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수원화성박물관 특별기획전
사도세자의 부마, 흥은위 정재화
특별기획전 마지막 날 방문하였다.
정재화는 사도세자의 딸 청선군주에 남편으로 정조의 매부이자 부마다. 청선군주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막내딸이므로 외명부 품계 정2품이고 그의 남편인 정재화는 의빈부 흥은부위로 정3품 상계 당상관이다. 고종 때 대한제국 선포 이후 장헌세자(아버지 사도세자 정조 즉위 추존)를 장종(장조, 1899)으로 높이면서 딸인 청선군주가 공주로 봉작되고 아울러 정재화도 흥은위로 추봉되었다. 품계는 이미 정조가 1784년에 의빈계 정1품 수록대부에 올리었다. 전시에는 부위보다 높은 종2품 순의대부에 가자된 교지(고신)를 확인할 수 있는데, 청선군주에게 장가들어 '흥은' 칭호를 받은 이듬해이다.
이번 전시회는 흥은위의 후손들이 1천여점의 유물을 기증(2019)하면서 이루어진 전시회다. 정재화는 선조대 우의정을 지낸 송강 정철의 후손으로 영일정씨 명문가라는 것도 알겠지만 초상화를 통한 정재화를 보면서 이 인물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졌다. 어린 두 아들의 박물관 관람교육을 위해서 왔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다.
"적적한 때에 이처럼 관잠(官箴)에 관한 말을 하였기에 지극히 아름답게 여겨진다. 그러나 비답하는 분부를 오히려 이에 이르도록 지체하였음은 진실로 본사(本事)는 조정의 수치(羞恥)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본시 지각이 없는 사람이라 조만간에 죄과(罪科)를 범하게 될 것을 진실로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소청을 그대로 시행하라."( 寂寥之時 有此官箴之說 極用嘉乃 然批旨之尙稽至今 誠以本事爲朝廷羞恥故耳 渠本無知覺 早晩犯科 固已料之 所請依施-정조실록 16권, 정조 7년 10월 4일 임술 (1783년)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정재화에 대한 기록으로 정언 홍낙항이 흥은부위 정재화를 탄핵하자 정조가 비답한 부분이다. 홍낙항은 의빈(儀賓)인 정재화가 지방 주군에 마음대로 쏘다녀 물의를 일으키니 삭탈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정조의 답은 의외이다. 그것은 '조정의 수치'라는 둥, '지각이 없는 사람이라 조만간 죄를 범할 줄 알았다'는 둥 정재화가 수치스러울 정도로 야박한 평가였다.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정재화는 형편 없는 사람으로 정조에게 늘 골치였다가 이번 기회에 삭탈의 벌을 내리게 된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 의빈의 삶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왕권과 멀어진 왕족의 삶과 별반다르지 않았다. 존귀한 신분이지만 실권은 없다. 실권을 행사하려는 마음과 행동이 벌어진다면 한 순간에 역적으로 떨어져 일신은 물론 가문이 몰살 당할 수도 있다. 반면에 외척은 다르다 왕권에 다가가 있지만 실권까지 거머쥐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조선 초기 태종이 그토록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척족을 처단했던 것은 이때문이다.(여흥민씨, 청송심씨)
정재화는 명문가의 태생으로 왕실의 부마로서는 손색이 없다. 다만 정재화가 너무나 뛰어난 재목이었다면 의빈의 삶은 형벌이 되었을 것이다. 의빈의 자리는 그가 아무리 날고 뛰어도 아무런 일을 할 수도 해서도 안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할 수 있는 낙은 무엇이었을까 음주가무에 빠져 호색한이 되거나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밖에는 없었을 것이다.(태종의 부마 정선공주, 의산군 남휘가 대표적이다.) 실록에 언급된 것처럼 조선 선비들이 즐겨한 지방 유람(관광)이 그의 낙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정조가 총애하는 누이 동생, 특히 막내 동생 청선군주의 남편이라는 것이다. 정재화야 자유롭게 다니고 싶었지만 그가 나타난 고을에서는 고을수령 등 대단히 골칫거리거나 아니면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난 상황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일이 정조의 말처럼 단시간이 아닌 오래 전부터 있던 터라 정조는 그를 비난하면서 삭탈을 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정조가 그를 힐난한 것이 개인적 치부로만 그치고 있다는 점과 소청을 그대로 시행했지만 정조의 비답은 정재화를 벌 주려는 것보다는 그를 왕으로서 변호한 내용이라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다. 아비없이 자란 막내 누이를 가엽게 여겼던 정조가 그의 남편에게 절대로 죄를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재화가 이듬해 의빈 최고 품계인 정1품 수록대부로 가자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만 정재화는 이에앞서 이미 행실의 문제가 있었다. 1770년(영조46)에 청탁을 받고 궁노들을 옥문으로 보내 금리를 구타하고 형구를 부숴 밀도살로 잡혀온 죄수를 빼 간 일로 지평 홍상성의 탄핵을 받은 것이다.
