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조광조 선생 묘 및 신도비

달이선생 2025. 1. 14. 14:28
무릇 선생께서 크게 임금에게 인정을 받을 즈음에는 여러 현인들이 모두 조정에 진출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함께 좋아하였으나, 그윽한 절개는 끝내 시들었다. 높은 절개는 뭇사람들이 시기하였다(夫當先生際遇之隆。群賢彙進。擧世同好。幽貞卒萎。高節衆猜)

청음집 제39권 제발(題跋) 17수(十七首)

조정암(趙靜菴) 선생이 난죽화병(蘭竹畵屛)에 쓴 시 뒤에 제하다(題趙靜菴先生蘭竹畫屛詩後)

1750년경에 그린 국오 정홍례가 그린 조광조 초상화

 

"숲보다 큰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고, 해안보다 높은 흙더미는 파도에 쓸려가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비방에 시달린다.(木秀於林 風必推之 堆出於岸 流必湍之 行高於人 衆必非之)

출처 : 중국 삼국시대 문인 이강, 류쉬안(번역 원녕경), 2020, 『성숙한 어른이 갖춰야 할 좋은 심리습관』 168쪽)"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정암 조광조 선생의 삶과 그 이력이 이러했다.

 

"때를 만났으나 때가 아니었다"

  중종반정 이후 조선 건국세력으로 성리학은 물론 경세적 경학을 추구하여 조선 전기 문물 정비와 발전을 주도하였던 훈구파는 성종 이래로 수구 기득권화하여 조선의 변화와 발전을 더는 이끌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다. 따라서 연산군의 폭정을 끝내고 중종이 등극한 지금이 정암 선생이 조선의 변혁을 이룩할 수 있는 때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변화를 이끌 재목이 아니었다. 문약하고 영린하지 못한 군주 중종 때문이다. 그래서 때가 아니었다. 결국 중종의 무능은 그 아들 인종, 명종 대를 거치면서 태종과 세종, 세조, 성종 조 이룩한 조선의 황금기를 무참히 무너뜨렸다. 그래서일까 조선 왕조 적통도 명종을 끝으로 절손되고 서자에서 왕이 나오니 선조다. 이후 선조의 적통과 서자왕들이 대를 이었다.

 

을사년 새해맞이로 첫 번째 나들이는 역시 우리 두 아들 지시환과 같이 엄동설한을 뚫고 지척에 있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와 심곡서원을 다녀왔다.(2025.1.11.) 두 아해와 나서니 그 춥던 한철도 볕이 들고 온화하다. 답사를 다녀오고 정암 선생을 생각하며 어떻게 글을 쓸까 생각에 잠겼다. 블랙아이스로 길이 미끄러워 아이 손을 꼭 붙들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버드내도서관으로 향하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꼬리를 문다. 그 이야기를 푼다.

  화성에서 자라고 수원에서 살고 있지만 가까운 용인의 역사에 문외한이었다. 그래도 역사를 전공했어도 지역사에는 빠삭하다고 자부했는데 아니었다. 오늘날 용인시청이 위치한 곳은 과거 용인이 용구현과 처인현이 합쳐 용인이 되기 전 처인현의 중심이었고 실제 용인이 된 이후 용인의 중심은 현재의 용인시 수지구 일대이다. 광교산 자락 동편에 구성동 일대가 용인읍치였다. 현재 읍치의 사실을 알려주는 용인 향교가 용인 구성초등학교 (용인관아지)동편에 위치한다.

  이러한 용인에 걸출한 인물들이 기거하게 되는데 한 분은 고향으로 가시다가 머물러 장지가 되신 분이고 한 분은 선산이 위치하여 친구 양팽손에 의해 묻히신 분이다. 바로 포은 정몽주와 정암 조광조이다. 조선 사림의 정신적 지주이다. 따라서 정몽주 선생을 모신 묘가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 있고 재실 영모재와 배향된 충렬서원이 있다.

  조광조 선생은 정몽주 선생 묘와 반대인 서쪽으로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산 55-1(포은대로 125)에 위치한다. 선생의 묘소에서 큰 길로 나가면 정몽주 선생 묘로 이어지는 포은대로이다. 이 대로변에 수지구청이 위치한다. 이 도로는 수원에서 용인을 거쳐 광주로 이어지는 길로 광주 가기 전 모현읍이 정몽주 선생 묘가 있어 모현, 즉 성현인 정몽주 사모,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림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고 종장을 삼았던 사람이 조광조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사유(師儒)와 유생 등에게 강(講)을 시키니, 성균관 사성 김안국(金安國)이 《논어(論語)》를 강하여 ‘통’(通)하고, 사예(司藝) 김윤온(金允溫)이 《시경(詩經)》을 강하여 ‘통’하고, 진사 조광조(趙光祖)는 《중용(中庸)》을 강하여 ‘약’(略)하였다. 강이 파한 뒤에 안국과 윤온에게는 ‘각각 마장(馬裝) 한 벌씩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무오 사화(戊午史禍)를 겪은 뒤부터 사람이 다 죽어 없어지고 경학(經學)이 씻은 듯이 없어지더니, 반정 뒤에 학자들이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조광조(趙光祖)는 소시에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여 성리(性理)를 깊이 연구하고 사문(斯文)을 진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추대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丁卯/御思政殿, 講師儒及儒生等。 成均館司成金安國《論語》通, 司藝金允溫《詩》通, 進士趙光祖《中庸》略。 講罷, 命賜安國允溫, 各馬裝一部。

【史臣曰: "國家自戊午史禍之後, 士林殲盡, 經學掃地, 反正之後, 學者稍稍興起。 光祖少時, 受學於金宏弼, 以硏窮性理, 振起斯文, 爲己任。 學者推爲士林領袖。"】)
중종실록12권, 중종 5년 11월 15일 丁卯 1번째기사 1510년(자료열람 | 조선왕조실록)

 

  정암 조광조 선생은 1519년 중종의 친위쿠데타였던 기묘사화로 말도 안되는 '주초위왕'이라는 모함으로 죽은 기묘명현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졸기를 남기지 못했으나 당대 실록에 조광조 선생을 성리학자로 김굉필의 제자이자 사림의 영수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로 서인의 영수 청음 김상현은 현인이지만 뭇사람의 시기로 시들었다라고 평한다. 이렇듯 조선 후기 사림, 특히 서인, 노론으로 이어지는 집권 사림으로부터 정신적 지주로서 추앙된다.

  사실 조광조 선생이 대단한 것은 그가 사림의 영수이기 이전에 훈구파, 즉 훈구공신의 후예라는 것이다. 신도비에서 보이듯 그의 선조 조휘는 쌍성총관부의 총관이었고 후에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개국공신이 조온(한천부원군)이었다. 바로 정암 선생의 고조부이다. 조부 조충선은 세종 때 문과 급제하여 안평대군과 결의형제를 맺었던 위인이다. 백부 조원상과 작은아버지 조원기까지 3대 문과급제 했고 특히 조원기는 공신후예로 안당, 신상 등과 사림후원자가 된다. 조원기는 한양조씨 족보를 처음으로 편찬하였다. 이렇듯 비록 아버지가 현달하지 못해 과거에 오르지 못했으나 문관 6품에 해당하는 찰방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던 것은 이러한 공신의 후예로서 우대한 조선 왕조의 법통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조광조에게 일생일대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연산군 4년(1498), 아버지 조원강이 압록강변 평안도 어천 찰방으로 부임하면서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희천으로 김굉필이 유배를 오자, 17세였던 조광조가 아버지에게 청하여 그를 사사하게 된 것이다. 공신의 후예가 사림의 종장 김종직의 3대 제자(정여창, 김일손)의 하나였던 김굉필을 사사한 것이다.

