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소다미술관, 만년제, 안녕리 표석

달이선생 2021. 6. 18. 22:22

소다미술관, 만년제

 

  화성에서 자랐지만 종종 화성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처럼 말이다.

  617일 화성시 안녕동 소다미술관을 찾았다. 소다미술관은 유명한 곳이었다. ‘인스타 미술관’, ‘하이브리드 미술관등 으로 이야기되는 유명세가 있는 곳인데 지금껏 모르고 살았다. 이곳 장동선 관장은 사립미술관이지만 하루평균 주말 4,5, 평일 1,2백명이 찾고 있어 이렇게 모인 관람료를 총 운영비 절반을 감당한다고 하니 여느 미술관이나 박물관보다 운영조건이 매우 양호하다. 그런데 소다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주변에 즐길 거리가 없다. 볼게 없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한다. 역사를 전공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본능적으로 '왜 없어 이렇게 많은데' 바로 옆 만년제니 용주사니 용주사도 있고 한신대 너머 독산성 세마대지도 연결되고 풍부한데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일 것이다. 특히 주 미술관 방문객이 어린아이와 그 가족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소다미술관을 몰랐다. 왜냐하면 관심밖이기 때문이다. 특히 소다미술관과 같은 예술은 아주 쥐약이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도 똑같을 것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 일대가 문화재가 많고 스토리텔링이나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여건이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여기 문화유적은 그저 황량함 그 자체이다.

  재밌는 사실은 문화계에 몸담고 경기만에코뮤지엄 사업에 발을 조금 담그고 있을 때 공공디자인으로 제부도가 아주 유명해졌다는 것을 알고 2019 선진지 견학을 했었다. 그리고 자부심이 있는 삼괴의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삼일만세길 31km가 개통되어 중심에 방문자센터 등을 꾸렸는데 득달같이 찾아가보고는 참 괜찮다 싶었었다.

오늘 이 모든 것이 소다미술관 작품임을 알았다.

 

알았지만 몰랐고, 몰랐지만 알았다.’

 

  사실 공공디자인은 생소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 지역은 일찍이 시작은 공공디자인이 아니었지만 심재덕 수원시장을 중심으로 공공화장실 수원, 나아가 대한민국, 세계로가 있었다. 위생 문제 등으로 시작은 어느새 공공화장실을 공공디자인의 중심으로 바꾸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전국 어디를 가나 화장실은 쾌적을 넘어 지역의 문화와 특성을 담은 하나의 상징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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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천 십리길, 여기산에서 해우재까지

서호천 십리길, 여기산에서 해우재까지 서호천 십리길은 수원시 서호천변 길인데, 시작을 여기산 북쪽 아래 화산교(화서역)에서부터 해우재까지 이르는 길이 4km가 조금 넘어 십리길이라고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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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빠르게 공공디자인이 주목되고 확산될 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를 선도한 곳이 있었다. 소다미술관(장동선)SOAP(권순엽)이다. 최근에는 궁평리 해송군락지 궁평 오솔 아트파빌리온이라고 해서 또 하나의 명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본상 위너 수상까지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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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경기만에코뮤지엄 화성에코뮤지엄 제부도

2019 경기만에코뮤지엄 시흥에코뮤지엄연구회 투어(화성에코뮤지엄, 제부도) 시흥에코뮤지엄연구회 2기가 2019년 6월 10일 시흥시 월곶동 시흥 월곶공판장 아트독에서 출범을 하고 그 첫 사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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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3.1운동 만세길, 방문자센터

화성 3.1운동 만세길, 방문자센터 2019. 4. 27.(토) 화성시는 1919년 당시 3.1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이다. 특히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은 예로부터 쌍부현, 삼괴 등으로 불리며, 한 지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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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평 오솔 아트파빌리온

 

  장동선 관장의 이곳 화성시의 첫 느낌은 '물류가 발달한 컨테이너가 많은 곳이었다'였다. 그래서 파격적인 시도로 컨테이너를 통해 소다미술관이며 제부도에 각기 예술 건축을 남겼다. 소다미술관 소다는 무슨 뜻일까?