지평 홍상성(洪相聖)이 상소하여 이만식(李萬軾)을 다시 국문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근일 도하(都下)에 밀도살이 낭자하여 신이 있는 의금부에서 어제 패장(牌將)이 붙잡아다가 막 감률(勘律)하려고 하는데, 흥은 부위(興恩副尉) 정재화(鄭在和)가 남의 청탁을 받고 많은 궁노(宮奴)를 풀어서 옥문(獄門)으로 보내어 금리(禁吏)를 구타하고 형구(刑具)를 부순 다음 죄수를 빼앗아 갔으니, 이는 참으로 전에 없었던 해괴한 일로서 당당한 국법이 이 나이 젊은 한 명 귀근(貴近)으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파괴되었으니, 정재화에게 삭직의 율을 시행하여야 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정재화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하였다.(持平洪相聖疏請更鞫李萬軾, 又言 近日都下, 犯屠狼藉, 臣府昨牌見捉, 方擬勘律, 而興恩副尉 鄭在和, 聽人請囑, 多發宮奴, 作挐獄門, 敺打禁吏, 破碎枷械, 奪去罪囚, 此誠前所未曾有之怪事, 堂堂國法, 由一年少貴近而隳壞無餘 鄭在和宜施削職之典 批曰 鄭在和事依施。"-영조실록 115권, 영조 46년 12월 15일 정해 (1770년) )
37살에 요절하여 정조를 더욱 비통하게 만든 정재화, 정조는 사랑하는 누이가 청상이 되자 더욱 각별하였다. 다행히 누이 청선군주는 정재화와 슬하에 외아들 정의(鄭漪)가 있었다. 정의는 외할머니 혜경궁홍씨의 안부를 챙기는 승후관으로서 소임을 할 정도로 왕실 일원으로서 군주의 아들로서 아버지 정재화를 대신해 성심을 다하였다.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마련한 조선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1795년 을묘원행과 회갑연에서는 어머니 청선군주를 모시고 함께했다. 이런 그였기에 정조는 '진명'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의'를 지어내렸다. 뿐만아니라 1796년 정조는 유엽전을 쏘고 고풍지를 올린 정의에게 관례를 깨고 하사품으로 서책인 중용을 하사하였다. 보통 고풍에 대한 하사품은 대개 활과 같은 무기 혹은 음식 따위였다.