  이 만남이 정암 조광조를 사림으로 이끌었고 그가 도학정치를 표방하며 자신의 가문을 지키게 하였던 공신 기득권을 버리게 하고 끝끝내 그들과 척을 지게 되는 위훈삭제로 나아가게 되는 운명적 만남이었다. 위훈삭제는 공신록을 세세히 전승하지 못하게 하여 공신 후예인 훈구파의 경제적, 사회적 위상을 박탈하는 조처로 왕권강화 정책 이상의 엄청난 변혁을 주창한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는 기득권 훈구파에게 있어서는 같은 하늘을 도저히 이고 함께 살 수 없는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 역사에서는 점진적으로 꼭 필요한 조처였지만 말이다.

  조광조 선생은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이다. 아버지 조원강(趙元綱)과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 閔氏 민의(閔誼)의 딸) 슬하 1482년(성종 13)에 한성에서 출생했다. 17세에 사림의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을 사사하고 29세에 이르러 처음 사마시 경오 식년시(1510년, 중종5) 진사 1등 장원을 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성균유생과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조지서사지로 조정에 나아가고 그해 대과 을해 알성시(1515년 중종10) 을과 1위를 하고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며 중종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어 주자학의 핵심인 도학정치를 현실 정치에서 구현하는 데 전심을 다했다.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를 폐지하고 천거시취제인 현량과를 설치하여 도학정치를 표방하던 소장 사림들을 관직에 진출하도록 했다. 반정공신인 정국공신이 너무 많아 많은 문제가 불거지자 거짓 공훈 삭제(위훈삭제)를 주장하여 훈구파를 축출하려 하다가 이들의 강한 반발로 새로운 정치질서(도학과 왕도정치)를 이루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중종의 친위쿠데타인 기묘사화로 1519년(중종 14)에 사사되었다.

"삼가 생각하건데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도를 행하려 했던 것인데, 도를 행하는 요체는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다. 애석하다. 문정고(조광조)은 현철한 자질과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할 재능을 지니고서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요로(정치)에 올라 위로는 임금 마음의 잘못됨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는 거가대족(훈구파)의 비방을 막지 못하고 겨우 충성을 바치려 하자 참소하는 입이 벌써 열려 몸은 죽고 나라는 어지러워지게 되어 도리어 뒷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징계삼아 감히 일을 해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 하늘이 우리 유교의 도를 행해지지 못하도록 하였던가 어째서 이 사람을 낳기만 하고 도를 성취하게는 하지 않았는가 문정공이 비록 진퇴의 기미에 밝지 못하기는 하였으나 배우는 이들이 이때에 이르러서야 성리학이 높일 만하고 왕도가 귀하며 패도가 천한 것을 알았으니 그가 우리 도에 끼친 공로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후세들이 태산과 북두처럼 우러러보고 조정에서 은총을 내림이 갈수록 더욱 융숭함은 실로 당연하다.(謹按。古之人必待學成。乃求行道。行道之要。莫先於格君。惜乎趙文正。以賢哲之資經濟之才。學未大成。遽昇當路。上不能格君心之非。下不能止巨室之謗。忠懇方輸。讒口已開。身死國亂。反使後人懲此不敢有爲。豈天欲斯道之行歟。何其生此人而不使之成就歟。文正雖於進退之。幾有所未瑩。學者至此知理學之可宗。王可貴而霸可賤。其有功乎斯道。不可泯也。宜乎後人仰之若泰山北斗。而寵命之錫。久而愈隆也。)"

'석담일기(石潭日記)' 권지 상(卷之上) '융경원년정묘(隆慶元年丁卯)' 이이(李珥) 찬(撰)

 

  이곳 응봉산(236m) 한양조씨 선산(세장지)은 증조부 조육에서 아들 조용에 이르기까지 묘가 쓰인 곳으로 지역 사족인 용인(구성)이씨 이백지(고려 우왕 11년 문과 급제 후 세종 대 이르러 전라감사 역임)의 딸을 배필로 맞은 조육이 처가입향하며 재지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조광조 선생이 아버지 조원강을 19세(1500, 연산군6)에 여의고 이 아래 여막에서 3년상을 모신 곳이다. 삼년상을 끝내고 그 자리에 초당을 지었다. 따라서 단순히 그의 묘소가 위치한 곳이 아닌 조광조 선생이 실제 살았다. 신도비의 기록에 따르면 조광조 선생의 묘소는 선생의 유언으로 조상을 모신 선산(용인현 심곡리) 아래 써달라하여 서쪽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친우 양팽손에 의해 초장이 이루어지고 이후 1541년 11월 25일 부인 한산 이씨가 졸하자 현재의 위치로 합장하여 모신다. 조선 조 어느 집안이나 마찬가지로 손이 귀해 두 아들 정과 용이 후사를 잇지 못하고 당제 조희안의 아들 순남을 계자로 들였다.

  양팽손은 누구인가 학포 양팽손(學圃梁彭孫, 1488~1545)은 제주양씨로 조광조와 같이 경오 식년시 생원 장원(2위) 급제 동기이고 기묘명현이다. 1958년 심곡서원에 추향되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유배된 능성(전라남도 화순 능주)에 살았던 선비다. 서슬퍼런 조정의 눈치도 안 보고 유배 온 조광조와 어울렸고 어린 당질 양산보를 사사시킨 장본인이다. 양산보는 기묘명현으로 스승 조광조가 사사되고 담양으로 내려와 세상과 등지고 학문을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소쇄원이다. 그래서 그는 소새옹이라고 불렀다. 소쇄원은 조선 선비의 멋과 풍류를 대표하는 한국 정원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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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밟기 순천

가고 가고 가는 중에 알게 되고 하고 하고 하는 속에 깨닫는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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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은 남향으로 풍수적으로 좋은 명당이다. 재밌는 것은 탁트인 묘역 앞을 수원 광교로 이어지는 고층 아파트단지가 기맥을 막고 답답한 형상이 아니라 혈을 감싸고 돌아 포은대로를 비보하는 형국이라 퍽이나 인상 깊다. 현대 문명의 눈엣가시가 여기선 효자노릇을 톡톡히한다. 구릉 맨 위에 선생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묘제석물로는 백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인 묘표와 상석, 향로석, 문인석 한 쌍과 망주석 한 쌍이 있고 개체석으로 단을 두었다. 매우 단촐하다. 비각이 최근에 세워졌지만 원래 신도비(전액 ‘문정공정암조선생신도비명’)도 비각을 세우지 않고 대리석으로 세운 단촐한 모습이다. 대학자로 이자, 이부자로 칭송된 퇴계 선생 무덤에서도 느꼈던 감정이다. 이러한 성현의 무덤을 두고 어떤 길손들은 너무 꾸미지 않음을 지나가듯 던지는데, 정암 선생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이 모습이야말로 조선 사림의 종장인 정암 선생 다운 무덤이다. 조선의 선비의 묘가 어디 왕실과 닿은 사람이나 조선 권력의 핵심으로 권세가였던 이의 무덤처럼 다양한 묘제석물로 치장이 되어 있어야할까? 단촐한 무덤 봉분을 이룬 이 무덤이야말로 정암 선생이 어떤 사람이였는가를 잘 말해준다. 그래서 후손들이 1997년 대대적으로 묘역을 성역화할 때도 그 외 다른 무덤들에 묘표 정도 더하면서도 정암 선생 묘에 어떠한 묘제석물 치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대단한 선택이고 조상을 더욱 빛낸 사려 깊은 후손들의 예의이지 싶다.

