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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始興市)의 한국양명학(韓國陽明學) 연구(硏究)

달이선생 2018. 12. 23. 10:52

시흥시(始興市)의 한국양명학(韓國陽明學) 연구(硏究)
-장유(張維)와 정제두(鄭齊斗)를 중심으로- 

 

 

 

 

 

1. 들어가기

 

   시흥시(始興市)는 전근대시대 인천(仁川)과 안산(安山)을 경유한 지역으로, 이지역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이 글에서 주목하고 있는 한국양명학(韓國陽明學)의 장유(張維, 1587-1638)와 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당시 안산에 지역적 연고를 맺고 활동하였다. 현재 이들의 연고지는 시흥시이다.
  양명학은 주자학(朱子學=程朱學)과 함께 신유가 철학의 양대 주류를 형성했다. 양명학은 심학(心學) 혹은 육왕학(陸王學)이라고도 한다. 정주학 특히 주희(朱熹, 1130-1200)의 학설을 부정하던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의 이론을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 계승하여 발전시킨 이론이다. 정주학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주학을 통치 원리로 삼고 있던 조선에서 크게 발달할 수 없었다. 16세기 초반 중종 16년(1521) 전후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박상(朴祥, 1474-1530)에 의해 비판되었고, 특히 대표적인 정주학자인 이황(李滉, 1501-1570)이 「왕양명전습록변(王陽明傳習錄辨)」을 통해 적극 비판․배척되어 이후 조선 말기까지 매우 미미한 상태로 머물렀다.(윤사순, 2012 『한국유학사』상, 지식산업사, 469-470쪽)

양명학의 비조 왕수인 초상(중국국가박물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몇몇 사류에 의해서 양명학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에서 조선의 양명학자를 세 부류로 구분했다. 첫째, 뚜렷한 저작이 있거나, 그 사람의 말이나 글 가운데 분명한 증거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 하더라도 양명학파로 분류하기에 의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최명길(崔鳴吉, 1586-1647)과 장유, 정제두이다. 둘째, 양명학을 비난한 기록이 있지만, 그 전후를 따져 보면 허위로, 속으로는 양명학을 주장한 사람들이다. 이광사(李匡師), 이영익(李令翊), 이충익(李忠翊) 등이다. 셋째, 양명학을 단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또 실제로 주자학을 하였지만, 일생토록한 주장의 핵심적인 정신이 양명학자인 사람이다. 바로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다. 이 세 부류를 흔히 ‘한국양명학’이라고 부른다.(천병돈, 2007 「하곡학 연구 현황 분석」, 『양명학』제19호, 한국양명학회, 146-147쪽)
  1995년 한국 양명학회가 성립된 이래로 한국양명학에 대한 연구 성과는 ‘연구사’로서 1)한국양명학 연구의 시기분류(태동기, 기초 확립기, 발전기, 성숙기)및 주변학문과의 연계 연구 2)한국양명학관련 기초자료의 발굴과 정리 3)강화학파의 개념설정과 그 연구방향이라는 조금씩 다른 제안을 담고 있지만, 한국양명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통된 시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양명학의 존재양태에 관한 대전제로서 1)한국의 양명학파 가운데 양명학을 적극 표방하지 않고 때론 비판하면서도 그 사상적 맥락은 양명학이 주를 이루는 학자가 많았고 2)한국양명학은 역사적 질곡 속에서 사상사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여 실학, 개화사상 등 근대적 사유의 저변을 형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한국양명학에 관한 국내 연구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기조 아래 양명학파의 명맥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자료의 발굴과 사유의 분석, 그리고 근대적 사유 형성과정과의 연관성을 밝히는 작업을 과제로 삼아왔다. 이러한 연구 기조는 양명학 연구 초기에 형성되어 2000년대까지 70여 년간 지속되어 오면서 한국양명학 연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많은 기여하였다.(김윤경, 2013「국내 한국 양명학 연구 경향에 대한 반성적고찰」,『양명학』제35호, 한국양명학회, 157-158쪽)
  이 글에서는 한국양명학의 전체의 주된 연구 성과보다는 시흥시라는 역사문화적 공간 속에서 지역적으로 연고가 깊은 장유와 정제두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본격적인 연구는 시사편찬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어서 시흥문화원의 제3차 시흥지역문화세미나에서 심우일(향토연구자 한개, 명문고 교감)이 정제두의 안산 거주를 실증하였고, 4차 세미나에서 정인재(서강대 명예교수)는 양명학의 선유(先儒) 장유와 정제두의 사상이 시흥시에서의 가치와 의의를 밝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한국양명학의 중심에 있던 장유와 정제두를 중심으로 안산, 즉 현재 시흥시의 지역적 연고를 실증적으로 밝히는 한편, 이들의 학문적 성과를 살펴보고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 지역에서 교유(交遊)한 저명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밝히고, 아울러 장유와 정제두의 관계도 살펴보았다. 이는 장유와 정제두의 지역적 연고를 바탕으로 시흥시가 한국양명학의 발원지(發源地)로서의 역사적 사실과 위상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시흥 장곡동에 기거한 양명학의 선유(先儒) 장유

