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역사)

녹두꽃

달이선생 2019. 7. 13. 22:00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간다"-'가보세요'(참요[讖謠])

*동학농민혁명을 전후하여 불려진 가사로 가보세는 1894년 갑오년을 을미적은 1895년 을미년을 병신은 1896년 병신년을 말한다. 이 민요는 동학농민혁명 자체를 예언했다든지 병신년에 이르러 거사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예언한 참요라고 한다.

 

 

 

사발통문

...이때 도인(道人)들은 선후책(先後策)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1.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1.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의 것을 빼앗은 탐리(貪吏)를 공격하여 징계할 것  

1.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바로 향할 것

 

 

1894년(고종 31) 1월 10일 새벽 고부읍 마항장(馬項場)에 모인 농민군 1,000여 명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고부읍의 삼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가자 조병갑이 달아났다.

 

  (의정부[議政府])....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이 올린 장계(狀啓)의 등보(謄報)를 보니, 고부(古阜)의 난민(亂民)은 아직 잡지 못해 명백히 조사하지 못하였고, 단지 해당 백성들이 올린 소장에 폐단을 설명한 조목과 해읍의 수령을 논죄(論罪)하여 파직(罷職)하고 잡아오도록 하는 것, 해당 관속(官屬)들에 대해 공초(供招)를 받아 감처해 달라는 요청만 있었습니다.

요즘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대체로 관리와 백성이 서로 믿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지만 나라의 기강이 허물어지고 백성의 풍습이 고약한 것으로는 역시 고부처럼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가령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무리를 불러 모아 제멋대로 법을 무시하고 본분을 어긴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응당 먼저 제창한 사람과 추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조사하고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道)를 안찰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단지 역마(驛馬)만 번거롭게 하는 계사만 올릴 뿐 난민(亂民)의 두목이 날뛰도록 내버려두고 고약한 습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징계를 미루고 있으니 이것을 어찌 조정의 명령을 받들고 나라의 체모를 보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이번 소란은 사실 원한이 쌓이고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정사에서 나온 것이니, 하루 이틀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 것이 뻔합니다. 해당 수령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일을 그르쳤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표상하였다가 나중에는 파직하고 잡아왔으니 어찌 앞뒤가 이렇게 서로 판이합니까? 매사가 개탄할 일이므로 경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에게 우선 월봉삼등(越俸三等)의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고부 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소란을 초래하고 범장(犯贓)한 죄는 이미 도신의 계사에 열거되어 있으니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정죄(正罪)하게 하소서. 고부 군수의 후임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격(常格)에 구애되지 말고 각별히 가려 차임(差任)하게 하며 【이조(吏曹)에서 박원명(朴源明)을 차하(差下)하였다.】 하직 인사를 올린 다음에 역마를 주어 당일로 내려 보내소서.

