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이야기

수원 행궁동 더페이퍼

달이선생 2021. 4. 14. 21:50

  어둑한 짙은 황사가 왔다가 두 차례 비가 지나고 4월의 햇살이 주춤하더니 파란하늘이 열리고 옷무새 날리는 바람이 시원하다. 사무로 시작한 일정이지만 가깝고도 멀었던, 행궁동을 찾았다. 

  행궁동을 찾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보통은 수원 화성행궁을 찾아서 오는 길손이 많을 것이고 더러는 행궁동의 아기자기한 찾집이며, 카페며, 혹은 점집을 찾아 드는 객이 많을 것이다. 10여년 전 매산로 부근에 살며, 화성성곽을 돌고 그 아래 행궁동이며, 지동이며 발품으로 곳곳을 누비고 다녔었다. 그 때 이런 일정에는 화성과 행궁 등 문화유산이 중심에 있던 나들이었다. 지금의 행궁동은 많이 변했다. 그 옛날 화성과 행궁을 찾아 오던 이보다도 더 행궁동 자체의 문화향수를 가지고 찾는 이가 많을 것이다. 혹자는 "도시재생이 벽화만 그리다 끝났다'라고 비판하는 한 곳이기도 한데 글쎄다 벽화도 벽화지만 우리 시대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의 변화와 기대가 너무 왜곡되거나 한 곳만 바라보는 건 아닐지..

  하여간 행궁동을 찾았다. 수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오늘 사무차 더페이퍼 혹은 사이다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곳이 행궁동이었고 그래서 행궁동을 걸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라 몇몇 종교단체가 원성을 사고 있다. 그럼에도 행궁동에서 목회를 하며 지역과 길손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교회가 있다. 수원제일감리교회로 평일 교회 주차장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지역 특성상 주차장을 유료로 할 수도 있는데 좋은 인상이다. 평시에는 갈일이 없는 인적 드문 산길도 막아 통행료를 걷는 산사도 있는 판에 대도시의 변두리도 아닌 중심지 도심에서의 일이다. 덕본김에 빚갚음이다.

  행궁동을 중심을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청운의 꿈을 가지고 무수히 많은 일을 한다. 그 중 시대와 사람들, 그 사람들에 주목하여 그들을 기록하고 남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주식회사 더페이퍼와 골목잡지 사이다'이다. 1999년 이래 더페이퍼가 설립되고 2012년 출판인쇄를 중심으로 하는 사이다가 설립되었다니 젊은 행궁동과 함께한 회사이다.

  사실 사회를 발디디기 전에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중에 이런 일을 취미로 갖거나 혹은 작은 출판사업자를 내어 은퇴 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 그럴 때 더페이퍼와 같은 곳은 단지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고 있었다. 꿈은 꿈이다. 젊은 시절 청운의 꿈을 꾸지만 꿈에서 그친다. 실천이 중요하다. 시흥에서 시민기록자 모임 '한개'와 이를 사업화를 한 '도토리' 등을 알고 있었는데 그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사업화를 한 곳이 있었다.

 

  "역시 세상사 인생도처 유상수(人生到處 有上手)다"

 

  사옥은 더 보물이다. 행궁동에 사라진 무수히 많은 집 중 주변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보존된 한옥이다. 물론 개조가 되긴 하였다. 그 옛날 초가집이었다라니 그래도 행궁동 하면 어울리는 곳은 여기가 아닌가 한다. 집도 행궁동이지만 그 집자리도 행궁동이다. 푹 꺼진 것이 옛날 행궁동 터이다. 최서영 대표의 안내로 안에 들어서니 길가 화단으로 쓰다 버려진 것을 주어다 만들었다는 작은 어항이 있고 바닥에 모자이크로 꾸며져 있다. 뒤란으로 이어지는 작은 문을 나서니 개방된 작은 휴식처가 만들어져 있다. 지난 겨울 한파에 초록빛을 잃었다는 대나무가 누렇게 서있다. 벽에는 그으름이 남아있는데 누군가의 실수로 흔적도 없이 불타 없어질 뻔 했다고 한다. '자나깨나 불조심' 어릴 때 포스터 숙제를 하면서 숱하게 곱씹은 말인데 우리네 금연교육도 중요하지만 흡연교육도 절실하다. 개인 건강은 물론 사회 공공성까지 아우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더페이퍼를 나와 뒤를 보니 태권브이 벽화가 인상적이다. 그 길로 점심시간 때라 잠시 행궁쪽으로 발을 옮겼다. 행궁에 다다르니 행궁의 막바지 복원을 위한 발굴과 공사가 한창이다. 일제가 행궁을 부수고 한켠에 만들었던 신풍초등학교가 없어지고 담벼락에 건설팬스가 쳐져있는데 '담벼락갤러리'라고 해서 화성 주변의 옛사진과 풍경을 담은 그림이 한창 전시중이다. 특별히 요즘 관심사인 대황교에 눈길이 간다.

