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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 산화한 안중근

달이선생 2009. 12. 20. 01:17

 

 만주에 산화한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러시아)지구군사령관

안중근(1879-1910)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崔在亨, 1858- 1920)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되는 '해조신문'에 실린 동의회 취지서로 안중근 의사가 최재형, 이범윤, 엄인섭 등과 동의회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하였음으로 말해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이토를 사살하고 러시아 검찰관 앞에서의 예비조사와 이후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일제법정에 선 안중근 의사는 당시 만국공법(국제법)에 의거하여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서 교전국 군인으로 대우 받길 밝혔다. 이는 단순한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 받아 현 이토 사살이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닌 우리나라 독립전쟁의 일환이었음을 당당히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안중근 의사를 단순한 살인범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밝혔듯이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한 안중근 의사는 이범윤을 만나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였다. 그 때 지원자가 무려 300여 명이 넘게 모이자 이를 조직하고 총독에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은 이범윤을 각각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이 되었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된 안중근 의사는 국내진공작전을 감행 함경북도 홍의동,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특히 이 전투에서 안중근 의사는 붙잡은 일본군 포로를 만국공법과 인도주의를 내세워 석방하였는데 이를 두고 의병 안에서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이유는 일본의 우리 포로에 대한 처우가 비인도적이며 포로 석방 후 이들이 길잡이가 되어 우리의 위치가 드러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결국 풀어준 포로중 일부가 의병의 본거지를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이 되었고 안중근 부대는 대패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안중근에 대한 한인들의 여론은 극도로 나빠져 그 활동이 매우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고자 안중근 의사는  이상설, 이범윤과 교우하며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위 해조신문에 기사에서 보여지듯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이렇듯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동지규합에 적극나섰다.

 

  마침내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손가락을 자르다.)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때문에 이후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유명한 유묵에는 왼손 약지가 절단된 채 보이게 된 것이다.

 

 

 

 

 

안중근 의사 등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정권을 강제로 뺏은 죄요.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뺏은 죄요.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교육을 방해한 죄요.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퍼뜨린 죄요.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엔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요."

  

 

  위 사진은 블라디보스톡에서 9월 발행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 (大東共報)의 기사 사진이다. 이 기사와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을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온다는 것을 안 안중근 의사는 우덕순(禹德淳, 일명 連後)·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 동지와 저격 사살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아래 사진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하는 거사 직전 하얼빈에 머물면서 구국의 의지를 담아 지은 장부가(丈夫歌)로 왼쪽의 한글과 오른쪽 한문 모두 친필로 작성한 것이다.

  

 

   일본의 총리대신을 역임하고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에 만주할양과 조선병합에 양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순방을 마치고 귀국 도중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하얼빈역에서 하차하다가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총 3발을 맞아 사살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일본 제국주의의 수장인 이토를 쏘고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대한만세!"

를 외치며 체포되었다. 

  이토와 함께 수행중이던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와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도 안중근 의사가 쏜 세 발의 총성에 뒤이어 네 발의 총성으로 쓰러졌다. 

 

 

 

   안중근 의사는 동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이토 사살을 준비하였다. 이들의 거사에는 블라디보스톡의 거부이자 연해주 지역의 한인 지도자인 독립운동가였던 최재형의 도움이 컸다. 최재형은 당시 대한의군 동의회를 만들고 총재에 안중근을 세웠다.

 

 

 

 안중근 의사와 우덕순(禹德淳, 일명 連後)·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

 

 

 

 

 

  최근 독립운동자료 발굴을 통해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막역한 동지 우덕순이 밀정이었음이 드러났다. 밀정은 독립운동의 주요 정보를 몰래 일제에 빼돌리는 사람이다.

 

. '독립군이 2천명 결성됐어도 그 안에 밀정이 한 사람 있으면 그 조직은 와해되고 마는 것이다.

