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최석정 선생 묘

달이선생 2024. 9. 21. 14:07

명곡(明谷) 최석정 선생은 지천 최명길의 손자로 조선의 명재상이다. 2024년 9월 14일 묘소를 찾았다.

인조반정 이후 병자호란을 거치며 대의명분과 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권 서인에 맞서 청과의 화의를 주장하며 조선의 병란에서 구했던 최명길의 처사로 훌륭한 조상이지만 이러한 면을 당당히 드러낼 수 없었던 조선에서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것이 최석정, 최석항, 최창대 등 최명길의 후손이었다.

더욱이 4대붕당으로 노소분당이 되면서 소론의 영수로 노론과 대립하게 되니 이러한 처지 더욱 더 개인에 대한 사대존화주의 빠진 사류들의 집중적인 공격과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최석정 선생의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졸기는 상당히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판중추부사 최석정의 졸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지극한 슬픔으로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었다."
하고, 이어 예장(禮葬) 등의 일을 속히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최석정은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공교하며 경솔하고 천박하였으나,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어 여러 서책을 널리 섭렵했는데, 스스로 경술(經術)에 가장 깊다고 하면서 주자(朱子)가 편집한 《경서(經書)》를 취하여 변란(變亂)시켜 삭제하였으니, 이로써 더욱 사론(士論)에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번 태사(台司)123) 에 올랐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으며, 남구만(南九萬)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그의 언론(言論)을 조술(祖述)하여 명분(名分)과 의리(義理)를 함부로 전도시켰다. 경인년124) 에 시약(侍藥)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엄지(嚴旨)를 받았는데, 임금의 권애(眷愛)가 갑자기 쇠미해져서 그 뒤부터는 교외(郊外)에 물러가 살다가 졸하니, 나이는 70세이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判中樞府事崔錫鼎卒。 上敎以震悼之極, 涕淚沾襟, 仍命禮葬等事, 卽速擧行。 錫鼎性傾巧佻淺。 少有文名, 淹博群書, 自謂最深於經術, 取朱子所編經書, 變亂而㧓裂之, 以此尤得罪於士論。 屢登台司, 處事多顚妄, 師事南九萬, 祖述其言論, 放倒名義。 庚寅以侍藥不謹, 被嚴旨, 上眷頓衰, 自後屛居郊外而卒, 年七十。 後諡文貞)
숙종실록 56권, 숙종 41년 11월 11일 계묘 3번째기사 1715년 청 강희(康熙) 54년

