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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구지천 십리길, 웃불에서 왕송호까지

달이선생 2020. 6. 19. 22:21

황구지천 십리길, 웃불에서 왕송호까지

 

  황구지천(黃口池川)은 의왕시 오봉산에서 발원하여 군포시와 의왕시 왕송호(저수지)를 거쳐 수원시에 들어와 크고 작은 하천들이 합수하는데 오망골천과 당수천을 만나고 이어 구운동과 천천동에 걸친 일월저수지에서 흘러내린 일월천과 금곡천, 호매실천을 만나고 정조대왕이 축조한 축만제 서호의 물줄기이고 수원시 4대 하천인 서호천, 그리고 수원 화성을 가로지르는 수원천, 원천리천을 만난다. 화성시에 들어와 반정천, 삼미천이 유입하고  정조대왕이 축조한 안녕동의 만년제 물줄기와 정남면 갈천이 만난다. 그리고 양감면 양문리와 평택시 서탄면 회화리에 이르러 진위천으로 합수하여 흐르다 안성천에 이어져 서해안 아산만(평택호)에 이른다. 

 

서호천 꽃뫼버들교 아래 교각에 그려진 수원하천도(수계) 수원의 4대 하천은 물론 지류까지 그려져 있다.

 

  황구지천의 이름은 수원군 율북면 황구지리(현재의 평택시 서탄면)에서 유래한 것으로  ‘누런 흙으로 된 곳’, ‘누렁구지’를 한자로 ‘황구지’라 하였는데, 1914년 일제의 부군면통폐합에 따라 행정리가 되었다.

황구지천의 다른 유래는 진위천의 큰 나루터인 항곶진(亢串津)에서 유래된 것으로, 항곶포(項串浦)등으로 불리다가 항곶천(亢串川)에서 유래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다른 유래는 옛날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황구지천 맞은편이 황구지리) 뒷산에 청룡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주지 이름이 황구지(黃口地)로 이 절의 본당과 승방 사이에 내[川]가 있었기 때문에 절의 스님들은 본당과 승방 사이를 오가기 위해서는 주지가 이곳에 돌다리를 놓아 아랫내의 이름을 주지의 이름을 따서 ‘황구지천’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하고 승방이 있었던 마을을 황구지리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현재 다리는 없어졌으나 1970년 제방 축조 공사 때, 다리를 놓았던 돌로 추정되는 큰 돌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황구지천 십리길은 수원시 구운동 웃불(서부로 농업지하도-일월천)에서 너른 농경지를 지나면 일월천 하구에서 농업용수문 위에 만들어 놓은 작은 철제다리를 건너면 호매실 금곡동으로 이어지는 금곡로의 일월교 아래 지하도를 나와 황구지천을 만난다. 2020년 6월 19일(08:40~1140) 이곳에서부터 의왕시 초평동 왕송호(왕송저수지였으나 개명하여 왕송호로 명명[2014])로 이어지는 매실길로 가는데 4km가 넘는 거리기 때문에 십리길이라고 한 것이다. 걸어서 십리가 넘는다. 매실길은 수원 팔색길의 하나로 매실 같은 자연생태계길이라는 의미로 주요 자연지물이 이곳 황구지천과 서쪽 명산 칠보산(일곱가지 보물이 숨겨진 산)이다. 자연친화적이고 칠보산자락 아랫마을(호매실동)이 원래 매실자생지라서 매실로 길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황구지천 길가는 온통 가로수들이 모두가 매실수가 아닌 왕벚나무다. 전국팔도가 왕벚나무나 심어 벚꽃잔치에 혈안인데 이곳도 별 수 없나 보다.(매실수를 심어 특색을 만들었다면...)

 

 

 

