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개관한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을 다녀왔다.(2024.10.5.)
보통의 전시관과 다르게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으나 지하에 시설이 있으면서 점점 내려가는 기념관의 닿는 길은 엄숙하면서도 숙연한 느낌을 준다. 이곳은 화성시에서 있었던 3.1운동의 대표적인 순국지이기 때문이다.(1919년 당시 수원군이며, 오래전부터 남양과 수원이라는 지역 정체성이 깃듯 곳) 제암리 주민 수십 명이 교회당에서 목숨을 잃었고 이웃한 고주리에서는 일가족이 몰살을 당했다.(김흥렬 일가) 이는 모두가 3.1운동이라는 민족적 거사에 분연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화성은 물론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그저 평범한 우리 이웃이 일제에 항거한 아주 평범하지만 극렬했고 무서운 탄압이 뒤따랐던 참혹한 역사이다. 이제는 우리 헌법에서 천명하듯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이지만 그 시대를 살아냈던 사람들은 혹독했던 겨울 그 자체였다.
제암리 순국기념관이 있으나 화성시에서 있었던 독립운동 전체를 담아 낼 수 없다는 한계가 발전적으로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오래 지나서 꼭 가야지 하다 두 아들을 데리고 부모님과 같다. 숙연한 입구 내리막 길을 한참 돌아 입구에 다다르니 멀찍이 돌아서 절(저리)로 가란다. 알고 보니 입구 로비 천정에서 물이 새고 바닥은 금이 가있다. 누가 보더라도 느낌 있는 건축이 아닌 부실 공사다.
그래도 건축가가 우리 화성의 3.1운동에 대한 공부와 애정이 있는지 건축 설계를 잘해서 그 동선을 지키며 상설전시관으로 발을 옮긴다. 분위기는 이런 느낌을 계속 준다. 화성의 처음 봉기, 사강 시위와 홍면옥 지사가 나오고 이어 커다란 중앙 공간에 '삼괴의 4.3항쟁'인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이 미디어보드로 참신함이 눈을 끈다. 게다가 주요 장소를 터치하면 인물, 장소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좋았다.
그간 화성의 3.1운동에서 특히 4.15 제암리 학살사건이 가혹하게 이어질 수 있었던 사건이 우정, 장안면의 항쟁이었고 게다가 이들 주민에게 자행했던 일제의 보복 수준에서 제암리의 비극은 충분히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내 고향의 이야기에 충격이었고 뒤늦게 알아 널리 알리고픈 맘이 정말 컸다. 그리고 이렇게 현실화되니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미디어보드 쌍봉산 너머가 쌍봉산보다 높은 산봉우리로 둘러친다. "엥 이건 뭐지"
화성시는 서해에 면해있는 해안도시이다. 개발독재시대 이르러 남양황라라 이르는 우리나라 최초의 차관 도입(박정희 대통령) 대규모 간척사업의 결과로 어촌벽지의 풍경이 순연한 여느 농촌마을이 된지 40년이 흘렀다. 그렇지만 쌍봉산 너머 서쪽은 바다다 당대를 묘사한 미디어 전시인데 산이 왠말인가 해발고도 100미터에 불과한 쌍봉산이 지역에서 두드러질 수 있던 것은 대부분 해수면과 맞닿은 지형지대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이곳을 일러 '염전이 별처럼 펼쳐진 곳'이라고 일컬었다. 그런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미디어보드가 그냥 다 무시한다. 정체성이 무너진 거다.
뭐 이 정도가지고 난리냐고 할 수 있으나 3.1운동의 원동력이 이들 염전과 간석지에 있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또한 천도교로서 전국 최대로 성미를 낼 수 있었던 저력도 이러한 생산기반을 통해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인데 이러한 역사성과 정체성을 무시한 처사이다. 화성시의 몰이해다.
전시관을 나와 기획전시실에서 유족의 기증품으로 이어진 기획전시를 본다. 그리고 생각이 든다. "뭐 본거지"
엄청 굉장한 무엇이라는 느낌은 받았지만 정작 작은 것도 남지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평범했던 그들의 이야기지만 그들이 너무 안 보인다. 전시를 했다지만 가독성이 없다. 감흥이 없다. 건물에서 주는 감흥이 전시물에서는 전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과거 순국기념관의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가 되뇌어진다.
이런 점을 들어 관계자와 민원 통화를 하였다. 너무나 실망스럽다. 1차 사료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최근 연구 경향을 반영해야는데... 구구절절 하는데 다 변명이다. 첫술부터 배부르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비판을 못 받아들인다. 다행히 더 위 책임자는 수용적 태도이다.
독립운동 자체는 1차 사료가 사실 전무하다. 기억에 의존하는 구술자료로 2차 사료가 더 우선시 할 수밖에 없는 현실문제가 있다. 비밀리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길이라서 철저히 흔적을 남기지 않은 탓도 있고 또는 당대 일제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일이기에 국내는 물론 해외에 체류하면서 남기는 흔적도 거진 전무하다. 이는 전공자가 더 잘 알텐데 이걸 전문가랍시고 떠든다. 김구, 안창호, 이회영, 신채호 등 유명인사도 1차 사료가 부재한데 하물며 시골 벽촌의 사람들의 흔적을 1차 사료 운운한다면 말이 안된다.
3.31 발안장 시위와 발안, 팔탄, 양감, 삼괴지역의 민족의식 고취를 말한다면 마땅히 탄운 이정근 선생(개화서당 개화유림)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고 제암리를 말한다면 홍원식, 전동례(생존자)와 스코필드(석호필, 선교사로 수원의 3.1운동을 전세계에 알림)여야 한다. 그리고 이들 민의 구심점이 되었던 천도교와 기독교(감리교), 유학적 지식인인 구장의 향촌체제에 대한 내용이 실상이다. 이러한 이전의 전시 내용들이 구시대적 발상과 유물로 치부되는 것은 안된다. 이 정도도 이해를 못하면서 학예사니 전문가라고 한다면 부끄럽지 않은가 게다가 최근의 연구성과로는 수원대 박환 교수의 연구와 그 동고학연구소의 실적이면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최근 연구 운운한다. 아니 김구같은 연구도 최근 연구 성과가 미비한데 하물며 지역사를? 근현대사를 전공했다는 그 담당자(문화유산과) 너무 화가 난다.
오랜 생각인데 '화성에는 화성사람이 없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너무 지역에서 몰입해도 안되는데 화성군시절부터 이 지역의 내노라는 사람들은 지역 일을 하지만 지역의 일을 안했다는 생각이다. 100만 인구의 특례시를 앞두고 있는데 사실 기아자동차 아산만 공장이 여기로 올 때 이는 큰 변혁이고 기회였다. 향남은 물론 조암이 신도시로 조성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근데 참... 기아를 예로 했으나 다 이런 식이었다. 화성에 걸맞는 화성의 사람들이 화성의 문화를 일구길 소망한다.
그래도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화성시 당대 수원지역 3.1운동의 과정과 이야기를 보여주는 곳이고 더욱이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은 기념관보다 더 큰 감흥을 준다. 이곳의 처절했던 이야기를 작은 비석에 이승만 대통령 친필 휘호가 말해주듯 우리 민족사에서 중요했던 곳이고 면면한 그곳에 스코필드와 자전거(동상)가 위치하고 그 영령을 모신 23위의 커다란 무덤이 있다. 넓은 순국유적 공원과 기념관 주변에 편의시설이 없으니 기념관 한쪽 카페테리아에 매점과 카페가 꼭 유치되어 이곳을 방문하는 길손들에게 작은 쉼이 있는 곳이 생기길 바라본다. 순국 유적으로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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