밀정은 그만큼 어떤 반민족 행위보다도 더 악랄한 반민족 행위다'(원광대 김주용) 

 

  우덕순은 1920~30년대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거류 민회(조선인민회 하얼빈지부)' 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일제의 외무대신 시데하라에게 거액의 활동보조금을 직접 신청해서 수령했을 정도로 대단한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당시 재만 조선인 사회(하얼빈)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 친일단체로 조선인들의 동향과 정보 수집이 주요 활동이었다. 바로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보 탐지가 주 목적이었다. 더욱이 우덕순은 일제 특무기관과 고급호텔인 북만호텔에서 식사를 한 자료도 발견되었는데 당시 25엔이라는 거액의 식사비가 지출되었다. 이는 일제 정보기관과의 밀착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김주용 교수는 "조선인민회가 활용하는 밀정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 정보가 조선인민회장을 했던 우덕순에게 집중됐다"고 하면서 우덕순이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이었다고 했다. 현재 우덕순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50년 9월 26일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에서 피난을 못 가고 남아있다가 인민군에 붙잡혀 처형됐다. 이러한 사실은 KBS 탐사보도부가 1tv '시사기획 창', '밀정'(8.13, 22시)을 통해서 8개월 동안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 기밀문서, 헌정자료실에 보관된 각종 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5만 장의 문서를 입수해서 밀정 혐의를 받는 895명의 실명을 확인하면서 드러났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1841-1909)

 

 

일설에 의하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자 총알 끝을 갈아서 살상력을 높혔으며 또한 이토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馬鹿野郎(ばかやろう바카야로=바보같은놈)”라고 한다. 자신은 한국을 보호국화만 하려했지만 자신이 죽으면 한국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된다는 것으로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폄하하였는데 그러나 이미 한국의 식민지화는 기정 사실이었으며 설령 이토가 보호국화만 하려고 했다손 치더라도 그 시기만 늦어질 뿐 일제의 대외팽창의 과정으로 볼 때 이미 식민지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거사소식 후 고종은 숫가락을 떨어뜨리며 기쁨을 표시했고 중국의 총통 원세개도 기뻐하며 ‘죽어 천년 간다’라는 안의사 만사(애도시)를 지었다. 물론 한국과 중국의 모든 민중이 기뻐했다.

  또한 안중근의사가 순국(1910.3.26)한지 단 3주만에 <근세역사>(1910.4.10)라는 제목으로 그의 전기가 출간된다. 지금까지 나온 위인전중 가장 많은 것은 안중근 의사이다.

 

이토 사살의 정당성

  "'이번의 거사는 나 일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다. 동양전체의 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나는 3년간 군의 참모중장으로서 각지의 싸움에도 나갔다. 이번거사도 한국의 독립전쟁이므로 나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내 나라를 침략한 적에게 한 것이다... 까닭에 나는 지금 이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있으나.. 적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안중근 의사는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님을 법정에서 당당히 국제법적으로 진술한다. 그래서 자신을 군인이자 포로로 대우할 것을 말하였고 그에 따라 처리 할 것을 밝힘으로서 국제법에 대한 넓은 식견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에 국제적으로도 단순한 암살사건이 아닌 국제분쟁에 따른 정당방위라는 인식과 전쟁에 따른 인명 손실이라는 논리로 안중근 의사의 행위가 정당성을 가지는 행위였으며 그의 논리는 합당하였다.

  이밖에 안중근 의사는 총알 7발중 6발만 쏘고 한 발을 남겼다.

왜냐고 묻는 검사의 말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본군국주의는 증오하지만 일본인은 결코 어떤 사람도 미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토를 쏘고 난 뒤 나머지 총부리를 거둬들였다"

 

안중근 의사의 가계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본관은 순흥이다. 태어날 때 배에 점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고 하여 응칠(應七)이라 불렀고 국외활동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위부터 안중근 의사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청계동 마을 그림과 안중근 의사의 가계도 및 안중근 의사 가문의 애국지사들의 모습이다. 특히 친동생인 정근과 공근 두 형제분이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성리학을 전한 안향의 후손으로 순흥안씨이다. 할아버지 안인수는 진해현감을 지내고 수천석의 전답을 일군 사람으로 안중근 의사가 특히 따랐다. 아버지는 청계동으로 이사해 가솔을 이끈 진사 안태훈이다. 안태훈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의 박영효가 70여명의 도일 국비 유학생을 모집할 때 선발되었던 개화유림이었다. 따라서 개화당이었던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자택을 의려(의병)소로 하고 신천의려를 꾸려 자신이 의려장이 되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갑오의려인 것이다. 안태훈이 이끄는 신천의려는 당시 황해도 지역에서 떨치던 원용일의 동학농민군이 해주감영을 압박하여 오자 당시 황해도관찰사였던 정현석이 안태훈에게 구원요청을 요청해옴에 따라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다.(안중근 의사도 선봉장이 되어 출진) 관찰사 정현석은 최초 근대식 사립학교의 모체인 원산학사의 설립한 개화파이다. 

