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이야기

늦가을 한신대학교

달이선생 2019. 11. 16. 12:00

늦가을 한신대학교

 

  늦봄을 늦가을 한신에서 맞는다.

  늦봄 문익환은 학생시절에는 잘 몰랐다.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로 민족시인 윤동주의 친구로... 선생님이 걸어가신 길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감흥도 없었다. 사회로 나와서 늦봄이 걸었던 길이 얼마나 숭고한 길인지 새삼 많이 깨닫게 된 어른이다. 물론 학교에서는 '재야의 빛', 또는 재야대통령으로 일컬어지는 장준하 선생을... 조선신학, 민중신학의 아버지 장공 김재준 목사를...  

  이러한 선인들의 발자국이 길이 되었다. 나약했던 조선이 망하고 일제 36년의 식민지를 거쳐, 민족의 큰 시련으로 지금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은 한국전쟁... 이러한 역사로 인해 우리 사회는 계층, 세대, 이념 등으로 나뉘어 엄청난 갈등이 빚고있다. 이러한 때 저마다 진보를 가치로 젊음을 바친 이들이 있다. 한신이 한신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이들이다. 한신은 이들을 열사로 동지로 부르고 이들의 자취를 추모비로 남겨 기억하고 있다.

  오월의 영령으로 만우관 붉은 광장과 그 아래 오월계단으로 불리게 한 류동운 열사를 비롯하여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짧은 생을 마감한 박태순, 강민호, 이해진 동지, 그리고 농민운동에 나서 젊음을 불사른 조덕희 동지 등이다.

  장공관(본관) 앞에 그리스도 상이 인상적이다. 학내 운영을 두고 총장과 총학이 갈등을 빚는 모양이다. 천막 두 동이 농성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처음엔 '빨갱이 학교', '데모 잘하는 학교'라는 말에 거부감도 있었으나 이내 '뭐라도 잘하는 게 있고 특징이 있으면 좋은 거지'라며 합리화했다. 그리고 한신의 한국사회 진보의 역사를 자랑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한신이 한신의 길을 가고 있는가... 세상은 변한다. 한신도 변한다. 근데 어떻게 변할지는 선택이다. 시류에 편승할지 아니면 자기 길을 갈지... 한신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인가

  장공관 맞은편 경삼관(중앙동서관) 입구에는 묘제석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신대 박물관에서 야외전시한 것들이다. 경삼관에 위치한 한신대박물관은 경기남부지역을 중심으로 고고조사와 연구를 하는 전문기관으로 이 때 수집한 다수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중 하나이다. 수집인지 기증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눈길이 가는 것은 흐릿하게 지워진 부분도 있으나 문화유산에 대한 정갈한 설명이다. 그 분의 철학이 느껴진다.(한국사학과 이남규 교수님)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탁트여 멀리 수원도심까지 보여 답답할 때 잠깐의 쉼을 할 수 있던 곳이다. 운동장은 하나여서 많은 학과생들의 혈기가 표출되는 곳이다. 예전 국사학과도 복학생과 재학생이 전투체육이라는 이름으로 이 사부님(한국사학과 이세영 명예교수)을 모시고 축구를 하였다. 지금도 몇몇은 사부님을 모시고 이어가고 있다. 오늘도 오후에 축구를 한다고 한다. 

  한신의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파란 하늘과 눈시린 햇빛과 차가운 바람과 그리고 초록을 잃은 잎새들...

 

 

 

 

 

 

 

 

 

 

 

 

 

 

 

 

 

 

 

 

 

 

만우관(인문대학 등) 붉은 광장

 

광주민중항쟁류동운렬사추모비

 

1961.1.3 경북 포항 출생

1976.     광주진흥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연행

             단식투쟁으로 3일 만에 풀려남

1979.3  한국신학대학 신학과 입학

1980.5.18 계엄군에 의해 상무대로 연행, 심한 고초를 당하고 5월 20일에 풀려남

1980.5.26 도청 사수 중 일시 외출,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이 역사를 위해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시오'

