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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

달이선생 2019. 8. 13. 23:00

 

  밀정은 독립운동의 주요 정보를 몰래 일제에 빼돌리는 사람이다.

 

'독립군이 2천명 결성됐어도 그 안에 밀정이 한 사람 있으면 그 조직은 와해되고 마는 것이다.

밀정은 그만큼 어떤 반민족 행위보다도 더 악랄한 반민족 행위다'(김주용 원광대 교수) 


 "이 밀정들은 반민족 행위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라는 것을 규정하고

이건 밝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

 

  KBS 탐사보도부가 1tv '시사기획 창', '밀정'을 2부작으로 기획하고 8개월 동안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 기밀문서, 헌정자료실에 보관된 각종 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5만 장의 문서를 입수하여 밀정 혐의를 받는 895명의 실명을 확인하였다.

 

  "당시의 일본 경찰과 군 라인들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통제하기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정보들을 극비로 모았던 보고 문건들입니다. 그 시기에 일정한 정보의 한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내부에서는 틀림없는 정보들인 거죠"(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

 

  이와 같은 문서는 극비문서들이다. 첫방송으로 '밀정 배신의 기록(8.13, 22시)'을 내보내고 8월 20일 2부 '임시정부를 파괴하라'를 방송하여 일본의 공작과 밀정들의 역할을 방영하였다.

 

  "밀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볼 생각이 없었던 거죠 그 이유는 밀정이 '밀정' 이렇게 나와 있는 게 아니고 모든 보고서가 밀정 보고서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다 숨어있단 말이죠"(김광만 KBS 객원 연구원)

  " 조각 맞추기 같으면 100개를 모아야 되는데, 한 20, 30개 정도밖에 없는 그것도 인제 가운데 몰려있지 않고 흩어져 있는 전체를 알 수 없는 그런 조각인 거죠 그래서 아직까지는 밀정에 대한 연구들이 매우 힘든 상황입니다."(장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이렇듯 지금까지 친일파에 대한 연구는 인명사전 편찬까지 이루어졌으나 밀정에 대한 연구는 거의 걸음마 수준이다. 당시 밀정들의 역할은

 

  "밀정은 일본의 독립운동 전선에서 독립운동가나 독립운동 조직이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서 정보를 일본 쪽에 제공하는 사람들이죠 일본 당국이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진압하기 위해서 또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잡아들이기 위해서 정보들이 지금 필요한 거거든요 그걸 밀정들은 현재의 아주 생생한 정보들을 제공한 거죠"(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이처럼 일제의 밀정은 운영은 일제가 식민지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이에 대항하는 한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위한 정보 수집의 최일선이었다. 이러한 밀정 한 사람당 평균 월급은  50엔이었다. 

 

  "이 사람들 월급이 50원입니다. 아 1920년, 21년에 50원이라는 월급 자체가 얼마나 큰가하면 교사의 초임이 45원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급여보다 많다는 거죠 상당히 많은 비중의 돈을 밀정을 관리해서 독립운동의 정보를 수집하는데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장신)

  "보고 체계는 지금 봐도 상당히 놀라울 정도인데요 아래쪽에서는 서로 갈등이 있더라도 경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정보)을 공유하는 게 상당히 많습니다. 보고서 제일 뒤에 보며는 보고 선이 따로 있어요 이 자료는 어디어디에 보낸다는 발송 선이죠 외무성에서 생산한 정보라 하더라도 육군, 경찰, 검찰 다 보내게 돼 있어요 식민지 경영을 하는 악랄함을 갖고 있었죠"(김광만)

 

   이렇듯 일제의 밀정 조직 관리와 운영은 철저하였다. 밀정의 조직과 관리는 일제 외무성을 정점으로 각국 파견 영사관과 조선총독부, 조선군사령부 등 핵심 식민지권력기관이 참여한 방대한 정보 조직이었으며, 삼림감시원, 독립운동가에 이르기까지 모세혈관과 같이 퍼져 있었다. 이러한 밀정 조직은 일제 조차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방대한 것은 물론 극비로 진행된 조선식민지 경영에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지수였죠, 독립은 대한의 독립은 언제 올지 모르는 거예요 긴 터널, 그 길 터널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편하기 위해서 그 독립운동의 미지수라는 것에 현혹되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공작에 이기지 못해서 오히려 조국의 버리는"(김주용*)

*수원지역 3.1운동을 이끌었던 김연방 애국지사의 증손자이다.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의 종손인 김연방 지사는 1919년 당시 수원군 우정읍 화산리에 살았던 대한제국 시종원 시어를 지낸 지역 유지로 일제 탄압과정에서 주모자로 지목되어 학살되었다. 그로 인해 홀로되신 증조할머니는 평생 소복을 입고 살았고, 할아버지 김창규는 그 울분을 삭히며, 해방 후 발안장 거류민단장이자 김연방 지사 학살 주모자인 사사카 리키치를 쫓아 부산까지 다녀올 정도로 통한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집안의 일을 묵묵히 지켜온 것은 어머니 종부 이신열로 이신열은 충무공의 후손으로 아산에서 시집왔다.   