  더욱이 이웃한 곳에 선생을 배향한 심곡서원 또한 경기의 포은 선생을 배향한 개성의 숭양서원과 더불어 도학으로 충성과 대의를 지켜 '신미 존치 47서원(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피한 사액서원)'이라는 위상을 가지는 높은 명성과 달리 여러 참화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 새로이 중수된 지금의 모습은 의미가 깊다.

  처음 대한 모습이 너무 소박하고 단촐하여 의아하였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이야말로 조선 사림과 성리학자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한 후손들의 철학이 담긴 걸작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는 더이상 강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제향만 춘추로 이어질 뿐, 그런 서원을 당대의 모습 그대로는 아닐진데 장대하고 위엄을 갖춘 건축으로 미화한다면 이 모습이 정말 정암 선생의 뜻을 바로 따르는 것일까? 허례허식이 아닌 진정한 도학을 추구한 정암 선생의 뜻을 잘 받들은 검박한 서원이라고 생각한다. 도산이나 병산서원, 고부의 무성서원 같은 고래의 품격은 없으나 질박한 맛이 있는 경기도에서 이만하면 정말 잘 지은 서원이다. 무엇보다 정암 선생의 사상을 담긴 잘지은 서원인 것이다.

  조선을 세운 성리학자들은 화려하고 외향적인 고려를 끝내고 검박하고 내향적인 조선을 만들고 이끈 사람들이다. 그 길에 정암 선생은 실천적 지도자로 사림을 이끈 영수였다. 그의 무덤과 그를 배향한 서원의 품격에 왈가왈부하는 무례가 없길 바란다.

한양조공 정암광조선생 묘역

분묘위치도

이곳 묘역은 1950년 6.25 사변이후 반세기간 거의 방치되어 오다 시피 해왔다. 아 이제 그 누구를 탓하랴? 1997년 초입에 석축을 쌓고 표석비 설치를 시발로 이어서 시비를 세우고 돌계단을 조성하고 반세기동안 자생하여 우거진 잡목을 제거하면서

소나무 주목 단풍 잣 조팝나무 등 30여종을 자연친화적으로 매년 심어왔다. 이제 십사년이 지나 금년 ??에 이르러 이 위치도비를 세움으로써 대체적인 완성을 보았다. 후손 우리 종회들은(판독불가)

제액(전액)