   안진사는 6형제였고 조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중근을 맏이로 정근(무오독립선언서 발표), 공근(임시정부 국무위원, 한인애국단 조직), 삼형제를 뒀다.

 

 

 

  오른쪽부터 부친 진사 안태훈 모친 조마리아 여사

  조마리아 여사는 거사 이후 여순감옥에 수감 중인 안중근 의사를 찾아   “앞으로 판결 선고가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 라며 항소를 그만 두게하였다.(1910년 2월 21일자 만주일일신문)

 

  안태훈은 김종한의 문객으로 소과에 합격하고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박영효의 해외파견 유학생 70명 이 선발되었는데 갑신정변 실패 후 박영효가 망명하면서 해주로 몸을 피해 가산을 정리하여 청계동으로 들어왔다. 이 때 동학교도의 접주로 동학군을 이끌다 피신 중이던 창수 후에 김구를 자신의 사저에 숨겨서 교우했고 해주의 유학자 후조 고능선과 교우하였다.(백범일지)

  따라서 향반 가문에서 자란 중근은 한학을 하고 신학문인 수학 및 1897년 18세에 안태훈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도마’라는 영세명으로 받은 기독교인 중근은 어려서 사냥을 즐겼고 사격술이 백발백중으로 뛰어났으며 부친과 스승이 글공부을 등한시한다고 꾸중 이후 중근이 초패왕처럼 장부로 살기로 결심 후 글공부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에 재촉하지 않았다.(백범일지)

 

 

 왼쪽은 안중근 의사의 부인이신 김아려 여사와 장남 분도, 차남 준생이다. 오른쪽은 안중근 의사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던 아버지 진사 안태훈과 동생 정근과 공근의 모습이다. 

 

 

민족주의 신앙인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신앙이 두터운 가톨릭 신자라고 널리 알려졌듯 그의 세례명 ‘도마(토마스)’는 유명하다. 당시 가톨릭은 황해도 지역의 널리 퍼져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양대인자세인 서구지향적 신앙과 달리 안중근 의사는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주체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처음 기독교 계통의 애국지사들이 실력양성에 힘썼듯

 

 

 

  

  1906년 진남포에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국권회복을 추구하였다. 아울러 천주교 교세와 프랑스 신부의 힘을 빌어 고급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오른쪽 사진(1910년 3월 10일)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사형 전 마지막 고해성사 및 유언을 남기는 장면 사진 속 뒷 모습이 조세프 빌레앙(빌렘) 신부이고 뒤쪽은 안중근 의사의 두 형제 정근, 공근이다. 빌렘 신부는 조선천주교 뮈텔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사를 위해 여순에 왔다.

 

“나는 홍신부(J.Wilherm 조세프 빌레앙-빌렘-홍석구)와 서로 의논 민주교(G.C.M.Mutel서울 대주교 뮈텔-민덕효)에게 말씀해서 서양 수사회 가운데 박학한 선비 몇 사람을 청해 와서 대학교를 설립한 뒤 국내에 재주가 뛰어난 자제를 교육한다면 몇십년 안가서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홍신부를 설득한 후 그와 함께 곧 서울로 가서 민주교를 만나 보고 그 의견을 제출했더니 주교가 말하되 한국인이 만일 학문이 있게 되면 교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일을 꺼내지 마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번 세 번 권고했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어찌할 길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분함을 가눌 길이 없어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교의 진리를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되며, 가르침을 받을지언정 프랑스 말은 배우지 않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고 영국의 말을 배우는 자는 영국의 앞잡이가 된다. 내가 만일 프랑스 말을 배우게 되면 프랑스의 앞잡이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를 폐한다고 하면서 만약 우리 한국이 세계에 떨친다면 온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렇듯 안중근 의사는 1900년 초 대학설립 계획안을 세워 실천한 선각자이자 신앙은 철저하게 민족주의에 입각한 주체적 신앙인이었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1년여 만에 1907년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에 가담하여 윗글에서처럼 무장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양대인 자세

청,일전쟁 때 일본이나 중국, 조선에서 서구 선교사교회나 미국 성조기가 걸린 기독교 관련 시설은 보호를 하거나 침탈하는 일이 없었다. 이를 본 조선인들은 서구교회와 선교사를 절대화하게 되어 최고의 존칭인 양대인이라 하며 그  뒤에 기대는 풍토가 생겨 한국 교회가 종속되는 병페를 낳게 된다.