아비와 달리 벼슬에 나갈 수 있었지만 그는 왕실과 관계되는 일에 특별히 매진하여 외할아버지가 잠들어있는 현륭원의 원령이 되어 수묘를 다했고 이어 수원판관이 되면서 외삼촌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을 관리하는 화령전령과 왕실행사의 종척집사 등을 두루 수행하며 지냈다. 특히 만년에 낙봉 기슭에 띳집에서 은거하며 검약하게 살면서 주변 노인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왕실 일원으로 높은 신분(시랑)이란 것을 몰랐다는 것으로 볼 때, 그의 자질과 품성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문, 서화를 잘했고 국조전고에 달통하였다. 아버지 정재화보다 의빈의 삶을 정말 충실히 잘 살았다. 현종의 부마로 숙종의 매제였던 해창위 오태주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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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을 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수원화성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과 화성행궁에 대한 대표적인 박물관이다. 따라서 여러 전시실을 통해서 정조와 화성, 화성행궁 등에 자세한 자료와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 특별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정조의 이름이다. 정조는 보통 사극을 통해 '이산'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정조가 명하여 찬한 규장전운을 통해 이름이 '성'으로 불린다는 것을 밝혔었는데 이번 박물관 전시에서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어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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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화성성역에 큰 공훈자는 누가 뭐래도 당대 최고의 재상 채재공이다. 그의 초상은 물론 초상을 그리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자세히 전시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다만 그가 죽고 남인이 실각하는 가운데 정조 묘정에 당연히 배향(종묘)되어야 하는 명신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그를 정조 곁에서 떼어 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당당히 수원 한복판에서 정조와 그의 행적를 기념하는 장소에서 그가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다행이다. 그리고 사실 화성성역과 수원의 건설은 채제공과 같은 권신말고 이름없이 공역에 참여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땀의 결실이다. 그 중 내고향 삼괴의 대표 무반가이자 명문가인 해풍김씨 쌍부파 김후의 초상을 보고 반가웠다. 김후는 정조라는 임금을 만나 무반으로 입신하여 화성건설의 실제 감독관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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刑曹參判鄭公墓誌銘 幷序○乙未