지금 듣건대 민란(民亂)이 다시 일어났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른바 난민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다 자기 본성을 잃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단지 위협하는 것에 겁을 먹고 때를 틈타 불평을 풀려는 데 불과할 따름이니, 이것은 철저히 조사하여 법으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고부군 안핵사(古阜郡按覈使)로 차하하여 그로 하여금 밤을 새워 달려가서 엄격히 조사하여 등급을 나누고 구별하여 등문하게 하소서. 고을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에 대해서는 일체 자세히 논열(論列)하도록 해야 하는데, 지금 한창 바쁜 농사철에 경내에 소란이 퍼지면 반드시 살길을 잃고 농사철을 놓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제창한 사람 외에 일체 속임을 당하였거나 위협에 못이겨 추종한 사람들은 될수록 공정하게 하고 일일이 깨우쳐주어 각각 생업에 안착하게 하여 조정에서 보살펴주는 뜻을 표시하라고 삼현령(三懸鈴)으로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又啓: "卽見全羅監司金文鉉狀啓謄報, 則‘古阜之亂民未捉, 明査未行, 而只有該民狀之說弊條目, 該邑倅之論罪罷拿, 該官屬之取招請勘’矣。 近日民之起鬧, 多由於官民之不相孚, 而國綱之頹弛, 民習之駭悖, 亦未有如古阜之甚者。 藉曰痛若之不堪, 及其嘯聚而自恣, 蔑法干分, 罪著罔赦。 宜其有首倡隨從, 鉤覈區別。 而其在按道之地, 徒煩馳驛之啓, 亂魁一任猖獗, 悖習尙稽懲創, 是豈可曰奉朝今而存國體乎? 蓋此鬧, 實由於積冤干和之政, 而必其所由來者, 非一朝一夕之故矣。 該倅之溺職僨事, 不言可知, 而始也褒仍, 終焉罷拿者, 何前後相反之若是乎? 事事慨歎, 不可無警, 全羅監司金文鉉, 姑先施以越俸三等之典。 古阜郡守趙秉甲致鬧犯贓之罪, 旣有道啓之臚列, 令王府拿問定罪。 古阜郡守之代, 令該曹勿拘常格, 各別擇差 【吏曹以朴源明差下】 , 辭朝給馬, 當日下送。 今聞民鬧再起, 傳說狼藉。 所謂亂民, 豈可盡失其恒性而然哉? 直不過怯於威脅, 乘時逞臆耳, 此不可不到底査覈, 以法從事。 長興府使李容泰, 古阜郡按覈使差下, 使之罔夜馳往, 嚴査分等, 區別登聞。 至若邑弊之矯捄方略, 一體消詳論列, 而顧今東作方殷, 一境滋騷, 必其有失所失農者矣。 首倡之外, 諸凡詿誤脅從之類, 務從平反, 一一曉諭, 俾各安業, 以示朝家撫恤之意事, 三懸鈴行會何如?" 允之。)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2월 15일 임술 4번째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그날 이후 조정에서 논의 한 결과이다. 조정의 시각은 조선이 아직도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혼군(고종)과 혼신(민씨), 혼국(조정)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정의 주요 국사를 살피던 최고위 의정부의 논의 사항이 이랬다는 것인데, 조선이 망한들 이상할 게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은 1894년 망한 거와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중전민씨는 청에 원병을 구하면 일본이 자동 군대를 파병하여 위기를 자초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고자 어리석은 짓을 벌였다.

 

청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이 때에 반민의 형세가 날로 확대되어 성읍이 연이어 함락되어도 백성들은 도리어 혼연히 기뻐하는 기색을 띠고, 동학 교도가 패하였다는 말이 있어도 사람들은 믿지 않고 그러할 리가 없다 하였으며, 오직 관군이 패한 것만 말하였다. 중앙의 대관들은 시골 사람을 만나 반민들의 소식을 듣고 모두들 크게 탄식하며,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하였다....왕과 왕비는 크게 노하여 반민들을 빨리 평정하지 못하며 점점 난측한 말이 퍼질 근심이 있다 하고, 민영준을 불러 계책을 정하니 전보를 보내 청국에 원병을 청하자 하였다. 민영준이 말하기를, “지난해 텐진 조약을 맺을 때 청일 두 나라가 조선에 파병한 일이 있으면, 서로 사전에 연락을 취하자는 조문이 있으니, 청은 진실로 우리를 위하니 악의가 없음을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오랫동안 틈을 엿보고 있으니 조약의 내용을 빙자해서 원병을 맞아오지 아니하면 형세가 심히 험악할 것이니 어찌할 것인가하였다. 중궁이 말하기를 용렬한 무리들이 어찌 왜놈들과 작간할 수 있겠는가? 다시 임오군란과 같은 일은 참을 수 없다 내가 패하면 너희들도 모두 멸망할 것이니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민영준이 위안 스카이에게 원조를 청하니 위안 스카이는 북양 대신 이홍장에게 이 사실을 전보로 알렸는데, 이홍장은 허락하겠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 매천야록 권 2 갑오, 고종 31-

 

  고종의 비인 중전민씨를 명성황후로 부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을미사변으로 일제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는데 누굴 탓하랴 자기가 자초한 것이다. 정말 민자영이 현명한 국모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흥선대원군과 권력다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제 백성을 죽이기 위해 청에 원병을 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그렇다고해도 동학농민군과는 화합을 도모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기 위한 기회로 삼았다면 중전민씨도 비운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本意)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의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호강(豪强)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 호남 창의 대장소(大將所) 백산(白山)에서 '백산격문' -

 

 

  1894년 음력 3월 하순 백산에서 포고된 격문 내용이다. 이날 모인 농민군이 흰 옷을 입고 있어서 백산을 불린다는 설도 있고 '서면 백산, 않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유명하다. 백산에서의 봉기는 고부라는 한 고을의 문제가 아닌 농민과 나라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한 것을 천명한 것으로 다른 지역 농민들이 속속 모여들어 대규모 봉기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중앙정부와 전면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 때부터 농민봉기가 아닌 농민전쟁이었다.

