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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와 우리 땅 간도

달이선생 2009. 12. 8. 14:09

 들어가기 앞서...

 

 

  백두산에 올라 맑은 천지와 하늘을 보기란 하늘에 별을 따기처럼 쉽지 않다고 한다. 누군가는 말했다. 백두산 천지를 보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일이라고... 필자도 오락가락 하는 빗줄기에 결국 백두산의 낯을 확인하지 못했다. 민족의 영산이자 민족의 뿌리 백두산은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시 한 번 백두산을 찾자고 돌아섰다. 그날 날씨가 좋았다면 네 번째 사진처럼 천지의 모습을 확인하였을 것이다. 6월의 백두산은 비와 눈이 내리고 산등성이마다 눈이 쌓인 정말 신령스런 분위기에 마음을 경건하게 만드는 영산은 영산이었다.

 

  필자가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날씨가 좋은 여름 날 백두산을 찾으면 볼 수 있는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다. 북한 쪽이 아닌 중국 쪽 달문(천지의 물이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유일한 곳)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1. 백두산 정계비와 우리 땅 간도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가 우리 영토로 편입 된 것은 고려 말 때이다.

  공민왕은 강계에 만호부를 설치(1361년)하고 압록강 중류 지역을 고려 땅으로 편입했다. 1369년 압록강 하류의 의주를 개척해서 이 지역의 관할권을 확립했지만 상류지역은 조선 왕조가 건국될 때까지 여진족의 영역이었다. 1432년(세종14년) 건주위(建州衛 건주위는 누르하치가 여진부족을 통합하고 후금 즉 청을 세운 부족이다.) 이만주(李滿住)가 이끄는 여진족의 침입을 받자 조선에서는 최윤덕을 도절제사로 삼아 야인정벌(여진정벌 1433년)을 단행하여 여진족을 압록강 북쪽까지 몰아냈다.

   이때 여연, 자성, 무창, 우예 등 4군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고 주민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방비의 어려움 때문에 1459년(세조5년) 이 지역에 설치된 4군을 폐쇄하고 주민의 이주를 금지시켰다.  

  두만강 하류지역은  1356년(공민왕5년) 철령이북의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면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 출신이었기 때문에 조선이 건국 후에는 흥왕지지(興旺之地)로 존중받았다. 1401년 주요 거점으로 경흥부를 설치하여 동북방면의 경영을 본격화 했다. 세종 때는 김종서 등의 활약으로 6진(부령,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을 설치(1449년)했다.

   4군 6진을 개척하는데 사용된 병기가 최초의 로켓 무기 신기전(로켓장치를 단 화살)과 신기전을 대량으로 발사하는 화차 등이 사용되었다. 

 

 

 

 

4군6진

조선 세종 때 북진정책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여진족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는 6진을 설치하게 된다. 다음 지도는 4군과 6진의 위치


 이처럼 태조에서 세종 대까지 북진 정책에 힘입어 조선의 북쪽 국경은 압록강 중하류와 두만강 하류지역에 이르렀지만 백두산 인근의 국경은 명확하지 않았다.

    

  17세기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왕조가 바뀌고 청은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 지역 일대를 보존하기 위해서 한족 거주를 금지하는 이른바 ‘봉금정책(封禁政策)’을 실시했다. 17세기 말 무렵 조선은 서북지역을 개발하면서 많은 인구를 이주시켰다. 특히 이 지역은 산삼의 자생지였는데 조선의 심마니들이 산삼을 캐기 위해서 봉금 지역을 수시로 침범하자 조선과 청 사이에 외교문제가 발생하였다.(우리나라 포수들이 청나라 사람의 삼을 빼앗고 죽였다.)