  실록의 계절 여름이라 매실길 지천으로 계란꽃으로 불리는 개망초가 피었다. 걷는 내내 매실길이 아닌 개망초길이라 생각되었다.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었으니 여름이 깊어가고 있다. 개망초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인데 이 꽃에 얽힌 이야기는 참으로 슬프다. 바로 우리네 가난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저마다 독립의 기쁨으로 세계가 들떠있을 때, 우리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아 그 기쁨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지만 실제론 38선이 그어지고 미소양국의 식탁통치로 각각 군정이 실시되었으며, 급기야 6월의 가장 뼈아픈 비극인 남북전쟁인 6.25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남북은 지금껏 영구히 분단을 맞고 있다. 이러한 한국전쟁의 발발과 끝은 우리나라를 전세계에서 아프리카 빈국보다도 더 가난하고 비참한 땅을 만들었다. 가난을 넘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이 당연시 되던 시절, 이러한 참담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큰 빛이 되어준 것이 미국의 원조이다. 이 미국의 식량 원조를 받아 굶주림은 면했는데, 이 원조물품을 선적할 때 쓰인 완충재가 바로 북미지역에서 자생하던 개망초 더미였다. 흔하디 흔한 개망초가 우리네 볏단처럼 사용된 것이다. 북미를 떠나온 개망초가 전국에 퍼진 것을 보더라도 우리나라 곳곳에 미국 원조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수원에서 통일벼가 발명(농촌진흥청)되기 전까지 우리 밥상은 쌀보다 미국 밀가루를 주식이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충남 당진의 외가에서는 이 시기 외할아버지가 지금의 공공근로와 비슷하게 일을 하고 밀가루를 배급받아 허기를 면했다고 이야기하는 어머니.. 미국의 원조가 자국내 농산물 처리와 멀리는 제3세계의 식량자급률을 낮춰 식량주권을 좌지우지 하고 곡물 판로 확장이라는 미국의 세계정책으로 보지만 그 시절 지독히도 가난했던 우리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렇듯 개망초는 우리의 가난을 상징하는 꽃이다. 

개망초의 꽃말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멀리 있는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게 해준다"이다. 

  황구지천의 수량이 적어 하천보다는 개울같다. 비록 지금은 수량이 적으나 옛날에는 서해 아산만에서부터 황포돛배가 수원까지 거슬러 올라 올 정도로 물이 풍부하였다. 지금의 한신대학교(오산시 양산동)에서 아래로 바라다본 황구지천변이 이러한 돛배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하니 지금은 상상조차 어렵다. 황구지천만이 아닌 우리네 강과 하천 등은 개발 등으로 각종 농업용수 사용과 도시개발에 따라 하천 유입의 물들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거나 유출되면서 중심된 하천의 수량이 크게 줄었다. 우리나라는 원래 육로보다는 배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수운이 발달한 나라다. 지금의 개울 같은 하천을 볼 때는 상상이 어렵겠지만 말이다.

  멀리 수리산 슬기봉(관제대대)이 가까워 보이며, 높고 길게 가로로 놓인 제방이 눈에 들어온다. 왕송호 남쪽 수문에 잇닿아 매실길을 돌려 집으로 가기전에 잠시 왕송호를 둘러본다. '하동정씨문성공제2자하성위파재실(하성위파하동정씨하성위파승장계초평종친회)'이 있고 왼쪽으로 돌아나가니 하성부원군 정현조의 묘가 있다. 이 묘는 정현조의 처인 세조의 따님 의숙공주와의 합장묘로 일제강점기(1942)에 경기도 양주에서 여러 석물은 놔둔채 묘비 2기와 시신만 이장되어 온 것이다. 양주의 묘는 의숙공주가 먼저 죽어 왕실에서 장지를 잘 골라 묘를 썼고 나중에 천수를 누리다 정현조가 죽어 아버지 정인지 묘하로 가서 무덤을 썼으나 중종의 명으로 정현조 묘가 양주 공주 묘와 합장되었다가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른 공주묘와 달리 부마 정현조 묘라는 표지판 외에 의숙공주에 대한 아무런 표시가 없다. 후사를 잇지 못해서 일까.. 묘하의 철문이 굳게 닫히고 개망초 등 수풀이 허리까지 차올라 감히 성묘는 엄두도 못내었다. 어느 집안이든 선묘에 대한 정성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 조에 군왕과 조정에서 백두포의의 사손을 실직은 아니나 허직으로 등용하고 사패와 군역을 면제 한 것은 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보상이었다. 때문에 집안의 장주는 보통 과거를 해도 초시(진사, 생원) 정도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명한 고관대작들이 장자들이 아닌 이유가 여기서 연유한다. 

  화성 촌(고향)에 가면 동리에 많은 묘들은 가깝게 후손들이 살아선지 번듯한 석물하나 없는 흙묘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잔디는 파리한 중학생 머리 같다. 이곳 의숙공주 묘는 양지바르고 너른 묘원이지만 정성스런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파조인 정현조와 의숙공주를 모실진데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조상의 묘는 철문을 둘러 출입을 막는 것이 아니다. 묘원과 생활의 경계는 묘지를 알리고 엄숙함을 표하는 것이다.(표석) 묘 답사를 다니다 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이런 답사는 원래 겨울이나 초봄에 수풀이 우거지기 전에 하는 것이 최고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한다.

