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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그리고 '윤동주'

달이선생 2009. 12. 14. 09:36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그리고  ‘윤동주’ 


 

 

 


 

생애

  윤동주 시인(이하 '윤동주')은 당시 만주국 간도성(間島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1)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에서 1917년 12월 20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동주의 '동(東)' 자는 「명동」에서 따 온 것으로 그만큼 이 고장 명동에 대한 애착은 각별하고도 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866년 그의 증조부 윤재옥이 43세 때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 이끌고 북간도 자동(紫洞)으로 옮겨 온 후, 1900년 조부인 윤하현(尹夏鉉) 때에는 다시 명동촌으로 이사, 자수성가하여 가세는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으며 윤동주 시인과 그의 동생들이 태어난 생가는 이 고장에서도 돋보일 만큼 큰 기와집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 고장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리 만큼 그 경관이 뛰어난 것으로도 이름난 곳이었다.

 

  명동촌의 전경이다. 명동촌의 산야는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산천을 많이 닮아있다. 아니 똑같았다.우리 산천이 백두산에서 뻗어나와 한반도의 백두대간을 이루듯 이곳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도 백두산에서 뻗은 산세와 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 뿌리내린 옛사람들 역시 우리 고향과 똑같은 곳을 찾아서 정착했다고 했는데 역시 빈말은 아니었다.

 

 

 1925년 명동 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 등과 문예지 《새 명동》 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 중학교 입학2)

 1935년 평양 숭실 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 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 입학3)

 

 

 

윤동주 생가

  윤동주의 고향 마을 명동은 '밝아오는 동이(東夷)마을'이라는 뜻으로 선각자 김약연 義士(목사-윤동주의 외조부)가 명동 교회와 함께 세운 터전이다. 지금의 윤동주 생가는 9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생가는 전형적인 우리 북방지역의 가옥의 형태인 난방과 생활의 공간인 정주간(세 번째)이 있고 고유의 팔작지붕으로 멋을 한껏 냈다. 그리고 이 지방의 우리 동포들에 가옥에서만 보이는 특징인 처마 밑 기와를 여러 장 겹쳐 쌓는 특징도 있다. 생가 왼쪽 끝 방에는 윤동주 시인의 서거 64주년을 기리는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다. 시인이 떠난 그 자리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들고 나지만 시인의 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이어가는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쓸쓸함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현실 인식의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 그의 내면과 고통은 차츰 시에 대한 집념의 확산으로 승화시키게 되었다. 밖으로 중일(中日) 전쟁4)이 확대되어 갔으며 안으로는 한국인에 대한 경계가 심해졌고 특히 지식인에 대한 증오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언더우드 일가가 창립자가 되고 선교사 측의 정신적인 뒷받침과 국제적인 관심도가 높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으려니와 매우 자랑스러운 일임이 틀림없었다. 걸핏하면 연전 교수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곤 했던 시기였다.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일정한 법이 없는 세상이었다.

  이러한  연희전문에는 그가 귀를 쫑긋하고 늘 경청하였던 외솔 최현배(1894-1970)가 있었고 위당 정인보가 있었다. 서슬퍼런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윤동주가 우리 말과, 민족사를 되새기게 해준 큰 스승들이었다.   

 이따금 윤동주는 누이 혜원과 동생 일주에게 태극기의 모양과 무궁화, 애국가, 기미 독립 만세, 광주 학생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는 민족주의 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한 묵시적 동조를 꾀한 것으로 여겨진다.5)

  윤동주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정직하고 맘씨가 깨끗할 뿐 아니라 폭넓은 인간애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장기의 가정환경이나 곧은 인품에서 나온 것으로서 순수한 열정의 솟아남이었다. 외유내강(外柔內剛),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이렇게 표현하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대인관계에서 모가 나는 일이 없었고 누구도 그를 지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는 엄격하였다. 그는 자신을 변명하는 일이 없었다.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변명하는 데는 너그러웠지만 스스로 용서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일제의 분노나, 울분, 비애와 절망 등을 조용히 안으로 깊이 삭이면서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는 온유한 성품이었다. 그는 행동파이기보다는 사색가(思索家)에 가까웠다.