  숙종 38년 청나라의 오라총관 목극등(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조선과 청의 국경을 확인했던 목극등은 실제로 백두산 부근의 지리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조선에서 안내인을 보내줄 것을 계속 요구했고, 정계비를 세운 위치 역시 엉뚱하게도 백두산의 동남쪽 4km지점에 세웠다고 한다.) 과 조선 관리가 백두산 천지 부근에 정계비를 세웠다. 정계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烏喇總管 穆克登

奉旨査邊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勤石爲

오라총관 목극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이곳을 조사했다. 서쪽으로는 압록이고 동쪽으로는 토문이다. 분수령 위에 비석을 세워 기록을 남긴다.

 

  18세기 후반 비문 해석을 놓고 문제가 생기는데 문제가 되는 부분은 동쪽의 경계인 ‘토문’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부분이다.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았고, 조선은 송화강의 지류로 보았다. 

 

 

  영조30년(1754년)에 발행된 관북총람원도에도 토문강의 위치가 두만강 보다 훨씬 위쪽에 그려져 있다.

  1869년과 1870년 함경도 지방에 기근이 들어서 간도지방으로 사람들을 이주 시키면서 조선인들의 간도 개척이 본격화 되었다. 이에 맞서 청나라도 봉금 정책을 풀고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한다.

  1882년 임오군란(임오군란은 일본식 군제 도입과 민씨정권에 대한 구식군대의 반항으로 일어난 군변. 결과 흥선대원군이 청에 나치되고 조선 내에 청과 일본의 입지가 확대되게 되고 갑신정변의 바탕이 됨)으로 청나라가 조선에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자 청나라는 간도지방에 살던 조선인들을 강제로 청나라 주민으로 흡수하는 한편 조선 정부에게 조선인들의 간도 지방 이주 금지를 요구했다. 그러자 조선은 1885년 토문강을 경계로 청과 영토를 확정짓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어윤중은 고종의 명으로 정계비를 다시 조사해 본 결과 간도가 우리 땅임을 알고 청나라에 토문강의 발원지를 공동 조사해서 국경을 확정 짓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하고 조선은 토문강을 송화강이라 서로 주장만해서 회담(을유 강계 회담)은 결렬되고 만다.  

 1901년 대한제국은 회령에 변계 경무서를 설치하고 간도 행정권을 행사하였다.

 1902년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했으나 청의 반발로 1904년 잠정 중단되었다.

 

 

 

 함경북도에 포함된 간도(자료사진) '대한신지지부지도(大韓新地志附地圖)' 철판본(1907)에 실린 대한전도. 북간도가 함경북도 내에 포함돼 있다.

 

  1905년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았다.(을사늑약-을사조약 강압성을 강조하여 을사늑약이라 부르기도 한다. 모두 5개조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의 식민화를 위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두어 내정(內政)을 장악하는 데 있다.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7년 조선 통감부 명의로 간도는 조선 땅임을 청나라에 통보했다. 그리고 간도 출장소를 설치해서 통치권을 행사했다.

  1909년 안봉선 철도 부설권(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순, 엔타이 지방의 탄광 이권을 받는 대가로 간도 지방을 청나라에 넘겨줬다. 이 협약을 간도 협약이라고 하는데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상태였으므로 억울할 일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직후 백두산 정계비가 사라졌는데 어지러운 틈을 타 일본 또는 중국 측이 없앴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간도 협약은 무효!

2차 대전이 끝나고 난 다음 국제 사회는 식민지 지배국이 일방적으로 체결한 각종 규약이나 협약은 무효라고 했다. 또한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의 기본 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민국과 일본 국가 간에 체결 된 모든 조약,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1905년 외교권 이양은 무효가 되고 1909년 간도협약은 절차상 성립할 수 없으므로 이때 확정한 국경 또한 효력이 없다.

 

 그렇다면 오늘 날 현재 백두산과 간도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중국은 2018년 동계 올림픽 유치 후보지로 창바이산(우리의 백두산)을 신청해 놓고 있다. 그리고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관광객 유치를 위해 울창한 수림지역을 밀어내고 공항과 위락 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올림픽 유치를 기회로 백두산이 중국의 영토임을 못 박으려는 것이다.