故侍郞鄭公旣卒之三年。胤子海尙。抱公狀泣謂余曰。先人墓草再宿。而平生言行。將就闇㫚。如蒙惠以隧銘。俾垂永世。則不肖庶可以藉手九京。抑先人有知曰得子文。吾志也。余歎曰吾何忍銘吾友。然吾而不銘。誰當銘者。遂叙之曰。公諱漪字淸夫。延日人。系出新羅諫議大夫諱宗殷。圭組奕世。至左議政文淸公諱澈。名德冠冕士林。於公九世祖也。曾祖贈贊成諱楺。以太學生。主張士論。疏辨聖誣。爲善類所推重。祖平壤庶尹贈領議政諱麟煥。考興恩副尉諱在和。尙莊獻世子女淸璿郡主。擧公于慶幸坊賜第。初諱鎭命字性汝。正廟賜今名。純廟又賜字而錫以字說。殊渥也。甲寅命授敦寧府直長不就。辛酉還授。壬戌陞掌苑署別提。移義禁府都事。換掌樂院主簿。歷司憲府監察。甲子拜繕工監主簿。乙丑陞顯隆園令。換宗親府典簿。丙寅出監果川縣。戊辰換鴻山。己巳移儀賓府都事。陞尙衣院僉正。庚午守高城郡。未赴換高陽。辛未陞瑞興府使。甲戌 特授水原府判官。丙子陞淸州牧使尋罷。辛巳以仁川府使執事于健陵灤朝。敍勞陞通政。壬午特除同副承旨。後累拜序至左。癸未以孝禧殿享官陞嘉善。拜漢城府右尹。轉左尹,同知義禁府事,都摠府副摠管。後屢拜。甲申除刑曹參判。又以景祐宮享官陞嘉義。丙戌以同知敦寧府事。出守淮陽府。己丑又出牧驪州。再期而賦歸。自是不復起矣。壬辰九月三日。考終于園泉本第。距其生辛丑正月十四日。爲五十一歲。訃聞賜賻祭如例。越三月戊子。葬于楊州陵谷坐坎之原。公娶延安金氏。學生諱載象女。僖靖公相紳曾孫也。擧一男一女俱不育。繼子海尙前別提。有二女幼。公生稟絶異。一歲而効語。二歲而誦風騷。三歲受解語方于世父。默識而不錯。議政公授公以扇佩而歿。公敬戢巾衍。久猶寓感焉。七歲入闕私覿。進退中度。見蜘蛛近御榻。以身揮之曰。幺麽裸蟲。敢近香案乎。上奇之曰天生忠誠。九歲見畫雪中羊咀。傍有植旄者。指曰此北海上漢中郞蘇武也。四座驚服。修葺祠屋。見廳底石凾曰是爲緩急藏主而設。其警悟夙就如此。性於孝。庚戌丁外艱。居瘠如成人。戊午服承重內憂。辛酉又丁內艱。情文俱摯。嘗侍食驗匙箸多少。以爲憂喜。常以早孤含恤。終身。事世父順志居養。喪祭靡極不致。友悌二姊。及老彌篤。愛諸甥如己子。周急恤匱。如恐不及。窮親貧交。歸之如旅。居家崇四禮。嚴內外。平生不問家人產業。亦不以事物經心。軆不御綺羅。口不食兼味。絶無禁臠氣味。非勉強而然也。嚴於辭受。有餽而過者。輒却之曰與者傷惠。受者傷廉。莅官如家。克輸悃愊。抑强杜私。不尙聲譽。信心直行。去就不苟。以故未曾終三年淹也。俸餘不入于室曰。我家牌賦。足以供賓祭之需。安用此爲哉。每執鞭而歸。其廉介拔俗皆類此。出入禁闥。兢兢翼翼。常存溫室樹之戒焉。天姿寡慾。樂易昭朗。面如冠玉。符彩襲人。有神聰博涉書史。讀不過數遍。終身不忘。爲詩淸警可誦。筆畫精妙。未成童已然。而不少槩見。嫺習國朝典故。每公家有事。疑難棼錯。輒詳切辨諭。諸僚皆遜聽。做邑剸劇。再接訟民。已曙其居住役名。名實未覈。而吏民不敢欺焉。雅不樂市朝。無官則輒獨往丙舍。瞻依松楸。以寓蓼莪之慕。嘗愛原驪間山水。求田問舍。用擬六一翁歸潁故事。而病未遂。仍僦居駱麓。茅茨隱約。蕭然如林廬。時與野老爭席。人不知爲舊侍郞也。居恒任眞。不設畦畛。而自守甚確。居外絶苞苴。處內戢刺牘。其所以立腳得住者。無媿汲直之不拜。范理之不禮。而老益遵晦。一步不枉。是爲公晩節所樹立卓然者也。公卽吾姑母子婿。而行委禽之禮于吾家。以故世親之愛。至皓首靡替。常期于東峯泉石。公至自薇山墳菴。觴詠跌宕。風流溢發。仍擬分華卜隣。用追龎徐故義。而公不少待矣。每臨風把酒。想像其高情遠韻。而林壑有餘悲矣。銘曰。
嗟嗟鄭公。王國之甥。銀潢滉漾。玉佩鏘鏗。紫馬九郡。黑頭貳卿。繄公所樂。不在顯榮。富而能儉。貴而不驕。恭爲德基。令聞孔昭。有味蔬筍。婆娑林臯。棲心澹泊。遠世超搖。若將終身。行歌反招。豈欲長往。秖可自怡。繁紅嫰綠。屛諸庭墀。幽篁寒菊。左右相隨。欣然相托。歲寒心期。晩晦於身。其大爲守。詎若世人。威怵利疚。緇塵眛俗。獨我拂袖。庶幾無忝。爲文淸後。維楊州西。華岳巑岏。公藏居中。睾如之安。玉樹黃壤。不朽者神。知德者誰。惟我故人。靡敢獻諛。用累公眞。- 한국문집총간 > 매산집 > 梅山先生文集卷之三十八 > 墓誌銘
정의 호패
정의의 호패 중 각패 앞면에는 성명과 신축생이라는 탄생시기(1781년)와 갑인입사라는 관직에 오른 시기(1794년)가 표기되어 있다. 아패도 동일한 기록이다. 또한 각패의 뒷면에는 갑인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낙인이 찍혀 있어 오패의 제작 시기가 1794년임을 알 수 있다. 아패는 뒷면에 계미가 새겨져 있어 1823년(순조 23)에 제작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정의는 정조 말에 돈녕부 직장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순조 초에 수원판관, 동부승지를 거쳐 형조참판까지 지냈다. 그의 이력은 홍직필의 문집인 매산집 형조참판정공묘지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풍에 기록된 중용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1책 완질로 인쇄되었고, 크기나 종이 두께 등으로 보아 1796년(정조 20) 정조가 하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책 하단 밑면 서근(書根)에 '新印(신인)'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새로 인쇄된 것이다. 