 

 

조선천주교 뮈텔 주교(오른쪽 사진)는 안 의사의 거사 직후 그를 파문하고 천주교인의 애국투쟁 행위를 적대시 하였으며 당시 안 의사를 접견한 빌렘 신부를 명령불복종 죄로 프랑스로 소환시켰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와 가까웠던 빌렘 신부가 안중근 의사 사촌인 안명근 의사의 신민회 군자금 사건을 서울 대교구 뮈텔에게 보고하여 총독부에 알려 ‘105인 사건’이 조작 은폐되었다. 이유는 당시 종현성당(명동성당)의 입구 진고개 땅의 소유권 문제로 소송 중에 일제에 도움을 필요로 했다는 것인데 안중근 의사의 신념 중 “교는 믿데 프랑스 말은 안 배운다”던 말씀이 생각난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사살에 대한 살인행위의 신앙적 입장

신앙적 정당성

“일 검사 - 그대가 믿는 천주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겠지? 

-그대로이다.

일 검사 - 그렇다면 그대는 인도에 반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닌가?

- 교에서 사람을 죽임은 그 국(局)에 있는 자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 성서에도 사람을 죽임은 죄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 한다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 뿐이다.“

  이와 같은 신앙적 문제는 1940년 나치정권하 고백교회를 주도하고 히틀러 암살 시도한 본회퍼의 “술취한 운전사에게 운전을 맡김은 우리 모두의 죄악이다”는 신학적 입장과 같다. 이는 기독교 기본 정신에 살인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으나 한편 더 큰 살인행위를 막기 위한 살해행위에 대한 정당성 문제도 고려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다만 이토 살해 신념은 기독교의 정의와 평화 정신에 입각한 행위이고 계획 후 항시 기도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유언으로 “장남을 신부로 키우고 숙부(안태진)가 가톨릭에 귀의하길 바란다.” 동생들에게는 “내가 죽은 후 내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고 국권의 회복을 기다려 고향에 묻어달라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을 다할 것이다. 너는 돌아가서 동포에게 알려라 각자 마음을 합쳐 힘을 하나로 모아 공을 세우고 독립을 일으켜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닿으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오른쪽 사진은 모친 조마리아 여사께서 손수 지으신 수의를 입고 사형 직전의 모습

 

  

 

 

 안중근 의사의 이토 사살은 우리나라 뿐 아닌, 일제의 침략에 위협을 느낀 중국인에게도 커다란 감명을 주기에 충분하였고 그 결과 중국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안중근 의사의 이토 사살을 높이 사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만장과 글을 써서 기렸다. 오른쪽 위에서 아래 위 차례로 신해혁명을 주도한 중국 민족지도자 손문과 중화민국 독재자 총통 원세개, 중국공산당의 영원한 지도자 주은래,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자유중국 대만(타이완)의 총통 장개석이다. 특히 장중정이라는 이름으로 쓴 장개석의 휘호 '장렬춘추'는 중화민국 60년 10월로 표기되어 서기 1972년(1912)에 윤봉길 의사에게 추념했던 것이기도 하다. 

 

功蓋三韓名萬國(공개삼한명만국)
生無百歲死千秋(생무백세사천추)
弱國罪人强國相(약국죄인강국상)
縱然易地亦藤候(종연역지역둥후)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니
살아서 백세 못가도 죽어선 천추에 이어지네
약국의 죄인과 강국의 재상
처지 바꾸면 이토 히로부미도 죄인인 것을

[孫文(손문=쑨원) 손문 추모시]출처 : 남산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에 가서 쑨원이 쓴 안중근 의사 추모시를 보고 울컥했습니다.|작성자 아산선인



平生營事只今畢
평생에 벼르던 일 이제야 끝냈구료
死地圖生非丈夫
죽을 땅에서 살려는 건 장부 아니고.
身在三韓名萬國
몸은 한국에 있어도 이름은 만방에 떨쳤소
生無百歲死千秋
살아선 백 살이 없는데 죽어 천년을 가오리다.