               라는 일기를 남김

1980.5.27 도청에서 투쟁 중 계엄군에 의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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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학대학생의 죽음 ㅡ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가끔 교회에서 체육대회 가는 곳이 있지? 수유리 한국신학대학교 대학원. 오늘날 한국신학대학교는 경기도 오산으로 이전해서 종합대학인 한신대학교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970년대엔, 네가 뛰어놀았던 수유리 그곳이 한신대학교 캠퍼스였어.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대한민국을 휘어잡던 무렵 그 막강한 골리앗 같은 권력에 3천만이 숨죽이는 것 같았었지. 그래도 물맷돌을 휘두르며 나섰던 다윗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당시 한신대학교는 그 용사들의 산실 같은 곳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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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신대학교는 전교생이 기백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1만 명 이상의 학생 수를 자랑하던 다른 대학교들보다도 더 정권의 미움을 샀던 학교였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이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이 용맹한 신학도들은, 정부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사람의 목을 매달고, 초주검이 되도록 고문하고, 똥물을 끼얹고, 그 가족들까지 못살게 굴던 권력에 맞선 빛의 사자들이었단다. 학생 뿐 아니라 교수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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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한신대학에서는 맹렬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시위 주도 학생들에 대한 제적을 요구했다. “다 잘라 버리시오. 말 안 들으면 재미없소.” 마치 이스라엘의 왕이 났다는 소리에 갓난아이들을 죄다 죽여 버리라고 소리 지르던 헤롯 왕처럼 말이야. 이 산천초목도 덜덜 떨만한 호령 앞에서 한신대학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단다. 이 대학의 학장님이 머리를 박박 밀어 버린 거야. 학생들을 지지하고 정부의 요구를 따를 수 없다는 시위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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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따라 교수님들이 줄을 서서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 버렸고, 이를 본 학생들도 앞다퉈 이발소로 달려가거나 자기 손으로 가위를 들어 머리칼을 싹둑싹둑 잘라 버렸다. 일부 교직원들도 삭발에 동참했다고 하니, 졸지에 한국신학대학은 승가대학 (스님들을 위한 교육 기관)을 방불케 하는 ‘박박머리’들의 천국으로 화하고 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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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는 이 작은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그후에도 ‘한신’의 기세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어. 이즈음 정부는 각 학교의 학생회를 해체하고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의 군대식 학생 조직을 만들었다. 한신대학교에서는 되레 이 ‘학도호국단’이 주동이 돼서 데모에 나섰다. 학도호국단 이름으로 시위에 나선 건 전국에서 한신대학이 처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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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4월 7일. 교회에서 기념하는 ‘고난 주간’이었어. 한신대학생들은 교내 예배실에 모여 고난 주간 예배를 드린 후 고난 선언문을 발표한단다. 이 고난 선언문에서 한신대학생들은 저승사자처럼 무섭던 정권 퇴진을 입에 담게 돼. 그걸 읽은 건 학도호국단장이었지. 하지만 선언문을 다 읽기도 전에 경찰이 예배실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 그를 낚아채 끌고 나갔단다. 분노와 모욕감으로 학생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또 한 명의 학생이 단상으로 나서 선언문을 이어 읽었지만 그 역시 경찰의 우악스런 손길에 끌려가고 말았어. 한 학년이 50명 쯤 되던 대학의 학생 20명이 긴급조치 위반자로 처벌받았으니 그 의기(義氣)를 능히 헤아릴 수 있을 거야. 그 무렵 한신대학생을 비롯하여 진정한 ‘예수쟁이’들이 불렀던 찬송가 가사는 이렇다. .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니 정의가 사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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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 의기왕성한 한국신학대학에 한 신입생이 들어온다. 이름은 류동운. 성결교회 목사였던 류연창 목사의 장남이었어. 아버지가 시무하는 성결교회 계열의 성결교 신학 대학이 엄연히 있었지만 그는 굳이 한신대학교를 택했어. 한신대학교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이고, 그 학교가 추구하는 사회 복음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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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는 정권의 쓴맛을 본 바 있었다. 아버지 류연창 목사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됐을 때 가택수색을 당하는데 그 와중에 ‘불온한’ 메모가 발견돼 연행됐던 거지. 당시 나이 열 다섯 살. 너와 동갑이었단다. 당시 정부가 얼마나 정신이 나가 있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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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많은 신학생 류동운이 1학년을 마치기 전에 한신대학교를 무던히 미워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 같았다. 그러나 1980년, 군복 입은 살인마들이 대한민국에 도둑처럼 들이닥친단다. 그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고 이에 맞서는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했지. 5.18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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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운은 경북에서 태어났지만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지. 류동운은 광주 소식을 듣자마자 서울에서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시위 도중 계엄사에 체포돼 엄청난 곤욕을 치르고 풀려난단다. 머리는 깨지고 온 몸은 멍투성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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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 같으면, 아니 아빠라도 그렇게 무서운 곳에서 구사일생 빠져나온 뒤엔 언감생심 안방의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군복과 비슷한 색깔만 봐도 비명을 지르며 와들와들 떨었을 거야. 하지만 류동운은 다시 집을 나서서 시민군의 일원이 돼.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이 역사를 위해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시오.”