 

  희망 없은 독립운동의 길에 끝내는 동지를 팔아 자신의 안위를 챙기며, 반민족으로 나서야했던 그들... 방송에서 언급한 주요 밀정들과 895명의 밀정 명단을 공개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지 않아 독립운동은 못했으나 오늘을 살기에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낱낱이 드러내고 진실을 밝히는데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1부 배신의 기록

  일본에서 발굴한 기밀문서에 임시정부 초기의 독립운동가들이 담긴 사진첩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진첩에는 손정도(

孫貞道, 1881~1931, 평안남도 강서출신, 건국훈장 독립장[1962])

, 김홍서(

金弘敍, 1886~1959, 평안남도 강서출신, 건국훈장 독립장[1968]

), 엄항섭(

嚴恒燮, 1898~1962, 경기도 여주출신, 건국훈장 독립장[1989]

) 등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주요인물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매우 극비의 사진이다. 이러한 사진이 유출되면 이를 토대로 독립운동가 파악 및 신상파기(수배 전단)가 가능한 것으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일제가 입수한 사진첩은 독립운동가 곽윤수와 관련이 있었다. 곽윤수(郭潤秀, 1874~1937, 대통령표창[2011]) 지사는 서울 종로 출신으로 임시정부에 사무실과 숙박장소를 제공하면서 조사원으로 활동했다. 이 사진은  임시정부 초기 인물 225명이 담긴 파노라마 사진으로 곽윤수 지사 집에 걸려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사진을 넘긴 것은  곽윤수 선생의 처남이었다. 밀정이 처남에게 가져 오도록 하였다는 일제 측 기밀문서에 드러나있다.  

 

  1909년 한일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하얼빈역에서 사살된다. 바로 안중근(

安重根, 1879~1910)

 의사의 총탄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곧바로 수사에 돌입해 안중근의 동지들을 체포한다. 우덕순(

禹德淳, ?~1950, 충청북도 제천출신)

은 안중근 의사의 동지로 거사를 함께 모의한 애국지사이다. 1920년대 우덕순은 이상 행적을 보인다. 일본 기밀문서 등에 따르면 우덕순은 1920~30년대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민회'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하얼빈 조선인민회 회장을 지낸 우덕순의 단체인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당시 한국인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 친일단체다. 정보 수집이 주요 역할이었다. 일반 한국인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를 면밀히 감시하고 정보를 끌어모았다. 더욱이 우덕순이 일제 정보기관인 '특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나왔다. 우덕순은 조선인민회의 운영을 위한 보조금 신청을 일제 외무대신 시데하라와 직접 통할 정도였고, 일제의 정보기관인 특무기관 간부와 고급호텔에서 값비싼 향응을 제공받았던 인물이다.

 

 

"조선인민회가 활용하는 밀정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 정보가 조선인민회장을 했던 우덕순에게 집중됐다"(중국 지역 한국독립운동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교수)

 

  우덕순은 만주 일대의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우덕순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독립운동가에서 밀정으로 밀정에서 독립유공자로의 변신이었다. 철저한 신분 비밀 유지 덕분이었다. 일제의...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의 상세한 정보가 담긴 일본 기밀문서에는 장군 말고도 참모들인 이장녕(李章寧, 1881~1932), 박영희(朴寧熙, 1896~?, 충청남도 부여출신, 건국훈장 독립장[1977]), 오광선(吳光鮮, 경기도 용인출신, 건국훈장 독립장[1962]), 김규식(金圭植, 1882~1931, 경기도 양주출신, 건국훈장 독립장[1963]),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장군 등 독립군 간부들의 개인별 특징까지 상세히 나와 있다. 핵심 간부가 아니면 알기 힘든 내용, 동지들의 비밀 정보를 일제에 밀고한 사람은 문서에 '이정(李楨, 1895~1943,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써있다. 김좌진 장군의 막빈, 즉 비서로 현재 건국훈장 독립장(1963)을 받아 독립유공자이다. 1924년 작성된 문건이다. 이정은 청산리 전투 4년 만에 밀정이 되었다. 문서는 총 57장으로 군자금 모금 과정과 독립군의 향후 계획 등 내부 기밀 정보가 낱낱이 담겨있다.