일성록 1793년 11월 5일 정조가 성균과 유생의 응제(應製)를 직접 채점하고 수석을 한 자에게 새로 찍은 중용 1건을 내려주라는 명령의 기사와 이후 1794년 9월 7일과 9일 초계문신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들에게 상으로 새로 찍은 중용 1건을 주라는 기사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정의는 이 무렵에 새로 인쇄된 중용을 하사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1796년(정조 20) 11월 11일에 정조가 유엽전을 쏘고 이때 참석한 정의에게 '중용'을 하사한 문서이다. 고풍은 옛 풍습에 임금과 함께하는 활쏘기에서 곧 어사(御射)를 모신 사람이 임금의 활쏘기 성적을 적은 고풍지(古風紙)를 올리며 상을 청하면 임금이 종이 끝에 하사하는 물건을 써서 주는데 이때 작성한 문설르 고풍이라 한다. 정조는 재위 기간동안 활쏘기 진작에 힘써 고풍이라는 문서가 이 시기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정의가 올린 고풍에 따르면 정조는 모두 3순의 유엽전을 쏘아 11발을 명중 시켰다. 대개 고풍의 하사품은 활이나 화살과 같은 무기 혹은 음식 등인데 이처럼 책을 하사한 경우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정의와 혜경궁홍씨가 어느 해 동짓날에 주고받은 편지이다. 혜경궁홍씨는 동짓날을 맞이하는 기쁨을 드러내면서도, 정의가 입궐하였으나 자신에게 문안을 드리러 오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도 내비치고 있다.
"윗궁에 가 어찌 다녀왔는지 염려로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정의는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에게 승후(문안)하느라 혜경궁홍씨에게는 오지 못한 듯하다.
앞의 편지에서 혜경궁홍씨의 친필임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을 확인하였는데, 이 편지에서는
"나도 감기를 심하게 앓고 아득하여 대서로 답하고 섭섭하다."
라고 밝히고 있어 궁녀를 통해 대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혜경궁홍씨가 작성한 편지는 총 77편인데 그중 친필인지 대필인지를 추정할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하는 편지가 다수 있어 향후 혜경궁홍씨의 필적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주목된다.
화성성역의궤(1801)
1794년(정조18)에서 1796년(정조20)까지 축조된 수원화성에 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기록한 종합공사보고서이다. 책의 체재는 권수 1권, 본편은 제1권에서 제6권까지로 축성공사와 관련된 내용이며, 부편 3권은행궁의 증축공사에 대한 내용으로 총10권 9책이다.
성곽 시설물의 도면뿐만 아니라 축성도구, 재료의 쓰임과 비용, 중앙관리로부터 공사인부에 이르기까지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임금지불에 대한 모든 내용이 총망마된 책으로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다.
번암 채상국 제공 백규(채제공의 자)의 73세 초상. 화가 이명기.
성상 15년 신해년에 어진을 그린 후 왕명을 받아 초상을 그려 대궐로 들이고, 나머지 초상은 다음해 임자년에 장황하였다.
네 모습 네 정신은 부모의 은혜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군의 은혜로다.
부채는 임금의 은혜, 향마저도 임금의 은혜
온 몸을 꾸민 것, 그 모두가 임금의 은혜
그 은혜 갚을 길 없으니 너무도 부끄럽네.
번옹이 짓고 쓰다.
호수(虎鬚)
김후가 사용하던 것으로 전화는 호수와 그것을 보관하는 함이다. 호수는 무관이 융복(戎服)차림을 할 때 머리에 쓰던 주립에 꽂는 장식품이다. 호랑이 수염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로 보리이삭이나 새의 깃털로 만들어진다. 김후 호수는 시료 분석 결과 새의 깃털로 확인되었다. 호수는 무관의 상징이다.
전시 안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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