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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천 십리길, 서호천에서 만석거(영화정)까지

달이선생 2020. 7. 1. 19:03

영화천 십리길, 서호천에서 만석거(영화정)까지

  영화천(迎華川) 십리길은 수원시 영화천변의 길이다. 서호천 13교인 한마루교에서 서호천의 지류인 영화천이 만나는데 여기부터 동북쪽으로 길을 잡아가면 정조가 축조한 만석거(萬石渠)가 나온다. 이 만석거가 영화천의 실질적인  발원지이다. 여기까지가 대략 2km가 넘고, 만석거의 둘레가 1km가 넘으니 다 돌아보면 거의가 십리(4km)라서 이름한 것이다. 참고로 수원시는 3월 16일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에 따라 일왕저수지는 만석거로, 서호는 축만제(祝萬堤)로 공식 명칭이 각각 변경됐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먼저 걸음하였던 황구지천과 서호천은 과거 수원 권역으로 볼 때는 도심 외곽에 위치한 변두리에 가까웠다. 지금도 황구지천은 수원 서부 들녘을 관통하지만 도심은 아니다. 이와 달리 영화천은 수원 신도심을 흐르는 하천으로 정조가 풍년을 기원하고 만석을 거둔 대유평(북둔, 대유둔)이 현대에 들어와 커지면서 곡식 만석이 집 만집이 들어서는 일대 상전벽해가 이루어진 곳이다. 도심 속 잘 정돈된 호수와 같은 곳이 된지 오래다. 이러한 만석거의 물줄기가 서호천에 이르는 것이 영화천이다.

 

서호천 꽃뫼버들교 아래 교각에 그려진 수원하천도(이하) . 영화천은 서호천수계 오른쪽 만석거 방향

 

  영화천의 이름은 수원의 역원인 영화역(迎華驛)과 만석거 정자인 영화정(迎華亭)에서 딴 이름이다. 영화천변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 특히 서호천과 만나는 부근은 가장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천 상류의 만석거 부근에 이르면 복개되어 지하수로길로 들어서야 하는데 어둑한 공간이다 보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드물다. 나름 조명도 하고 벽화도 그렸지만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지하수로길이 어려우면 입구에 징검다리가 있으니 영화천을 건너 위로 올라가서 만석거로 가면 된다.(길 건너 어린이도서관) 수로길 중간에 어린왕자가 맞아주지만 어둑하니 혼자 걸어갈라치면 분위기 으슥하다.

  긴 지하수로를 나오면 영화천이 만석거와 만나 큰 저수지를 이루고 있다. 만석거의 물이 내리는 수문을 지나면 만석거 표지판이 나오고 그 위로 만석거를 조망하는 영화정이 나온다. 영화정은 원래 자리에서 북쪽으로 200m 이건된 것이다. 정자를 잘 복원해 놓았는데 만석거 수변과 많이 떨어져 있고 문도 잠겨서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영화정 주변으로 국화 무궁화가 피었고 이렇게 만석거를 돌아보면 시승격 70주년 기념 역사의 길, 송림, 또 다른 만석거 조망 정자인 여의정 등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제법 볼거리가 있다. 축만제 서호는 그저 근처 일월저수지와 같은 일반 수변공원 느낌이 강한데 비해 만석거는 역사와 문화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일찍이 정조부터 장안구청장 등 많은 사람들이 공들인 구석이 보인다. 다만 역대 구청장들의 식목표석은 현대판 송덕비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과거의 송덕비나 공덕비는 대개가 조선후기 가렴주구의 산물로 목민관의 기념물이 아닌 탐관오리의 산물이다.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고부군수 조병갑도 공덕비가 있다.(경상남도 함양군 상림숲)  

  만석거는 정조가 축조한 축만제, 만년제 보다 수원시에서 위상이 높다. 특히 만석거 영화정은 교구정이라고 하여 역대 수원유수가 교대의식을 하였던 곳으로 한양에 이어지는 수원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수원 화성의 정문도 북문인 장안문이 한양과 잇닿는 첫 문이라서 정문인데 이처럼 수원의 관문과 같은 위상이 이곳 수원 북쪽 만석거 일대가 그러하다. 현대에도 그러한 관념은 여전하여 오늘날 수원이 큰 변화와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기여한 이병희 국회의원 동상도 이곳에 있다. 이병희 의원은 '이병희 장관'으로 불리는데 무임소장관을 역임하였기 때문이다. 이병희는 경기도청 유치, 삼성전자와 연초제조창(화서역 부근 옛 kt&g)을 수원에 오도록 노력하였고 일제시기와 한국전쟁으로 무너진 수원화성을 복원한 공로가 있는 인물이다. 육사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삼성 이병철 회장을 소개한 실력자로 5공(전두환) 때 어려움도 있었으나 개발독재시대 수원을 풍미했던 인물이다.  