 "일제에 아주 중요한 고급 정보였을 테고, 독립운동 세력을 소탕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정보가 일제 측에 밀고되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거죠."(전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이동언)

 

  이러한 이정의 활약 덕분이었을까? 청산리대첩으로 한국독립운동사의 영광의 한페이지를 남겼던 독립군이 흔들렸다. 더욱이 이정은 현충원에 나란히 위패가 있는 이홍래(李鴻來, 1888~?, 함경북도 회령출신, 건국훈장 독립장[1963]) 지사의 활동을 밀고하는데  이홍래 지사는 이 때문인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군자금을 모금하러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일제에 체포된다. 

  일제패망이후 1950,60년대 중국 당국이 파악한 밀정자료 가운데  '김재룡(金載龒) 원동기 자격증'이 발견된다. 김재룡은 함경북도 길주군 출신의 밀정으로 원동기 자격증을 이용해 곳곳을 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밀정들은 철두철미하게 제일 마지막에 있는 그야말로 접점에 있는 실핏줄이기 때문에 원동기 허가증을 갖고 있어야만 농민들과 최전방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을 할 수 있어요 그렇다보니 의외로 수의사 면허증, 농장원, 삼림 관리원 이런 걸로 파견을 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빨치산이나 공산주의자들이나 독립군들의 활동을 다 보고하는 거죠"(김광만)

 

 

 

 

 

 

 

 

 

 

 

 

 

 

 

 

 

 

 

 

 

 

 

 

 

 

 

 

 

방송보기

[시사기획 창]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 - 밀정

입력 2019.08.13 (22:00)수정 2019.08.13 (23:13)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262160

 

 

 

 

 

 

2부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민족독립운동가들은 민족독립운동을 위한 구심체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임시정부의 수립은 일제에 있어서는 있어선 안될 일이었기에 밀정을 동원해 임시정부 파괴 공작을 집요하게 시도하였다. 일제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특히 임시정부내 명망있는 독립운동가를 밀정으로 포섭해 임시정부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고자 계획을 세우는데, 그 중심에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 조선군사령관이 있었다. 조선내 사이토 마코도(齋藤實, 1858~1936) 조선총독 다음 서열이다.
  우쓰노미야가 우선 포섭한 사람은 당시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던 범재 김규흥(凡齋 金奎興, 1872~1936, 충청북도 옥천 출신), 다섯 차례 만난 후 김규흥에게 임시정부를 파괴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김규흥은 이미 밀정으로 잘 알려진 김달하(金達河)와 연결되어 있었다. 
  김규흥이 우쓰노미야에 보낸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김규흥의 친필 편지로, 우쓰노미야 관계자는 한일양국 경색에 따라 실물 공개를 꺼렸다. 다행히 부산에서 논문 준비를 위해 이를 사전에 입수한 배경한 교수(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사본을 처음 공개하였다.

 

  "(우쓰노미야, 1919) 10월 2일 목요일 김상설(金相卨, 1880~1938, 총독부 중추원참의 역임)이 김복(金復)을 데려왔다. 희망 없는 독립운동은 갈수록 조선인을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니 일본에 의지해야 한다고 김복은 말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에 크게 수긍하는 듯했다. 김복, 거의 수중에 들어온 듯하다." 

   "1919년 11월 27일 상해에서 김복이 회유 경과를 보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비용 서류도 도착했다.
   "(김복=김규흥) 우쓰노미야 사령관 각하에게"

  "일제가 외교.군사권을 갖고 그 아래 조선인 내각을 두는 방식으로 가야합니다."
  "임시정부에 200명이 있었지만 대부분 귀국하고 60명만 남았다. 이중 극렬분자는 40명"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선 2, 30만 엔이 필요하다"

  "김달하와 함께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북경에 모아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계책을 갖고 있습니다."

  "활동비로 김달하에게는 3만 엔 저에게도 2만 엔을 주시길 바랍니다."

  "신속하게 김달하를 중용해 그를 후하게 대하고 그 능력을 다하게 해 큰일을 부담하도록 해야 합니다."