 

  정인보는 『양명학연론』을 통하여 조선양명학자를 발굴하고 조명하였다. 한국양명학(韓國陽明學)에서 있어서 중요한 인물인 장유(張維)와 정제두(鄭齊斗)는 시흥시(始興市)를 지역적 연고를 가지고 활동하였던 인물로서 시흥시는 한국양명학의 발상지로서의 역사적 사실과 위상을 가진다.
  장유는 한국양명학에 있어서 당대 조선의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적 풍토를 비판하면서 다양한 학문적 관심은 물론, 양명학을 받아들였던 한국양명학의 선유(先儒)였다. 이러한 장유가 시흥시와 지역적 연고를 맺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속한 덕수 장씨 가문이 증조부 이후 시흥시 장곡동 일원에 세장지를 가졌고, 그 역시 김직재 무옥으로 안골마을로 내려와 12년간 해장정사(海莊精舍)를 지어 살며, 이웃한 농민들과 어울리고 이를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

 

  농가에서 김매는 일을 다 끝내고 나서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먹고 마시는 것을 호미씻이(洗鋤)라고 하는데, 내가 시골에 살면서 그 일을 눈으로 확인했기에 이를 시로 기록하였다. “남정네는 하얀 대오리 갓 머리에 쓰고 여인네는 푸른 무명 치마 삶은 박에 오이 썰어 새우도 듬뿍 올려놓고 오래 된 옹배기엔 막걸리가 찰랑찰랑 잔디 덮인 언덕의 뽕나무 그늘 아래 앉자마자 사방에서 꽃 피우는 농사 얘기 저쪽은 이쪽보다 김매기가 늦었다느니 아랫배미가 윗배미보단 벼가 더 잘 됐다느니 잔 돌리는 청년들에 노인들 거나해져 짧은 옷 소매 일어나서 춤도 절로 덩실덩실 일 년 내내 고된 농사 이 날 하루 즐거움 농촌 들녘 오늘만은 모든 근심 잊으리라 알다시피 지난해 세금 독촉 아전이 들이닥치자 바삐 마련하랴 사흘 굶기도 하였었지 농부들 즐거운 일 어찌 쉽게 얻으리요 가지 말고 천천히 실컷 먹고 취하시라” (農家耘事已畢 老少男婦聚飮 謂之洗鋤 余田居目擊其事而記以詩 “田翁白竹笠 田婦靑布裙 烹匏斫瓜薦鰕魚 老瓦盆盛黍酒渾 靑莎原頭桑葉陰 坐來四座農談喧 東家耘較西家晩 低田禾比高田繁 少年行酒長老醉 短袖起舞何蹲蹲 一年作苦一日歡 田家此夕百憂寬 君不見去年吏到索租時 翁姥狂奔三日飢 田家樂事豈易得 勸君醉飽無遽歸”)-『계곡집』권26, 칠언 고시

 

