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로 빠진다거나 겹가지로 나간다거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떤 일을 하다보면 늘 겪는 일이다. 인생사 정주행은 없는 거 아닌가..
2021년 10월 2일 경기도문화원연합회에서 '경기도 동네한바퀴 주간'이라는 행사를 찾아보았다. 날씨 좋고 다 좋은데 항상 나에게 영감을 주고 무한 호기심을 주는 것은 역시나 역사적 장소와 문화재이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답답했던가 집을 나서고 고속도로 인근에서는 주차장이 따로없다. 그래서 안성 가는 길을 큰 도로를 나와 작은 국도로 길을 잡았다. 막힌길 무작정 내비도 안 보고 그저 안성이라는 팻말만 보고 달렸다. 그랬더니 이게 왠걸 익숙한 지명이 눈에 들어온다.
원곡면
만세고개
안성3.1운동기념관
양성면
목적지는 행사장소인 안성 보개면 대추농장 주주바팜인데 왜이리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지 3.1운동이라는 거국적 민족운동의 고장 경기도 화성시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늘 자랑으로 여기며 살았다. 근데 늘 공부하다보면 안성 원곡과 양성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우리 고장이 치열했듯 더하면 더했던 원곡과 양성, 이 곳에 왔다.
새롭게 들어온 지리적 풍광을 익히고 느끼기(지도라는 평면과 책이라는 활자에 그만 이 지역이 평탄한 지역으로 알았는데 산골이다.)도 너무나 빠듯한 나머지 만세고개 아래로 양성에 있는 기념관에 들려 순국선열에 대한 인사를 바삐하고 그나마 안내장이라도 얻고자 하였지만 연로하신 해설사 선생님께서 "없어요"라는 말에 안성시청에 대한 신뢰가 땅바닥을 친다.(해설사 선생님 탓이 아니다. 들어보니 행정적으로 잘 구비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토록 뇌리에 박혔던 안성 원곡과 양성에 대한 3.1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전문가인 수원박물관 이동근 교육홍보팀장(학예사)님의 입을 빌린다.(출처 : (2) 이동근 | Facebook)
[‘대한독립’ 그 길 위에 서다]22. 경기 안성(1) : 민중불교 미륵의 고장 안성
안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안성맞춤’이다. ‘안성맞춤’은 안성의 유기그릇과 가죽꽃신이 유명하여 생겨난 말이다. 안성은 서쪽으로 평택과 동북쪽으로 이천, 용인과 접해있다. 남쪽으로는 천안인 충청북도와 맞닿아 있는 안성은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적 요충지이다. 때문에 팔도의 물건들이 모여들고, 좋은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한때 ‘안성에 가면 뭐든지 있다’라는 말이 생겨났고 안성장이 유명했다. 안성은 삼남으로 통하는 길목이고 장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수공업도시로서 민란 때마다 안성장의 비중이 컸고, 장날을 이용하여 농민군이 자주 결집되었던 곳이었다.안성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이 미륵부처들이다. 안성에는 안성시내 아양동의 남녀 미륵과 양성면 대농리의 미륵, 교통의 중심지였던 과거 죽산현 관내 삼죽면의 기솔리 쌍미륵, 그 위 국사봉의 궁예미륵, 그리고 관아터의 동편인 죽산면 매산리의 태평미륵이 있다. 태평미륵은 원래 대평미륵으로 불렸다고 한다. 대평원에 있던 미륵이라는 뜻이다. 미륵불은 민중들이 희망하는 이상세계를 실현해 줄 부처이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56억 7천만년이 될 때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미래의 부처다. 석가모니의 교화가 다 끝나고 새로운 ‘용화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민중들이 희망했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은 ‘자유’와 ‘평등’의 기쁨으로 가득 찬 평화의 세계이자 유토피아였다. 비록 현실은 고단해도 미래에는 새로운 밝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의 상징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 혼란기에 미륵불이 많이 조성되는데 조선후기에는 부처의 격식마저도 없앤 동네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모습을 닮기도 한다. 세우는 장소도 마을 어귀나 정자나무 옆에 세우기도 하여 생활 신앙의 한 존재가 되었다. 현실 속에서 이상향을 구한 안성사람들의 믿음이 마을 어귀와 중심에 미륵불을 세워 놓은 것이다. 바로 이런 미륵의 세상이 오기를 식민지 아래 어둠 속에서 희망했을 안성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을 일으키며 들고 일어났다.(2021.12.19.)
