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주도한
3월의 독립운동가 ‘차희식’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화성지역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차희식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2일 밝혔다.
주역들 위 첫째 줄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그 성명은 김교철, 김덕근, 김덕삼, 김명우, 김명호(김여근), 정순영, 윤영선, 백순익, 김종학, 김응오, 차병한, 차병혁, 차희식, 김응식, 정서송 선생
차희식(1870. 11. 10-1939. 11. 7음) 선생은 무학문맹으로 성격은 쾌활하며 교재력도 있고 힘도 장사였다. 당시 구슬리(현 화성시 우정읍 주곡리)에 살았는데 처가가 전주이씨 양영대군파로 구슬리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1915년 수원경찰서에서 도박죄로 태형 60대의 처분을 받았다가 경성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3개월을 받아 형기를 마쳤다. 1918년 川端(가와바타)순사가 부임하여 도박 재발을 주의 받고 늘 감시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사이 유(劉)서방으로부터 만세운동을 듣고 있었다. 석포리 구장(이장)으로 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주도한 차병한, 차병혁과는 일가이며 선생이 한 항렬이 높다.
차희식 선생의 일가는 연안 차씨로 강렬공 차운혁((剛烈公 車云革 1393. 태조2년-1467. 8. 6 세조13년)의 후손이다. 차운혁은 1393년(태조 2년)에 태어나 조선 세조 때의 武臣으로 자는 홍기(弘器),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포로로 잡혀 1467년(세조 13)에 죽었다. 난이 진압된 후 그 공이 인정되어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오르고 시호는 강렬(剛烈)이다. 화성시 장안면 석포 2리 마을회관 앞에 연안차씨(廷安車氏) 사당이 있으며 좌측으로 차운혁의 묘가 있다.
차희식 선생이 우정․장안면의 3․1운동에 주도적이었던 이유는 1917년에 우정면 화수리에 주재소가 설치되고 부임한 순사 가와바타(川端)가 당시 주민들을 가혹하게 취급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제는 무단통치기로 헌병경찰제를 시행하여 조선의 문화 생활 등 총체적인 간섭과 규제를 가하고 있었다. 이때 차희식 선생과 주민들은 가와바타 순사의 위생검사를 통하여 모욕을 받고 도박을 철저히 단속하여 반감을 사게 되는데 특히 선생의 경우 도박혐의로 옥고를 치른 상황이라 그러한 일이 발단이 되어 가와바타의 살해모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생은 주곡리, 석포리, 수촌리 등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이끄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선생의 활약은 일제의 심문조서에 그대로 드러나는데 3․1운동을 주도한 차병한은 소사 엄성구를 시켜 “차희식이 장안면사무소로 가니 우리 마을도 동참한다고 전하라”고 하였다는 구절과 선생이 사는 주곡리는 선생을 중심으로 장제덕, 장소진, 김흥식 등이 행동대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이 발발하는 4월 3일, 선생은 장제덕, 장소진 등과 석포리 이영쇠, 주곡리 구장 한규회 등을 만나서 만세운동이 있으니 참여하라고 선동하면서 “불참하는 사람은 그 집을 불 지르겠다.”며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참여를 적극 유도하고 함께 북을 치며 독려하였다.
또한 선생과 그 동지들은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공격할 때 주도적으로 나서서 참여하였다 특히 순사 가와바타가 총을 쏘며 도주하자 정서성, 이영쇠, 이순모, 차인범 등이 나서서 몽둥이로 구타하고 선생과 장소진, 장제덕 등이 합세하여 돌 또는 몽둥이로 난타하여 일제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이때 순사보 박재옥도 뒤를 따라 봉래암으로 도망치고 결국 주재소는 불태워졌다. 당시 처단된 순사 가와바타는 주재소에서 한 300m쯤 떨어진 곳에서 잡혀 난타를 당해 전두부골이 파열되고, 기타 두부, 면부, 경부, 흉부, 복부, 등 38개소에 창상을 입고 뇌진탕과 두개골골절 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검시소견 되었다.
순사 가와바타 검시도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보복과 함께 검거 시 붙잡혀 수원경찰서로 이송되고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아 9년 2개월 만에 출옥했다. 출옥 후 오랜 옥고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69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
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1919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수원군 우정․장안면 지역, 현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 일대에서 발발한 3․1운동이다.
일제가 작성한 우정, 장안면 만세운동도
*朝鮮總督府 陸地測量府 大正 3年 測量圖. 大正 5年(1916) 製版本. 一分萬五尺縮
서울의 만세시위와는 지방 파급의 시차를 두고 한 달여가 지나 4월 3일에 일어났다. 1925년 말 일제의 조사에 따라 우정면 1,468 장안면 922 호수로 조사되었으며 그 가감(加減)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해도 평균 2,000호로 우정, 장안면의 인구를 추산할 때 1919년 4월 3일 만세운동에 참여한 2천여 명의 시위대 규모는 한 호(戶)에 거의 한 명씩은 참여한 대규모의 적극적 항쟁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일제 순사를 처단하고 대규모 주민이 항쟁을 벌인 사례는 드물며 수원지역 즉, 현 화성지역은 이미 3월 28일 사강(송산)에서 시위 중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순사부장를 처단하였고 3월 31일 유학자 탄운 이정근 선생1이 주도한 발안장날 1,000여명이 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있던 터로 화성지역은 그 어느 곳보다 민족의식 및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이 높던 지역이었다.