 

 

 

 

 

 

김개남 장군

 

 

 

새야새야 녹두새야

웃녘 새야 아랫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함박 쪽박 열나무 딱딱 후여

 

새야새야 녹두새야

녹두밭에 안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새야 팔왕(八王)새야

네무엇하러 나왔느냐

솔잎 댓잎이 푸릇푸릇

하절인가 하였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리니

저 강 건너 청송 녹죽이 날 속인다

 

 

  이 민요는 동학농민군의 실패를 애석하게 생각하며 불려진 것으로, 녹두는 키가 작은 전봉준 장군의 별명이다.

 

작년 3개월 동안 무슨 사연으로 고부 등지에서 민중을 크게 모았는가 

전봉준 : 고부 군수(조병갑)의 수탈이 심하여 의거하였다

 

흩어져 돌아간 후에는 무슨 일로 군대를 봉기하였는가? 

전봉준 : 문제 해결책임 이용태가 내려와 의거 참가자 대다수가 일반 농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동학으로 통칭하고 체포하여 살육하였기에 군대를 봉기하였다 

 

 

전주 화약 이후 다시 군대를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냐?  

전봉준 : 일본이 개화를 구실로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으니, 충군 애국의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워 그 책임을 묻고자 함이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일으킨 군대가 '의병'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금치 전투이후 순창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받은 심문이다.

  그날의 사건을 현재 국가에서는 '동학농민혁명'으로 명명하여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따라서 국정교과서인 '역사'에도 이와 같이 적혀 있다. 이와 별개로 그날을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다.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전쟁' 등 긍정도 있지만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동학난', '고부 민란' 등 시대적 변화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날에 참여한 사람도 비적(匪賊)으로 낮춰 부르고 있다.

  드라마 '녹두꽃'은 차갑게 식어 있던 그날의 역사를 뜨거운 눈물로 되살려 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역사적 사실은 어떻고, 배경은 무엇이고, 봉건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은 무엇이다라고 정리만 했지, 그날 사람들이 그곳에서 떨쳐 일어난 것을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물론 일제가 우리 농민들을 무참히 살육한 비참한 역사라는 생각은 머리로 입으로 떠들었었다.

  드라마는 정현민 작가의 극본을 통해 배우들의 열연으로 이야기된다. 거기에서 그날의 사람들이 왜 그토록 죽음을 불사하고 일어나 끝내는 우금치에서 몰살을 당했는지...

  당시에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한울)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그들은 인내천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날의 기억은 우금치에서 참혹하게 실패로 끝났다고 간주되지만 결국 우리 역사는 경술국치의 참혹함을 지나 1919년 3.1운동, 그리고 1945년 해방과 함께 인내천의 세상을 열었다. 그래서 가상 인물 백이강은 중요했다.

  봉건제 모순에 빠져 자각하지 못한 백성이었고,

  인내천의 세상을 만들고자 떨쳐 일어난 백성이었고,

  우금치에서 일제와 합세하여 같은 민족에게 총질을 당해 죽은 백성이었다.

  이후 을미, 을사, 정미의병에 참여하고 끝내는 조선을 떠나 만주와 연해주, 바다 건너 미주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수많은 백성, 그 백성이 백이강이다. '백성이야말로 강하다'라는 신념을 표현한 백이강이다.

  그 백이강이 동학농민군에서 의병으로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거듭났다. 우리네 역사가 그러하다.

  이러한 생각을 담아 녹두꽃 게시판을 글을 올렸다.