 

그의 마지막 일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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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류연창 목사 역시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옥살이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기도 했어, 민주주의든 자유든 어떤 세상없는 가치든 내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있어도 내 아들 목숨보다 무거울 수는 없는 게 인지상정이야. 아버지는 제발 가지 말라고 아들에게 호소해.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항변하지. .

 

“아버지 붙잡지 마세요. 다른 집 자녀들은 다 희생하고 있는데, 왜 자기 아들만 보호하려고 합니까? 평소 소신이 왜 변합니까? 아버지 설교 말씀에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이 역사가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를 붙잡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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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설교를 인용하여 아버지의 손을 뿌리친 아들은 총총 역사의 어둠 속으로,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찬란하다 할 빛줄기 속으로 사라진단다. 계엄군이 도청을 함락한 뒤 그는 시신으로 발견돼. 아버지가 그 치아만으로 아들을 알아보았을 만큼 참혹하게 변해 버린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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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졌던 신학생 류동운. 예수 잘 믿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그 뜻이 하늘에서 이뤄지듯 땅에서 이뤄지이다’를 가르친 예수의 가르침을 깨우치고자 한국신학대학교를 애써 택했던 신학생 류동운은 지금 그의 아름다운 동지들과 함께 5.18 묘역에 묻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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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서 아빠가 광주 5.18 묘역을 꼭 들르고 싶었던 이유는, 네게 우리 역사가 얼마나 긍지로 빛나고 영예로 눈부신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경제적으로 잘 살고 어느 정도로 힘이 센가도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한 나라의 국민들이 불의에 맞서 일어서고, 강도와 같은 독재자들에게 죽음으로 저항하고, 스스로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역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역사요 기억이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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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생 2백 명의 신학대학이 보여 준 용기는, 그리고 그 학교를 선택한 한 신학생이 택한 부활의 길은, 또 망월동에 누워 있는 수많은 묘비들은 우리 민족의 고난과 영광의 십자가고, 항시 우리들의 머리를 찌르는 가시들의 면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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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은 이 나라와 백성이 길이 간직해야 할 혁명의 날이자 분노의 날, 동시에 희망의 날이었어. 그래서 광주(光州)는 빛고을이다. 36년 전의 오늘밤은 용감한 신학생 류동운의 마지막 밤이었다.

 

-새봄교회 이진권 목사 회고

 

 

 

 

 

  공중파에서 들었던 안타까운 사고의 흔적이 오석에 십자가로 남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일 이후 오월계단 언저리는 차량 등의 돌진을 막고자 크고 튼튼한 보호 난간이 자리한다. 사실 이런 게 필요하진 않았다. 만우관 위까지 차량이 오르지 말았어야 했했다. 어느 시기나 사고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그 시기를 나는 사람들의 몫이다.(관련 뉴스 https://news.v.daum.net/v/20060415145110726?f=o)  

 

 

 

 

 

 

 

 

 

 

 

 

임마누엘관(학생회관) 입구 아래

 

고 강민호 동지 추모비

해방 세상의 건설을 위해

숱한 흰 새벽을 맞았던 우리

시대의 어둠으로 침잠한 그대에게

다시 흐르는 기쁨으로 다짐하노니

진정 우리는 그대였음을

진정 그대는 우리였음을

터져오는 목마름으로 살아오는 외침으로

그대에게 함께 할 것으로 그대에게 따름으로

-동지를 사랑하는 미족 한신학우 일동-

 

나는 한평생 노동자로서 개척하며 살아갈 것이다.

역사의 가장 진보적인 계급으로서

선배 열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런 노동자로서 한평생을 후회없이 살아갈 것이다.

지난 날의 모든 나약함을 과감히 버리고

민중사회를 향해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오로지 앞만을 향해 전진할 것을 가슴속 깊은 곳에서 결의한다.

한평생 후회없이 싸우다 가련다.

우리를 억압하는 반동의 무리들을

처단하는 투쟁의 최전선에서 서서...

그리하여 우리가 승히하고 해방된 사회를 본다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조국해방 만세를 힘차게 부를 것이다.