또한 유명한 3․1운동에 처참한 참화로 기억되는 제암리 교회당 학살사건(4월 15일)은 바로 차희식 선생 등이 주도하였던 삼괴2 지역 즉, 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이 원인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개요는 천도교인 구장 백낙렬(수촌리), 석포리 구장 차병한, 차희식, 수촌․제암교회의 담임 전도사 김교철 등이 이웃한 제암리 안종환, 유학자 이정근 선생 등과 교류하며 대규모 시위를 모색하였다.
마침내 4월 1일 수촌리 개죽산을 시작으로 봉화, 횃불이 오르고 4월 3일 백낙렬이 이끄는 수촌리 주민과, 차병한이 이끄는 석포리 주민, 주곡리 차희식 선생과 동지들이 장안면사무소로 집결하면서 각 동네에 사람을 돌려 만세시위를 독려하였다. 시위대는 장안면사무소를 불태우고 나아가 우정면사무소를 불로 태워 부수고 화수리에 있던 순사주재소로 몰려가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이 때 참여한 주민이 무려 2000여명이 넘었다.
위아래 각각 장안․우정면사무소
이후 일제는 순사가 처단되고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이 심상치 않음을 여기고 하세베(長谷部)대위를 중심으로 특별검거반을 편성하여 대규모체포 및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헌병 경찰관 9명과 보병 5명이 수촌리에 난입하여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불을 놓아 불길을 피해 뛰쳐나오는 주민들에게 총을 난사하였으며 이날 방화로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 예배당은 물론 민가 대부분이 방화되었고 주민 6명이 체포되었다.
수촌교회
일제의 2차례 탄압으로 전소된 수촌리
일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4월 9일 대규모 시위 첩보에 따라 츠무라(津村憲美)헌병특무조장(憲兵特務曹長)을 책임자로 하사 이하 6명, 경찰관 4명에 후루야(古屋) 수원경찰서장 이하 7명과 보병 15명 협력 아래 3개반을 편성하여 오산과 우정․장안면이 있는 화수반도 일대에 대대적인 검거을 벌였다. 이때 우정면, 장안면내 25개 마을(어은리, 주곡리, 석포리, 멱우리, 금의리, 사곡리, 독정리, 이화리, 고온리, 덕다리, 사랑리, 화산리, 호곡리, 운평리, 원안리 등)을 포위하고, 204명의 시위 주모자들이 체포되었다. 수촌리는 이때도 1차에 이어 2차로 검거반이 난입하여 방화되고 남은 나머지 가호를 불태우고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불태워졌다.
이후 4월 15일 일제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두고 보지 않고 확실한 보복으로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분대 11명을 인솔하여 일본인 순사 1명과 순사보 조희창, 발안 거류민단장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아 제암리에 도착,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뒤 사격을 가해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기독교인 12명, 천도교인 25명이 무참히 학살되는 참화를 격었다. 또한 이들이 이웃마을 고주리로 이동하여 천도교인 김흥렬을 비롯한 김성렬, 김세렬, 김주업, 김주남, 김홍복 등 가족 6명을 학살하였다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아쓰다(熱田 實)와 순사 나가무라(長村淸三郞)에 의해 차희식 선생 등 34명 구속하고 수원경찰서장 경부 후루야(古屋淸威)에게 보고하였다.
일제가 수원지역 58개 마을에서 328채의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 47명을 살해했으며 17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442명을 검거하여 갖은 고문을 가하여 일제만행의 잔혹성은 국제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제암리학살사건이 집중조명을 받아서 나온 결과로 이 때 수촌리 참화를 보고 받은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박사가 수촌리를 방문하다가 제암리현장을 찾았고 이를 계기로 각국의 선교사 및 특파원, 외교관인 R. Curtice(영국부영사), A.W. Taylor(재팬 어드버타이저 특파원), H.D. Underwood(장로교 선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F. Schofield(장로교 선교사, 세브란스의학교 교수), Royds(영국 대리영사), W.A Noble(선교사, 수원지방 감리사), E.M.Cable(감리교 선교사, 협성신학교 교수), S.A. Beck(감리교 선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B.W. Billings(감리교 선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F. Heron Smith(감리교 선교사, 일본인교회 담당), 등이 이 지역을 직접 다녀가고 난민구호에 힘쓰는 한편, 일제의 학살만행을 해외에 알리고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공식적으로 그 책임을 물으며 국제여론을 진작시켰다.