 2001년부터 시작된 동북공정은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 만주 대륙에서 활동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려고 하고 있다. 수 백 년 전부터 이어져온 중국과 우리민족 사이의 영토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간도지방은 어디?

 위 글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간도는 어디쯤을 말하는 것일까? 간도 지방은 서간도, 동간도, 북간도로 나뉘는데 간도 협약에서 말하는 간도는 일반적으로 북간도 지역을 말한다.

 

 

 


북한이 백두산 반쪽을 중국에 팔았다는 말이 사실일까?

 북한은 중국과 국경협약을 맺으면서 압록강의 모든 섬을 차지했다. 또 백두산 천지를 반으로 나누면서 압록강과 백두산 천지와 두만강을 있는 국경을 경계로 삼았다. 북한이 중국에게 백두산의 반쪽을 넘긴 것일까?

 원래 백두산 정상과 천지는 만주국의 영토로 인정되어 왔다. 그런데 일본의 패망 직후 중국은 만주국을 자신의 영토라고 되찾아 갔으며 백두산 전체를 중국 땅으로 선포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중국의 이런 태도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북한이 한국전쟁 참전의 대가로 중국에게 백두산의 절반을 주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며 오히려 북한이 중국 영토로 되어 있는 백두산을 보고 강하게 항의하여 절반이나마 되찾아 온 것이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산머리가 희다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우리 민족은 백두산 지형이 화산지형으로 그 토양이 사진에서 처럼 흰 화산재 토양으로 이루어져 흰머리 산이라고 하여 백두산이라하고 하였다. 반면에 여진족(만주족)과 중국인은 눈이 하얗게 덮여있다고 하여 장백산 혹은 백두산이라고 하여 차이점이있다. 백두산에 대한 보다 자세하게 파악한 것은 역시 민족의 기원을 두고 있는 우리의 입장이라고 하겠다. 물론 중국 한족 말고 여진족도 민족의 기원과 성산으로 여긴다.

 

 

 

  천지를 오를려면 여러 길이 있는데 그 중 중국쪽 달문에서 걸어 오르는 길과 SUV차량을 이용하여 천지 위 가장 높은 천문봉 아래까지 오르는 길, 북한쪽 길이 있는데 현재 북한쪽 길은 오를 수 없어서 천문봉 아래까지 차량으로 올랐다. 

 

 

 

  천지를 오르는 길이 천문봉으로 차량을 이용한 길이 있다면 직접 산등성이를 넘어 천지를 만져 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달문을 통하는 길이다. 달문은 천지에서 유일하게 천지의 산등성이가 열린 부분이고 이곳을 통해 천지물이 흘러내린다. 이 때 장엄한 폭포를 이루는데 그 폭포가 비룡(飛龍)폭포이다. 비룡은 '용이 난다'라는 것으로 폭포의 장엄함이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라서 붙여진 우리 고유의 명칭이다. 그러나 현재는 중국인들이 장백폭포라고 하여 그 명칭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흘려나온 천지의 물은 백두산에서 유일하게 천지에서 직접 발원하여 들넓은 대지를 적시는데 그 강물이 바로 송화강이다. 송화강은 만주의 젖줄이라 불리는데 백두산에서 유일하게 직접 발원한다. 그리고 직접은 아니지만 화산지형상 천지의 물이 침수하여 산 아래 용출하는데 그렇게 실개천이 모여 큰 강을 이룬 것이 압록강과 두만강이다.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는 우리의 강이다.

  세 번째 사진이 달문이 만주를 향해 열려 있는 모습이다. 강줄기가 뻗어가듯 우리 민족이 만주를 향해있음을 말해 무엇할까 ...

 

   아직도 활화산인 백두산에는 지각활동이 왕성하다. 때문에 지표면에 마그마로 데워진 지하수가 뜨거운 물이되어 솟는다. 중국 어딜가도 동북공정 때문에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이라는 중국식 명칭이 의도적으로 많이 보였는데 그래도 한국사람이 많이 찾는 달문 앞 온천 간판에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보여 반가웠다.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이지만 관광수입을 필요로 하는 상업성에는 정치도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이 오늘날 중국의 현실이지 싶다.