 

   김규흥은 당시 우쓰노미야 조선군 사령관과의 만남 등 친일 논란이 있었지만, 그동안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 은행을 설립(흥국은행-흥화실업은행 개칭)하고자 일제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타내기 위해 밀정으로 위장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밝혀왔다. 그런데 위와 같은 구체적인 밀정 의심 행적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 


   "제가 김규흥을 발굴했달까 이렇게 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우쓰노미야의 일기나 이 편지를 읽었을 때 크게 놀랐습니다. 경악스러웠죠.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서훈 심사 당시에 우쓰노미야 일기와 이 편지가 공개되었다면 서훈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연기됐을 겁니다. 그 당시로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연구자들의 연구를 기다려야 되지, 조급하게 이쪽이냐 저쪽이냐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배경한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


  김규흥은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金九, 1876~1949)를 경무국장으로 임명하고 요원들로 하여금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를 보호하고 밀정 색출과 처단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공교롭게도 경호원 중에 밀정 한태규가 있었다. 한태규는 자신이 밀정이라는 사실을 동거인 조선여인에게 들키자 이를 감추기 위해 줄을 이용해 목을 졸라 살해했는데, 그 방식이 밀정을 처단하던 경무국의 방식이었다. 이렇게 김구는 밀정 한태규를 밝혀내고 그를 처단한다. 그러한 일화를 백범일지에

 

  "그런 악한을 절대 신임했던 나야말로 세상에 머리를 들기 어렵다는 자괴심이 들었다..."

 

라고 심경을 밝히고 있다.

 

  "이곳은(일본총영사관) 당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지휘소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쑨커즈 중국 푸단대 사학과 교수)

 

  상해 일본 총영사관은 끊임없이 밀정을 생산해 내는 이른바 '밀정 공장'이었다. 집요하게 임정 내부에 밀정을 침투시켰고 김구 선생의 경호원까지 밀정으로 포섭했다. 세 차례에 걸쳤던 김구 암살 시도, 모든 공작에 일제는 밀정을 동원하였다.


  "김구 선생은 심장 있는 데 관통을 당하고, 독립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매수돼서 저격당하게 됐다."(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해방 직전까지 무장투쟁의 의지를 불태웠던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1898~?) , 무장투쟁만이 독립운동의 근본적 대안으로 여겨 1919년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조선의열단을 조직하였다. 특히 의열단은 1921년 9월 12일 김원봉의 조선 총독 암살 밀명을 받고 국내에 잠입한 김익상(金益相, 1895~1941, 경기도 고양출신,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이 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고 유유히 빠져나와 상해로 돌아갔고, 이어 상해에서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864~1929)가 오자 그를 저격하여 머리에 총상을 입히고 붙잡혔다.

  이 일로 일제는 조선의열단의 존재를 알았고 큰 충격에 빠진다. 이 때 일제가 대책을 세운 것이 바로 밀정을 통한 의열단 공작이었다. 일제의 계략은 성공적이었다. 의열단을 회를 거듭할 수록 거사가 실패하였다. 단발적인 항일투쟁에 한계를 느낀 김원봉은 결국 군대를 조직하기로 결심한다. 1925년 의열단원들과 상해를 떠나 비밀리에 광저우의 황포군관학교로 간다. 이러한 기밀사항도 고스란히 일제에 넘어갔다. 1926년 작성된 일본 기밀문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결국 의열단의 활동과 김원봉의 행적이 밀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일제에 기밀로 전달되어 그 활동이 위축되었던 것이다. 일제가 심은 밀정 때문에...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함께 한구로 왔고, 김원봉은 북경을 거쳐 광둥으로 향했다." 

  "상해 프랑스 조계 31공학에서 의열단 총회가 개최될 것이다. 참석자는 40~50명이다"

 

  러시아와 일제에 대항할 선전비 교섭도 밀고된다. 이러한 기밀이 넘어가면 결국 일제의 외교력으로 타격을 입게 된다. 의열단 결성의 주역 한봉근(韓鳳根, 1894~1927, 경상남도 밀양출신, 건국훈장 독립장[1980]) 지사의 정보, 의열단의 사무실 위치는 물론 행적 하나하나 철저히 비밀이었던 내부 정보(기밀사항)가 누출됐다. 문서에 적힌 밀고자는 의열단원 김호(金浩), 본명 김재영(金재瀯, 1892~?, 경상남도 하동 출신)이다. 의열단과 청년동맹회에 참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1995)을 받은 자이다. 