[‘대한독립’ 그 길 위에 서다]23. 경기 안성(2) : 민중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고자 외친 ‘대한독립만세’
안성군의 3․1운동은 3월말부터 읍내와 죽산면, 원곡면, 양성면 등을 중심으로 평화적인 시위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 평화적 시위가 공격적인 운동으로 바뀌게 된 것은 4월 1일 원곡면과 양성면이 연합으로 공동투쟁을 전개하면서부터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은 처음에는 각각 별도의 시위를 일으켰으나, 4월 1일 저녁 원곡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만세를 부르던 원곡면민이 일본 순사주재소가 있는 이웃 양성면으로 쳐들어가 마침 양성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에워싸고 만세를 부르며 되돌아 나오던 양성면민과 합세하면서 대규모의 농민시위로 발전하였다. 2천여 명의 농민들의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었고, 시위행렬은 의기충천하여 기세를 올렸다. 시위 농민은 경찰관주재소와 양성우편소에 불을 질렀다. 또한 전선을 끊고, 경부선 철도까지 차단하려 하였다. 그리고 양성 읍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비롯하여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호적원부를 꺼내어 소각하고 기물을 모두 파괴하였다. 또한 면장을 포박하고 면사무소를 불태워 버렸다. 이에 맞서 일본 군경은 야만적인 발포를 자행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24명이 순국하고 127명이 투옥되는 사상 최대의 탄압이 벌어졌다. 양성․원곡의 운동은 농민에 의해 주도된 운동으로, 특히 원곡면민들은 한학자로서 동리의 신망을 받던 이유석(李裕奭) 등의 사전 계획과 현장지도에 의해 일제 행정관서와 일본인 거주지가 있는 이웃 마을까지 원정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운동이었다. 민중들의 원한은 치솟았고, 연대투쟁이 되면서 격화되었던 것이다.일제는 양성․원곡의 3․1운동을 3대 폭력지로 꼽았다.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폭력항쟁지이지만 가장 치열한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으로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의 만세운동,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의 만세운동과 더불어 3대 실력항쟁이었다.(2021.12.25.)
[‘대한독립’ 그 길 위에 서다]24. 경기 안성(3) : 면사무소를 불태우며 시작된 2일간의 해방구
원곡면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곳은 그대로 원곡면사무소가 되어 있다. 당시 일제의 간악했던 통치기구였던 면사무소는 불타 사라졌다. 지금은 해방 이후의 새로운 면사무소로 면사무소 앞 주차장에는 이곳이 3·1운동이 벌어진 곳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한 커다란 ‘3·1독립항쟁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면사무소 옆의 원곡파출소 앞 도로의 자그마한 로터리가 만세광장으로 지칭되어져 있는데, 이곳에 3·1운동 항쟁을 알리는 동상이 2018년 10월 25일 세워졌다. 태극기와 함께 다양한 계층의 인물 동상 12개가 설치되어 신분여하에 관계없이 원곡면과 양성면 독립만세에 참여한 민중들을 표현하고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있다.원곡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5~26일 경부터 동리 단위로 시작하여 점차 면사무소 앞 시위로 발전하였다. 4월 1일이 되자 이유석·이덕순·최은식·이희룡·홍창섭·이근수 등 지도자들은 각 동리마다 시위대를 조직했다. 저녁 8시경 1,000여명의 시위대가 등불 또는 횃불을 밝혀 들고 면소재지인 외가천리로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후 1,000여명이 대열을 지어 면장 남길우와 면서기 정종두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면으로 향하였다.원곡면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양성면으로 넘어갔던 고개는 성은고개였다. 이제 이 고개를 더 이상 성은고개라 부르지 않는다. 휴게소가 있고, 안성3·1운동기념관이 지어져 있는 이 고개는 만세고개이다. 만세고개는 1919년 4월 1일 원곡면민 1,000여 명이 양성으로 원정시위를 넘어가며 ‘대한독립’의 결의를 다진 곳이다. 