[원세개 추모시 번역] 출처:http://omn.kr/1vq3s



중일갑오전쟁 후 본세기 초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합이빈역에서 처단하면서
중국 조선 양국 인민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이 시작되었다.

[주은래] 출처 '주은래 총리의 중조역사관계에 대한 담화' 중(1963.6.)



壯烈千秋(장렬천추)
장렬함이 천추에 이르리

[장중정 중화민국 61년 7월 6일]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동양평화론 서(序)

  성패는 만고에 항상 정해진 이치이다. 오늘날 세계는 동서로 갈라지고, 인종이 각각 다르며, 서로 경쟁하기를 밥 먹듯 하며 이기(利器)연구에 농상보다 더욱 열중하여 새로 전기포(電氣砲),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 등을 발명하고 있으니, 이것들은 사람이나 사물을 상해하는 기계들이다. 젊은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에 몰아넣어 수 없는 귀중한 생령들이 희생물처럼 버려져, 피가 내가 되어 흐르고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어 그칠 날이 없다..." 위 문서 처음 부분 일부 번역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사건이 기독교의 평화 정신에 입각한 행위였음은 그가 주창한 동양평화론에 잘 나타나 있다. 본래 동양평화론은 후쿠자와 유기치의 아시아연대주의에서 도출된 것으로 러일전쟁시기까지만 해도 일본의 승리가 곧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할 것으로 믿고 동양평화론을 지지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이토를 사살하고 옥중에서 집필한 것으로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동양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중국, 일본, 한국이 상호연대관계를 갖고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의 침략의 위기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논리로 따라서 초기 손문과 강유위 등 중국의 진보적 사상가와 혁명가들도 이와 함께하였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일제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그 말이 허구였음으로인해 분노했다. 따라서 동양평화론을 구축하기 위해 이토를 암살했다.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다”라고 자신의 동양평화론을 진술하였다.

 

“우리 동양은 일본을 맹주로 하고 조선 청국과 정립하여 평화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혹은 백년의 대계를 그르칠 것을 두려워 한다. 이등의 정치적 책략은 이에 반하여 함부로 한국을 병합하는데 급하여 조선이 정신 차릴 새 없이 동포를 살육하고 황제를 위박하여 그 횡포가 이르지 않은 것이 없다. 그가 잡은바 방침을 고치지 않고 이대로 추진하면 우리 동양은 삼국이 다 같이 쓰러지고 백색인종의 뜻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러, 청 양국이 일본에 향해 다시 싸우려고 하는 형세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며 미국 또한 일본의 발호를 좋아하지 않는다. 점차 세계의 동정은 한, 청, 러의 약자에 모이고 일본이 고립한 지위에 설 것은 지금부터 상상하여도 어렵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생각지 않고 일시 세력에 맡기어 우리 조선의 독립을 빼앗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지식인의 어리석은 짓를 초래하는 바라고 하겠다. 우리 어진 임금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부모처자를 생각하는 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한 몸 한 가문을 걸고 우리 한국을 위해 동양의 평화를 위해 진력하려면 이때에 있다고 결심한 것은 곧 고국을 떠나던 날의 일이었다. 이등공을 죽이는 따위는 이 대목적을 달성할 사업 중의 첫째 일이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필자 해석본)

 

 

안중근 의사의 현실인식

  “1894년 갑오년에 내 나이 16세로, 아내 김 씨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무렵 여러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東學黨)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여러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 일이 장차 일본, 청국, 러시아가 개입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직접 쓴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1894년은 갑오년으로 봉건적 조선정부의 한계와 중전 민씨와 그 일가의 세도에 따라 국내의 민생은 파탄이 나고 밖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이 대립하는 가운데 서구열강이 조선의 목을 조여오던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이때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부르짖으며 권력자의 횡포와 수탈 등에 희망 없이 살았던 농민들에게 희망이 되어 널리 퍼지던 동학은 드디어 보국안민(補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로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 장군의 지휘로 일어섰다.