-열사의 글 '대망의 90년대를 맞이하는 새해에' 일기를 발췌-

 

강민호

1966.2.16 전북 출생

1985.3 한신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1986.10 건국대학교에서 진행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 위원회' 발대식으로 집행유예

1987.12.18 구로구청 부정선거규탄 투쟁 건으로 구속, 재판거부 혐의가 추가되어 실형 2년 선고 받음

1990.3 안산시 소재 대붕전선 입사

1990.4.4 입사 7일 째 작업용 기계에 휘말려 사망

 

 

 

 

오월계단 옆 노인정

 

고 조덕희동지추모비

뜨거운 신념으로 언 땅을 녹이고

짓밟힌 우리 발자국을 일구었던

그대 땅의 아들이여

척박한 땅에 뿌린 그대의 불씨

우리 해방의 대지에 피우리라

 

동지를 사랑하는 민족 한신 학우 일동

 

고 조덕희 동지 약력

1962년 8월 15일 출생

1981년 2월 인천 정석 항공고 졸업

1983년 3월 한신대 경영학과 입학

1987년 경영학과 학생회장 역임

1988년 총학생회 학술부내 통일사업분과원으로 활동  

1989년 2월 한신대 경영학과 졸업

1989년 6월 김포 자주농우회 간사로 활동

1990년 6월 김포 자주농우회 교육부장 역임

1991년 6월 30일 오전 10시 30분경 분신

                        오후 3시 30분경 운명

 

 

 

고 이상희 추모비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사람

그와의 영원함을 위하여

-사랑하는 친구들-

 

이상희(1964.10.29~1995) 추모비

이 비는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1995.6.29)로 유명을 달리한 고 이상희 동문(국어국문학과 1984학번)을 기리는 비입니다.

생전 모교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고인의 뜻을 살펴 학교 울타리 안에 모셔 한신의 동문들과 언제나 같이 합니다.

고 이상희 동문의 유족께서 고인의 마음을 헤아려 기탁해 주신 금포장학금은 지금도 후배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1995년 7월 학교가 잘 내려다 보이는 양산봉 봉우리에 처음 세웠던 추모비를 좀 더 가까운 이곳에 옮겨 모십니다.

2019.4.16

 

 

 

노동운동가 고 박태순 동지 추모비

 

열사에게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절 있었으니

 

첫사랑 설레임으로

오직 하나 아름다운 맹세

노동하는 이 대접받는 세상 꿈꾸었네

 

고된 노동

가난한 생활

각박한 옥살이에

마냥 의연하더니

 

십여 년 세월 훌쩍 넘어

사연 없는 주검으로 한줌 재되어 돌아온 너

네 고운 미소를 이제 어디서 보아야 하느냐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절 있었네

 

여기 맑은 영혼 가진 이 영원히 곁에 있어

고개 들어 내일을 보네

함께 꾸었던 고운 꿈 되새기네

 

박태순

1966.9.12 경기 출생

1985.3 한신대학교 철학과 입학

1988.5 수원 검찰청 검거농성, '폭력 공무집행방해'로 구속, 1년 6개월 복역

1992 수원, 부천에서 노동운동

1992.9.29 직장에서 귀가 중 행방불명

2001.2.15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1992.8.29 21:55경 시흥역에서 광주행 무궁화호와 충돌 사망한 것으로 밝혀짐

2001.8.19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

 

이렇듯 학내 다양한 추모비가 있듯이 한신대의 병풍으로 자리한 양산봉 자락에도 많은 동지들의 추모비가 있다. 그 중 국사학과 이해진 동지 추모비가 대표적이다. 노동운동을 하던 이해진 동지는 불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고 유족과 동지들이 동지의 시신을 화장하여 이곳에 뿌려졌다. 이곳 양산봉 자락은 이해진 동지의 유택 아닌 유택이 된 자리이다.

이곳에는 경영학과 조덕희 동지와 국문학과 이상희 추모비도 이웃하며 자리했는데, 이해진 동지 추모비와 달리 학내로 옮겨졌다.(양산봉 자락 추모비는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kcyun3/18353716

이해진 동지 추모비가 있는 곳에서는 아래 학교는 물론 노동운동을 하였던 현재의 화성시 과거 와우공단 일대가 조망된다.

 

 

 

 

 

 

출처 : http://blog.daum.net/kcyun3/18353716

 

고 이해진 동지 추모비

착취의 칼날에 피흐르는 세상을 부여안고

그는 시대의 강속에 고요히 잠겼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울부짖은

펄펄 살아 숨쉬는 노래는

이제 곧 솟구칠 것이다.

