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역사)

매천야록(황현)에 보이는 이순신 장군 및 조선의 명신(황희, 송시열 등)

달이선생 2009. 11. 4. 19:22

梅泉野錄 卷一上


甲午以前


六五, 我朝名臣, 有以諡而行于世者三人, 曰翼成公則知其爲黃喜(厖村), 曰文翼公則知其爲鄭光弼, 曰忠武公則知其爲李舜臣, 有以封贈者一人, 曰遼東伯則知其爲金應河也。


 

 

육십오 번째, 우리조선시대 명신으로서 시호를 가지고서 널리 행세할 수 있는 이는 세 분을 들 수 있다. 익성공하면 즉 방촌 황희 임을 알고 문익공하면 즉 정광필이 임을 알고, 충무공하면 즉 이순신 임을 알 수 있다. 봉증으로써 행세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 있는데 요동백하면 즉 김응하 임을 알게 된다.

 

독음(讀音): 매천야록 권 1 상 갑오이전 육오 아조명신, 유이시이행우세자삼인, 왈익성공즉초기위황희(방촌), 왈문익공즉지기위정광필, 왈충무공즉지기위이순신, 유이봉증일인, 왈요동백즉지기위김응하야


 

주(註) 

 

상주 옥동서원에 봉안된 황희 영정

 

①황희(黃喜, 1363~1452)본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호 방촌(厖 村). 초명 수로(壽老). 시호 익성(翼成). 개성(開城) 출생.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사헌감찰(司憲監察)·우습유(右拾遺)·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형조·예조·이조 등의 정랑(正郞)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廢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南原)에 이배(移配)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②정광필(鄭光弼, 1462~1538)본관 동래(東萊). 자 사훈(士勛). 호 수천(守天). 시호 문익(文翼).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 ·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에게 극간(極諫)하여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부제학에 복직, 이조참판 ·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510년(중종 5) 우참찬(右參贊)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수습한 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가 파직되고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면직되었다. 1537년 총호사(總護使)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로 김해(金海)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김안로의 사사(賜死)로 풀려났다. 이때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등이 영의정에 추천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었다. 중종의 묘정(廟庭)과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용궁(龍宮)의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배향되었다. 문집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③김응하(金應河, 1580~1619)본관 안동. 자 경의(景義). 시호 충무(忠武). 철원 출생. 1604년(선조 37)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말직으로 전전하다가, 1608년 박승종(朴承宗)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자 그 비장(裨將)으로 기용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선전관으로 임명되고, 삼수군수(三水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 건주위(建州衛)를 치려고 명(明)나라에서 원병요청을 하자, 이듬해 도원수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참전하였다. 명나라 유정(劉綎)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부차령(富車嶺)에서 패하여 자결하자, 3천 명의 휘하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1620년 명나라 신종(神宗)이 그 보답으로 요동백(遼東伯)으로 추봉(追封)하고, 처자에게는 은(銀)을 하사하였다.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철원의 포충사(褒忠祠), 선천의 의열사(義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六六, 忠武公祀孫文榮, 貌寢氣不揚, 丙子(高宗十三年)春, 黑田淸隆泊江華, 朝野震懼, 文榮適謁雲峴, 雲峴戲之曰, 君乃祖孫也, 破倭有何良策, 文榮應聲曰, 大監勿急, 此易禦爾, 計將安出, 曰忠武公八世孫, 乃爾孱劣, 淸正八世孫, 有何莫勇, 聞者絶倒, 時傳淸隆爲淸正八世孫, 而文榮距忠武亦八世孫也。

 

흥선대원군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구로다 기요타카

 


육십육 번째, 충무공의 사손 이문영은 됨됨이가 활발하지 못하고 기개도 시원치 않았다. 병자년(고종 13년, 서기 1876) 봄에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이 강화도에 내박하여 조야가 공포를 느꼈다. 이문영이 대원군을 알현하여 만났는데 대원군이 희롱하여 이르기를 “자네가 충무공의 후손인데 왜놈을 격파할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는가?” 했다. 이문영이 힘주어 말하길 “대감은 급하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막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했다. “계책이 어떠한 것인가?”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충무공의 팔대손이 못났는데 청정의 팔세손인들 어찌 영특하고 용감하겠습니까?” 하여 듣는 사람들이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고 한다. 그때의 청륭은 청정의 팔대손이라 전하여졌으며 문영 역시 충무공의 팔대손이었다.