 

 

 

2. 오늘날의 간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국 동북지구 중부 길림성 동부에 있는 자치주. 면적 약 4만 2700㎢. 인구 약 200만(1990). 주도는 연길시.

일찍이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국경분쟁을 일으킨 간도지방에 해당하는데, 동쪽은 러시아의 연해주, 서쪽은 길림성(지린성)의 통화지구, 남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북쪽은 흑룡강성과 접한다. 1952년 성립되었으며, 연길·도문·훈춘·용정·돈화화룡의 6개 시와 왕청·안도 등 2개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해발고도 500∼1000m의 고원으로, 주 안에는 장백(창바이)산맥과 그 지맥이 이어지고, 그 사이를 제 2 의 송화(쑹화)강과 목단강·토문(투먼)강 등이 흐른다. 동부의 투먼강 및 그 지류인 훈춘강 등의 연안에는 하곡평야가 넓게 발달해 있다.


중국동포사회 

연변의 자치기관은 자치주인민대표회의와 자치주인민정부로 크게 나뉘며, 한인간부가 연변간부 총수의 약 60%를 차지한다.

한편 53년부터는 한글을 제1종문자로 하는 한글 위주의 어문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근래의 통계에 의하면 한인소학생 95.2%, 중등학생 82.4%가 한글로 교육을 받고 있다. 연변한인의 교육열은 남달라서 각급 교육기관이 다수 설립되었으며,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연변과학기술대학·연변의학원·연변농학원 및 사범전문학교·텔레비전대학 등이 있다. 그리고 연변과학기술협회·역사언어연구소·조선역사연구회·한글학회 등 많은 학술단체가 있다.

53년 연변문화예술연합회가 결성되면서 민족문화에 대한 창조의욕이 구체화되어 《연변문예》등 한글문예월간지가 창간되었으며, 신문은 8·15 직후 한글판 《한민보》의 발간을 효시로 이듬해 지린성 공산당기관지 《길림일보》가 한글판·중국어판으로 각각 발행되었고, 48년 한글판《길림일보》가《연변일보》로 개칭되었다


연길延吉(옌지)

  중국에서 유일한 조선자치주의 주도인 연길. 인구의 40% 이상이 조선족(중국동포연길의 주민구성은 조선족·한족·만주족·회족(돌궐족)·몽골족 등이며 조선족의 비율이 전체인구의 40% 이상으로 가장 높다. )으로 이루어진 연길은 백두산으로 가는 관문이자 조선자치주의 행정, 문화의 중심도시다.

  연길은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부터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연길의 발전 청(淸)나라 말기에 간무국(墾務局)이 설치된 뒤 발달하였기 때문에 국자가(局子街)라고도 불렀다. 1902년 연길청[延吉廳]이 설치되고 1909년 부(府)가 되었으며, 1913년 중화민국 수립 후 현(縣)이 되었다.

  1909년 간도협약(間島協約:젠다오협약) 이후에 교역주로서 개방되자 많은 한국인 이민이 이주하여 시의 주변지역을 개척하였다.)이며 중국 조선족 문화의 중심지로 백두산과 가까워 매년 많은 한국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연변에서는 사람들의 옷차림, 집, 길거리를 둘러봐도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 나라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자치주 스스로 그 민족 나름대로의 지역을 가꾸어 나가도록 하는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에 따라 연변자치주 내의정부기관이나 신문 광고 등에 조선족 자체의 문자를 우선적으로 쓰고 있고, 그 때문에 연변의 거의 모든 옥외광고가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글이 공용어로 되어 있다. 연길은 중 온대 반 습윤기후에 속해, 여름에는 무덥고 비가 많이 내리며 겨울이 길고 춥고 뚜렷한 대륙성 계절풍 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5.7℃, 최저 -32.7℃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연길의 면적은 390㎢, 인구는 약 25만 8000명(1993)에 달하며 주변 농업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