문정공정암조선생신도비명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동지경연성균관사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문정공 정암조선생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 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 兼同知經筵成均館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文正公 靜庵趙先生神道碑命 幷序)
융경(隆慶) 무진년, 금상(今上)의 원년(금상은 宣祖大王을 가리킴. 즉 1568년임)에, 정암선생(靜菴先生)께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이듬해 이름을 바꾸어(諡號를 말함), 도덕이 있고 들은 것이 넓으며 올바른 도리로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뜻을 취하여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그 언행을 기록하게 하고 서원(書院)과 사우(祠宇)를 세우게 하셨다. 대개 그것은 천심(天心)을 나타내고 인기(人紀)를 붙들어서 혁혁하게 사람의 이목에 비춰준 것이다. 이로써 이래서 한 나라의 선비들이 안정되게 되었다. 그 후 11년 만에 진신(搢紳, 사대부)과 포의(布衣, 벼슬하지 않은 이)들이 모두그 묘도에 비석이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서로 이끌고 와서 나 수신에게 비명(碑銘)을 위촉하였다. 정히 효릉(孝陵, 文宗의 능호)께서 칭상(稱賞)하던 바와 같이 제생(諸生)의 바른 학문은 선왕이 가르치신 은택의 뜻에 근본한 것이니, 이 거사(擧事)를 누가 옳다 하지 않겠는가! 나 같은 말학(末學)의 소견이 얕고 말이 약한 이가 족히 써 고명한 이를 제대로 잘 나타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고 가기를 서너 번 하다가 마침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삼가 상고(詳考)하건대 조씨(趙氏)는 본래 한양사람이다. 휘 지수(之壽)라는 분이 있어서 고려의 첨의중서(僉議中書)가 되시고, 휘 휘(暉)를 낳으시니 쌍성총관(雙城摠管)이셨다. 총관이 휘 양기(良琪)를 낳으셨는데, 이 분이 총관직을 습직하셔서, 나이 13살에 김방경(金方慶)의 부원수(副元帥)로써 원 나라 장수를 따라서 일본 병을 토벌해 공을 세우니, 조서(詔書)하여 금포(錦袍)와 옥대(玉帶)를 하사하였다. 아들은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휘 돈(暾)이요, 손자는 좌정승(左政丞) 한산백(漢山伯)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 양렬공(襄烈公)이니, 휘는 인벽(仁璧)이시다. 이 분은 힘을 다하여 등주(登洲)의 12성을 능히 회복하시고, 서쪽으로 국경을 침입하는 것을 수복하셨다. 그 후세에 휘 온(溫)은 본조의 개국공신·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책록되어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을 봉하고, 시(諡)는 양절(良節)이다. 휘 육(育)은 의영고사(義盈庫使)로서 증(贈) 이조참판이시고, 휘 충손(衷孫)은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서 증 예조판서이시다. 휘 원강(元綱)은 사헌부감찰로서 증 이조참판이신데, 여흥 민씨(麗興 閔氏) 현감 휘 의(誼)의 문(門)에 장가 가셔서, 성화(成化) 임인(1482)년 8월 10일에 선생일 나으셨다. 공은 용모가 청수(淸秀)하고 단정하여 그 놀고 희롱하는 일이나 일상의 행동거지가 곧 성인(成人)의 거동 및 법도와 같으셨다. 남의 비위(非違)를 보시면 곧 능히 그를 넌지시 타일러 그치게 하셨다. 자라서는 스스로 독서할 줄을 알아서 강개하게 큰 뜻을 지녔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친구 간에 신뢰 있는 것이 모두가 자연으로부터 나오셨다. 홍치(弘治) 을묘년(1495년) 겨울에 참판공께서 어천찰방(魚川察訪)이 되셨는데, 무오년(1498년) 가을에 한훤선생(寒暄先生)께서 희천(熙川)으로 귀양가시니, 선생께서 아버님을 따라서 갔다가, 드디어 한훤선생을 추종하면서 학문하는 대방(大方)을 들었다. 오랜 뒤에 돌아올 때 한훤선생이 전송하며 말하기를 “우리의 도가 동쪽으로 왔도다.”라고 하셨다. 이로부터 도를 독실하게 믿고 민첩하게 탐구해서 세속의 습기를 씻은 듯이 탈피하셨다. 경신년(1500년) 여름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산소 아래서 시묘를 사실 적에, 다닐 때는 반드시 산소를 도시고 앉으면 반드시 봉분을 대하셨다. 당시에는 『문공가례(文公家禮)』가 세상에 시행하지 않았으나 선생만은 한결같이 이 법을 존수(尊守)하셨다. 복제(服制)가 끝나매 초가집 서너 칸을 그 곁에 지어두고 사모하는 곳을 삼으셨다. 대부인(大夫人)을 섬기시면서 여가마다 학문을 해서 일찍이 잠깐이라도 떠나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자못 방해하고 저해하는 놈이 있어서 지목하기를, “미친 자다”, 혹은 “화의 태동이다”라고 하기까지 되어, 친지들이 모두 더불어 사귀지 아니하였으나, 그렇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셨다. 병인년(1506년)에 처음으로 그 도를 이름내어 사류(士類)들을 지도하였다. 오로지 한 방안에 도서(圖書)를 두었을 뿐이고, 거자업(擧子業, 과거)에 대해서는 애당초 생각을 두지 아니하셨다. 정덕(正德) 경오년(1510년) 봄에 사마시(司馬試)를 응시하매, 시험관이 보고서 놀라 감탄하며 장원으로 정하였다. 여름에 천마산(天磨山) 성거산(聖居山)에 올랐는데. 경치 좋은 곳을 만나시면, 천천히 거닐며 시를 읊으면서 숙연히 진세(塵世)를 벗어난 듯한 생각을 가지시었다. 혹은 절에 거처하시며 올연(兀然)히 이소인(泥塑人)과 같았다. 괴로운 것을 참고 담박한 식사를 승려와 더불어 같이 하시고, 반드시 자시(子時)가 되어야 잠자리에 드시었다. 신미년(1511년) 겨울에 상을 당하셨다. 을해년(1515년)봄에는 지평(砥平)의 용문사(龍門寺)에서 사셨다. 그 여름에 성균관의 천거로 특별히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를 주시자,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늘 이 시대는 옛날 시대가 아니다. 차라리 과거(科擧)로 말미암아서 도를 행해야 할 것이다. 헛된 명예가 드러나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한다.”하고 하셨다. 8월에 임금께서 대성전(大成殿)을 알현하고 선비에게 책문으로 시험할 때 제2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을 제수하셨다. 옮겨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시었다. 11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발탁되셨다. 이해 봄에 장경황후(章敬皇后)가 돌아가시자, 가을에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순창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같이 상소해서 신씨(愼氏)를 복위할 것을 청하자, 대간(臺諫)이 국문할 것을 청하여, 당국에 보내서 혼신(魂薪, 죄지은 사람이 신역으로 대가를 바치도록 하는 제도)을 시키자는 의론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이르러 선생께서 가장 먼저 말씀하기를 “대간의 직분은 언로를 맡은 것이므로, 먼저 스스로 언로를 두절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대간들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왕께서 그들에게 체임(遞任)을 명하였다. 얼마 뒤에 선생께서도 또한 체임되어 전적이 되시었다. 병자년(1516년) 봄에 호조·예조·공조의 삼조(三曹) 좌랑(佐郞)을 역임하시고 좀 있다가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뽑혀 들어갔다. 임금을 대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한사람이라도 뜻을 얻지 못한 이가 있으면 저자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라는 존재는 백성을 위해서 마련된 것입니다. 진실로 이 뜻을 알진대 낮이나 밤이나 백성으로서 마음을 삼으신다면, 다스려지고 평화스러운 상태는 기약할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노여워함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면 반드시 경고로써 보여주고, 형세를 타서 진보하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것을 보여주어 반성하고 노력하게 합니다. 오직 천명이란 항상됨이 없는 것이오니, 심히 가히 두려워 할 만합니다.”라고 하셨다. 정축년(1517년) 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으시고 교리(校理)에 나가셨다. 