 

독음(讀音):육육, 충무공사손문영 모침기불양 병자(고종십삼년)춘 흑전청륭백박강화 조야진구 문영적알운현, 운현희지왈 군내조손야 파왜유가양책 문영응성왈 대감물급 차역어이 계장안출 왈충무공팔세손 내이잔렬 청정팔세손 유하막용 문자절도 시전청륭청정팔세손 이문영거충무공역팔세손야


주(註)

①雲峴: 조선 26대 왕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

②淸正: 임진왜란 때 조선 제1선봉장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黑田淸隆(구로다 기요타카) 일본 메이지 때의 군인 및 정치외교가 강화도조약의 주역

 

  흥선대원군과 이순신 장군 8대손 이문영의 일화이다. 구국을 열정을 다하셨던 이순신 장군님과 달리 유약하다 못해 못난 후손의 일화를 보니 당시 구한말 우리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보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六七, 先儒推尤庵(宋時列), 忠勳推忠武公(李舜臣), 朝家所以待其後者甚渥, 他名臣家無與爲比, 但兩家雲仍,居官貪汚, 無以廉白聞者。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과 송시열 초상(1778년 그린 것으로 추정 작자 미상)

 

육십칠 번째, 선대 유학자로는 우암 송시열을 추대하고 충의를 다하여 공을 세운사람으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추대하는데 조정에서 그 후손들을 대접함이 심악(깊고 두텁)하여 다른 명신가문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단 두가문의 후대자손들은 벼슬을 하면서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워 청렴결백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독음(讀音): 육칠 선유추우암(송시열) 충훈추충무공(이순신) 조가소이대기후자심악 타명신가무여위비 단양가운잉 거관탐오 무이결백문자

 

주(註)

①忠勳: 忠臣으로 나라에 업적이 많음 ②雲仍: 雲孫과 仍孫, 遠孫을 일컬음

 

  조선 후기 이순신 장군가문은 명망있는 가문으로 촉망 받았지만 그 후손들의 폐단이 극심했다. 집안에 걸출한 인물이 나고서 이후 그 인물에 상응하는 인물이 다시 나오긴 예나 지금이나 참 힘들다. 조상의 후광으로 일신과 가문이 풍족히 살면서도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자기 자신을 다독이지 못했던 현실은.. 조선 사대부가의 폐해와 함께 나라가 망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기호의 우암 송시열 가문도 그 횡포가 대단하였으며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혼사에서 이순신, 송시열, 이황 등의 가문이 최고의 혼사처로 명망이 높았으며 이는 다 조상의 후광으로 그 후손들이 누렸던 호사였다. 


                          梅泉 黃現, 李章熙 譯, 1982 『韓國名著大全集』 大洋書籍 참조.



 


참고(參考)