 1942년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6)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북간도 용정으로 귀향하려던 윤동주는 사상범으로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 명분은 사상이 불온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비국민(일본 신민이 아니라는 뜻), 서구 사상이 농후하다는 것 등으로 송몽규와 함께 교토 경찰서에 검거된 것이다.

  당시 일제 경찰에 표적이 된 이유는  사법성 형사국 사상월보 제109호(1944년 6월)기록에서 일본 내 조선인들 모임을 만들어 그룹 활동을 하면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정신 고양 등 여러 활동을 하였으며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특고월보(내무성 경보국 발행. 특고경찰=특별고등경찰은 주로 사상범을 다룸)에서 윤동주의 행적을 파악하며 송몽규와 함께 당시 금기시 되었던 조선어로 말하고 시를 써 그들이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사상범이었고 특히 윤동주가 우리말로 쓴 시는 증거로 채택되었다. 이는 '교토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명목으로 윤동주와 송몽규 등은 검거되었다.

  당시 이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당숙 윤영춘이 경찰서를 찾았을 때 윤동주는 일본 경찰의 지시로 자신이 쓴 시를 일본어로 번역 중이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 법원은 죄명 조선독립운동, 징역2년으로 판결하여 후쿠오카 형무소 수감되어 10개월 만에  1945년 2월 16일 만27의 나이로 죽었다. 조국이 광복되기 꼭 반년 전의 일이었다.  

 

   현재 명동촌 기념관 건물인 예전 예배당이다. 예배당 오른쪽 비석은 이곳을 일군 김약연의 비석이 서있는데 문화혁명1966-69) 당시 홍위병들이 들이닥쳐서 예배당과 비석을 부셔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방치되다 최근에 복원을 하면서 비석도 깨진 파편을 모아 다시 세웠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부분이 파손되어 당시 문화혁명의 영향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비석보다 더 오른쪽에는 나무그루터기가 남아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불령선인(일제가 부른 애국지사들의 호칭)의 소굴이라고 지목한 일제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명동촌 주민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면서 나무에 목을 메달았는데 그 때 그 나무의 밑둥이다. 명동촌은 무장항일운동인 1920년대 봉오동, 청산리 대첩 등에 연달아 대패한 일본군에 있어서 제일 눈에 가시였고 많은 간도 지역 동포를 학살한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 때 제일 먼저 일본군이 들어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한 북간도의 제암리(화성시에 위치한 마을로 3.1운동 당시 일제는 주민들을 예배당에 모아 놓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와 같은 곳으로 우리 항일운동의 중심지이다.

 

 

■ 윤동주의 사인(死因)

  이때 사망한 윤동주의 사인을 두고 논란거리이다. 특히 윤동주가 죽자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았다. 그때 같이 투옥되어 있는 송몽규를 면회하자 송몽규는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는 말과 일본인 간수가 '하루만 늦게 왔어도 시체를 실험용으로 가져갔을 거'라고 했다는 것이 윤영춘의 증언이다. 따라서 그의 사인이 단순한 옥고에 따른 죽음이 아닌 생체실험7)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최근에 이와 같은 윤동주 사인에 대해서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에 인접했던 규슈제국대학의대가 바닷물을 이용한 수혈대체제를 개발 중이었다는 증언과 함께 당시 후쿠오카형무소 수형자를 대상으로 규슈제대의대가 생체실험을 했다는 자료가 나왔다.

  때문에 당시 윤동주 및 송몽규, 모두 이 실험을 통해 사망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실험이 자행된 이유는 당시 일본이 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각지 동원된 병력이 전투를 하면서 출혈에 따른 병력 손실이 커졌고 따라서 일제는 문부성을 중심으로 각 의대를 연결하여 피를 대체할 수 있는 수혈대체 물질을 개발하기에 이르는데 그때 주목한 것이 보통 쉽게 얻을 수 있는 바닷물이었다. 따라서 윤동주는 이 바닷물을 주사기로 투약된 것이다.