 

SPACE

OF

DESIGN AND

ARCHITECTURE

 

철자 앞자를 따서 'SODA'이고, 직역하면 디자인 건축물의 공간이나 소다미술관의 표현대로 디자인 건축 예술공간이다. 그런데 처음 소다라는 말을 듣고 언뜻 생각된 것은 탄산이다. 아니나다를까 장동선 관장은 소다는 탄산으로 이곳이 추구하는 가치가 사람들에게 가볍고 신선하고 부담 없고 친숙한 뜻으로도 통한다고 하니 우연이나 공감되었다. 이름에서 놀림에 불과했던 병달이가 지금은 별명이자 호()가 되었듯이 말이다.(달이達理)

  소다미술관은 설치작품으로 특성화 된 곳이다. 소다미술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 목욕탕 설치작품을 찍고 싶었는데 각도가 안나와 포기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예술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것도 이 미술관을 특징이다. 예전 목욕탕의 특징을 살려 공중에 물이 뿌려지고 우산을 쓰는 것인데 아이들이 매우 좋아한다. 문화유적과 달리 미술작품에 대한 세세한 소개와 설명은 않는다. 원래도 이 분야에 소질이 없거니와 여기 작품들은 미술관 운영방침에 따라 처음 방문자는 전시기간(작품에 따라 전시기간 유동적) 동안은 무한 작품감상이 되기 때문이다.(인증샷 후 전시기간 동안 무한 방문 가능-화성시민과 근거리자 혜택) 작품이 바뀌면 처음 방문으로 돌아간다. 물론 무한 재방문도 가능하고 뿐만아니라 미술관에서 이용할 수 있는 굿즈, 다과 등도 다 바뀐다고 한다. 아마도 소다미술관의 창의성은 역동과 변화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여간 미술관 다 떠나서 매우 독특한 곳이다.

 

  이렇게 소다미술관을 찾아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사람 사는 곳곳에 뛰어난 사람이 있다.)를 만났지만 이곳에 오기까지 갈망했던 호기심은 미술관과 가까운 곳에 있는 만년제였다.

  만년제는 건릉의 정조가 현륭원을 보호(풍수지리적 비보)하고 농본으로 백성을 교화하고자 만든 상징적인 수리시설(저수지, 제방)이다. 한 때 그 축조와 쓰임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만년제(萬年堤)를 완성하였다. 만년제는 현륭원(顯隆園)의 동구(洞口)에 있다. 상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이번 화성(華城)의 만년제 공사는 백성 한 사람의 힘도 쓰지 않고서 몇 일만에 완성했으니, 참으로 큰 다행이다. 원침(園寢)의 수구(水口)에 이 방죽물을 저장해두면 현륭원 밑의 백성들 토지에 이것으로 물을 대게 될 것이니, 이것이 마치 저 장안문(長安門) 밖에 만석거(萬石渠)를 만들고 여의동(如意垌)을 쌓고 대유둔(大有屯)을 설치한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만석거를 만들고 여의동을 쌓고 대유둔을 설치할 당시에는 백성들이 모두 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누차에 걸쳐 권유 신칙하고 내탕전(內帑錢) 수만 금을 내려서 결심하고 시행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백성들이 도리어 주위가 광활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있으니, 백성들과는 이루어진 일을 가지고 함께 즐길 수도 있으나 일의 시작을 함께 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하다. 그러나 지극히 신명한 것이 또한 백성들이니, 뒤에 의당 나의 고심을 알 것이다."(萬年堤成萬年堤在顯隆園洞口, 謂筵臣曰: "今番華城 萬年堤役, 可謂不費一民之力, 而不日告完, 誠大幸也園寢水口, 貯此堤水, 園底民田, 以此灌漑, 與長安門外, 開萬石渠, 築如意垌, 設大有屯一般意而萬石築垌設屯時, 民皆不肯, 屢勤勸飭, 下內帑錢數萬金, 決意爲之, 到今民人, 反以週遭不能廣闊怨之, 可與樂成, 不可與謀始, 有如此然至神者, 亦小民也, 後當知予苦心")-정조실록 권48 정조22427일 신유(1798)

 

  이렇게 완공된 만년제를 정조는 원침수구(園寢水口)라고도 불렀다. 정조가 만년제라 이름하고 그 준공에 대한 뜻을 밝힌 것과 달리 농업수리시설로 보긴 어렵다는 의문(2012. 왕릉에 딸린 네모 형태의 연못[방지원도])이 계속되었으나 경기문화재단(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만년제를 발굴한 결과( 20165차 시발굴조사를 끝으로 완료) 농업수리시설 기능을 한 것이 밝혀졌다. 