  이러한 시흥시 장곡동은 조선시대 안산군 마유면 장하리(長下里, 장종리長宗里), 도촌리(島村里), 응곡리(鷹谷里)였다가, 1912년 2월 5일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7호로 안산군 내 동리의 구역과 명칭을 변경할 때, 장곡리로 합쳐졌다. 장하리에서 ‘장’을 응곡리에서 ‘곡’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후 1914년 시흥군 군자면에 속하였다가 1989년 시흥시가 승격하면서 장곡동(법정동, 행정동)이 되었다. 안골(꼴)은 매골(꼴) 북쪽으로 장곡초등학교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상양산 밑 골짜기 안에 자리 잡은 마을(삼태기처럼 생김)이므로 ‘안골(內谷)’이라 했다. 덕수 장씨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입향조는 장유의 형인 장륜(張綸, 의금부 경력 역임)으로 이곳에 사는 장씨는 대부분 그의 후손이다. 장곡동 산 68에서 장유가 12년간 은거하는 동안 장선징(張善徵, 1614-1678)과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정비로 현종의 모후)를 낳았다. 시흥시의 연성2지구 택지개발 사업으로 1996년에 폐동 된 뒤 1999년 동양아파트가 들어섰으며, 마을명칭은 안골이 본래 매골에 속한 곳이므로 매골이 되었다. 매골은 안골 동쪽에 위치하고, 풍수로 보아 엎드려 있는 꿩을 매가 낚아채는 지형(伏雉形)이므로 ‘매골(응곡)’이라 불렀다.(시흥문화원, 2006『始興市地名由來』, 265, 267쪽, 1999, 『장곡동의 어제와 오늘』, 11쪽)

 

 

매골마을 유래비(시흥시 장곡동 연성래미안, 1999. 5. 21. 건립)


 

장유의 형 의금부 경력 장륜 묘비(시흥시 장곡동) 출처 : 장경창 소유 밭(원래 있던 곳은 상양산 세장지이고 개발로 묘비를 현재 인선왕후 공원 옆 도로변에 묻었던 것을 발굴하여 세운 것이다.


 

 

 

 

 

 

 

 

 

인선왕후 공원(매꼴공원, 시흥시 장곡동) 장유 선생과 인선왕후의 역사성을 기려 인선왕후 축제를 이어오고 있다.


  장곡동을 중심으로 세거한 덕수 장씨는 원나라의 제국공주(齊國公主)가 고려에 들어올 때 겁령구(怯怜口 : 사속인)로 공주를 따라 들어와 귀화한 순룡(舜龍, 1255-1297)을 시조로 한다. 이후 조선 전기 장충보∙장옥(張玉) 부자 때에 관직에 나아가 활동하며 양천허씨, 동래정씨 등 중앙관인가문과 혼인을 맺었다. 장유의 증조 장임중(張任重)이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 조부 장일(張逸)은 목천현감을 지냈고, 부친 장운익이 선조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장유와 장신(張紳, ?-1637)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되면서 가문이 번성하였다. 특히 반정에 장신의 처부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 ?-1624)의 동조는 성공의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장유는 인조반정에 참여함으로서 다시 조정에 중용되어 문명을 날렸으며,  서인의 핵심세력으로 활동하면서 장유의 딸이 국혼으로 1631년(인조 9)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과 혼인 하였다. 또한 이 무렵부터 서인계의 유력한 가문들과 혼인을 맺었다. 장유의 처부는 인조대 우의정을 역임한 안동 김씨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었고, 아들 장선징(張善徵, 1614-1678)의 사위는 숙종대 좌의정을 역임한 전주 이씨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이다. 또한 서인계 학맥의 종장이었던 사계(沙溪) 김장생의 현손인 김진서(金鎭瑞)도 장선징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이렇듯 장곡동에 세거한 덕수 장씨는 명문가였다.   
  장유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모친 박씨 부인이 강화도에서 별세하자 장사를 치루고, 이어 우의정에 제수되자 18차에 소(疏)를 올려 체직(遞職)되었다. 노쇠한 몸으로 모친의 집상(執喪)에 열중하다 병이 악화되어 무인년(1638, 인조 16) 3월 17일에 별세하였다. 시흥시 조남동 장군재에 묘가 있다. 현재 장유 묘와 신도비는 1986년 3월 3일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장유의 묘는 「계곡장공신도비명」에 “묘는 안산(安山) 월곡리(月谷里) 앞에 안장되었고 어제(御題) 표액(表額)이 있다.(墓在安山月谷里 前有御題表額)”고 되어있다. 장경창(장신 후손, 1951)은 월곡리를 근거로 현재 덕수 장씨 세장지가 상양산 서쪽 구릉으로 장곡동과 달월에 걸쳐 있으므로 이들 지명의 ‘월’과 ‘곡’자를 따서 월곡리로 추정한다.(현재 초장지에 석물과 봉분이 없는 무덤자리가 있음) 그러나 그 위치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인조실록』에 장유가 ‘안산 묘소’와 ‘선대 묘소’에 거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장곡동의 덕수 장씨 세장지가 예로부터 이어져 온 곳이므로 이곳이 장유의 초장지로 추정된다.  