 

 

 

   혹시나 했는데 이미 그럴 계획이었다. 연출을 맡은 신경수 감독은

   "우리 민족과 역사를 향해 큰 잘못을 하고도 아직까지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친일파들도 자각했으면 했고, 또한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는 바람에 반복되는 역사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켜봤으면 하는 의도도 있었다"  반면 시간은 흘렀고 사람들은 새 희망을 찾아 살아갔다. '녹두꽃'의 동학군 별동대장 백이강(조정석 분)은 의병대를 계속 이끌며 일제에 맞서 싸우는 독립군으로 성장했고, 보부상 송자인(한예리 분)은 꾸준히 의병을 지원했다. 이에 대해 신 감독은 "둘은 같은 뜻을 가지고 앞날도 계속 같이 걸어가는 느낌을 주려했다"라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출처 : SBS연예뉴스 '녹두꽃' PD "윤시윤 자결 결말호의호식 친일파도 자각했으면" 최종편집 : 2019-07-15 08:38:28: http://sbsfune.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E10009583089&plink=COPYPASTE&cooper=SBSENTERNEWS)

 

 

1907년 양평 지평 의병 영국 데일리메일 특파원 멕켄지 촬영

 "당신들은 언제 전투를 했죠? 오늘 아침 전투를 해서, 일본군 4명을 죽였고, 우리는 2명 전사에 3명이 부상당했죠. 전과를 올리고도 쫓기는 이유는? 일본군의 무기가 훨씬 우수합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차라리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낫지요"라는 인터뷰가 유명하다.

 

  우리 역사는 그날 일자무식의 백성들은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그 당연한 가치를 알았는데, 조선 5백년을 주인으로 살았던 왕(고종, 중전 민씨와 척족)과 양반들은 무식한 백성보다도 어리석었다. 서세동점 상황에서 빗장을 걸면 나라가 안전할 거라 생각했고 외세의 침략에 상하가 합심하여 나라를 지킬 생각을 못하였다. 그저 동비, 비적이라고 무시하고 일제와 편을 먹으며, 자신과 피를 나눈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비수를 꽂았다.

  예전에 해방된 조국에서 왕실이 복원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있다. 정말 어리석었다. 왕실은 그 죗값으로 역사에서 당당히 지워진 것이다. 하루살이 같은 백성과 함께 인내천의 세상을 열어야 했지만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려다. 민씨도 죽고, 이왕이라 격하되고 독살되어 결국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라진 것이다.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결말이었다.

  녹두장군과 백성이 들고 일어났던 그날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결국 녹두 장군이 바라던 인내천의 세상이 왔지만 우리는 일본제국주의가 남긴 상처가 암이 되었다. 바로 민족 분단이다. 한반도가 휴전선으로 분단된 것은 보이는 것이고 사람들 마음에 빨갱이, 친일파, 틀딱, 좌좀 등 마음의 분단과 갈등이 상당히 높다. 태극기를 들고 성조기를 흔들며, 일본에 망해야 한다고 떠드는 사람들...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 현재 일본의 아베정권은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넘어 국제적 관계에서 적국과 다름없는 관계 설정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우리의 굴복을 바라고 있다. 그것에 대한 해답으로 전문가인양 떠드는 사람들은 저마다 냉정해야 하고 감정적 대응을 말라고 주문하고 있다. 특히 언론들... 녹두 장군이 일어선 그날도, 을미, 을사, 정미 의병이 일어난 그날도 우리의 냉정한 이성을 자처한 사람들과 언론은 무모한 무력항쟁을 비웃었고 동양평화를 부르짓는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국가의 관계라는 것은 개인의 일과 같지 않아서, 만약 개인이 자기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면 다만 칼 한 자루 쥐고 바로 해치워도 된다. 그러나 국가의 원수에 있어서는 때와 힘을 헤아리고 승산이 있을 때 하지 않으면 안된다. - 대한 매일 신보

 

의병 제군에게 경고한다.