  당시 농민군에 대한 역사적 입장은 반봉건, 반외세에 서서 민중이 직접혁명을 일으킨 역사적 의의를 가지므로 동학농민혁명 혹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 평가된다.

  이러한 동학농민군에 대해서 안중근 의사가 바라본 생각은 참으로 의외라고 볼수 있다. 이는 당시 농민군을 도적이나 폭민으로 매도한 안중근 의사가 민족의 대표적 의열독립운동가라는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서이다.

더욱이 안중근 의사의 부친 진사 안태훈은 신천의려라고 하여 농민군을 토벌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그 때 아버지는 동학당의 횡포를 걱정하며 격문을 뿌리며 동지들과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하니 정병이 70여명이나 되었으며 청계산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중략)

그 때 나는동지 6명과 함께 선봉 겸 정탐대가 되어 적병 지휘소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 자신도 아버지가 이끄는 신천의려에 참여해 황해도 해주지방에서 큰 세력으로 일어난 원용일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대치하였고 선봉장이 되어 토벌하였다. 이러한 진술에서도 보듯 안중근 의사는 농민군 토벌에 대한 긍정과 농민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여 나라의 국운이 기울게 되는 망국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청나라의 개입은 중전 민씨를 위시한 민씨척족이 비호세력인 청나라군대를 불러들인 패착이었고 청나라군대의 조선파병에 따라 청일양국이 맺은 텐진조약으로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오면서 양국의 전쟁은 불과피하게 된 사안이었다. 결국 이는 청일전쟁으로 비화되어 발빠르게 움직였던 일본에 패배한 청나라는 일본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조선 내정에서 빠지면서 조선에서의 주도권이 일본에 넘어갔던 것이다.

  따라서 자주적 입장에서 본다면 외세의존적 행태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부역시 외세의 진주를 오판한 것을 깨닫고 다시금 파병철회를 요청하는 한편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농민군과 협상에 나서 전주화약을 맺었다. 이에 농민군은 폐정개혁안12조를 올려 개혁을 요청하는 한편 자치기구인 집강소 등을 세우며 정부와 협조하였다. 정부역시 교정청을 세워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혁에 착수하였다. 따라서 청일양국의 침탈은 단순히 농민군의 봉기에 따른 문제가 아닌 외세의존적인 조선정부의 무능과 현실인식의 잘못이 빚은 문제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를 주장하면서 보인 일본제국주의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인식 역시 한계를 볼 수 있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할 때, 일본의 선전포고문 가운데,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이제 일본이 그 같은 대의를 지키지 않고, 음흉한 책략을 자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일본의 대정치가인 이토의 계락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을사늑약 이후 군대해산까지 이르며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항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에 대해서는 그 본질적 이해를 정확히 하고 있다. 이렇듯 동학농민군에 대한 인식은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그러나 역시 이토 히로부미를 ‘늙은 도둑’으로 부르며 일본의 조선침략을 일본제국주의의 문제가 아닌 이토 히로부미 개인에 대한 원망과 단죄를 강조한다.

  이처럼 일본제국주의의 본질을 보기 보다는 지나치게 이토 히로부미 개인에 대한 잘못을 강조하며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문제를 개인의 심성문제 등으로 규정짓고 있다. 물론 조선침략에 대한 책임자가 필요하고 그에 대한 단죄는 대의명분이다. 그러나 대의명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실제적 접근보다 관념적 접근에 따라 사안의 정확성을 보기 힘든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아 슬픕니다. 저 강도들이 도리어 우리를(의병) 폭도라 일컫고, 군사를 풀어 토벌하고 참혹하게 살육하여 두 해 동안에 피해를 입은 대한인들이 수 십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강토를 빼앗고 사람들을 죽인 자가 폭도입니까. 제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막는 사람이 폭도입니까. 이야말로 도둑놈이 몽둥이들고 나서는 꼴입니다. 한반도에 정략이 이같이 포악해진 원흉은 바로 일본의 늙은 도둑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전통시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의 지식인이었던 안중근 의사의 식견은 참으로 대단하다. 우리처럼 열강의 이해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던 폴란드의 역사를 알고 있었고 영국의 압제로부터 독립하여 강대국이 된 미국역사에 정통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웃한 청나라의 실상 및 만주 흑룡강 청국인에 대한 역사는 물론 조선의 역사와 학문에도 그 깊이가 상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안중근 의사가 동학농민군에 대한 인식과 일본에 대한 인식이 달랐던 것은 무엇일까?