  만석거 서쪽으로 잘 가꾸어진 송림이 나오고 그 아래 바닥돌로 시승격 7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의 길' 조형물이 꾸며져 있다. 수원의 첫 관문 만석거의 위상에 걸맞는 현대판 조형물이다. 역대 수원시 연혁을 바닥돌에 새기고 있다. 특별히 정조의 즉위부터 시작하는 것은 수원이 정조의 도시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삼한시대 모수국에서 시작되는 수원은 정조와 관련 없지만 지금의 수원은 정조가 화성시 화산 아래 구읍치(수원고읍성)를 지금의 탑산(팔달산) 아래로 옮겨온 신읍치(1789)로 화성을 쌓아 만든 곳이다. 그러니 지금의 수원은 정조의 아들인셈이다. 그래서 정조는 집권 내내 아비의 역할 이상으로 수원에 애정을 쏟아 관민의 은혜는 차고 넘쳤다. '사람을 품다'라는 주제어도 정조의 애민정신과 국민정치사상을 잘 들어낸 글귀다. 이런 것은 칭찬해도 부족하지 않다. 다만 좋은 건 잘 설명해주면 좋겠다. 허기사 그런 거 다하면 나같은 사람 할 일이 없겠다싶다.

  한바퀴 돌고 여의교에 올랐다. 저번 왕송호에서처럼 정자를 오르는 이, 혼자이다. 다들 호변 걷기로 바쁘다. 정자의 이름인 여의루란 '뜻한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여의교를 기념하거나 상징하는 정자이다. 여의교는 정조의 행차가 ‘미륵현(彌勒峴 : 지지대고개)을 넘어 괴목정(槐木亭) 다리를 지나 용두(龍頭 : 현 노송지대) 앞 길을 거쳐 진목정(眞木亭 : 만석거 공원 부근), 여의교, 영화정, 장안문에 이르는 행행로선의 다리이다.

  ‘만석거 남쪽은 흙 낭떠러지에서 시작해서 북쪽은 돌 낭떠러지에서 끝난다. 그래서 그 낭떠러지의 돌을 파서 물이 들어오는 입구를 만들어 물을 끌어내리는 길과 통하게 하였고, 나무다리를 걸쳐놓아 여의교(如意橋)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리의 너비를 방죽 등허리와 나란히 하여 그대로 가마길을 만들었다. 또 남쪽 머리께 방죽이 시작되는 곳에 하나의 물구멍을 설치하였는데, 나무를 깎아 마치 우물난간의 틀과 같이 하여 가로 세로로 엇쌓아서 네모난 구멍이 관개수로와 관통하게 하였다.’-‘화성성역의궤' 만석거

  쉼과 구경을 할 수 없는 영화정보다 백배는 나은 정자가 여의루이다. 여의로 기둥 곳곳에 낙서가 가득하다. '낙서를 보면 시대가 보인다'했던가 로마의 옛 유적에도 보이는 낙서에서는 주로 보이는 것은 사랑으로 도배를 했다더니 여의루 낙서도 사랑과 애인 찾기가 대중을 이룬다.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길손 최고의 낙서는 '왔다감'이다. 

 