  이와 같은 윤동주가 죽음에 이르게 된 기록은 현재 일본 고등학교 3학년 현대문학 교과서(1992년 처음 편찬, 편집자 노가미 다츠히코)에도 실려 있어 주목된다. 교과서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윤동주의 대표적 서시 등이 수록되고 그의 생애와 함께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가 일제의 생체실험에 따른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은 윤동주를 기리는 일본 동인들의 활동 결과였으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리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이곳 만주의 북간도는 현재 중국의 행정구역상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연변에서 연길이 제일 번화한 대도시라면 위 용정은 우리 민족이 제일 먼저 정착하여 간도를 개척한 중심지였다. 때문에 청나라와 대한제국은 국경을 확정짓지 못하고 갈등을 빚었는데 대한제국에서 이곳에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파견하여 직접관리하며 우리의 관할지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청과 비밀리 간도협약(1909)을 체결하여 청나라로 영토를 넘겼다. 일제는 그 댓가로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었는데 이는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얻은 것으로 일제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하여 북간도는 우리의 실효적 영토에서 중국의 영토로 뒤바뀌게 되었다. 우리 선조가 많이 들어와 산 북간도의 용정(세 번째 사진 전경 일송정에서 본 모습이다.)에는 일제의 출장소 및 영사관이 제일 먼저 설치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선조(한인)들의 북간도 들어온 이유는 기근에 허덕이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 지방 수령의 탐학을 피해온 사람, 동학과 의병을 한 죄로 떠나온 사람, 나라 잃은 슬픔에 독립운동을 위해 들어온 사람 등, 북간도에 들어온 사람들의 사연은 저마다 달랐지만 이곳을 터전으로 우리의 삶을... 역사를 시작하는 것에서는 한 마음 한 뜻이었다. 그래서 북간도는 우리의 삶과 역사가 묻어난다. 용정시 남쪽으로 야트막하게 높이 솟은 일송정이 위치하고 이곳을 젖줄인 해란강(네 번째 사진)이 흐른다. 예전 독립운동가들이 일송정에 올라 고국을 그렸고 일제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지켜보던 자연 망루 역할도 한 곳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정상에서 회의를 하고 해산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일송정에 오르면 용정시와 해란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용정시는 윤동주가 명동촌을 나와 이사한 곳이며 윤동주가 다닌 대성중학교와 은진학교가 위치한 유서 깊은 곳이다. 3.1운동 당시 북간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항일시위도 일어났다.(3.13만세운동) 해란강 주변으로 넓은 논이 펼쳐져 있다. 본래 쌀경작을 하지 못하는 추운 지역이었으나 우리 선조들이 들어와 벼농사를 시작하고 그 북방한계선이 무려 흑룡강성 하얼빈 지역까지 이를 정도로 우리의 농경 기술은 뛰어났고 한인들의 생활력이 강하였다.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논을 팔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가 늘어나고 한국의 경제사정이 좋아 한국으로 일하러 들어오는 사람도 많다. 때문에 우리 선조들이 개척한 수많은 농토들이 현재 중국 한족들이 거의 헐값에 넘겨받고 있다고하니 그 찹착함을 금할길이 없다.

 


■ 오늘 우리의 윤동주는...

  윤동주가 죽고 윤동주의 평가는 '해방이후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이는 젊은 나이에 일제의 횡포에서 부당하게 생을 마감했던 젊은 시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우리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윤동주의 이력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유는 윤동주가 항일저항시인으로의 위치를 가지나 특별히 항일운동에 진력한 전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윤동주는 일본유학을 위해 북간도 용정을 떠나 당시 일본 유학을 위해서 꼭 필요했던 도항증을 발급받고자 창씨개명을 하였던 이력은 논란거리가 된다. 이는 항일운동에서 직접적인 투쟁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나 당시 독립지사들은 비협조 내지 철저한 일본을 외면하는 것으로 자기 투쟁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던 것을 본다면 윤동주가 선택하였던 일본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한 것과 릿쿄, 도시샤대학 등의 대학 입학 역시 일제의 직접적인 협력은 아니라고 해도 일제의 제도권 안에서 당시 식민지 청년으로 엘리트 코스이자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걸어 간 건 분명한 사실로써 이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항일정신이 분명히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기도 하고 윤동주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많은 논란이 빚어졌다. 그래서 막연히 그가 자라온 북간도 용정 명동촌의 항일역사성과 그의 외조부 김약연 등의 영향이 그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가치형성에 있어서 직간접으로 영향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 사촌이던 송몽규(김구의 임시정부 참여로 투옥)처럼 당시 항일운동에 직접 참여치도 않았고 오히려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모습은 그의 이중성으로 폄하되는 이유가 되었다.