판중추부사 최석정의 졸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졸(卒)했다. 최석정은 자(字)가 여화(汝和)이고, 호(號)가 명곡(明谷)인데,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의 손자이다. 성품이 청명(淸明)하고 기상(氣像)이 화락(和樂)하고 단아(端雅)했으며,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를 따라 배웠는데, 이치를 분별하여 깨달아 12세에 이미 《주역(周易)》에 통달하여 손으로 그려서 도면을 만드니, 세상에서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구경(九經)과 백가(百家)를 섭렵하여 마치 자기 말을 외듯이 하였는데, 이미 지위가 고귀해지고 늙었으나 오히려 송독(誦讀)을 그치지 않으니, 경술(經術)·문장(文章)·언론(言論)과 풍유(風猷)가 일대 명류(名流)의 종주가 되었다. 산수(算數)와 자학(字學)에 이르러서는 은미(隱微)한 것까지 모두 수고하지 않고 신묘하게 해득(解得)하여 자못 경륜가(經綸家)로서 스스로 기약하였다. 열 번이나 태사(台司)004) 에 올라 당론(黨論)을 타파하여 인재(人才)를 수습하는 데 마음을 두었으며, 《대전(大典)》을 닦고 밝히는 것을 일삼았다. 신사년005) 에 세 번 차자를 올려 미움받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것이었으니, 조태채(趙泰采)가 매복(枚卜)에서 대신(大臣)의 풍도가 있다고 했다. 소관(小官)에 있을 때부터 임금의 권애(眷愛)가 특별하여 만년까지 쇠하지 않자, 당인(黨人)들이 이를 매우 시기하여 처음에는 경서(經書)를 훼파(毁破)하고 성인을 업신여겼다고 무함하다가 마침내 시병(侍病)하는 데 삼가지 않았다고 구죄(構罪)하니, 하루도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편안히 지내면서 끝내 기미(幾微)를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너그러운 도량에 감복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경외(京外)를 왕래하다가 황야(荒野)에서 죽으니, 식자(識者)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문식이 지나치고 또 경솔하여 절실함이 깊지 못하였다.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긴요한 듯하면서 실지로는 범연하여 남구만(南九萬)처럼 독실하고 정확(精確)하지는 못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며, 태묘(太廟)에 배향(配享)되었다.(癸卯/判中樞事崔錫鼎卒。 錫鼎汝和, 號明谷, 文忠公 鳴吉之孫。 淸明愷悌, 敏悟絶人。 幼從南九萬朴世采學, 刃解氷釋, 十二已通《易》, 手畫爲圖, 世稱神童。 九經、百家, 靡不通涉, 如誦己言, 旣貴且老, 猶誦讀不輟, 經術、文章、言論、風猷, 爲一代名流之宗。 以至算數、字學, 隱曲微密, 皆不勞而得妙解, 頗以經綸自期。 十登台司, 以破黨論, 收人才爲心, 以修明《大典》爲事。 辛巳三箚, 受疾於己言人所難拔, 趙泰采於枚卜, 有大臣風。 自在小官, 上眷殊異, 晩而不衰, 黨人甚忌之, 始以毁經侮聖, 誣之, 終以侍疾不謹, 構之, 不得一日安於朝廷, 處之晏如, 終無幾微見於色, 人服其雅度。 晩益棲屑, 卒於荒野, 識者恨之。 然文勝且率爾, 不能切深, 論治似要而實泛, 不若南九萬之篤實精確焉。 諡文貞, 配享太廟庭)
숙종실록보궐정오 56권, 숙종 41년 11월 11일 계묘 1번째기사 1715년 청 강희(康熙) 54년

숙종실록과 숙종실록보궐정오가 차이가 나는 것은 숙종실록이 당대 집권 노론에 의해 편찬된 실록이라 노론과 반대되던 소론의 권신에 대한 비판적이고 축약적인 기록이 이루어진 사실이 보여진다. 반면 일시 소론이 영조대 정미환국으로 일시 권력을 잡으면서 소론에 대한 기록을 전면 개정하고자 하였으나 쉽지 않아 일부 보충이나 바로 잡는 선에서 실록 개수잡업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보궐정오이다. 따라서 최석정에 대한 졸기도 상당히 보충되고 비판이 사라진 측면이 잘 보여진다.

이렇듯 개인의 평가가 매우 사나운 현실에서 최석정 선생은 이러한 사류의 평가를 멀리하고자 유시를 통해 묘표, 묘갈, 신도비 등 일체 금하게 하여 현달했던 아들 최창대에 이르기까지 비석을 금하여 무자비 묘가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표식과 표석 등을 통해 그이 묘소임을 알 수 있지 아무런 표시가 없다면 그의 묘를 알 수 없다.

또한 최석정은 당대 사류가 이단으로 몰았던 양명학의 대가 정제두와 친구였다. 정제두가 안산 추곡과 강화 하곡에서 양명학에 대해 심취하며 그의 학문을 깊이 할 때 편지를 통해 이를 통박하고 양명학을 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린다. 이는 최석정 뿐 아닌 당대 소론의 권신들인 친우는 물론 스승 박세채는 물론 당여 소론의 영수 윤증 등도 마찬가지였다.