군들의 오늘 이러한 행동이 어디까지나 애국의 뜨거운 피를 쓸어 이태리 가리발디의 공업을 이루고자 함이나 실은 도리어 동포를 잔해하고 조국을 상하게 할 뿐이오. 실끝만치도 실효가 없을지니 어찌 충군지사가 행할 바이리오....만약 정말 충의의 열성을 안정시킬 수 없어 실심(實心)으로 국권을 만회코자 한다면, 눈앞의 치욕을 참고 국가의 원대한 계획을 도모하여 일체 병기를 버리고 각자 향리로 돌아가, 농군은 농업을 열심히 하고 공장(工匠)은 공업을 열심히 하여 각기 산업에 종사하여 자산을 저축하고 자제를 교육하여 지성을 계발하며 실력을 양성하면 다른 날에 독립 의무요 또 고금 역사상에 발게 비추어 고구할 수 있는 것이라. 어찌 우리들의 억설로 끌어 유인하려 함이리오....‘황성신문광무 10

 

  결국 그들의 이야기대로 일본이 우리를 보호국화 하여 문명국가로 이끌었나? 아니다. 보란듯이 이토히로부미 조차도 식민지배는 너무 빠르다고 했지만 그가 죽자 바로 우리는 식민지가 되었다. 아주 철저한 일본의 종복이 되었다. 

 

  그런 선례가 있고 역사가 있는데 아직도 감정적 대응을 말라고 한다. 상대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야 말도 통하는 것이다. 

  일본은 현재 아베와 그 추종자들은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은 추호도 생각이 없다. 그들은 회한이다. 바로 태평양 전쟁 참패에 대한 회한을 극복하는 것이 지금의 아베와 일본의 목적이다.

  사실 일본 근대사에 있어서 태평양 전쟁 말고는 빛나는 영광의 역사였다. 미국 페리에 의해 개항되고 막부를 타도하여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문명개화라는 이름으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다. 탈아론이라고 할 정도로 동양적 구습과 적폐,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하게 서구화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을 통해 그 전 운양호 사건을 일으켜 함포외교를 연습하고 성공시켰다. 1894년 드디어 일본이 육성한 근대식 군대를 시험할 기회가 왔다. 바로 조선 출병이었다. 동학농민군을 죽이고 청나라에 선전포고 하여 청나라 군대를 쓸어 버렸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풍도해전도 일본 도고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끈 일본 해군은 청나라 고승호를 격침시키며, 청일전쟁 승리의 단초를 만들었다.

(출처 : 안산 어촌민속박물관)

 

   청일전쟁의 승리로 막대한 배상금을 타낸 일본은 더욱 군비확충에 매진하여 마침내 청나라 의화단 운동 진압을 통해 그들의 힘을 확인했고 그 군대의 역량을 시험하였다. 이러한 일군은 마침내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러시아제국군을 무릎꿇렸다. 바야흐로 일본제국주의 날개를 단 날이었다. 이 때 바로 손을 내민 것이 바로 미국이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후 승승장구한 일제는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승국이 되었다. 이어 만주사변, 중일전쟁까지 일본이 걸었던 역사는 오로지 승리와 영광 뿐이었다.

  이러한 일본을 기억하고 태평양 전쟁을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 오늘의 일본과 아베이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아직도 감정적 대응을 말라고 냉정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제가 그렇게도 심혈을 기울였던 정책이 빛을 발하고 있다. '뼛속까지 종놈의 근성' 식민지 시대 조선시대를 착안하여 철저하게 식민교육한 것이다.   

  목소리를 높혀야 한다.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일본의 지성과 일본인의 합리적 이성을 가진 평범한 그들에게 우리가 부당하게 당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표현해야 한다. 깨어있는 민들이 해야한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죽자 녹두꽃이 떨어졌다고 슬퍼하였지만 녹두꽃은 수 많은 녹두꽃으로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꽃은 졌을 망정, 다른 수 많은 녹두꽃은 지금도 내일도 계속 필 것이다.  그것이 역사이다.  

 

부록

1. 전봉준  장군 판결선고서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원본 국사편찬위원회)http://www.e-donghak.or.kr/index.jsp

 