 

  "예전에 내깔(황구지천) 다리 자리에 가면 널다라니 네모 반듯한 큰 돌 위에서 뛰어내리며 멱도 감고 밤에 횃불을 켜서 바소고리(발채)를 돌 사이에 쳐서 참게며 물고기며 많이 잡았다" 

 

  황계동 김종연 노인회장님의 대황교에 대한 추억거리가 떠올랐다. 말씀처럼 다릿돌이 큼지막하니 이해가 된다. 파란하늘에 울긋불긋한 팔달산이 아름답다 풍경이 좋아 사진으로 담아보지만 눈으로 보는만 못하다. 

  '행궁동 왕의골목' 표지판을 보고 섯다 그 내용을 보니 거북하다. 얼굴책에서 조금은 완고한 어느 역사학자의 글을 자주 보는데 그 분도 직업상 여러 곳을 다니다 문화재나 그 연유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딴지가 심하다. 근데 나도 그런 기질이다. 행궁동을 왕의 골목으로 이름하였지만 실재 왕이 행차하던 골목은 아닐 것이다. 임금의 행차는 지금의 의장행렬과 같은 것으로 이미 골목을 통한 행차는 말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도 좁은데 예전 골목은 더 좁았다. 이런 골목을 정조께서 행여 가셨다면 변복하시고 몇몇 수행원만 앞세워 걸으셨을까.. 그리고 정조께서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화성 신도시를 건설하였다는 설명..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실학사상 자체도 할 얘기가 있겠으나 정조가 세운 화성이 당대 사상의 총화였을지는 몰라도 정조께서 실학을 바탕으로 건설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는 참 왕을 좋아한다. 어디를 가니 '왕의 밥상'이니 '왕의 쌀'이니 하면서 광고를 하는데 이 부분이 사람들에게 상당히 좋은 인상인가 보다 사실 왕실과 왕실문화의 중심이고 그것을 이야기로 했을 때 가장 정통은 한성 4대문 안 구중궁궐이다. 근데 보면 거기보다 변두리 혹은 어쩌면 왕실의 착취에 대상이 되었던 곳이 더 왕을 앞세워 홍보에 열을 올린다. 여주, 이천쌀 참좋다.(화성 간척지쌀도 참 좋다) 근데 왕에게 진상한 쌀이라서 좋단다. 과거 진상품은 백성의 고혈이자 민생파탄의 주범으로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가 극성을 부리는 이유가 되었다. 이것의 폐단을 개선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한 것이 대동법이다. 쌀 자체가 좋다. 좋은 쌀 임금님을 꼭 끼어 넣을 이유가 없다. 행궁동 자체도 그렇다. 서울의 왕을 위시한 고관대작을 피해 우리네 백성들이 다녔던 골목 피맛골이 있다. 피맛골은 왕이랑 관계 없지만 어린시절 그 골목에서 취하고 떠들고 좋았다. 그 시절 향수가 진한 곳이다. 행궁동은 과거 향수는 없어지고 마치 사람으로 치면 성형되어 다른 곳이되어 '왕의골목'이란다. 아무래도 왕은 아닌 거 같다. 새롭고 젊은 행궁동, 그 얼굴에 맞는 새로운 방향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꼰대질이다.

  예전 행궁동 나들이는 화성성곽에서 화서문을 지나 행궁에 이르거나 매산로 도청을 지나 향교길로 팔달문을 거쳐 행궁에 이르는 등 나들이 중심에는 화성과 행궁이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행궁동 작은 사무실을 찾는 일이었고 그 길에 행궁앞을 찾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