  기밀유지가 목숨과 같았던 의열단원이 일본 총영사관으로부터 돈을 받는 조건으로 기밀을 팔았다. 더욱이 김재영은 돈이 떨어지면 일본경찰서로 찾아가 자신이 밀정임을 밝히고 돈을 받아갔다. 치졸하고 추악한 단면이다. "상해에 있다가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진 의열단 김원봉의 간부들이 광저우로 갔다, 그리고 황포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거는 상해 일본 총영사관으로서는 굉장히 새롭고, 고급 정보입니다."(대구대 김영범)라고 밀정 정보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굉장히 놀랐어요. 밀정이라는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그런 짓인데 기막힌 일이죠, 말이 안 되는 얘기죠."(김태영 김원봉 후손)  

  평생을 민족독립을 위해 싸우다 비운에 간 약산은 지금껏 서훈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지의 정보를 팔아 호의호식하였던 추악한 김재영은 서훈이 된 사실 아이러니다. 역사의 뒷맛이 씁쓸하다.

 

  "홍범도는 포수였죠. 유명한 포수였고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독립군의 명장으로 전술과 전략이 굉장히 뛰어났고 사결술에 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제가 잡으려고 애를 썼는데도 잡지 못해서 만주벌의 호랑이다"(이동언 전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홍범도(洪範圖, 1868~1943, 평안남도 양덕 출신,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장군은 봉오동 전투가 있기 10년 전부터 지속적인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1912년 작성된 일본 기밀문서, 밀정이 된 홍범도의 부하가 밀고한 내용이다.


  "홍범도는 부하 500여 명과 총기 500자루를 갖고 있고 차도선은 부하 300명에 총기 300자루를 갖고 있다."

  "홍범도는 러시아 말 한 마리를 타고 있다. 홍범도의 복장은 부하들과 비슷하게 갈색이고 팔에 차는 완장에는 붉은색 선 두 줄이 둘러져 있다. 어께에 차는 견장은 청색이고 통령감이라고 적혀 있다."  
  "조선 안으로 침입한 부하들의 이름과 파견된 지방은 다음과 같다."

  "원상학 35세 상투를 튼 머리 얼굴은 둥근 편 신장은 5척 정도 체격이 큰고 피부가 단단하다. 흰 장갑을 끼고 있다."

  "김한보 28세 수염이 있다. 코가 높다. 체격은 마른 편"

  "표창순 27세 신장은 5척 정도 얼굴이 길다. 통통한 편 눈과 귀가 크다 입이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다."

  홍범도의 명을 받고 일제치하 한반도의 상황이 어떤지 살피던 충직한 부하들이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낱낱이 탄로났다.

 

  "앞에 세 분과 최달룡 이런 분들을 찾아봤어요 국가보훈처에 자료가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우리 역사 속에서 휘발돼 버린... 우리가 기억 조차하지 않고 있는 분들인거죠"(이재석 기자)

  "홍범도 장군 소재지도 나오는 것 같아요 혜산진 대안 일리에서 약 30리 떨어진 신약수동에서 거기서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 지역 동북쪽에 있는 사헌부락(위장가옥)에 가옥을 지었다. 점점 범위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거예요 홍범도 장군이 거주하는 위치를... 그건 가짜고 신약수동에 거주하고 있다. 이렇게 봐야 되는 거죠"(이세중 기자)

 

   일제의 이런 감시에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은 봉오동,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치욕적으로 패배한 일본은 간도에 있는 한국인 수천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간도참변) 홍범도는 대한독립이 되는 그날을 위해 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1937년 스탈린의 정책에 따라 러시아의 한인들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다. 그는 75세 나이로 해방의 기쁨도 보기도 전에 머나먼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때 장군의 직업은 극장 문지기였다.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공을 인정 받고 최고에 영예다. KBS탐사보도부는 이번 취재로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 중 심각한 흠결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대한민국 서훈 과정이 얼마나 부실한가를 보여준다. 건국훈장은 개인에 대한 예우를 넘어 국가의 뿌리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지금, 과연 우리는 역사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제대로 돌아보고 있는 것인가

 

  "우리나라가 친일파 청산도 제대로 안 됐지만 밀정은 더 심각합니다. 친일파는 드러났지만 밀정은 드러나지 않고 신분세탁을 했어요 이 사람들을 도려내지 못했죠 이번에 많은 자료가 나왔지 않습니까? 앞으로 또 많이 나올 겁니다. 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을 맞이한 올해부터 새로운 과거로 새롭게 출발해서 다음 세대에는 나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우리가 힘써야 한다는 겁니다."(김광만 KBS 객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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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밀정 2-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입력 2019.08.20 (22:00)수정 2019.08.20 (23:02)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266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