 

 

 

 

 

 

안골마을과 상양산 덕수장씨 세장지 현재 이곳에 장유 선생 초장지와 모친 정경부인 박씨 추정 묘소가 있다.

 

 

 

 

  상양산 덕수장씨 세장지의 장유 선생 초장지


  그리고 지금의 장유의 묘는 같은 안산군내로 이장되었다. 『현종실록』의 “신풍부원군의 묘소 이장으로 왕대비가 망곡례를 행하였다.(1664)”는 기사 등, 이장에 관한 여러 기사가 확인된다. 따라서 이렇게 이장된 묘는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과 합장되어 현재 시흥시 조남동 장군재에 있다. 장군재는 조선후기 제청리(祭廳里)였는데, ‘제청’의 의미가 묘제(墓祭)를 위한 공간을 뜻하므로 이 마을의 명칭이 장유 묘에서 유래되었다.

 

  조남동은 조선시대 안산군 초산면의 조남리(鳥南里)와 제청리(祭廳里)였다가, 1912년 2월 5일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7로 안산군내 동리의 구역과 명칭을 변경할 때, 조남리로 합쳐진 것이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경기도령 제3호에 따라 시흥군과 수암면으로 속하였다. 1989년 1월 1일 시흥군 승격으로 조남동(법정동)이 되었다.(행정동 목감동) 장군재는 응단말인데, 장승박이 동남쪽에 위치해 북향받이로 해가 비추지 않아 ‘응단말’이라 부르고 있으며, 장유의 후손과 동지중추부사 김유향의 후손(김해 김씨 구직파)이 자리를 잡아 취락이 이루어졌다. 응단말은 북쪽에 있는 양단말, 서북쪽에 있는 장승박이를 통칭해 ‘장군곡’이라 지칭하는데, 이는 장유 묘가 이곳 동쪽 기슭에 있어 그의 성씨와 군호를 따서 ‘장군재’라 부른다. 이른 기록은『조선지지자료』의 안산군 초산면조에 제청리를 ‘장군잿’이라고 했다.(시흥문화원, 2006『始興市地名由來』, 시흥문화원, 136, 138쪽) 

 

  이장 이후 특기한 것은 정조가 1789년 8월 행행(行幸)에서 16일 안산관아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에 본디 현명한 국구(國舅)가 많으나, 문장과 공업(功業)의 성대함으로는 신풍부원군만한 이가 없다. 숭릉(崇陵-현종) 어필(御筆) 신도비(神道碑)의 성대한 유적을 추모하니 배나 슬픈 생각이 든다. 고 부원군 장유와 영가 부부인 김씨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고 판서 장선징(張善澂)에게도 똑같이 치유(致侑)하도록 하라.(我朝固多賢國舅 而文章功業之盛 未有如新豐 追惟崇陵御筆神道之盛蹟 一倍愴想 故府院君張維 永嘉府夫人 金氏墓 遣承旨致祭 故判書張善澂 一體侑之-『정조실록[正祖實錄]』권47, 21년 8월 계축)

 

  명하고 어제로 장유와 영가부부인의 치제문을 지은 것이다.