계(啓)하여 말씀하시기를, “풍속이 인순(因循)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나쁜 것을 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마땅히 시기를 따라서 상량(商量)하여 고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고쳐서, 서로 더불어 보고 느끼게 하며 넉넉히 유도하게 하여야 하옵니다.”라고 하셨다. 가을에 응교(應敎)에 승진하시고 전한(典翰)에 승진되셨다. 사면하기를 청하여 말씀하기를, “소신(小臣)이 학문에 뜻을 두고서 성취하지 못했사옵기에, 바라옵건대 벽지의 고을을 5·6년간 맡기셔서 학문에도 겸하여 힘을 쓸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부디 거두어 받아들여 주시면, 바야흐로 두 가지가 다 온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겨울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진급되셨다. 무인년(1519년) 봄에 부제학(副題學)으로 승진되셨다. 이 무렵 말에서 떨어져서 낙상을 하였는데, 사실을 보고해서 올리자, 보내신 의원과 문안하는 중사가 길에 연속되었다. 계(啓)하여 말씀하기를, “김종직(金宗直)은 유자(儒者)인지라 비록 그 당시에 대유(大儒)로서 크게 베풂을 얻지는 못했지만, 뒤에 많은 이가 풍화(風化)를 듣고서 일어난 것은 그의 공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나라의 원기(元氣)가 되어야 하거늘, 이승건(李承健)이 화를 조작함으로부터 날마다 쇠퇴하여져서, 이제 그 기운이 이른 봄의 풀이 적은 서리에도 곧 시드는 것과 같게 되었습니다. 어찌 열 가지 착한 것을 버리고서 한 가지에 과실을 제기하여야 하겠습니까? 종사(宗社)의 편안하고 위태로운 것은 모두 이로부터 비롯합니다.”라고 하셨다. 여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옮겼다. 계를 올려 말씀하시기를, “학자가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것도 또한 어렵고, 잠깐 나와서 벼슬할 적에 일을 임하면 어그러짐이 많습니다. 하물며 인군(人君)은 구중궁궐에서 모든 기무(機務)를 맡아 보시므로, 정신이 흔들리고 뜻을 빼앗기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심하고 생각해야 할 바입니다.”라고 하셨다. 조정에서 논의하기를, “도덕을 강론하여 임금을 돕고 기르는 일은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라고 하여, 수일이 못 되서 도로 전직(前職)으로 돌아가셨다. 이때에 대과(大科)를 베풀고자 하매 선생께서 계를 올려 말씀하시기를, “임금께서 정치에 뜻을 두었는데도 효과가 나지 않는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능히 이것을 행하신다면 인재를 얻지 못하는 것은 걱정이 없사옵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과연 선비를 제대로 얻었다고들 하였다. 가을에 삼사(三司)가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할 것을 청한지 여러 달이 되었다. 이에 선생께서 직접 상소하셨다. 그 뜻에 대략 말씀하기를 “이 교(敎)를 받드는 것은 비록 여염집 백성이라 하더라도 임금된 자가 진실로 마땅히 예를 밝히고 의를 보여서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거늘 도리어 관청을 두어서 받들게 해서, 이것을 공경하기를 마땅히 흠향(歆享)하여야 할 귀신과 같이 하여 기도하기를 음울하고 번거롭게 하고 음귀(陰鬼)가 간악한 조화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의 올바른 법에 따라 영(令)이 없는 것이니, 아래 백성들이 무엇을 법(法)받겠사옵니까? 어찌해서 굳은 결단성을 아껴서 모두들의 심정에 의혹과 침울한 마음을 갖게 하시나이까?”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동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청함을 얻지 못하면 물러날 수가 없다.”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자 대간(臺諫)들은 모두 퇴청하였는데도, 옥당(玉堂)에서 굳게 버텨서 허락을 받으셨다. 또 회령(會寧) 번호(藩胡)인 속고내(速古乃)가 몰래 깊은 산중 사람들과 결탁해서 갑산(甲山) 경계를 노략질 하니, 방어사(防禦使)를 보내어 몰래 엿보았다가 사로잡을 것을 의론하고자, 임금은 정청(政廳)에 임하시고 장수와 재상들이 두루 모셨는데, 선생이 밖에서 달려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군사를 부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은 은혜와 위엄을 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포첨사(滿浦僉使) 허혼(許混)이 오랑캐를 엄습해서 잡았다 하여 성종(成宗)께서 특별히 허혼을 처벌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렇거늘 이제 조그마한 오랑캐를 분하게 생각해서 대장을 명하여 도적과 같은 꾀를 행해서 나라의 체통을 크게 손상시키려 하시다니, 신은 실상 부끄럽게 여기나이다.” 임금께서도 급히 영을 내려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자 좌우가 다투어 말하기를 “군사에는 기법(奇法)과 정법(正法)이 있사오니, 그러할 수가 없다.”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다 이루어진 계책을 저해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그런 비난을 물리치셨다. 이 달에 특별히 계질(階秩)을 높여서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임시키시니, 그 말을 듣고 힘껏 사양하였으나, 임금께서는 돌보심이 더욱 융성하셨다. 겨울에 임금께서 불시에 어강(御講)을 베푸셔서, “마음을 잡으면 성(聖)이 되고 놓으면 광인(狂人)이 된다.”는 것을 주제로 삼으셨다. 공이 대하여 말씀하기를, “마음에 감응함이 있으면 일이 주(主)가 되어서 어지럽지 않는 듯한 것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외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에 도리어 더욱 혼란을 느낍니다. 잡아 두어 보존하는 것이란 한 곳에 집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반드시 매양 착한 생각을 지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정제하고 한결같이 하여 항상 각성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하루는 임금께서 선생께 명하여 계(戒)를 지으라 하시니, 이에 「계심잠(戒心箴)」을 지어서 바치시었다. 그 서(序)에 말하기를, “임금의 한 마음은 하늘의 큰 이치를 체(體)받아서 천지의 기운과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내 마음에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의 기후와 한 물건의 성품이라도, 그 가히 내 법도에 순응하지 아니하고 어그러지거나 간사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욕심에 가려서 신령스럽고 신묘한 것이 침체되고 정과 사사로움에 질곡을 받아 능히 소통하지 못하니, 천리가 어두워지고 기도 또한 막혀서 떳떳한 윤리가 무너지며 만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됩니다. 하물며 아름다운 소리와 색태와 냄새와 맛의 유혹이 날마다 앞에 나열되고, 형세도 높고 높아서 또한 교만하기 쉬운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셨다. 다시 옮겨져서 사헌부 대사헌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하시었는데, 사양하고 성균(成均)을 겸하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하셨다. 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보임하시니 사양하여 말씀하기를, “보양하는 책임은 모름지기 노성(老成)하고 후덕한 이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신은 결코 이 이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기묘년(1519년) 봄에 김우증(金友曾)이라는 자가 사림을 무함하고 훼방한 일로 조정에서 심문을 하게 되었는데, 양사(兩司)에서는 선생께서 몸소 힐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일로 논난(論難)하여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府事)로 체임되었다. 얼마 안 가서 다시 부제학이 되셨다. 