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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천추태후가 남긴..

달이선생 2009. 11. 2. 16:38

 

  지난해 KBS의 야심작 천추태후가 연일 안방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에 극중 인물들의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며 이들의 배경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대체로 그 중심세력으로 천추태후의 서북세력, 발해의 후예 강조, 신라 부흥세력이자 여진과 결탁한 김치양, 그리고 최섬 등 경주세력이 서로의 알력을 형성한 가운데 강감찬과 같은 중립세력이 포진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드라마의 설정은 역사적 사실과는 맞는 것일까? 아쉽게도 극중 초반 어린시절 설정에서 극적 요소를 만들기위해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논리를 폈다.

 

  먼저 발해의 후예로 나온 강조는 역사적 사실로나 정황으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한 호족의 후예가 타당하다. 발해유민으로 묘사는 허구이다. 물론 고려가 발해 멸망 후 민족재통일과 동북아정세에서 거란의 등장에 따른 북방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거란에 적대세력인 발해의 지배층 및 유민을 적극 받아들여 이들을 서북지방에 거하게 하면서 고려 국방을 담당케 하였다.

이는 1차 거란 침입시 안융진성의 용장 대도수(발해 세자 대광현의 아들)의 경우가 그러하겠다.

 

  강조보다 더 왜곡이 심했던 것은 김치양을 신라부흥세력으로 묘사한다는 점이었다. 당대는 고려 후기 무신정권기까지도 지역활거에 따른 백제, 신라 유민의식이 남아서 중앙권력이 그 통치력이 흔들리면 그때마다 각각 백제, 신라를 외치며 반란이 거듭되었다. 그래서 극중에 신라부흥군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문제는 천추태후의 연인 김치양이 신라 부흥세력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또한 천추태후와 사이에서 나은 자식인 황주원군이 훗날 김치양의 숙원을 이어 여진족에 들어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아구타)의 조상으로 나와 금나라를 신라 부흥세력이 세운 나라로 극을 마쳤는데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적잖은 의문과 혼란을 끼쳤다.

  물론 금서와 만주원류고 등 각종 기록에 신라 혹은 고려인으로 아골타의 조상을 밝히고있고 이 이야기를 연결하여 극적 감동을 이끄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다만 김치양으로 대표되는 서북세력이 자주 국방을 넘어 적극적인 북진세력이었다는 역사적 의의에서 김치양을 하루 아침에 신라 부흥세력으로 혹은 고려의 북진을 저지 시켰던 금의 조상으로 연결하며 역사적 진실을 왜곡한 것은 적잖은 문제점이 있었다.

  김치양은 본관이 서흥으로 서흥은 서북지역의 황주와 마찬가지로 황주의 대호족 황보씨와 같은 서북호족으로 생각되며 특히 황보씨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을 것이며 이로인해 헌애왕후 즉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정치적 동반자로 연인으로 함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서북지역은 유민의식으로 따진다면 고려 전에 궁예의 후고구려에 편승했듯 고구려유민의식이 높았고 서경(평양)을 중심으로 북진정책 및 고려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강하게 주장하였을 것이다.

  이는 성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여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피력된다.

 

  그렇다면 신라부흥세력의 존재는 있었을까? 신라의 후예로 그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고려의 중추로 나서는 것은 단연 경주세력의 유학자들이고 극에서처럼 무장반란세력의 존재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유는 신라는 후백제와 달리 고려에 대한원한도 없이 스스로 귀부하였고 고려는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였다. 때문에 신라말 혼란 중에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여 그 힘을 정치적으로 표출하는 것에 애를 썼다. 이는 현실적으로 무장반란이나 고려전복은 신라지역 백성이라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라말 혼란으로 가장 비참한 상황에 처한 것은 백성이었고 이들이 그나마 안정되는 것은 태조 이후 성종조에 이르는 정치적 안정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고려사에 전하는 태조 이후 혜종, 정종, 광종 대의 왕위쟁탈과 호족숙청의 혼란은 고려사회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였나? 오히려 그로 인해 백성의 민폐가 가중되지 않았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득권의 혼란으로 사회 저변의 백성에게는 이러한 혼란은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지배가 자연히 느슨해지는 결과로 이어져 사회저변의 안정에 특히 도움이 되었다. 특히 고려 건국공신인 호족의 비대는 백성에게는 가혹한 수탈로 이어졌고 이들은 왕권에 도전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광종은 호족을 대거 숙청하고 과거를 시행하여 후주 쌍기와 같은 한인관료, 과거를 통해 등장하는 경주계 유학자를 등용하여 호족을 경계하고 경제적으로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호족들이 무고한 양민의 재산과 신분을 점탈한 것을 풀어줌으로써 고려 사회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성종 대에 관제 및 문물의 정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천추태후에서 극에 비중이 큰 인물이 허구가 지나쳐 역사적 모습이 왜곡된 것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