 

 “신풍부원군 장유와 영가부부인 김씨의 묘소에 치제한 글. 조정에 있어서는 명신이고 국가에 있어서는 원구였으니 공훈은 마원(馬援)과 등애(鄧艾)를 능가하고 문장은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를 앞질렀네 아름다운 영가부부인을 배필로 맞아 복을 돈독히 하여 성후(聖后)를 낳았으니 공의 집이 더불어 영화로워 성자신손(聖子神孫)이 줄곧 이었도다 경사를 기른 터전에 공경을 다하는 정성으로 깊고 넓은 관아에 밤중에 앉았으니 시각이 깊었다네 엄숙하게 모습을 접한 듯하여 나의 생각 유유하니 상경의 반열이었던 아들과 일체로 아름다움을 함께하네(新豐府院君張維 永嘉府夫人金氏墓致祭文 在朝名臣 在國元舅 功駕馬鄧 文軼韓歐 匹美永嘉 篤祜塗莘 公家與榮 承繼聖神 毓慶之地 致敬之誠 潭潭衙閣 坐夜深更 肅焉如接 我思悠悠 胤子上卿 一體同休)-『홍재전서(弘齋全書)』권24, 제문(祭文)6, 「신풍부원군장유영가부부인김씨묘치제문(新豐府院君張維永嘉府夫人金氏墓致祭文)」

 





장유 선생 묘와 신도비(시흥시 조남동 장군재)


  장유의 양명학적 저술은 친구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과 달리 온전히 남을 수 있었다. 이는 그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역대 조선의 국왕들의 혈친이 되며, 조선왕실의 존귀를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후 영의정 추증은 물론, 정조(正祖)가 1797년 8월 행행(行幸)에서 시흥지역을 거쳐 안산에서 묵을 때, 친히 장유의 치제문을 짓고, 치제하였다. 이렇듯 왕실의 비호로 장유의 저술들은 문집으로 만들어져 보존되었고, 특히 현재의 시흥시 화정동 추곡마을에 들어와 살던 정제두가 그 저술들을 통해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었다.

 

  일찍이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양명에 관한 글을 보았는데, 그는 양명의 글에 대하여 문의(文義)와 견해가 다 익숙함으로 한 번 보자 곧 그 요령을 파악하였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의 안목이 높고 흉회(胸懷)가 공정함을 매양 탄복한 일이 있습니다.(嘗觀谿老於陽明之書 惟其文義見解之熟 故一見便會 無不得其要領 於是每歎先輩眼目之高胸懷之公-『하곡집』 서24. 「답최여화서[答崔汝和書]」계유[癸酉])

 

 


3. 시흥 화정동 추곡에 기거한 양명학자 정제두

 

  한국양명학의 대종사로 학파(學派)를 이룬 정제두는 그간 강화(江華)를 중심으로 이야기되었다. 그가 강화로 이전하기 전, 시흥시 화정동 추곡(楸谷=가래울)에서 20년간 살면서 그의 호는 ‘추곡’으로 불렸다.

 

  추곡(楸谷)의 학문에서 만약 범위의 넓은 곳을 가지고 논한다면 혹 옛사람에게는 조금은 손색이 있으나 밝게 나아가고 스스로 얻으려던(自得) 지취(旨趣)에서는 이 세상에서 뒤따라갈 이가 거의 없을 것이라.(楸谷之學 若論廣闊處 或少遜古人 而明造自得之趣 當世無幾及之者-『하곡집』,「연보」, 숙종 22년 병자)

 

  정제두와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 민이승(閔以升, 1649-1698)이 정제두를 ‘추곡’으로 부르고 있다. 민이승은 안산시기에 양명학에 심취해 있던 정제두를 바로 잡으려 한 인물이다. 추곡시기 민이승은 자신의 둘째아들 민경창(閔景昌)을 정제두에 맡겨 공부를 시켰으며, 정제두가 추곡에 살 때 별세하였는데, 정제두는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하였다.

 

 

 

 

 

 

 

가래울 마을비와 마을 전경(시흥시 화정동 가래울)


  안산시기에 정제두가 ‘추곡’으로 불렸던 흔적은 많이 보인다. 정제두가 안산으로 내려가자 그 근처로 이사했던 박심(朴鐔, 1652-1707, 박문수의 종조부로 박정희 대통령이 박문수의 방계후손)은 「묘지명」에서 정제두를 ‘추곡’으로 적고 있다. 이밖에도 정제두의 제자인 이광신의 동문 김택수가 지은 제문(祭文)에도 정제두를 ‘추곡’이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하곡으로 널리 알려진 정제두지만, 강화 이전 안산시기에 ‘추곡’으로 불러진 것이 확실하므로 앞으로 그의 호인 ‘추곡’도 ‘하곡’과 더불어 병용되어야 할 것이다. 하곡은 추곡을 떠나 강화로 이거한 정제두가 살았던 하현(霞峴), 하일동(霞逸洞)을 말한다.