여름에 동지성균관사를 겸임하셨는데, 정부의 계가 있어서 다시 대사헌이 되셨다. 10월에 양사가 정국공신에 함부로 등록된 자를 삭제할 것을 청했는데, 선생께서도 또한 극진히 논하며 말씀하기를, “성희안(成希顔)이 유자광(柳子光)에게 위임하였기 때문에 극형의 죄에 해당할 자들이 많이 끼어 있습니다. 위에서 이(利)의 근원을 한 번 열어 그것이 국가의 고질로 되면, 이만 있는 것을 알고 의(義)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어, 아마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1월 11일에 윤허를 얻었다. 계속하여, 공훈에 따라 품계를 함부로 가자(加資)한 것을 체직하자고 청하였으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일에 군신(群臣)들이 녹건(錄件)을 가지고서 어전에 나아가 개정하였다. 이날 밤 이고(二鼓, 二更)에 심정(沈貞)·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이 신무문(神武門)에 들어가서 변을 고해 올려 말하기를, “조(趙)아무개가 그 당과 더불어 불법을 꾀하여 홀연 영추문(迎秋門)으로 들어왔기에, 이미 여러 관원들을 잡아 대정(大廷)에다가 매어 두었습니다.”고 하였다. 사건이 예측할 수가 없게 될 무렵, 수상 정광필(鄭光弼) 공이 입대하기를 청하여, 눈물을 흘리며 죽여서는 안 된다고 임금님의 옷깃을 붙들고 호소하였다. 이에 가까스로 금부(禁府)에 하옥시킬 수가 있었고 모두 귀양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서생마다 울고 불며 거리마다 슬퍼하였다. 선생께서 능성(綾城)에 가셔서 북쪽 담을 헐어버리게 하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대궐을 연모하는 생각을 달래었다. 12월 20일에 하명(下命, 死藥을 내림)이 이르자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으시고 사자(使者)에게 죄명을 물으니 대답이 없었다. 이에 친한 친구들에게 두루 편지를 썼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선인(先人)의 무덤 아래 묻게 하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군(人君)을 사랑하길 아버지와 같이 하니, 하늘과 태양이 단충(丹衷)을 비춰주네.”라고 하셨다. 드디어 졸하시니, 나이 38세이셨다. 휘는 광조(光祖)요 자는 효직(孝直)이시다. 명년에 용인현(龍仁縣) 심곡리(深谷里)에 장사지냈다. 정사년(1541년) 11월 24일 부인의 장사에 의하여, 서쪽 수백 보 쯤 되는 곳에 옮기셨다. 부인은 첨사(僉使) 이윤형(二允泂)의 따님이시다. 정숙하고 정성스럽고 공경하고 삼가시며, 능히 군자의 교훈을 지키셨다. 아들 정(定)은 현감 권흡(權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이 죽었다. 용(容)은 문천군수(文川郡守)인데 대호군(大護軍) 이경(李鏡)의 따님에게 장가들어서 두 사위를 두었다. 사위 가운데 좌랑 허감(許鑑)은 다들 윤(昀)을 낳았고, 진사 홍원(洪遠)은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당제(堂弟) 희안(希顔)의 아들 순남(舜男)으로서 후사를 삼았다. 아아! 우리 동방의 호걸이 대를 이어 계속해 일어났으되, 공명과 절의에 국한이 되거나 훈고(訓詁)와 사장(司章)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이학(理學)을 한다고 이름하는 이가 있더라도, 연마하고 궁리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고서 또한 헛되고 먼데에 관계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경공(文敬公)이 나타남에 이르러서는, 선학들이 창도한 것을 선생께서 실상 이를 이어받아 확대시키셨다. 그 학문은 자기 몸을 살피고 사욕을 극복하는 것을 앞세우시고, 공경의 태도를 지키고 정일(靜一)을 위주로 함을 요점으로 삼으셔서, 침잠하고 각려하며 정(精)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서, 능히 도를 몸에 체득하고 덕을 이루어서 성인의 정성(精誠)을 얻으셨다. 의관과 용모와 보고 듣는 것과 말하고 움직이는 것으로 말하면, 지나간 현철(賢哲)들을 모범으로 삼으셨다.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높이시고, 모든 경전을 발휘하셨다. 늦게는 󰡔주역(周易)󰡕 배우기를 좋아하셔서 잠시도 쉬지 않으셨다. 집에 들어와서는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부모의 뜻을 승순하셔서 곡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상사(喪事)에는 슬픔을 극진히 하고 제사에는 공경을 극진히 해서 한결같이 예에 구차히 하지 않으셨다. 안과 밖을 절연(截然)하게 하시고 인(仁)과 신(信)을 행하셨다. 외부에 나아가서는 사람을 접하시매 그 재품(才稟)에 따라서 하시고, 품조(品藻, 즉 평가)는 그 기국과 지식에 따라 취하셨다. 이단을 배척해서 경상(經常)의 도리로 되돌리고자 하셨다. 남들은 그 즐거워하시고 평이하게 여기심을 볼 수가 있었지만, 스스로는 검소하고 간략함을 준봉하였다. 일찍이 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왕실에 있어서 자연히 가사(家事)에는 미치지 못하겠소.”라고 하셨다. 이때를 당해서 임금께서 유술(儒術)을 숭상하시어 옛 도의를 사모하시어, 선생을 의지해서 정치를 하셨다. 선생께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품고 알아주는 이를 만난 것을 감격스레 여기시어 요순의 도로서 자기의 책임을 삼았다. 그래서 말씀하기를, “인군의 마음은 정치를 내는 근본입니다. 근본이 바른 연후에 정치가 서고 교화가 성취됩니다.”라고 하셨다. 경연에서 강론의 일을 담당할 때마다 그 전날 저녁에 단정히 앉아서 글을 숙독하였는데, 마치 임금님이 곁에 계시는 것과 같이 하셨다. 새벽에 이르러 옷을 갈아입으시고 나아가서는 숙연히 대좌해서 반드시 임금께서 감동하기를 바라셨다. 치도(治道)를 개진하시고 사리를 명백히 하셔서, 성(性)과 정(情)의 선악이나 의(義)와 이(利)의 분변이나 하늘과 사람, 왕도와 패도의 선하고 사특(邪慝)한 분변으로부터, 학문을 높이고 변방을 방비하는 허실과 제사의 예를 다하고 국가를 흥기시키고 조상의 업적을 계승하는 득실에 있어서도 마음을 기울이고 베풀지 않음이 없으셨다. 날이 저무는데도 피로를 잊으시어, 임금께서도 반드시 마음을 전일하게 해서 송연(竦然)하게 들으시고, 잘 한다고 칭찬한 바가 많으셨다. 심지어 백관들은 눈을 부비며 바라보고 모든 백성들은 머리에 손을 얹고 훈취(薰醉)되어 상상하고 기대를 가져서, 거의 선생의 법도가 차차로 실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거늘 제공(諸公)들은 너무 빨리 하고자 하는 데로 기울어지고 연소한 이들은 덩달아 움직여, 옛 신하들로서 실권을 잡지 못한 자들은 원망이 골수에 박혀서 밤낮으로 기회만 엿보았다. 그래서 선생께서도 진실로 일찍이 그 기미를 보시고서 떠나고자 한지가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신상(申鏛) 공과 이자(李耔) 공과 권벌(權橃) 공과 더불어 두 사이를 조정하여 실패가 없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일시(一時)에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비위(非違)에 의지한다.”라고 해서 탄핵을 하려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슬프고 또한 괴이하도다. 다만 추대되고 권력의 끝에 붙어서 세력을 잡았던 한때의 높은 훈신들은 도리어 깊이 탐색하여 죄과를 논하되,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크게 올곧기를 경계하지 않았다. 어찌 선생께서 스스로 떠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아시고, 사악한 것을 막지 않으면 정도(正道)가 시행될 수 없다 여기셔서, 드디어 모든 힘을 다 들여서 주저 없이 격파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논평하는 자들의 말대로, “갑자기 등용되어서 융화하여 통찰하고 실적을 쌓을 수가 없었고, 일찍이 돌아가셔서 교화를 베풀고 입언(立言)을 할 수가 없었다.”하는 것이었던가? 아아! 가히 슬퍼할 만하고 가히 답답해 할 만하도다. 어찌 우리 도의 원통함을 면하겠는가? 오직 우리 중종(中宗)께서 환연(渙然)히 은혜를 베풀어 유지(遺旨)를 남기시고 인조(仁祖)께서 인하여 그 관직을 회복하시고, 명종(明宗)께서 또 유념을 하여 보살펴 주시니, 능히 오늘날에 더욱 훌륭하게 될 수 있었고 또 장차 공자님 사당에 배향하게 되었다. 이제 위학(僞學)을 금하지 않더라도 정맥(正脈)이 의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백성들을 계몽시켜 사랑하고 미워할 바를 알게 되어 차차로 능히 분발하고 그 무언가 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으로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그러나 네 임금께서 이것을 시종 돌보아 주지 않았더라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이르게 하였겠는가? 