최명길 선생 묘 및 신도비를 조금 지나 나오는 명곡 선생 묘는 입구에서 언듯 보면 구릉 여러 묘소 위가 최석정 선생 묘로 착각이 든다. 이는 선생의 아들 최창대의 묘소이고 그 옆으로 난 오솔길로 한 100여 미터 남짓 더 들어가야 선생의 묘가 나타나고 그 뒤로 전주최씨 입향조에 해당하는 고려말 최재의 묘가 서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석정 선생 묘는 비석이 생략된 단촐한 모습이나 위의 선조 묘는 묘제석물이 다 갖췄다. 최석정 선생의 유시로 현재까지도 비석은 세우지 않고 표석만 세운 후손들의 결정을 존경한다.

위대한 조상은 겉치레 겉치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조상의 위엄과 격은 후손의 처사로 기인된다. 안동 퇴계가도 이향의 유언과 가르침에 따라 단촐하게 묘소와 제사 등이 아름다운 풍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석정 선생의 묘소는 단촐하다고는 하나 비석과 신도비를 빼고는 조선의 재상으로서 묘제석물을 잘 갖춘 엄숙한 묘역이다. 특히 무덤봉분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고 보호하는 호석은 무덤에 있어서 최고이 예장이다.

전주최씨 묘역을 들리고 나와 20여 분 달리니 예전 맛보았던 초정리 광천수가 나온다. 맛은 정말 탄산수와 같다. 탄산수보다 탄산이 적은 탄산수

전 홍문관 부제학 최창대의 졸기

전(前)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최창대(崔昌大)가 졸(卒)하였다. 최창대의 자(字)는 효백(孝伯)이요 호(號)는 곤륜(昆侖)으로, 문정공(文貞公) 최석정(崔錫鼎)의 아들이다. 청명(淸明)하고 고랑(高朗)하여 빛나기가 빙옥(氷玉)과 같았고,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경전(經傳)과 백가(百家)를 깊이 연구하였다. 신령한 마음과 지혜로운 식견은 거의 소광(昭曠)005) 의 근원을 보았으므로, 비록 횡역(橫逆)과 원감(怨憾)에 처하였으나 의론이 항상 공정하여 털끝만큼도 분노한 기색이 없었다. 경악(經幄)에 출입하면서 규절(規切)006) 한 바가 많았고, 임금의 비위를 거스리는 일을 피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항상 어긋나 방랑하였기 때문에 조정에 나가서 벼슬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만년에 유수(留守)에 발탁되었으나 선무(先誣)007) 를 끌어대고 임하지 않으니, 자질(資秩)을 회수하였다. 이때 선배(先輩)는 조락(凋落)하고 사류(士流)는 물러나 있으니, 최창대가 관위(官位)는 비록 높지 않았으나 세도(世道)의 책임이 의지하여 경중(輕重)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졸(卒)하니 나이 쉰 둘이었다. 조야(朝野)가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겼으며, 비록 취향을 달리하는 자라 할지라도 또한 애도하였다. 최창대는 일찍이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났는데, 체재(體裁)가 균정(均停)하고 사리(辭理)가 구도(俱到)하여 박세당(朴世堂)·김창협(金昌協) 등 몇 사람과 서로 경쟁할 수 있다고 한다.(戊午/前弘文館副提學崔昌大卒。 昌大孝伯, 號昆侖, 文貞公 錫鼎子也。 淸明高朗, 炯如氷玉。 承家學, 深究經傳、百家, 靈心慧識, 殆見昭曠之源。 雖處橫逆、怨憾, 而議論常公, 無一毫忿懥氣。 出入經幄, 多所規切, 不避觸忤。 以此常齟齬留落, 立朝無幾時。 晩擢居留, 引先誣不赴, 收資秩。 時, 先輩凋零, 士流廢屛, 昌大雖官位未尊, 而世道之責, 倚爲輕重焉。 至是遽卒, 年五十二。 朝野痛惜之, 雖異趣者, 亦爲之嗟悼。 昌大早以文章名, 體裁均停, 辭理俱到, 可與朴世堂金昌協數人竝駕云)
숙종실록보궐정오 65권, 숙종 46년 4월 22일 무오 1번째기사 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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