 

  상도면(上道面) 187. 하일동(霞逸洞)  하현(霞峴)의 서남쪽은 골짝마다 그윽한데(霞峴西南谷谷幽), 재상이 예로부터 이 산중에 머물고 있네(山中宰相古今留). 두 정승(정제두, 최규서)의 집터와 세 정승의 무덤(정유성, 정제두, 권개) 있어(二公宅址三公墓), 이곳을 강화도의 ʻ제일구(第一區)ʼ이라고 부른다네(云是江州第一區). 상도면(上道面)은 강화부 관아 남쪽 35리에 있다. 도촌 정유성(陶村 鄭維城)은 묘는 하일리(霞逸里)의 서쪽 산기슭에 있다. 정제두는 도촌의 손자이다. 집터가 여기에 있는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도학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오조를 거쳐 국태로(國太老)의 학자라고 하였다. 또 하곡 선생이라고 불리었으며,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의 명을 받들어 지위가 숭록대부 우찬성 겸 성균좨주(崇祿大夫 右贊成 兼 成均祭酒)에까지 올랐고, 죽어서는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거처하는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지 못하여서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평소에 선생을 공경하였기 때문에 집을 지어주었다. 묘는 하현의 동쪽 기슭에 있다. 지금 그 손자인 참판(參判)을 지낸 정원하(鄭元夏)가 와서 살고 있다.(고재형, 역자 김형우․강신엽, 2008『역주 심도기행』, 인천학연구원․도서출판 아진, 213-214쪽)

 

  정제두가 추곡(楸谷)에 정착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환국 전해인 1688년(숙종 14)에 40세 이르러 재신(宰臣)들이 연거푸 정제두를 천거한 끝에 겨울에 평택현감을 제수 받자 1689년(숙종 15)년 봄에 부임 한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기사환국으로 사상적 스승인 서인(西人)의 우계 성혼(牛溪 成渾)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남인(南人)들에 의해서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되자 정제두는 평택현감을 버린다. 이후 조정에서는 천리(擅離 : 멋대로 직책을 떠남)하였다는 죄목으로 문초를 가하고 면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양을 떠나 안산(安山) 추곡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다.
  정제두는 41세부터 안산(安山)에서 거주했는데, 현재 시흥시 화정동(花井洞) 가래울(楸谷)이다. 추곡은 가래울의 한자식 명칭으로 조선시대 안산군에 속했다. 이곳은 한국사상사에서 양명학을 집대성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던 정제두가 41세에 이주하여 60세까지 학문에 매진하였던 곳이다. 특히 정제두는 이곳에서 한국양명학의 중요한 저술인 『학변(學辨)』과 『존언(存言)』을 집필하고, 스승 박세채(南溪 朴世采, 1631-1695)에게 자신이 양명학을 성학(聖學)으로서 위기지학(爲己之學)한다고 밝혔던 역사적인 곳이다.

 

  대개 제가 왕씨의 설에 애착을 가지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 버리기도 어려운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蓋齊斗所以眷眷王氏之說 倘出於求異而濟私 則決去斷置 非所難焉 但未敢知吾人爲學 將以何爲耶 思欲求聖人之意而實得之而已-『하곡집』,「답박남계서[答朴南溪書]」정묘) 

 