  왕송호는 레일바이크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선지 둘레길 전체가 레일로 둘러져 호변 풍광의 접근성이 떨어진다. 소수 레저인을 위해 다수 유객들을 소외시킨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둘레길을 걷는다. 서호(축만제)나 일월저수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다름이 보인다. 서호는 나이든 사람이 많은 반면, 왕송호는 일월저수지와 같이 젊다. 의왕이 젊은 도신가보다.

  의숙공주 묘에서 북쪽으로 나무데크 길을 잠시 오르며 솔밭 위로 현판 하나 없는 누각이 서있다. 내딴에 '초평루'라 이름하고 올라 본다. 나무가 우거져 호 전경을 눈에 두기는 어렵다. 그래도 호 건너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온다. 뜨거운 볕도 기와 얹은 서까래 지붕이 가려준다. 이만하면 더 무엇을 바라리 이마에 땀이 식어갈 때 쯤 의문이 든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고 있는데 정자에 오르는 이 드물다. 오히려 아래 솔밭 의자에 삼삼오오 머무는 이가 많다. 왜 그럴까

 

 

 

  정자를 내려와 왕송호 남쪽 수문을 지나 길을 돌려 거슬러 간다. 나무 그늘이 시원하다. 오는 길 중간에서 청려장은 아니나 길가 고춧대를 주어 청려장 삼아 길을 걸었다. 단단하게 마른가지가 대추나무인가... 길벗으로 이만한게 없다. 길가다 갑작스럽게 뱀이나 개를 만난다면 낭패니까 마련한 보신책이다.

  황구지천에 큰 보물을 본다. 투박하지만 단조로운 시멘트(콘크리트)로 만든 다리가 그것이다. 매실길 편의시설로 만든 나무다리(아래로 가장 맑은 물이 소리내어 흐르고 있다. 지류인 소하천 당수천이다)도 있지만 나무 데크로 만든 다리보다 오래되고 낮은 시멘트 다리가 더 운치있다. 높지도 크지도 않은 것이 자연하천인 황구지천에 최적화된 다리다. 이 다리 저 다리 구경하다 오던 길 거스르고 건너고 그렇게 뚜벅뚜벅 걷다보니 처음 왔던 곳이다. 다음은 서호천을 거슬러 오를까 아니면 내려 가볼까..

 

웃불 지하도를 나와 황구지천으로 나아간다. 멀리 칠보산과 호매실지구(금곡동)가 바라다 보인다.
일원천하구로 이 천변길 앞에 보이는 철제다리를 건너면 황구지천이다.
황구지천 매실길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다리, 철제로 만든 작은 다리다. 일월천 위 작은 농업용수문 위에 놓였는데 원래는 없었는데 농자 편의를 위해 가설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만 통해 가능하다.
흐드러지게 핀 계란꽃, 개망초
작은 철제 다리를 지나 뒤를 돌아 본 모습이다. 웃불 지하도 인근 모습이다.
일월교를 지나 도로 밑으로 나가면 황구지천이다.
황구지천에 들어서서 뒤를 보니 농협마트와 서수원이마트 등이 바라다 보인다.
황구지천의 보물 다리, 건너 보고 다시 건너 보고
당수천 위에 왕송호 방면으로 이어주는 나무다리
가는 길에서 가장 맑고 우렁찬 개울로 황구지천의 지류인 당수천(연장 1,950m)이다. 당수천은 당수동 727번지 일대서 발원하여 바로 이곳 당수동 625-1번지에서 황구지천과 만난다. 1997년 9월 수원시의 소하천으로 지정되었다. 
황구지천의 보물 다리
작고 낮은 오래된 시멘트 다리. 오른쪽 나무에 매실길 나들이 동행이 되어준 청려장
매실길을 거슬러 오니 왕송호 남쪽 수문 종착지(의왕시 초평동)다.
왕송호 남쪽 수문쪽 제방에서 본 호수 전경
오봉산에서 발원한 황구지천이 가로막혀 왕송호에 가득차고 그 물이 다시 여기 남쪽 수문을 통해 수원으로 흘러 간다.
하동정씨 하성위파 재실
의숙공주 묘. 철문이 가로 막히고 개망초와 수풀이 허리까지 차오른다.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갈 수가 없다. 다음을 기약하자
현판이 없어 나름 '초평루'라 이름 붙인 정자에서 땀을 식혔다. 지나는 사람은 많으나 들르는 이는 없다. 다들 운동하는 사람이지 나처럼 유객이 아닌 모양이다.
데크길 가운데 끝이 의숙공주 묘 입구이다. 이 길 끝에 왕송호 수문이 있고 수원으로 가는 황구지천이 시작된다.
왕송호 수문 앞 다리이다. 오른쪽 수원시 입북동 아파트 방향에서 올라 왔으니 건너편 길로 다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