노동 해방의 거대한 파도가 되어

-동지를 사랑하는 민족 한신학우 일동-

 

고 이해진 동지 약력

1965.1.9 전남 장흥 출생

1983.2 서울 북공고 졸업

1984.3 한신대 국사학과 입학

1985.11 수원지부 노동부 사무소 점거농성으로 구류 15일

1988.4 화성군 와우공단 내 영신산업사 입사

1988.6.5 동료노동자와 체육대회후 심장마비로 사망

 

 

 

 

출처 : https://new-pictame.com/post/BjoGIzplwUn

 

  국사학과는 지금은 한국사학과로 바뀌었는데, 학과에서는 재학생과 동문, 그리고 유족이 함께 모여 매년 무더운 6월 5일 추모제를 열고 있다. 추모제가 열리기 전에는 추모비까지의 등산로를 재학생들이 모여 정비하는게 전통이다. 동지의 추모비는 어떤 이들에게는 담배 한개비로 시름을 달랬던 곳이다.   

  유족은 동지의 보상금을 동지들을 아낀 이해진 동지의 뜻에 따라 국사학과에 장학금으로 쾌척하였다. 국사학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자 혜택을 입은 동문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받았던 혜택을 다시 후배들을 위해 되돌리고 있다고도 한다.

  유족은 최근에 1억원의 장학금을 동지의 이름으로 한신대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경삼관(중앙도서관) 앞 박물관 야외 전시물

 

 

향로석(香爐石)

분묘의 상석(床石, 제수[祭需]를 차리는 곳) 앞에 설치한 석물로 묘제(墓祭)를 지낼 때 향을 사르는 곳이다.

혼유석(魂遊石, 피장자의 영혼이 나와 제사를 받는 곳), 상석과 함께 일군(一群)의 세트를 이루어 조성되었다.

16세기 이후 조선지식인들은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함께 사회 전반에 걸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구현하려 하였다.

분묘에 조성된 석물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투영하였다. 봉분 앞에 묘표(墓表)와 상석만을 조성하던 것에서 벗어나 이른바 묘제석물(墓祭石物)이라 불리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의 석물들이 이때를 기점으로 묘제(墓制)로 정착하였다.

향로석은 대체로 4각, 5각, 6각형으로 제작되었으나 4각 향로석이 주종을 이루었다.

 

 

 

 

 

 

문인석

능(陵), 묘(墓)의 봉분(封墳) 앞에 조성한 문관(文官) 복장의 석인(石刃)이다. 문인석(文人石), 문석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능묘에 조성된 문인석은 그 형식을 복장에 따라 복두공복형(幞頭公服型)과 금관조복형(金冠朝服型)으로 으로 나눌 수 있다. 복두공복형은 17세기 중반까지 제작되었고 금관조복형은 15세기 초반에 등장하여 19세기 중반까지 조성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초중반 사림의 등장과 주자성리학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왕실 왕릉의 경우 건릉(健陵, 정조의 능침, 1800년)에서 처음  금관조복형이 등장하였으며, 원은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의 원침, 1789년), 묘는 광해군 묘(光海君 墓, 1643년)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동자석

분묘의 앞에 조성한 석인(石人)이다. 대체로 동자복(童子服)을 입고 머리는 총각(總角)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제작되었으나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주로 홀(笏)이나 현재로는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는 미상 물체들을 들고 있다.

동자석은 주로 16세기 중반 이후로 등장하는데 석인이다. 주로 상석(床石) 양 옆에 설치된다. 이는 사대부의 일상생활이 분묘 석물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사대부 문인 옆에서 시중드는 시동(侍童)을 분묘 석돌에 구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동자석은 제수(祭需)를 흠향(歆饗)하기 위해 혼유석(魂遊石)으로 나온 피장자의 혼령을 시중든다는 의미로 조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석

능, 묘의 혼유석, 상석 아래에 설치되는 북(鼓) 모양의 석물로 족석(足石)이라고도 한다. 고석은 상단과 하단에는 북모양과 같이 징을 조각하였고, 중앙에는 고리를 입에 문 나어두(羅魚頭)를 새겨놓았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왕릉에서는 혼유석(흔히 상석으로 알려져 있으나 왕릉의 제사는 정자각[丁字閣]에서 지내기 때문에 혼유석이 올바른 표현이다.)을 받치는 용도로 고석이 사용되었다. 사대부 묘의 경우에는 이른바 묘제석물(墓祭石物)이 등장하는 16세기 중반에 상석 자리에 혼유석을 배치하게 되고 상석이 계체석(階砌石) 밖으로 돌출하게 되자 이를 지지하는 석물로 고석이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