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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은 여자였을까?

달이선생 2009. 11. 2. 16:16

  드라마(사극)와 영화에서 신윤복이 화제였었다.

  특히 신윤복은 이들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여장남자라는 설정으로 극의 흥미를 끌었는데 과연 신윤복은 여자였을까?

  조선 후기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 화가로 손 꼽히는 신윤복 그는 과연 여자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신윤복이 여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조선시대 화원은 여자들이 수행할 수 없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도 나오는 조선의 유명한 초상화가인 이명기, 김홍도 등 모두가 남자였으며 혹여 여자가 남장을해서 화원이 되었다는 드라마 설정 역시 조선시대 관직임명 절차로 볼 때 아주 희박하다.

  하지만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설정은 충분히 문학적 상상의 허구로는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소재이다. 이는 드라마 '이산'에서 의빈 성씨(송영=한지민)가 도화서 화원으로 나왔는데 사실적 요소보다 드라마 내용상 도화서를 소재로하기 위해 설정된 허구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의빈 성씨 역시 화원이 아니다.

  그러면 신윤복이 여자라는 이야기가 나오게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먼저 신윤복은 뛰어난 화가라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당시 아버지 신한평 등 대대로 화원을 하는 집안으로 신분이 중인층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역시 자신의 문집이나 관직을 나아가서 그의 기록이 남게 되는데 하물며 양반보다 아래인 중인의 신분이었던 신윤복은 화원으로의 명성은 있으나 그에 대한 상세 기록은 당대에는 남길 필요가 없었다.

  또한 양반이하 신분들이 자신이나 그들에 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그럴 필요나 가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양반집 노비의 이름이 마당쇠인지 돌쇠인지가 중요하지 않듯 조선시대와 같이 신분적 사회에서

는 양반과 그 아래 신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불필요 하였다.

  이와같은 신윤복을 적은 기록은 조선시대 대표적 화가이자 화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못하여 그에 대한 여러가지 설화나 떠도는 이야기를 낳게 하였다. 그 중 특히 그의 그림 소재가 당시의 여자, 기생, 남녀 간의 사랑 등등을 묘사하는 화법이 남자라기 보다 여자의 섬세한 필치로 오해 받기 충분하였고  결국 그와 같은 의심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실로 받아들여 지게 되었다.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추적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기록이나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그들의 소문에 더 귀기울이는 것이고 작가와 같은 문학을 하는 사람 역시 허구적

상상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우리는 그것에 매료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학과 역사는 다르다. 둘 다 상상을 통한 이야기를 만들지만 문학은 허구고 역사는

실체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드라마는 드라마이고 사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역사소설이나 사극은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신윤복은  

1758(영조 34)∼?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 화원(畵員)이었던 한평(漢枰)의 아들이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풍속화를 비롯하여 산수화와 영모화에도 능했다. 정조시대 문화 중흥에서 그의 미적 감각과 예술적 재능은 정조시대를 예술이 꽃피는 문예의 절정기를 만드는데 한몫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