  이와 같이 젊은 나이로 요절한 윤동주...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기도 하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분명한 현실적 고민과 함께 시대적 소명의식은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윤동주의 과오가 되었던 일본유학은 윤영춘의 아들이자 가수 윤형주 씨는 자신의 아버지 윤영춘이 윤동주를 끔찍이 사랑하여 그의 능력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집안 어른들의 이해를 구해 윤동주를 설득하여 해외유학 가서 많은 문물을 보고 배우라고 일본유학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윤동주는 직간접적으로 항일정신이 배웠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도항증 신청을 위해 1941년 平沼東柱(평소:히라누마 도슈)라고 창씨개명을 한 것은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윤동주도 그 심적 고통이 컸던지 그가 남긴 '참회록'에서 그의 심정을 구구절절하게 밝히고 있다. 1941년 일본 대학으로 유학 등 자신 주변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삶을 걸어가야 하는 길에서 이 젊은 시인은 나름대로 고뇌와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식민지 지식인들이라면 당시에 누구나 했을 고뇌로 윤동주 역시 이를 벗어날 수 없었고 특히 윤동주의 가계와 윤동주가 자란 간도의 역사, 명동촌의 역사는 더더욱 그를 더욱 깊은 고뇌와 성찰로 이어지게 하였다.

  그래서였던지 그가 처음 시작한 유학길은 집안 어른들의 의대진학 권고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족지식인이 자유롭게 강단에 설 수 있었던 선교사가 세운 연희전문이었고 이 시기에 그는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 대부분이 이 시기에 쓰여 졌고 우리가 아는 그의 대표적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도 이 때 만들어진다.

  '참회록'을 통해 심경이 어지러운 가운데 일본유학에 오른 윤동주는 일본에서도 도쿄의 릿쿄대학을 선택했다. 릿쿄대학이 미국선교사가 세운 학교라는 점이 주요 했던 것이다. 이렇듯 그에게도 일본유학은 마음의 짐이었다. 그래서 일본유학시절 그가 쓴 시는 단 5편에 불과하며 이것도 정식으로 펴낸 것이 아닌 지인에게 편지를 통하여 전해진 것이고 '쉽게 씌어진 시'에서 당시의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잘 나타나 있다.

  윤동주는 결국 도쿄 생활을 접고 사촌 송몽규가 있는 교토로 옮긴다. 학교도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 생활도 그리 오래지 않아 1학기 만에 북간도 용정으로 돌아가기로 하였고 그 와중에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귀향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고 체포되었던 것이다. 

  일본유학시절을 살펴보면서 윤동주는 선구자적이고 민족항일운동의 본거지 북간도에서 자라 그가 가진 사상이 분명히 민족주의라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선택했던 일본유학과 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창씨개명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윤동주 자신이 겪었던 고뇌와 성찰, 그리고 일본유학에서의 행적 등은 윤동주 나름대로 직접적인 투쟁이 아닌 작은 움직임으로 마음으로 끊임없이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며 식민지 젊은 지식인으로서 고뇌와 성찰로 살았고 늘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윤동주는 자신이 행동에 대해 그 어떠한 변명도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오늘날 한국사회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시인이 바로 윤동주가 아닐까

  그리고 이렇듯 젊은 시인의 고뇌와 성찰이 있었기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윤동주가 머물렀던 교토와 처음 유학을 했던 릿교대학동문 등 윤동주의 시적 재능과 문학성에 따라 일본 동인들이 윤동주를 기리고 기념하는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이 일본 현대문학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윤동주의 위치는 대단한 것이다.8) 이렇듯 민감한 한일정치사에서 그간 윤동주를 매개로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는 것을 본다면 상당히 주목할 만한 모습으로 현재 윤동주는 일본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우리의 자화상이 되고 있다.