이에 일제는 그 책임자를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토벌작전을 기획했던 경성헌병대장 겸 경기도 경무부장 시오자와(塩沢義夫)를 견책(譴責)하고 현장에서 총괄 지휘했던 경성헌병대 부관 겸 경기도 경무부 경시 하세베(長谷部 巖)을 중근신 15일, 수촌리 방화 책임자였던 경성헌병대장 츠무라(津村 勇)을 중근신 5일(2차 검거반 활동), 제암리사건의 책임자 아리다(有田)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마무리 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반인륜적 만행의 책임은 식민통치의 하수인에 불과한 몇몇 책임자에 대한 가벼운 문책으로 그 책임을 회피하고 기만하였다.
이처럼 ‘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이 일어나게된 배경은 크게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당성(당항성=唐城)이라는 특수성으로 일찍부터 선진문물이 자유로이 드나들던 대중교역로의 중심이었으며 12~13세기의 대몽항쟁과 16세기 임진왜란을 거치며 충(忠)의 정신이 고양되었다. 정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높은 진경시대 문화(眞景時代 文化)의 수해자가 되었으며 이후 한말 활빈당(韓末 活貧黨),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의병활동, 애국계몽활동 등 반봉건, 반외세의 민중항쟁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애족애민(愛族愛民)의 충절을 가진 화성정신이 있었다.
경제적인 배경으로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들이 대거 토지를 불하받고 많은 수의 일본인이 토지조사사업이 완성될 즈음 이주하여 이에 따라 당시 많은 농민들의 토지 이탈과 소작농화는 고질적인 식민지 농정의 모순이 되었고 당시 염업 중심의 주민생계는 일제 염업정책으로 인해 타격을 받고 과도한 염세에 따른 수탈은 급기야 염세저항운동을 야기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주민들 다수의 불만으로 내재하게 되었다.
또한 일제의 무단통치에 따른 그 하부조직인 면사무소, 당시 우정․장안면사무소와 화수리에 있던 헌병경찰제 말단 조직인 주재소의 설치에 따라 주민들이 면사무소와 주재소의 횡포에 시달리게 된 것이 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석포리 등지에서 활발히 진행되던 간사지의 간척사업 등으로 외부에서 들어 온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그들이 처해있던 고공신분(雇工身分)의 한계를 적극적인 저항으로 표출하였던 폭넓은 민중항쟁의 성과였음을 주지한다.
때문에 ‘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적극적이고 폭넓은 대중과 각계각층의 신분이 참여하고 여러 종교집단이 연합한 항일독립운동이며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순사를 처단하는 일련의 사건은 만주와 노령지방의 무장항일투쟁의 맥을 잇는 한민족해방운동사의 의의를 가진다.
한편 3․1운동이후 진행된 일제의 보복과 탄압과정에서 빚어진 당시의 참상이 이곳을 찾은 선교사의 증언을 토대로 조명되어 제암리나 고주리에 못지않게 그 실상이 참담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삼괴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항쟁의 결과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만행의 빌미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출처(논문) - 이병권, 2006「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2006국사학과 한신졸업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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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장안면지역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으로 三歸라는 지명이 오래되어지고 三槐라고 지칭되는 것은 근 100여년 정도이다. 삼귀나 삼괴는 모두가 한자식 명사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지명에 관하여서는 삼한시대 桑外國-桑外-삼귀-삼괴로 말이 변천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확한 판단을 내리긴 어렵다. 다만 삼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중국 周朝에서 “槐木 세 그루를 外祖에 심어서 三公이 이 나무를 향하여 앉은 일이 있어 三槐를 三公의 위계에 뜻으로 쓴다.”고 하여 삼공이 뜻하는 가장 높은 세 가지 벼슬에 따라 조선시대 이곳이 연고가 되었던 月沙 李廷龜(이화리), 陽坡 鄭太和(한각리), 霞溪 金尙魯(쌍봉산록에 무덤) 등, 三人의 政丞으로 유래했다는 설과 수백년 묵은 槐木이 어은리, 금의리, 화산리에 있어서 붙였다는 설 등 다양하다. 또한 건치연혁에 따르면 삼국시대 六浦라 불리고 이후 신라 경덕왕 때부터 雙阜縣이 되어 인조 22년(1644) 南陽府가 縣으로 강등되면서 쌍부현도 閉縣이 되었다. -한정택, 1991 『국향』석천초등학교 교지편집위원회 pp. 72~77 참조. 雙阜西南六十里本百濟六浦景德王改雙阜爲唐城郡領縣貞松西南三十五里本百濟松山景德王改貞松爲唐城郡領縣 右四縣高麗顯宗九年來屬 -김정호, 1864『大東地志』권2, 「京畿道四都-水原府」참조. 쌍부현(雙阜縣) 부(府) 서쪽 4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옛날 육포(六浦)이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와서 본부에 예속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권9,「水原都護府」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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