 

  먼저 당시 동학농민군에 대한 인식적 한계를 들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봉건조선에서 할아버지 안인수가 진해현감을 지냈고 아버지 안태훈이 과거에 올라 진사에 이른 양반이었다. 신분적 사회 조선에서 자유로운 생각과 활동을 할 수 있는 신분인 것이다. 반면에 인식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자신이 속한 양반의 신분이 당대 농민신분에 대한 이해의 벽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적 한계는 당시 지식인의 대명사였던 유길준, 김옥균, 서상범, 박영효, 홍영식 등과 같은 갑신정변(1884)의 주역 개화당의 인식과 크게 차이가 없다. 아울러 이후 안창호, 서재필 등이 이끄는 민족계몽운동(실력양성)과도 닿아있다. 바로 이들은 당시 농민, 즉 민중에 대한 인식이 무지하고, 미개하여 계몽하고 이끌어야 하는 지배와 개화의 대상으로 봤다.

  이는 당시 성장하였던 민중의 의식에 대한 역행이었다. 이미 동학농민군과 농민지식인 및 지도자들은 봉건조선의 신분적 철폐를 주장하고 국가운영의 민주성, 외세의 제국주의 침탈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들을 개화하고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에 섰던 우리 지식인들은 민중을 대등하게 보고 이들과 화합하기보다는 여전히 군림하고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서서 민중과 괴리되어 있었다.

  때문에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실패하였고 한말 민족계몽운동은 실력양성론으로 이어져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하나의 운동이 되었지만 그 운동에 참여하였던 많은 인사들이 일본에 협조하며 변절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민족반역자 이완용이 독립협회가 열었던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렇듯 당시 안중근 의사의 처지는 양반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봉건적 모순과 외세에 대항하며 일어난 농민군은 단순한 폭도와 도적에 불과하였고 이들을 토벌한 공은 안중근 자신에게 어릴적 대단한 무용담이 되었다.

  따라서 당시 농민군을 토벌하였던 봉건양반지식인들은 관군은 물론 침략자 일본군과 협력하여 농민군을 철저하게 토벌하였다. 아버지 안태훈이 일으킨 신천의려는 바로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반봉건, 반외세의 농민군을 봉건적 수구인 양반지식인과 권력자들이 반민중적으로 외세와 결탁하여 민중을 짓밟았던 농민토벌군 갑오의려였다.

  이러한 봉건지식인들의 한계는 이후 중전민씨가 일본자객들에게 유린당해 일어난 을미의변(1895), 을사늑약(1905)으로 일어난 을사의병, 군대해산 이후 13도 창의군에 이르기까지 양반신분에 섰던 많은 봉건 의병장들이 민중을 바라본 눈이었고 민중을 이끌었던 자세였다. 결국 민중과 괴리되었던 이러한 의병항쟁은 위아래가 단단히 협조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며 일제의 남한대토벌 작전에 따라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우리는 일본에 완전히 나라를 잃어 식민지에 들어갔다.(1910, 한일강제병합)

  이처럼 당시 안중근 의사의 현실인식을 생각할 때 또 다른 문제는 당대 지식인들이 신학문인 서구의 학문에 너무도 관대한 것이다. 아니 지나친 맹신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전통과 역사와 문화를 천시하고 서구의 문화를 우월하게 보는 것은 양대인자세(청일전쟁 당시 청일양국군은 물론 조선에서 서양기독교와 선교사 및 시설이 안전하게 보호되었는데 이를 두고 서양인을 우러르며 보인 행동)와 통한다.

  특히 이들의 공통적으로 보이는 문제는 세계관에서 보인 현실인식 문제였다. 생물학자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를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가 ‘사회진화론’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논리에 모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약한 것은 강한 것에 먹힌다.), 우승열패(나은 것이 이기고 못한 것이 진다.)와 같은 자연계의 진화의 특성이 인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문명화되고 강한나라와 민족이 약하고 미개한 나라와 민족을 지배한다.(도와 문명화를 해야한다.)는 논리로 국제질서에서 약한나라를 침략하고 시장의 확대를 노린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에 주요한 명분이 되었다. 따라서 이들 논리는 당시의 제국주의에 편승한 침략의 명분이 되었다. 이러한 논리로 청과 일본의 많은 식자들이 개혁을 이끌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이토 히로부미도 참가하였던 메이지 유신이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발 빠르게 일본을 변화시켜 제국주의의 길을 갔다.

