지리적 위치로 추정, 제시하였다.

 

『정조실록』를 토대로 당시 행행경로를 지금의 지리로 추측해보면 다음과 같다.(‘〔〕’로 표시)

기존 길(창덕궁 - 관왕묘 - 노량진 배다리 - 새로간 길〔양천행궁 - 장릉 - 김포행궁 - 부평행궁 - 부평역(1호선)으로 남하 우회하여 인천광역시 십정2동 방향(동암역-1호선) - 간석오거리 옛 한양, 인천 길(수인로 42번) 합류(인천대공원) - 상아산 김재로묘 지나(인천, 시흥경계) 소래산 앞길(하연 묘 계란마을 앞길) - 신천사거리 - 중림역(과림동 중림)에서 목감천을 넘어(범안로) - 광명시 노온사동 영회원를 들리고 나와 - 중림역도(금오로 397번)로 남하 - 무지내 감조개 넘어 수인로 합류(금이사거리), 남하 -조남동 장군재(장유, 장선징 묘) 앞을 지나(시흥, 안산경계) - 안산관아(행궁) - 수인로(안산 관아 앞 넓은 곳에서 부로 민원청취) - 반월을 지나 - 수원 관문 밖 5리 지점 - 수원 구포(鷗浦, 화성시 비봉면 구포리 일대)- 옛 서문로(화성 서측)로 남하) 〕- 기존 필로로 합류 - 현륭원)

 

 

 

(『대동여지도』 수원지방도 일부 -출처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이러한 정조행행으로 당시 지역 유생들은 가문의 명예와 입신의 기회(안산관아 행행별시 시행)를 얻었으며, 특히 백성들은 정조가 밤이 되어 안산행궁 도착하여 신임 안산군수 왕도상에게 고을의 고충을 듣고는 다음날 넓은 곳에 백성들을 모아 대령하라고 명하여 친히 지역의 어려움을 묻고 민원을 청취하고 행행의 은전으로 구환(갚을 때가 지난 환곡)을 면제해주었다. 따라서 정조행행은 시흥지역에 단순한 영향에 그치지 않고 각종 미담과 설화로 만들어져 구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지역에 널리 알려진 1797년 8월 17일 안산관아의 친림과거 시행은 실제로는 정조가 유숙만 하고 이후 화성행궁에서 명을 내려 안산관아에서 제술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지만 지역민들에게는 두고두고 자랑거리였으며, 별시에 어제로 ‘연지고사’가 출제되어 강희맹과 관련이 있는 관곡지(하중동 벼슬구지에 위치한 연못으로 시흥시 향토유적 8호이다. 세조 대 명신 강희맹이 명나라 남경의 진헌부사로 가서 전당강의 연꽃을 채취해 이곳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가 명승으로 국가적인 공인을 받은 것은 물론, 이를 상속한 안동 권씨 화천군파 문중이 안산군수 권용정(權用正, 1801~1861, 강희맹의 사위로 관곡지의 소유권을 물려받은 권만형의 12대손으로 안산군수로 부임(1845년 2월 22일)하여, 관곡지 관리를 위해 연지기(連直)를 두고자 경기 감사 이계조에게 서목을 올리고 『연지사적』의 「연지수치후보초(蓮池修治後報草, 연지를 수리한 뒤의 보고서)」를 써서 남김)에 의해 위선사업으로써 문중의 사회적 위세를 강화하였다.

 

 

 

 

 

(위 안산군수를 역임한 권용정 영세불망비-물왕동 선정비군 위치, 아래 관곡지 및 은휴정)

 

  그리고 현재의 관곡지 은휴정도 하중동 은휴정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는 것은 물론, 그 이야기의 핵심인 정조가 친림하여 쉰 이야기는 역시 사실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시흥지역에 널리 알려진 정조가 행행비용 충당을 위해 호조방죽(시흥시 신현동과 하중동 사이에 쌓은 뚝으로 주변 일대 너를 호조벌을 이룬다.)을 축조하였다는 이야기는 호조방죽이 정조 이전 경종 때 백성들의 구휼을 목적으로 호조의 진휼청에서 축조(1721년(경종 원년))되었다. 그러나 정조행행을 호위하는 장용영에 진휼청 재원이 충당되고 있었다. 또한 백상형이라는 인물이 지어 바쳤다는 ‘전하봉영곡’은 그 저자 백상형이 당대 하중동(관곡)에 살았지만 정조 행행 당시 이미 죽어 관련이 없으며, 이러한 ‘전하 봉영놀이’가 1997년 제11회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의 고증자료로 언급되고 있다.

  위와 같이 시흥지역에 정조와 관련되어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들은 시흥시 향토사료실의 이승언(본명 이한기)이 연구 정리한 시흥시『시흥향토총서』(1995)들에 처음 소개되고 있는데 이들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관계의 확인 없이 시흥지역에 대한 자료로 주로 인용되고 확산되었던 것이다. 다만 위의 이야기들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 시흥지역이 조선 후기 애민군주(愛民君主) 정조와 아주 친숙하게 맞닿아 있고 그로 인해 정조의 사상과 정신을 받들어 우리 지역의 미풍양속을 일구어왔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 시흥지역의 정신문화사에 있어서 소중한 역사적 사실들이다.

 

 

 

 

*위 글은 경기도문화원연합회, 2014 『京畿鄕土史學』第19輯에 수록된 「1797년 8월 행행(行幸)과 정조사적(正祖史蹟) 고찰(考察)-시흥지역을 중심으로-」논문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하시면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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