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34

수원 행궁동 더페이퍼

어둑한 짙은 황사가 왔다가 두 차례 비가 지나고 4월의 햇살이 주춤하더니 파란하늘이 열리고 옷무새 날리는 바람이 시원하다. 사무로 시작한 일정이지만 가깝고도 멀었던, 행궁동을 찾았다. 행궁동을 찾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보통은 수원 화성행궁을 찾아서 오는 길손이 많을 것이고 더러는 행궁동의 아기자기한 찾집이며, 카페며, 혹은 점집을 찾아 드는 객이 많을 것이다. 10여년 전 매산로 부근에 살며, 화성성곽을 돌고 그 아래 행궁동이며, 지동이며 발품으로 곳곳을 누비고 다녔었다. 그 때 이런 일정에는 화성과 행궁 등 문화유산이 중심에 있던 나들이었다. 지금의 행궁동은 많이 변했다. 그 옛날 화성과 행궁을 찾아 오던 이보다도 더 행궁동 자체의 문화향수를 가지고 찾는 이가 많을 것이다. 혹자는 "도시재생이 벽화만..

효암

효암孝巖의 유래 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수기리 홍법산弘法山 기슭에 있는 이 효암은 고려 의종毅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효자 최누백崔婁伯이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죽자 곧 도끼를 매고 추적해 이 바위 아래에서 범을 잡아 부친의 원수를 갚고 또 호환虎患으로 난리를 겪던 이곳 백성들의 걱정을 덜어 주어 칭송을 받았던 곳이다. 지금의 수기촌과 분천 일대는 고려 때에 용성현龍城縣에 속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삼봉三峯이라 불리던 것을 일제가 삼봉 갈담葛潭을 합쳐 봉담으로 개명하였다. 조선 제22대 정조대왕正祖大王은 효성이 지극했던 임금으로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陵을 이곳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자주 이곳에 행차 했는데 행차 길에 최공의 후손을 불러 훌륭한 조사이라 극찬하며 수..

최루백 효자비각

인물은 한림 학사 국자 좨주 최누백(崔婁伯)이다. (【고려 인종(仁宗) 때 사람이다. 】人勿, 翰林學士國子祭酒崔婁伯, 高麗、仁宗特人)-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 전근대시대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바로 수원최씨의 비조가 되는 효자 최루백(?~1206)이다. 수원을 본향으로 하는 성씨 중 최씨는 둘인데 그중 본최(本崔) 또는 원최(原崔)가 되는 것이 최루백의 수원최씨다. 화성시 매송면에 무덤이 전하는 비조 최영규는 수원최씨, 수성최씨로 불리는 내최(來崔)이다. 최루백은 고려 때 수원의 호장 최상저(崔尙翥)의 아들로 한림학사를 지내 인근 화산에 사도세자를 모신 정조가 "최학사"로 칭했던 인물이다. 특히 정조는 이를 더하여 최루백이 아버지 최상저의 시신을 수습한 바위를 효암으로 명하..

영화천 십리길, 서호천에서 만석거(영화정)까지

영화천 십리길, 서호천에서 만석거(영화정)까지 영화천(迎華川) 십리길은 수원시 영화천변의 길이다. 서호천 13교인 한마루교에서 서호천의 지류인 영화천이 만나는데 여기부터 동북쪽으로 길을 잡아가면 정조가 축조한 만석거(萬石渠)가 나온다. 이 만석거가 영화천의 실질적인 발원지이다. 여기까지가 대략 2km가 넘고, 만석거의 둘레가 1km가 넘으니 다 돌아보면 거의가 십리(4km)라서 이름한 것이다. 참고로 수원시는 3월 16일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에 따라 일왕저수지는 만석거로, 서호는 축만제(祝萬堤)로 공식 명칭이 각각 변경됐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먼저 걸음하였던 황구지천과 서호천은 과거 수원 권역으로 볼 때는 도심 외곽에 위치한 변두리에 가까웠다. 지금도 황구지천은 수원 서부 들녘을 관통하지만 도심은 아니다...