  윤동주는 이젠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대표적 한일양국의 문화교류에 대명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가 남긴 시

윤동주가 살아생전 꼭 내고 싶었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그의 친우 강처중과 후배  정병욱이 해방 후 1948년 초판을 낸 이후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일본판, 영문판, 러시아판 등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윤동주하면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서시'다. 윤동주의 모교인 대성중학교에 가면 본 건물 중앙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 시인은 떠났지만 그의 유작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 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어 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본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위 시는 1941년 연희전문(연세대학교 전신)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결심, 그간 창씨개명을 거부하였지만 일본 도항을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통한 정식 개명이 필요하므로 이를 결행하면서 그 심정을 쓴 시. 시를 쓰고 다음날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하였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쉽게 씌어진 詩(시)9)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육첩방10))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天命(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沈澱(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時代(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十字架(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동주야  11)

                                       -문익환12)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은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대성중학교(현재 용정중학교)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로 민족주의를 이념으로 1921년10월 대성중학교로 설립돼 많은 독립 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1946년 용정시내 5개 중학교와 통합되어 현제는 ‘용정 제1중학교’라고 한다. 용정 제1중학교 교문으로 들어서 오른쪽으로 돌면 옛 대성중학교 건물과 윤동주나 문익환 등 대성중학교가 배출한 동문을 소개하는 4개의 자료실이 있다. 특히 제4전시실은 윤동주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그의 생애와 문학 전반에 걸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2009년 6월 당시 우리 조선족 동포가 많이 거주하고 다니는 학교지만 공식적으로 조선말과 글씨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했다. 우리네 학교의 야외 게시판 같은 곳인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학생들이 '광국광 60주년'이라고 쓰고 있었다. 묻고 싶었다. 너희들의 조국을 아느냐?라고...


 

 

 


참고 및 사진자료 :

두레자연중학교 2009 중국이동수업자료집

 -두레자연중학교의 사회 교사로 재직하며 2009년 6월 초 10박 11일의 일정으로 만주 하얼빈을 시작으로 전역을 두루 살펴보는 이동수업을 하였다. 그 때 국어 박대현 선생님과 만든 자료집과 나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이다.

 

http://blog.daum.net/ilovepk달이샘의 역사나들이

 

 

 


1) 항일 운동의 고장 ‘명동촌’   

  당시에 명동 출신이라 하면 의례 배일(排日) 운동가의 낙인이 찍힐 만큼 삼엄한 대외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평생 일본(日本)이라고 부르기가 싫어서 왈본(曰本)이라고 불렀던 지사(志士)들이 많았는데 문재린(文在麟), 윤영석(윤동주의 부친), 문성린, 김석환 등이 그들이었다. 북간도에서 '동만(東滿)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약연 선생이 터를 잡고 있던 명동은 한 시인의 풍운에 찬 생애를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고장이었다. 개화된 집안에서 태어난 윤동주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외숙인 김약연 선생의 가르침과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당시 3·1만세 후에 결성된 '북간도국민회'는 상해 다음가는 임시정부 구실을 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봉오동․청산리(靑山里1920)대첩을 북간도국민회가 주도했으며 그 활약이 눈부셨다. 이 청산리 보복으로 일본군은 간도 지방의 우리 민족 3만여 명을 무참히 학살하였다.(간도참변) 윤동주 시인을 태어나게 하고 그가 자란 지리적 상황 배경은 바로 이런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었다. 그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그 정신적 배경에는 이토록 사무친 민족적 비애와 울분이 서려 있었다.