제37호[第三十七號]
판결선고서원본 [判決宣告書原本] 전봉준(全琫準)
전라도 태인(泰仁) 산외면(山外面) 동곡(東谷) 거주.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
피고 전봉준(全琫準). 나이 41세
위에 기재된 전봉준에 대한 형사피고사건(刑事被告事件)을 심문해보았더니, 피고는 동학당이라고 하는 비도(匪徒)의 거괴(巨魁)이고 접주(接主)로 불린다. 개국(開國) 501년 1월에 전라도 고부(古阜) 군수(郡守) 조병갑(趙秉甲)이조병갑(趙秉甲)이 처음 임소(任所)에 와서 매우 가혹한 정치를 하여 해당 지방의 인민(人民)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 다음해 11~12월쯤에 군수에게 가혹한 정치를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모두 잡혀 옥(獄)에 갇히게 되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청원(請願)을 하였으나 바로 그것을 물리쳐서 조금도 효험이 없었기 때문에 인민들이 매우 분하여 여겼다. 그래서 수 천명이 모여 거사(擧事)를 하려고 할 때에 피고도 마침 그 무리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추대하여 모주(謀主), 주모자로 삼았다. 지난해 3월 상순(上旬)에 그 무리를 인솔하여 고부(古阜) 외촌(外村)의 창고를 헐고 돈과 곡식을 내어 모두 인민(人民)에게 배급하였다. 1~2 곳에서 소요를 한 뒤에 한번 해산을 하였다가 그 뒤에 안핵사(按覈使)인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가이용태(李容泰)가 고부에 들어와서 지난번의 소요가 모두 동학당의 소행이라고 여겨 동학의 수도(修道)하는 사람들을 잡아 살육을 심하게 하였다. 이에 피고가 다시 그 무리를 규합하여 병사를 모을 때에, “불응하는 자는 불충불의(不忠不義)한 사람이니 반드시 벌을 주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 위협하여 4,000여명의 무리를 얻었다. 각각 소유한 흉기(凶器)를 지니고, 식량은 그 지방의 부민(富民)에게서 거두어 들여 그 해 4월 상순쯤에 피고가 직접 무리를 인솔하여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부・태인・원평(院坪)・금구(金溝) 등지를 갈 때에 전라 감영의 포군(砲軍) 10,000여 명이 동도(東徒)를 치러 온다는 말을 듣고, 한번 고부로 물러갔다가 하루밤낮을 싸운 뒤에 영문(營門)의 포군을 격파하였다. 앞으로 전진하여 정읍(井邑)・흥덕(興德)・고창(高敞)・무장(茂長)・영광(靈光)・함평(咸平)을 지나 장성(長城)에 이르러서 경군(京軍) 700여명을 만나 격파하고, 다시 밤낮으로 행진하여 4월 26~27일에 관군(官軍)보다 먼저 전주성(全州城)에 들어갔는데, 전라 감사는 벌써 도망하여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 다음날에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羲)가홍재희(洪在羲)가 군사를 데리고 성 아래에 가까이 와서 성밖에 큰 포를 놓고 공격하니 피고가 그 무리와 함께 응전(應戰)을 하여 제법 관군을 괴롭게 하였다. 이에 초토사가 격문(檄文)을 지어 성안으로 던지며, “피고들의 소원을 들어줄 터이니 속히 해산하라”고 타일렀는데, 피고들이 27조목을 가지고 임금에게 올려주기를 청원하기를, “전운소(轉運所)를 혁파할 것, 국결(國結)을 늘이지 말 것, 보부상(褓負商)의 폐단을 금지할 것, 도내(道內)의 환전(還錢)은 전임 감사가 이미 거두어 갔으니 다시 민간에서 징수하지 말 것, 대동미(大同米)를 상납하기 전에 각 포구(浦口)에서 잠상(潛商)이 쌀을 사는 것을 금지할 것, 동포전(洞布錢)은 호(戶)마다 봄과 가을에 2냥으로 정할 것, 탐관오리를 모두 쫓아낼 것,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관작(官爵)을 팔며 국권(國權)을 농단하는 사람을 모두 쫓아낼 것, 관장(官長), 수령이 된 자가 해당 경내(境內)에서 장사(葬事)를 치루거나 전답(田畓)을 사지 못하게 할 것, 전세(田稅)는 예전대로 할 것, 연호잡역(烟戶雜役)을 줄일 것, 포구어염세(浦口魚塩稅)를 혁파할 것, 보세(洑稅)와 궁답(宮畓)은 시행하지 말 것, 각 읍(邑)의 수령이 백성의 산에 투장(偸葬)하지 못하게 할 것”을 말하였다. 그래서 초토사가 바로 그것을 승낙하였기 때문에 피고가 그 해 5월 5~6일에 흔쾌히 무리를 해산하여 각각 생업에 나아가게 하였다. 또한 그 때에 피고는 최경선(崔慶善, 본명 永昌) 이하 20여명을 데리고 전주에서 금구・김제・태인・장성・담양・순창・옥과・창평・순천・남원・운봉 등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세하다가 7월 하순에 태인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피고는 일본 군대가 대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반드시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삼키려는 뜻이 있는 줄을 알고, 일본군을 쳐서 물리치고 그 거류민(居留民)을 나라밖으로 몰아낼 마음으로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전주 근처의 삼례역(參禮驛)이 땅이 넓고 전라도의 요충지이기에 그 해 9월쯤에 태인을 출발하여 원평을 지나 삼례역에 이르러 그곳을 기병(起兵)하는 대도소(大都所)로 삼았다. 그리고 진안(鎭安)에 사는 동학 접주 문계팔(文季八)・전영동(全永東)・이종태(李宗泰), 금구에 사는 접주 조준구(趙駿九), 전주에 사는 접주 최대봉(崔大奉)・송일두(宋日斗), 정읍(井邑)에 사는 손여옥(孫汝玉), 부안(扶安)에 사는 김석윤(金錫允)・김여중(金汝中)・최경선(崔卿宣, 위의 慶善)과 동일인・송희옥(宋憙玉) 등과 모의하여 지난해 3월 이후에 피고와 함께 일을 했던 비도의 괴수 손화중 이하 전주・진안・흥덕・무장・고창 등지의 원근(遠近) 각 지방의 인민에게 격문을 돌리거나 사람을 보내 유세를 하였다. 전라우도에서 4,000여명의 군사를 모아 곳곳의 관아에 들어가서 군기(軍器)를 강제로 빼앗고, 각 지방의 부민(富民)으로부터 돈과 곡식을 징발하여 삼례역을 떠나가면서 무리를 모집하였다. 은진(恩津)과 논산(論山)을 지나 무리가 10,000여명이 되었고, 그 해 10월 26일쯤에 충청도 공주에 이르렀는데, 일본군이 먼저 공주성을 점거하고 있어 전후 2차례 싸웠다가 모두 크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피고가 일본군을 더 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공주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다가 그 사이 피고의 포(包)중에서 〈병사들이〉 점점 도망가고 흩어져서 수습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쩔 수가 없어 한번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군사를 모아 전라도에서 일본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응모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함께 모의한 3~5명과 의논하여 각각 변복(變服)을 하고 조용히 경성(京城)으로 들어가 정탐을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상인(商人)처럼 하고 혼자 상경(上京)하려고 태인을 떠나 전라도 순창을 지날 때에 민병(民兵)에게 잡힌 것이었다.
위에 적은 사실은 피고와 함께 모의한 손화중(孫化中)・최경선(崔慶善) 등이 자백한 공초(供招) 및 압수한 증거 문서에 분명하다. 그 행위는 대전회통(大典會通)의 형전(刑典)에, “군복을 입고 말을 타며 관문(官門)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을〉 베라”고 하는 형률에 비추어 처벌할 것이다.
위의 이유로 피고 전봉준을 사형에 처한다.
개국 504년 3월 29일 법무아문(法務衙門) 임시 재판소가 선고한다.
법무아문 대신(大臣) 서광범(徐光範)
법무아문 협판(協辦) 이재정(李在正)
법무아문 참의(參議) 장박(張博)
법무아문 주사(主事) 김기조(金基肇)
법무아문 주사(主事) 오용묵(吳容默)
회심(會審)
경성주재일본제국(京城駐在日本帝國) 영사(領事) 우치다 사다츠지(內田定槌)