대개 대현(大賢)의 덕은 당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요, 글의 논술이란 마지못한 데에서 있게 되는 법이다. 가령 만일 덕에 나아간 것이 더욱 밝고 글로 지은 것이 더욱 많았더라면 다시 후학에게 유감되고 의심할 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로 자신이 조정에 서질 못했고 조금 베풀어 한 바가 무언가 일을 할 수 있으리란 것의 조짐만 되었다면, 뒤에 군신들이 어떻게 본받아서, 간사하고 바른 것을 살피고, 흥하고 망하는 것의 원인을 따져, 이 도가 당금(當今)에 행할 수 있는 것인가를 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보다. 이에 명(銘)에 이르기를, 하느님이 독실하게 이어주고 열어주셔서, 질박함으로 되돌려 파괴의 뒤에 거두셨네. 정기의 모임이 남달라서 유례가 없을 정도라, 순전(純全)하고 순연(純然)하셔 마장(魔障)에서 벗어나셨다. 양심을 지니어서 망녕됨이 없으시고, 그 마음을 보존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하셨도다. 마음이 오로지 활발하여 팔황(八荒)을 구역으로 삼아 출입하매 만민을 다스리는 정치를 조물주의 도치(陶治)와 같이 보아 당시는 한때 소강(小康)을 이루었다. 장차 국가의 큰 계책이 성공하려 할 무렵 널리 인재를 맞이하심에 처음으로 복응(服膺)하였으니, 기상은 금슬로서 조화한 듯하셨네. 바라보면 신선과 같은 풍모에 경상(經常)의 도리를 지켜 계옥(啓沃)하시고, 법률을 지켜서 독려하셨다. 단단(斷斷, 정성이 한결같은 모양)하게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옛 것에 근거하여 새 것을 도모해서, 왕도를 행하시고 백성을 안정시키니 백성들은 바람을 받은 풀처럼 교화되었다. 진실로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여 물욕의 가리움을 오로지 제거하였기에, 나에게 아무 병이 없었건만, 소인들은 물여우처럼 모래 뿜어 쏘아대고, 무리들이 이를 갈아 대었다. 꺼진 재가 다시 탔나니, 군주의 기색을 살피고 혹은 세도가의 눈치를 엿보아서 어찌하면 이간하고 어찌하면 허물할까 지나 깨나 모의했네. 하지만 공은 순리대로 살아가고 죽음도 편안하게 여겨 오로지 마음은 단충(丹衷)이어서 밝고 맑은 한수(漢水)이고 빛나는 샘과 같았도다. 오는 이도 있고 가는 이도 있어 끊임없이 이어져 잊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니,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는 하도다. 역대의 임금들이 은혜를 베푸시고 모든 선비들이 보호하고 호위하여, 아직도 그 덕이 전하는 바가 있네. 공(功)은 비록 고작 두어 해 동안에 깊었지만 은택은 백세토록 흘러서 내려가리라. 더욱더 그 온전한 덕을 볼 수 있기에 나는 어둑어둑한 이들에게 이렇게 고하노라. 두려워하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 어질고 현명한 이를 반드시 믿어다오. 아아! 슬프도다! 성공하고 패하는 건 결국 하늘에 맡겨둘 뿐이로다.(龍仁 趙光祖神道碑 有明朝鮮國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 經筵成均館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文正公靜庵趙先生神道碑銘 幷序
隆慶戊辰今 上之元年 贈靜庵先生領議政越明年易名爲道德博聞以正服之曰文正旣又 命錄其言 行聽建書院祠盖其表著天心扶持人紀赫赫照人耳目於是一邦之爲士子者定後十有一年縉紳韋布咸以 其墓道闕顯刻相率來屬于守愼正 孝陵所賞諸王正學本先王敎澤之意孰不良是斯擧其如末學見膚語 綿不足以侔高狀明凡往返三四終不可得而辭焉則謹按趙氏本漢陽人有諱之壽爲高麗僉議中事諱暉雙 城摠管摠管生諱良璂襲職年十三副金方慶從元將討日本有功詔錫之錦袍玉帶子龍城府院君諱暾孫左 政丞漢山伯龍源府院君襄烈公諱仁壁戮力克復登州十一城又收西邊侵疆歷諱溫錄本朝開國定社佐命 功臣漢川府院君諡良節諱育義盈庫使贈吏曹叅判諱衷孫成均館司藝贈禮曹判書至諱元綱司憲府監察 贈吏曹叅判聘驪興閔氏縣監諱誼門成化壬寅八月十日先生生淵秀端潔其嬉戱擧止卽成人儀度見人非 違輒能諷止之比長自知讀書慷慨有大志孝友慈諒皆出自然弘治乙卯冬叅判公爲魚川察訪戊午秋寒暄 先生謫熈川先生旣趍庭遂往從之遊得聞爲學大方久而歸目送之曰吾道東矣自是篤信敏求脫世習洒如 也庚申夏服斬廬于塋下行必繞塋坐必對墳時文公家禮不行獨一遵之制除架茅宇數間其側爲永思地事 大夫人餘力學文未甞須㬰離然頗有謗詆至指爲狂爲禍胎知故皆莫與交不少撓丙寅始鳴其道陶成士類 但一室圖書於擧子業初不經意正德庚午春試司馬考官得之驚嗟定爲魁夏登天磨聖居遇懽適處緩步微 吟蕭然有出塵之想或寓蓮社兀若泥塑人攻苦食淡與禪共之惟子時在寢辛未冬宅恤乙亥春栖砥平之龍 門寺夏因成均館薦特授造紙署司紙嘆曰今之時非古之時也寧由科第以行道虛譽的然吾恥也八月 上 謁聖策士中第二名除成均館典籍遷司憲府監察十一月擢司諫院正言是年春 章敬上仙秋潭陽府使朴 祥淳昌郡守金淨同䟽乞復愼氏臺諫請鞫致于理止鬼薪論至是先生首言臺諫職主言路先自杜絶不可相 容請罷命遆已而先生亦遆爲典籍丙子春歷戶禮工三曹佐郞俄選爲弘文館副修撰入對言伊尹言一夫不 獲若撻于市君臣爲民而設者也誠知此義日夜以民爲心治平可期又言天怒有二作孼不悟必示以譴吿之 乘勢不進亦示之使警察加勉惟命無常甚可畏也丁丑春 賜暇讀書進校理 啓言俗喜因循人安汚染宜 隨時商量可改必改俾相與觀感而優游以導之秋進應敎進典翰請免曰小臣志學未就願調僻郡五六年得 兼用力於學幸復收用方可兩全不許冬進直提學戊寅春進副提學馬墜移吿醫問交道 啓言金宗直儒者 縱其時大儒不得大施後多聞風而作者此其功也善人爲國元氣自李承健搆禍日以耗喪今其氣如早春之 草微霜便痿其可棄十善而擧一失乎宗社安危皆自此始矣夏遷承政院同副承旨 啓言學者閑居工夫亦 難乍出而仕臨事多舛況人主九重萬機易以搖奪此是惕念處朝議以爲論思輔養非此人不可不數日還前 職時欲設大科先生 啓言自 上志治未效爲不得人才也信能行此不患不得後果稱得士秋三司請革昭 格署累月先生手䟽畧曰玆敎之奉雖在閭氓作元后者固當明禮眎義俾迪正方乃及置司述醮敬之如當享 之神祝禱幽繁陰鬼釀奸是乃后猷無令下民焉式何惜毅斷以疑鬱群情仍語同僚曰今日不得請不得退至 暮臺諫皆退玉堂爭之俞又以會寧藩胡速古乃陰連深處掠甲山界議遣防禦使潜伺捕梟 上臨軒將相環 侍先生自外至曰禦戎安民貴布恩威滿浦僉使許混襲擒獵虜 成宗特誅混今忿小醜 命大將行盜賊之 謀以重傷國體臣實羞之 上遽令更議左右競言兵有奇正不可因或言沮成算 上却之是月特進秩尋兼 同知成均館事聞而力辭 睿眷愈隆冬 上不時御講以操舍聖狂爲言對曰心有感則事爲主有似不亂常 人未接物時轉覺紛擾操存不是著於一處亦不必每存善念只得整齊虛一常惺惺之謂也一日 上命先生 述戒乃作戒心箴以獻其序曰人君一心體天之大理氣皆包在吾心運用之中一日之候一物之性其可不順 吾度使之乖戾邪枉耶然人心有欲靈妙者沉焉梏於情私不能流通天理晦㝠氣亦否屯彝倫斁而萬物不遂 況聲色臭味之誘日湊於前而勢之高亢又易驕與遷司憲府大司憲兼同知 經筵事請辭兼成均許之又充 元子保養官辭曰保養之任須責老成厚德臣決不敢當此名不許己卯春金友曾誣毁士林事發廷訊兩司以 先生不欲窮詰論遆爲同知中樞府事未幾復爲副提學夏兼同知成均館事用政府 啓復爲大司憲十月兩 司請削靖國功臣濫錄者先生亦極論爲成希顔委柳子光故當極典者多叅在上利源一開爲國家膏肓之疾 知有利而不知有義殆必有不忍說之事十一月十一日蒙 允繼請褫因功濫資不納十五日群臣將錄詣 榻前改正是夜二鼓沈貞南袞洪景舟等入神武門上變曰趙某與其黨謀不軌旋由延秋以入旣掩逮多官繫 大庭事且不測首相鄭公光弼請對言淚俱發至於牽裾得下禁府盡行竄逐庠塾號哭衢塗霑灑先生責綾城 扶墙北望以紓戀 闕之思十二月二十日後命至沐浴更衣請使者罪名不應乃編作親友書有曰吾必從先 人兆又曰愛君如愛父白日照丹衷逐卒壽三十八諱光祖字孝直明年葬龍仁縣深谷里嘉靖丁巳十一月二 十四日因葬夫人遷之西數十許步夫人僉使李允洞女貞恪敬愼克守君子之訓男定娶縣監權恰女夙逝容 文川郡守娶大護軍李鏡女有二壻佐郞許鑑生子&A3269;進士洪遠生二女幼以堂弟希顔子舜男後嗚呼吾東方 豪傑迭興局於功名節義溺於訓詁詞章至或號爲理學者非極於鑽硏亦涉於虛遠而已及文敬公出先覺倡 道先生實承而擴之其學以省身克己爲先持敬主靜爲要沉潜刻厲精思力踐能體道成德得聖人之誠若衣 冠容貌視聽言動繄往哲是範尊小學近思而發揮于諸經傳晩好學易不暫輟入則服勞承順靡不曲盡喪 致 哀祭致敬一於禮不苟內外截然而仁信行焉出則接引因其材禀品藻取其器識排闢務欲反經人見其樂易 自奉以淸約甞謂夫人曰我心王室自不及家當是時 上尙儒術慕古誼倚先生爲治先生抱負經濟感激遭 際以堯舜之道爲已任謂君心出治之本本正然後政立而敎達每當講前夕端書熟讀如在 上傍至曉易服 而進肅然對越冀必感動於 上開陳治道別白事宜自性情善惡義利之辨天人王伯淑慝之分與夫崇學備 邊之虛實祭祀興繼之得失莫不傾倒羅列日昃忘倦 上必專心竦聽多所稱善以至百僚拭眼齊民手額皆 得熏醉想望庶幾先王法度以次而擧奈諸公近於欲速年少從而皷之舊臣居散地者怨恚入骨昏晨覘釁而 先生固已早見其幾欲去久矣常與申公鐺李公耔權公橃欲調適兩間公至敗闕而一時有以爲依違至擬擧 劾吁亦異矣第推戴攀附一代高勳顧探論已事不戒大貞豈先生自知不得去不塞不流遂悉力擊破之不顧 也與抑談者以爲驟用無以融徹蓄積早終無以設敎立言吁其可情可愍詎免爲吾道之寃惟我 中廟有渙 恩遺旨 仁廟因而復其官 明廟又撫而有之式克至于今日休且將祀諸孔庭僞學無禁正脉有托用牖斯 民知所愛惡稍稍能奮發有爲是孰使之然然非四 朝有以終始之又孰能興於此大抵大賢之德具體於初 論述之書在不得已借如進德益邵著書益多無復疑憾于後學苟身不立於朝少有所施爲爲之兆也後之君 臣何所鑑法得以審邢正原興喪見此道爲當今之可行或者其天意夫銘曰 天篤繼開反樸收坏鍾異于鮮粹然離障存以無妄保厥不偏惟心之活八荒在闥一視陶甄時汔小休將升大 猷首膺廣延明于雪日調以琴瑟望之神仙執經以沃持憲以督斷斷拱筵據舊圖新行王定民風動化宣亶聰 旣達惟茅斯拔則莫我&A5792;有含其沙荐磨羣牙坑灰復燃迺瞻容色或伺鼻息曷貳曷騫存順沒安一念如丹昭 漢炳泉有來有歸不忘不違在後在前 列聖攸惠諸儒是衛尙克有傳功深數歲澤流百世益見其全我告伊 昧無懼無悔必信仁賢嗚呼嘻噫厥有成敗竟歸之天)
찬자 노수신(盧守愼) / 각자 미상 / 본문 글씨 : 이산해(李山海), 제액 : 김응남(金應南) / 높이 243.0cm, 너비 93.0cm, 두께 34.0cm. 1585년(선조 18) 건립. 해서(楷書)
출처 금석문 검색 - 국가유산 지식이음