 

2) 은진 중학 시절

   윤동주의 취미는 다방면에 걸친 것으로서 축구, 농구, 웅변, 문예, 편집 등을 위시해서 그림과 디자인 방면까지 고루 취미와 소질이 안 미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수학과 기하학에 특히 재미를 느낀 듯했고 손수 재봉틀을 돌려 기성복을 고쳐 입거나 나팔바지를 곧잘 만들어 입기도 했다.


 

3)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4)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盧溝橋事件)을 시작으로 일제는 본격적인 중국침략을 나섰다. 이어 1941년 12월 7일에는 전쟁을 확대하여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을 태평양전쟁(일제는 대동아전쟁이라 표현)이라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맞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로써 인류역사 전체에 큰 비극이었던 전쟁은 종식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가 전쟁물자 수탈과 함께 징용, 징병, 위안부 등 인적 수탈 등 총체적인 수탈로 어려움을 겪었다.


 

5) 그 당시 만주지방젊은이들의 소원은

 고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길림(吉林)을 거쳐 북경까지 갔다 온 송몽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으로 옮겨간 문익환 등을 더할 나위 없이 부러워하던 시인 윤동주 자신도 마침내 1935년 9월 평양숭실중학으로 배움의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학과가 서로 달랐을 뿐 아니라 학기 도중에 갔으므로 3학년 2학기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야 했다.


 

6) 송몽규

  사진 왼쪽부터 송몽규 문익환

 

   1917년 9월 28일 명동촌 출생. 1925년 명동소학 입학, 그후 은진중학,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중국 국민당의 지원으로 김구 선생이 꾸린 사관학교), 대성중학, 연희전문학교 등을 거쳐 1943년 윤동주와 함께 일본 교토제국대학 유학.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 학창시절부터 항일운동에 투신한 송몽규는 일본 유학중 '재경도조선인학생민족주의집단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1945년 4월 18일 옥중 순국.


 

7) 미국 국회 도서관에 소장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에 따르면 일제시대 생체실험에 관한 재판 기록이 있고 그 중에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국대학에서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 개발을 위해 미군을 대상으로 바닷물을 이용해 생체실험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일본 문학 평론가 고노 에이지 역시 윤동주 사인을 생체실험에 따른 바닷물 투약이라고 밝힌다.)


 

8) 도쿄 야나기하라는 릿교 대학시절 윤동주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내 세상에 알렸으며 동지사 대학의 우지고 교수는 윤동주 체포와 재판에 대해서 연구하고 이부끼 고는 윤동주 전집을 일본어로 최초로 번역하고 윤동주의 죽음에 관한 글을 자신의 번역 시집에 남기는 등 여러 뜻있는 일본 동인들의 윤동주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9) 일제 강점하의 시대에 살면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하나 현실은 이를 쉽게 허락지 않는 상황에서 오는 지식인의 고뇌와 자기 성찰을 형상화. 내면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과 성찰을 통한 화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0) 육첩방 : 일본식 다다미방


 

11) 일흔이 넘은 문익환 목사님이 영원한 스물 아홉 윤동주에게 보내는 시


 

12) 명동촌이 낳은 인물 - 늦봄 문익환

 

 

  명동촌에서 함께 자란 윤동주와 절친한 문익환 목사님... 목사님이라기 보다 요즘은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로 더 알려진 분이다. 늦봄 문익환은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였으며 남북분단을 고통스러워하며 통일운동에 주저하지 않았던 민주 평화통일 운동을 이끈 혁명가이다.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늦봄이다. 1918년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윤동주와는 한 살 터울로 은진중학과 광명학원, 연희 전문학교에 서 함께 배움을 이어 갔다. 

   이후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교)을 졸업(1947)하고 목사 안수를 받는다. 미국 프린스톤대학에서 신학공부(1949)를 하고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한신대학과 연세대학에서 강연도 하고, 한빛교회에서 목사로도 재직한다.

  1968~1976년에는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종교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민주주의 운동과 민족의 통일을 위한 활동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1992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1994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평생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현재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늦봄 통일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수상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 고은 시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