개국(開國) 501년 : 조선 왕조의 건국으로부터 501년 되는 해로 1892년이다.
국결(國結) : 結簿에 올린 結卜
동포전(洞布錢) : 철종 말기부터 고종 8년(1871)까지 동네에서 공동으로 바치던 세금을 말한다.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장정마다 1년에 2냥씩 납부하였다.
연호잡역(烟戶雜役) : 집마다 부과하던 여러 가지 부역
궁답(宮畓) : 대군 군 등 왕자나 공주 옹주에 딸린 토지인 궁방전(宮房田)을 말한다. 조세 대신 도조를 소작인에게 받아 자체 경비로 사용했다. 국고를 축내고 많은 피해를 일으켰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www.e-donghak.or.kr/
*「전봉준판결선고서全琫準判決宣告書」는 전봉준에 대한 5차례의 공식적인 신문
을 거친 후에 1895년 3월 29일 전봉준의 형량을 결정한 최종 판결문이다.
「판결선고서」는 전봉준은 물론이고 손화중・최경선 등 관련 인물들의 신문
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전봉준의 행적을 가장 압축적으로 일목요연
하게 정리한 문건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료이다. 예를 들면 동학농민혁
명의 1차 기병이 무장에서 시작하여 전주성에 들어갈 때까지의 과정, 삼례
에서 시작한 2차 기병이 공주대회전을 치루는 과정, 그리고 그후 농민군을
해산하고 전봉준이 경성으로 잠입하려다 순창에서 민병에게 체포되는 과정
등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판결선고서」는 사료로서의 취약점이 발견된다.
우선 갑오년 이전 전봉준의 활동이 빠져 있는 관계로 그의 활동이 조직적이
고 준비된 것이었다는 결정적인 내용을 담을 수 없었다. 또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조병갑과 같은 지방관리의 부정에 한정시켜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축소시켜 놓았으며, 고부봉기에서 전봉준의 역할을 주민의 추대에 의한 단
순 가담 정도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영향력을 의식한 때문에 이 자
료의 전체 분위기는 ‘척왜斥倭’의 강도가 약화되어 있고, 전주성에서 전봉준
이 홍계훈에 제시한 폐정개혁안 27개 조목 중 반외세 즉 반일의 부분이 빠
진 것으로 판단 되며, 일부만 열거되어 있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끝으로
전봉준의 재판 선고문이라는 성격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전국적인 동
학농민혁명의 전개상을 이 자료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고, 또 전봉준
을 비롯한 농민군의 활동이 비도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시각상
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취약점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이 자료는 전봉준에 관한 빠
뜨릴 수 없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현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다.
-동학관련판결선고서 해제(2015) 169~171쪽