『매천야록』은 매천 황현1)이 쓴 역사서로 1864년 고종이 등극한 해로부터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방)이 이루어지기까지 47년간의 역사를 매천 자신의 견문을 기초로 하여 섬세하게 기록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매천야록의 원본이 완성된 시기는 1910년 8월 말인데 책으로 간행된 것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것이 처음이다. 매천야록이 다소 늦게 세상에 나온 이유는 매천의 유언에 의해 그 후손들이 깊이 간직하였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그 내용으로 인하여 일제강점기 동안은 출간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매천야록의 구성은 총 6권 7책으로 권 1의 상·하는 갑오개혁까지의 약 30년의 기간을 기록하였고, 권 2는 고종 31년부터 35년(1894~1898년)까지, 권 3은 고종 36년부터 40년(1899~1903년)까지, 권 4는 고종 41년부터 42년(1904~1905년)까지, 권 5는 고종 42년부터 44년과 순종 원년(1905~1907년)까지, 권 6은 순종 원년부터 4년(1907~1910년)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 책 권 2에서 권 6까지의 내용이 갑오개혁 이후부터 한일합방까지 17년간의 기록을 다루고 있는데, 전체의 본론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일제의 침략 과정과 이에 대응하는 민족운동의 실상을 서술하였다. 또 갑오년(1894년)과 을미년(1895년)의 서술 분량이 많고 갑진년(1904년)이후의 사실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매천야록에 사용된 자료는 당시 서울로 다니던 가까운 지인들에게 듣거나 매천 자신이 본 것 등이었다. 때문에 정확한 연월일이 없거나 연대순이 바뀐 것도 있는 관계로 다소 과장된 기록들도 찾을 수 있다. 또한 은둔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신문기사를 많이 인용하고 있기도 하여 외국의 사건들이나 진기한 소식등도 찾아볼 수 있다. 1905년 이후부터는 신문의 인용기사가 많아지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신문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한편 매천야록은 당시의 주요 정사는 물론이고 비사 및 야사, 민중의 여론까지 함께 쓰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 매천의 학문적 깊이와 예리한 비판정신은 이 책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런 이유로 매천야록은 주변에서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건 또는 풍문 등이 다채롭게 수록되어 있어서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매천야록의 저술 동기는 매천 황현의 학문적 경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천은 어려서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천권의 서적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매천에게 많은 독서를 통하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취미를 갖게 해 주었다. 결국 직접적인 저술 동기는 아니더라도 그의 관심과 취미 위에 당시의 혼탁한 정치현실과 위기에 찬 국가의 운명을 바라보며 역사 서술에 대한 결심을 하게 하였을 것이다. 진실 된 기록의 보존을 통해 일제의 침략과정과 내용 그리고 민족운동에 대한 사실을 밝히고,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보존을 넘어서 동시대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방향제시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 황현(黃玹)의 호(號)는 매천(梅泉), 자는 운경(雲卿)이다. 매천 황현은 1855년(철종 6년)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서석촌에서 황시묵(黃時黙)과 풍천(豊川) 노씨부인(盧氏夫人)의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세종대에 영의정이었던 황희(黃喜)와 임진왜란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충청병사 황진(黃進),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黃暐)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이후 그의 집안은 특별히 내세울 만한 인물 없이 몰락한 시골 선비의 집안으로 남아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황현은 11세에는 시를 짓고 20세 되던 해(고종 12년)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문장가 이건창과 교우하며 시를 지어 매천 황현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883년(고종 20년) 황현은 보거과에 응시하여 초시에 장원으로 뽑혔으나 매천이 시골 사람이라는 것이 이유가 되어 2등으로 밀려나 당시 중앙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한 회의와 다음해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인해 벼슬로 입신하여 출사를 하려던 생각을 접고 낙향한다.

   이후 매천은 1888년(고종 25년) 그의 나이 34세 되던 해 부친의 당부에 의해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생원會試에 응시하여서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또 다시  1890년(고종 27년)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게 된다.

   매천은 이후 『매천집(梅泉集)』,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 『동비기략(東匪記略)』 등의 책을 저술하고 45세 때(1899년)에는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언사소(言事疏)」를 지어 조정에 개혁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며, 54세 되던 때(1908년)에는 국가의 존립을 위한 후진 양성을 위해 근대식 학교인 호양학교를 구례에 세우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 후 매천은 벼슬을 버리고 중국으로 간 그의 벗 김택영(金澤榮)을 따라 중국으로 가려하였지만 실현하지 못하고 다만 역대 중국의 인물 가운데 난세에 절의로 이름 높은 인물 열 사람의 초상을 그려 시를 지어 붙이고 병풍으로 만들어 둘러놓고는 두문불출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었다는 경술국치의 소식을 접한 매천 황현은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을 식음을 전폐 한 채 괴로워하다가 9월 10일 새벽에 절명 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을 하였다.

  정부는 매천 선생의 의기를 기려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했다.

 

 

매천의 절명시(絶命詩) 4수

 

亂離袞到白頭年 (난리곤도백두년)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末然 (기합연생각말연)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 (금일진성무가내)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 (휘휘풍촉조창천)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도다.


妖氣掩翳帝星移 (요기엄예제성이)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제성(帝星)이 옮겨지니

九闕沉沉晝漏遲 (구궐침침주루지)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 (조칙종금무복유)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 (임랑일지루천사)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비렸어라.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曾無支厦半椽功 (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지시성인불시충)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止竟僅能追尹殺 (지경근능추윤살)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當時愧不躡陳東 (당시괴불섭진동)         당시의 진동(陣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