꽃뫼버들교에서 본 서호천, 바로 보이는 영화교회 뒤부터 영화천이 이어진다. 여기부터 걸었다.
여름을 맞아 지천에 개망초가 피었지만 서호천에 야생 미국 나팔꽃도 볼 수 있다.
짐겅다리와 나무다릴 연결한 재밌는 다리다. 이 다리를 건너 한마루교 오른쪽으로 영화천이 이어진다. 
오른쪽 한마루교 아래 영화천의 서호천 합수 모습이다.
한마루교 교각 사이로 보이는 영화천 줄기
한마루교 아래 교각에서 갈라지는 길로 오른쪽으로 나가면 영화천변길이다.
영화천으로 이쪽으로 쭈욱 따라가면 만석거에 이른다. 
영화천변길로 나와서 그 입구를 돌아선 모습이다.
영화천은 서호천의 지류로 물줄기가 가늘어 개울 모습이다. 갈수기에 물수량이 급격히 줄으면 마치 도심 속 숲속같다.
영화천을 오르다보면 가장 인상적인 것이 교각 아랫길로 그 밑 높이가 2m가 넘지 않고 낮다. 어느 정도 키가 자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닿게 되어있다. 괜시리 호기 부리다 머리를 박을 수 있으니 장난은 금물이다. 자전거를 타고 질주 하는 사람이 종종있다. 저 멀리 만석거 복개 지하수로 입구이다.
지하수로는 원래 개방하지 않던 곳인데 나무 데크로 길을 만들어 만석거로 갈 수 있게 하였다. 조금 어둡고 음침하니 꺼려지면 바로 앞에 짐검다리를 건너 도로로 만석거로 갈 수 있다.(건너편 수원시 어린이도서관)
음침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곳곳에 어린이가 좋아할 벽화를 그렸다. 편견없는 어린왕자가 지하수로로 온 손을 반긴다.
지하수로를 나오면 뒤와 같은 모습이다.
만석거 수문으로 이어지는 영화천. 짧은 거리지만 숲속 계곡 같은 인상을 준다.
만석거 위로 복개로 실질적인 영화천의 발원이 되는 만석거 수문. 여기부터 물이 흘러 영화천이 시작된다.
만석거의 전경이다. 한 때 일왕저수지라는 오명이 있었으나 본래 이름을 찾았다.
만석거 둘레길이다. 나같은 손보다는 운동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즐비하다.
정조 때 만든 만석거를 조망하는 영화정으로 그 정문이다.
만석거 주변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색색이 무궁화이다. 나랏꽃이지만 예전보다는 보기 힘들다. 전국이 벗꽃난리 때문이다. 사실 벗꽃 말고도 복숭아. 자두, 매실, 앵두나무, 배꽃 등 꽃과 과실이 달린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꽃이 많은데 왜들 벗꽃에 난리인지 모른다. 너무도 일상이 되어 버린 일제 잔재이다.
문이 굳게 닫아 들어가지 못한다. 다른 블로거의 말씀인즉 과거 유수 교대식이 있던 곳이니 수원시장 이취임식을 하면서 이 공간을 살아있는 공간으로 오늘의 의미를 되살리자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적극 동감이다. 그러나 수원 이곳저곳을 가보지만 수원시가 과연 귀 기울일지 모를 일이다. 종각에서 없는 재야의 종 타종행사도 만들어서 하면서 실제 있었고 그 의미도 현실에 반영하기 좋은 문화행사인데 정말 안타깝다. 문화도시 수원이라면 시장 이취임식도 문화로 풀어 갈 수 있는 행정이 필요하다.
영화정 정면으로 바라본 만석거이다. 수풀이 우거져서 만석거 조망이 어렵다. 가운데 섬과 그 앞 분수대이다.
만석거 제일의 실용적 조형물이다. 남수문을 모방하여 만든 교각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것은 칭찬해줘야 한다. 화성의 도시 수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다리이다.
예전에 초등학교에는 다 있었던 기상대다. 공공장소에 이런 것은 아이들 학습효과도 있어서 매우 좋다.
혹자는 말한다. '이병희 장관'이라고 그가 수원시의 성장과 변화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산이 높을 수록 계곡이 깊고 그늘이 짙다.
이병희 동상 곁에 색색이 무궁화가 조경되어 있다. 이것도 만석거의 좋은 풍경 중 하나다. 조경수로 무궁화가 한 때 국가적 의식 강화와 맞물려 개발독재시대 일선 학교까지 곳곳에 뿌리 내렸지만 민선 이후 벌레도 많고 병충해에 약해 전국의 무궁화가 뿌리째 뽑혔다. 그래선지 초등학교에서도 조차 보기 힘든 꽃이 되었다. 내 어릴적 진달래 못지 않게 쉽게 본 꽃인데 말이다.
송덕비, 공덕비... 어느 시대나 목민관을 자처한 사람은 목민관이 아닐 것이다. 유교 이상향으로 말하는 태평시대 요순임금도 성군을 자처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평성대 성군 세종도 당대에 성군이니 태평성대라 말하지 않았다. 다 후대의 평가이다. 그런데 송덕비, 공덕비 다수는 조선 후기에서 특히 말기에 당대 지방관들이 부임과 함께 세우기 급급했다. 본인이 나서서 말이다. 이럴진대 송덕이 어딨고 공덕이 어딨겠는가 다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의 증표이다. 현대에도 정치인과 행정가들이 임기중에 자신의 치적을 드러내기 급급하다. 기념식수니 뭐니 하면서 말이다. 현대판 송덕비다. 나랏세금이 아니고 순수 시민들의 뜻이라면 모를까 혹여 그런 분의 자취가 있다면 너그럽게 넘어가주시길...  
수원 첫 관문 만석거의 위상에 걸맞는 현대판 조형물이다. 시승격 70주년 기념물로 역대 수원시 연혁을 밝히고 있다. 특별히 정조의 즉위부터 시작하는 것은 수원이 정조의 도시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태초의 수원은 정조와 관련 없지만 지금의 수원은 정조가 화성시 화산 아래 구읍치(수원고읍성)를 지금의 탑산(팔달산) 아래로 옮겨온 신읍치이다. 지금의 수원은 정조의 아들인셈이다. 그래서 정조는 집권 내내 아비의 역할 이상으로 수원에 애정을 쏟아 관민의 은혜는 차고 넘쳤다. 
정조의 애민정신과 국민정치사상을 품은 주제로 수원의 상징성이 있다. 신읍치 수원의 생일이 1789년이고 그 시작이 정조 즉위로 밝히고 있어 수원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조형물이다.
여의교를 기념하는 정자 여의루
너른 여의루 정자 위 시원한 만석거 바람이 인다. 땀을 식히고 다리를 쉬었다.
당대를 읽으려면 낙서를 보라했던가 뭐니뭐니 해도 내 눈길을 끈 건 바로 '나 왔다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