 

 

2. 손화중 장군 판결선고서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원본 국사편찬위원회)http://www.e-donghak.or.kr/index.jsp

제36호[第三十六號]
판결선고서원본 [判決宣告書原本] 손화중(孫化中)
전라도 정읍(井邑) 거주.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
피고 손화중(孫化中). 나이 35세
위에 기재된 손화중에 대한 형사피고사건(刑事被告事件)을 심문하였더니, 피고는 동학당이라고 하는 비도(匪徒)의 거괴(巨魁)로 개국 503년1894년 3월 이후에 해당 무리를 모아 전라도 고부군의 관아에 들어가 소요를 일으켜서 군기(軍器)를 약탈하였다. 그 곳에서 전라 감영의 관군을 상대하였고, 정읍・흥덕・고창・무장 등지를 지나 전주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羲)가 거느린 관병(官兵)을 대적하였다. 그 사실은 피고와 함께 모의를 한 전봉준(全琫準)・최영창(崔永昌) 등이 자백한 공초와 압수한 증거문서에 분명하다. 피고의 행위는 대전회통(大典會通) 중에, “군복을 입고 말을 타며 관문(官門)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을 베라”고 하는 형률(刑律)에 비추어 처벌할 것이다.
위의 이유로 피고 손화중을 사형에 처한다.
개국 504년 3월 29일 법무아문(法務衙門) 임시 재판소가 선고한다.
법무아문 대신(大臣) 서광범(徐光範)
법무아문 협판(協辦) 이재정(李在正)
법무아문 참의(參議) 장박(張博)
법무아문 주사(主事) 김기조(金基肇)
법무아문 주사(主事) 오용묵(吳容默)
회심(會審)
경성주재일본제국(京城駐在日本帝國) 영사(領事) 우치다 사다츠지(內田定槌)

손화중(孫化中). : 이름이 화중(華仲) 등 여럿으로 전해진다.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3대 지도자로 알려졌으며 전봉준 등 5명이 처형되었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www.e-donghak.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