  가래울은 화정동 고주물과 능곡동 능골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고주물과 능곡동을 왕래하는 분기점이 되는 마을이다. 가래울 남쪽 지역을 웃말, 동북쪽 지역은 외딴말, 서쪽 지역을 양지말, 외딴말 북쪽 지역을 아랫말, 아랫말 서쪽 지역은 양지말, 동북쪽 지역은 외딴말이라 각각 부른다.
  정제두의 후손인 정한일(1942년생으로 가래울 태생이다. 본적은 화정동 650번지. 지주사공파, 포은공파 32대손이다.)에 따르면 가래울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5대손인 정광윤(鄭光胤 1483-1524)의 사패지로서 영일 정씨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포은공파(圃隱公派)의 400년 세거지다. 따라서 이곳에는 정제두의 6대조이자 입향조 정광윤과 충주 정씨의 묘, 5대조 정운(鄭運), 고조 정구응(鄭龜應), 종증조 정열(鄭說), 증조모 창원 황씨(昌原黃氏)의 묘가 화정동 산90-4번지 및 그 일대에 위치한다.
  추곡은 선대 묘소는 물론, 아버지와, 첫 번째 부인인 파평 윤씨(부 윤홍거)의 초장지였다. 따라서 추곡은 정제두가 한양에 살면서도 자주 들리던 곳이다. 후에 두 번째 부인인 남양 서씨(부 서한주)도 추곡에 권조(임시 장사)하였다가 천안으로 이장하였다. 이렇듯 추곡은 영일 정씨의 세장지로서 정제두 생전에도 영위되면서 여러 차례 집안의 장지(葬地)로 초장(初葬)과 이장(移葬)이 거듭되었다. 이러한 추곡은 정제두가 강화로 옮겨간 이후에도 자주 찾았다.

 

 

 

 

 

 

 

 

 

가래울 영일정씨 세장지의 입향조 정광윤 묘, 아래 정열 묘, 옆에 창원황씨 묘가 있다. 창원황씨 묘비의 가래울 표시 부분 

 

 


  그리고 당시 가래울에서 교유(交遊)한 저명한 인물로 조부의 묘소(박동량, 시흥시 향토유적 12호, 순조의 모후 수빈 박씨의 조상)가 안산에 있던 스승 박세채와 함께 소론의 영수였던 동산 윤지완(東山 尹趾完, 1635-1718)과 친분이 두터웠다. 윤지완은 성혼의 제자 윤민헌(尹民獻, 1562-1628)의 손자이자 숙종(肅宗)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다. 더욱이 그는 정제두를 따라 이웃한 곳에 살았던 친구 지포 박심의 장인이었다. 이렇게 정제두는 지역의 저명한 인물들과 교우관계를 맺고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정제두가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양명학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둘러싼 가까운 사람들의 분위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첫 부인의 당숙 윤선거는 송시열과 대립한 박세당의 둘째 형의 장인이었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죽은 윤휴의 친구였다. 자신은 최명길의 형 내길(來吉)의 외손주 사위이자, 최명길의 손자인 석정이 친구였다. 이글에서 주목한 장유도 정제두와 관련이 깊다. 바로 그의 부인인 영가부부인 김씨가 김상용의 딸인데, 김상용은 권개의 사위로 정제두의 고조부인 정구응과 동서지간이다. 그리고 장유의 절친한 최명길의 손자가 그의 친우였다. 그밖에 그가 가깝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첫 부인의 6촌으로 당시 송시열과 대립하던 윤증, 박세채이다. 박세채는 그런 뜻을 담아서 『양명학학변(陽明學學辨)』을 지었다. 민이승, 박심 등과도 편지를 통한 교류가 많았다. 물론 그들은 모두 정제두가 양명학을 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특히 추곡에서 스승 박세채, 윤증(尹拯, 1629-1714), 그리고 친구 최석정(崔錫鼎), 민이승(閔以升, 1649-1698), 박심과의 교우관계는 그의 사상인 양명학이 한층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를 바탕으로 양명학의 큰 토대가 되는 『학변』과 『존언』이 추곡에서 저술되었다. 시흥시의 추곡은 바로 이러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역사적인 곳이다. 아울러 정제두가 양명학에 심취하여 그 학문적 성취를 하는데 있어서 영향을 끼친 것은 양명학의 선유 장유였다. 그가 장곡동에서 12년간을 살았던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시흥시가 한국양명학의 발상지(發祥地)임을 말해준다.

 

 

추곡 정제두 선생 유허비(시흥시 화정동 가래울 대동우물, 2017. 11. 21.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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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경기도문화원연합회, 2016『京畿鄕土史學』第21輯에 수록된 「시흥시(始興市)의 한국양명학(韓國陽明學) 연구(硏究)-장유(張維)와 정제두(鄭齊斗)를 중심으로-」논문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하시면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경기도메모리(https://memory.library.kr/)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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