정부인 증정경부인이씨부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동지 경연

성균관사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

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

추관관상감사문정공정암조선생지묘

 

용인 심곡리 입향조 증조부 조육 증조모 구성 이씨 합장묘

아버지 조원강 어머니 여흥 민씨합장묘.

묘표 방부와 계체석 외 비신과 상석, 향로석은 새로 갖춘 것이다.

 

 

본문 인용 청음 김상헌 글전체

조정암 선생이 난죽화병에 쓴 시 뒤에 제하다(題趙靜菴先生蘭竹畫屛詩後)

정덕(正德) 연간에 규정(葵亭) 강은(姜㶏)이 병풍 한 폭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위에 난초와 대나무를 그리고 정암 조 선생에게 가지고 가서 오언절구 8수를 받아 와 집안의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이르러 병화(兵火)에 없어졌다. 평택(平澤)의 수령으로 있는 조수륜(趙守倫)이 뒤에 7장(章)의 시는 기억해 냈으나 한 수는 잊어버렸다. 그러자 선생의 증손부(曾孫婦)인 유 유인(柳孺人)이 그 말을 듣고는 슬퍼하고 사모하면서 재산을 털어 비용을 마련한 다음, 그의 아들 찰방(察訪) 조송년(趙松年)에게 명하여 예전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키도록 하고는 나에게 그 일에 대해 서술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아, 이 시에서 보면 선생이 평소에 덕을 기르고 학문을 진보시킨 공과 험하거나 평탄하거나 절개를 한결같이 했던 뜻을 역시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니 성인께서 이른바 ‘수사입성(修辭立誠)’이란 말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공경할 만한 것이다.

무릇 선생께서 크게 임금에게 인정을 받을 즈음에는 여러 현인들이 모두 조정에 진출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함께 좋아하였으나, “그윽한 절개는 끝내 시들었다.〔幽貞卒萎〕”라는 구절과 “높은 절개는 뭇사람들이 시기하였다.〔高節衆猜〕”라는 구절을 갑작스럽게 시를 읊는 사이에 발하여 개연히 사물에 느껍고 시대를 상심하는 탄식이 있었다. 이것이 어찌 기미를 보고서 드러날 것을 알아 장차 그것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도는 반복되는바 군자는 적고 소인은 많았던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그러니 또한 슬퍼할 만한 일인 것이다.

옛날의 그림은 윤언직(尹彦直)이 그린 것이고, 지금의 그림은 이징(李澄)이 그린 것이라고 한다.

숭정 병자년(1636, 인조14) 동지에 안동 김상헌은 지(識)한다.(正德中。姜葵亭㶏畜一屛。上寫蘭竹。靜菴趙先生。就題五言絶句八首。其家寶傳。至萬曆壬辰。沒於 a077_591b兵火。趙平澤守倫。追記得七章而忘其一。先生曾孫婦柳孺人。聞而愴慕。計費捐貲。命其子察訪松年。俾復舊觀。求敍其事。嗚呼。觀於此詩。先生平日毓德進學之功。夷險一節之志。亦可知矣。聖人所謂修辭立誠者。豈不然乎。其可敬也。夫當先生際遇之隆。群賢彙進。擧世同好。而幽貞卒萎。高節衆猜之句。遽發於吟詠。慨然有感物傷時之歎。豈見微知著。將有不可得而違者歟。抑世道反覆。君子少而小人多。自古而然歟。其又可悲也已。舊畫尹彥直筆。今所作李澄云。崇禎丙子日南至。安東金 a077_591c尙憲識。)

출처 : 청음집 제39권 / 제발(題跋) 17수(十七首) 조정암(趙靜菴) 선생이 난죽화병(蘭竹畵屛)에 쓴 시 뒤에 제하다(題趙靜菴先生蘭竹畫屛詩後).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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