청풍김씨묘문 의왕시 고천, 김인백 비 안동 권씨 묘 및 몽오산인 김종수 묘

청풍김씨묘문 의왕시 고천김인백 비 안동 권씨 묘 및 몽오산인 김종수 묘    김인백의 비 안동 권씨 묘는 유명한 명당자리다.(전국8대 명당) 이곳에서 발복하여 후손들이 현달해서 6명이나 재상이 나왔다고들 한다. 묘 위쪽 좌의정을 역임하고 정조의 스승이었던 김종수 묘가 있는데 김종수도 후손이다. 김종수의 묘는 2015년 이장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경기도 하남시 광암동에 있었는데 하남시가 수도권 신도시 개발로 급변하고 있어 후손들이 의왕시 선영으로 모신 것으로 보인다.  안동 권씨 묘는 묘하에서 걸어가면 여느 왕릉 못지 않은 넓은 유택을 볼 수 있다. 오봉산 자락 그리 높지 않은 구릉에 위치한 묘는 양지바른 터에 편안하다. 주변에 의왕시청, 도서관, 보건소 등 많은 행정기관과 아파트들이 즐비하여 묘에서 ..

하계 김상로 선생 묘 옛터

하계 김상로 선생 묘 옛터(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쌍봉산 아래)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은 예부터 하나의 역사와 사회경제적 공동체를 이루어온 곳이다. 마한 상외국, 백제 6포, 고려 쌍부현, 조선 쌍창과 삼괴칠면 등 수원시의 전근대 행정구역인 수주와 수원부에 속하여 독립적인 역사와 문화를 이룬 수원 남부지역의 중심된 곳이다, 이곳이 정식 역사기록으로서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이다. 지역의 자연지리적 특징인 두 언덕을 말하는 쌍부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역사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그 인물이 바로 청풍김씨 하계 김상로(하계 김상로(霞溪,金尙魯, 1702 ~ 1766년 12월 29일)이다. 김상로는 당대 노론의 영수이자 사도세자의 비행을 들어 영조가 사사하는데, 큰 역할을 하..

김연방 애국지사 유허지

화성3.1운동 만세길 답사 김연방 애국지사 유허지 순절지사 김연방은 1881년 7월 21일 수원부 압정면 일원리(현재의 화성시 우정읍 화산5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원리는 조선 정조대 두각을 나타낸 무반가문인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의 집성촌이다. 김연방 지사의 5대조는 무반으로 포도대장을 역임한 김영 장군으로 그 역시 무반인 선전관의 갑오개혁 이후의 벼슬인 대한제국 시종원 시정분시경(시어)이 되어 광무황제(고종)를 보좌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낙향하여 삼괴지역 일원동(수원군 우정면 화산리)에서 99칸 종가를 지켰다. 그 뒤 1919년 3.1운동이 확산되면서 4월 3일 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에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독려하고 민족독립을 염원하였다. 4월 13일, 발안리에서 정미소를 운영하..

청주한씨 문익공파 묘역(한준겸)

청주한씨 문익공파 묘역 경기도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청주한씨 문익공파 묘역은 인조의 장인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의 시호 문익(文翼)을 따서 그 직계로 아들 한회일, 손자 한이성, 증손자 한두상 묘 등 4대에 걸치 묘역이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 한준겸의 졸기이다. 영돈녕부사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졸하였다. 한준겸의 자는 익지(益之)이고 호는 유천(柳川)인데 청주인(淸州人)이다. 풍채가 뛰어나고 기량이 넓으므로 일찍부터 공보(公輔)의 촉망을 지니고 있었다. 일찍이 북방의 관찰사가 되어서는 먼저 《가례》와 《소학》을 간행하여 언서(諺書)로 번역하였고, 또 《의례》를 모방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제정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거나 내직으로 들어오거나 근면하였..

김준용 장군 묘 및 신도비

김준용 장군 묘 및 신도비 1636년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서 암울했던 역사이자, 치욕이었다. 군왕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 황태극의 발 아래 항복례인 삼배구고두를 행했던 일로 인해 당시의 모든 일은 쉬쉬할 뿐, 말하기 꺼려했다. 더욱이 우리의 승전도 마찬가지였다. 김준용 장군은 병자호란 당시 몇 안되는 승장 중에 한 명이었지만 패전의 오명으로 파직과 유배를 당했던 인물이다. 다행히 억울한 누명은 곧 풀렸으나 그의 전공에 대한 포상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주장이 이러하였는데, 종군해서 용맹을 자랑했던 휘하 장졸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전라병마절도사 김준용 휘하에서 광교산 전투에 참가하여 만주 정황기의 주장이자 청태조 누루하치의 부마 양고리(백양고라, 슈무루 양구리(만주어: ᡧᡠᠮᡠᡵᡠ ᠶᠠᠩᡤᡠᡵ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