  이처럼 사회진화론은 강자의 명분이다. 그런데 이 생각의 가장 큰 문제는 침략을 받는 약소국의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이식된다는 것이다. 바로 지배당하는 사람 역시 자신이 지배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고 침략을 정당화한다. 마치 "우리가 강대국에 침략을 받아 힘들게 사는 것은 우리가 힘이 없어서 당연하다."라고 하듯 침략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침략자에 동조하기에 이른다는 함정이 있다.

  안중근 의사 역시 이러한 ‘사회진화론’적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글 속에 드러난다.

하지만 당대 지식인의 생각은 혼란이자 혼돈이었다. 안중근 의사 역시 사회진화론적 인식에 서서 현실세계를 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강한나라들이 선의에 서서 협력과 조화를 이루는 평화를 생각하였다. 바로 ‘동양평화’이다.

  사회진화론과 세계를 정확히 보고 있었지만 그 인식적 논리는 정연하지 못하다. 아니 정연한 논리가 미래에 대한 희망에 서서 불완전한 꿈을 표방하게 되었다. 사실 서구열강에 맞서 동양 한중일 3국이 협력해서 동양의 평화를 이루자고 주장한 동양평화론은 나름의 논리와 사실에 부합된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과 청나라와 나아가 우리 자신들 역시 사회진화론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제국주의적 발상에 있었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늙은 도둑’이라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며 그를 죽이고자 혈안이었던 안중근 의사에 생각에서 더더욱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한국에 대한 침략에 이토 히로부미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일본정계의 막후 실력자이자. 일본왕을 옹립하고 문명개화를 이끌었던 인물이기에 일본이 제국주의화 되는 데 지대한 공을 한 장본임에는 확실하다. 그러나

  일본 침략성과 제국주의화는 일개 개인의 문제를 벗어나 일본자체 나아가 세계사적 문제라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 말대로 이토 히로부미 개인의 문제가 크고 그의 자리가 스스로 약해져서 해결될 문제라면 안중근이 쏜 총알에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날 세계사는 제국주의 종막을 고하고 동양평화와 함께 세계평화라는 큰 물줄기의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평화에 대한 이상은 맞았으나 제국주의는 일개 개인의 존망에 달린 문제가 아닌 체제의 문제였고 결국 체제의 팽창이 충돌하여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인류가 두 차례 끔찍한 전쟁을 겪고 나서야 해결될 도도한 물줄기였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의 현실인식은 산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고 나무만 자르려 했던 그의 한계였다.

  물론 안중근 의사가 1910년 형장의 이슬로 끝나지 않았더라면 단재 신채호나 이회영 선생처럼 일제하 꾸준히 독립운동을 이어가면서 여러 사상을 접하고 활동을 하여 이와 같은 현실인식이 많이 바뀌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만 가정에 불과하다. 역사는 가정할 수 없다.

 

본문 인용 안중근 의사 진술

-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 중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

 

 

 

 

 

  안중근 의사 유묵 3점은 논어의 경구인 ‘不仁者不可以久處約’(불인자불가이구처약·어질지 않은 자는 곤궁에 처했을 때 오래 견디지 못한다)과 ‘敏而好學不恥下問’(민이호학불치하문·민첩하게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중용의 경구인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 경계하고 삼간다)를 적었다. 유묵은 모두 사형집행 직전인 1910년 3월에 쓴 것으로 약지의 단지 흔적이 있는 왼손을 눌러 찍은 안 의사의 장인(掌印)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절개를 나타낸 유묵 ‘백세청풍’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선비의 절개를 말하는 것으로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먹다 죽은 백이, 숙제를 뜻한다.

위 유묵에 손으로 낙관을 했는데 약지가 단절되어 있다. 이는 단지동맹시 약지를 절단한 것으로 12명의 동지의 피를 모아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단체는 이토 암살 등 독립운동을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기독교의 역사2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안중근자서전(안중근의사숭모회, 1970)

             백범일지

 

사진       달이샘의 역사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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