결의를 다진 원곡면민들은 양성면 소재지인 동항리로 가서 양성면민과 합세하여 2,000여명의 군중들이 양성주재소와 양성면사무소·양성우편소 등을 방화 또는 파괴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 2일 새벽 다시 성은고개를 넘어 원곡면으로 와서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를 불태우고 독립만세를 불렀다.만세고개의 ‘안성3·1운동 기념관’은 전시관과 광복사, 기념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력항쟁으로 몰아 낸 2일간의 해방을 기념하고 있다. 광복사에는 독립운동을 펼쳤던 안성의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기리고 있다. 전시관은 상설과 기획전시실이 자그마하게 나눠져 있고, 영상실에서는 원곡과 양성면 만세운동의 영상이 상영되고, 지하 1층에는 체험실이 있다. 야외에도 다양한 야외체험과 포토존, 다양한 조각품들이 놓여 있어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임을 증명하고 있다.만세고개를 넘어 양성면으로 가다 보면 양성초등학교가 나온다. 양성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운동장을 질러 교사 바로 앞에 ‘안성 3·1독립운동 발상지’ 기념비가 서 있다. 당시 양성공립보통학교로 1919년 3월 11일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양성면 덕봉리 출신의 보성전문학교 학생이었던 남진우가 조회시간에 학교에 와서 일본인 교장이 만류하는 가운데 한국인 교사들과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를 불렀다. 양성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는 이후 일어난 원곡·양성면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양성초등학교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양성면사무소터가 나온다. 4월 1일 양성면의 각 마을 주민들이 동네별로 따로 만세운동을 벌이다. 동항리에 집결한 곳이 이곳이었다. 1,000여명의 만세군중들이 돌아가려 할 때 원곡면 만세군중 1,000명과 합류하게 되었고, 2,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들은 양성주재소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를 소각했다. 이어서 양성우편소로 가서 집기를 불태웠으며, 양성면사무소에서도 물품을 파괴하고 서류를 불태웠다. 시위대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상과 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가구류와 기물들을 소각시켰다. 이로써 이 지역은 일제의 공권력이 사라진 2일간의 해방구가 되었다.(2021.12.31.)
연말, 성탄절, 해넘이에 이르기까지 분위기에 취하지 않고 열일하시는 이동근 샘에게 경의를 표한다.
위의 설명에서 미륵신앙, 미륵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안성이 새시대를 갈망했던 나말선초기의 민중신앙의 중심지이자 새시대를 여는 사람들의 고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궁예가 연결되어 있고 고려를 개창하고 광종이 나라를 반석위에 올리며 황즉불, 왕즉불 사상을 대내외에 알렸던 고장이 바로 안성이다. 삼남이 여기서 열리고 시작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시간을 내어 들리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너무나 아쉽다.
밥 때를 맞춰야 하니 어쩔 수 없다. 혼자 나선 길도 아니고 우리 아해들 굶길 순 없으니 혼자 마냥 좋아서 다닐 수도 없으니..
간만에 들려본 아주 좋은 식당이다.
밥을 먹고 배가 부르니 시선이 닿는다. 역시 궁금한 건 못 참는다. 멀리서 보이지만 어떤 비석을 덮은 비각이란 것은 분명하다. 보통 효자, 열녀, 충신 등등의 비인데 무슨 비일려나..
일제시기 가난하고 못배웠지만 부모 효성이 극진했던 효자 류해옥의 효자비이다. 지붕이 날리고 낡고 녹슬고 찾는이 없지만 시대를 관통했던 우리의 덕목이자 가장 중요한 표상이었다. 안내문이 떨어질락 말락 안성시청에 대한 신뢰가 두 번째 바닥을 친다.
로컬크리에이터(지역의 로컬(local)과 창작자의 크리에이터(creator)의 합성어)들의 향연 '경기도문화원연합회 동네한바퀴 주간 안성 대추농장 팜파티'
10월 9일 오늘도 고속도로는 주차장이다. 수원에서 여주까지 6시간을 갔다. 걷는 속도로 이 시간이면 강릉을 다녀와 여주에 있을 시간인데
경기도 동네한바퀴 두번째 시간 여주 세런디피티
두 아들과 함께여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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