만년제 규모와 발굴조사계획. 출처 화성시,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만년제 복원.정비 계획보고서1(2012) 145쪽

  다만 먼저 조성된 만석거는 광교산에서 발원한 송죽천과 조원천을 막아 안정적인 취수원을 두고 너른 저수지를 둔 반면 만년제는 화산과 성황산, 남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방축동을 경유한 능안천을 수원으로 일반적인 능묘 연못 보다는 규모는 크지만 취수와 관개 등에서 쓰임은 만석거나 후에 만들어진 축만제보다는 열악하다. 그러나 만년제(만년들)는 수원의 만석거(대유둔[북둔]), 축만제(축만년제둔[서둔])와 더불어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농본정책의 상징임은 부정할 수 없다. 임금 정조가 친히 말했고 오늘날 우리들도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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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천 십리길, 서호천에서 만석거(영화정)까지

영화천 십리길, 서호천에서 만석거(영화정)까지 영화천(迎華川) 십리길은 수원시 영화천변의 길이다. 서호천 13교인 한마루교에서 서호천의 지류인 영화천이 만나는데 여기부터 동북쪽으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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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축만제[서호], 항미정) 3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 2019. 3. 3, 3. 9(2일 2차례 답사) 전근대 수원은 화성시, 오산시까지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수원(水原)이라는 한자 명을 보더라도 물이 풍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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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는 현륭원 행행에서 수원에 들어서서 현륭원에 이르기까지 지나가는 경계가 되는 곳에 지명을 새겨 표석과 장승을 세웠다. 현재까지 화성시에 남아있는 것은 만년제표석과 안녕리표석 정도이다. 안녕리표석은 안녕리 입구에 잘 보존되어 있지만 만년제표석은 현재 만년제가 정비되지 못하여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화성역사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 이밖에 수원시에 괴목정교, 상류천, 하류천 등 3개의 표석이 남아있다. 이와 별개로 만년제표석과 유사한 축만제표석도 볼 수 있다. 정조 당대 수원필로에 세워진 표석과 장승의 수는 각종 편찬자료마다 내용이 다르다. 현존하는 표석이 많지 않아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년제는 본래 수원구읍치의 방축수(防築藪)라는 제언을 1795(정조19) 2월 초1일 행행에서 정조가 친히 만년제로 이름을 바꾸고(원행을묘정리의궤) 17962월에 이름을 써서 표석을 세웠다. 만년제의 뜻은 세세만년 오래도록 풍년을 기원’한다는 것으로 먼저 축조된 만석거(10년을 기다려 만석을 거두는 이익-1796 1월 정조 지음)와 후에 축조한 축만제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만년제는 본격적으로 확장, 개축되는 것은 1798년으로 정조는 이때 선혜청당상 겸 내각제학 정민시(鄭民始, 1745~1800)에게 다음과 같이 하교한다.

 

또 하교하기를,

“만년제의 토사를 파내고 물길을 소통시키는 일을 할 때 백성들이 관개(灌漑)의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유의해야 한다.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면 그 아래의 전답이 모두 옥토(沃土)가 될 것이니 어찌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니, 정민시가 아뢰기를,

“근래에 관개가 잘 되지 못한 것은 오로지 하류(下流)가 막힌 데에 연유합니다. 만약 편리한 기계를 이용한다면 공역(工役)을 그다지 많이 들일 필요가 없을 터이지만 오로지 사람의 힘에 의존한다면 또한 일을 마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又敎曰萬年堤疏鑿之功不可不留意灌漑之益大旱不竭其下之田皆成沃土豈不爲民生日用之大利乎民始曰近來灌漑之不通專由下流之壅閼若有器械之便利則工後不必多入如欲專靠人功則亦難卒就矣)-일성록, 정조 22년 무오(1798) 24(무술) '재실에 나아가 여러 각신 및 현륭원 영 서직수ㆍ송후연을 소견하였다.(御齋室召見諸閣臣及園令 徐直修 宋厚淵)'

 

  이를 통해 정조는 만년제를 만드는데 있어 관개를 위한 수리기능이 중시하였다는 것과 많은 인력동원을 통한 무분별한 공역의 남발을 화성축조처럼 기계를 이용해서 덜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화산동지(2006)' 12쪽
안녕리 입구(1952년) 출처 : '화산동지(2006)' 12쪽
맞은편 산이 양산봉 뒷산이 독성산성 세마대지로 그 아래 한신대 입구에 세람교가 있었고 그 표석이 서있었다.

 

  사실 만년제 일대가 태안3지구로 택지개발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아직도 그 여파가 만년제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지금 발굴된 자리 이전에는 만년제가 그 위쪽 현재의 만년제저수지가 만년제로 알려지기까지 했을 정도로 파행에 파행을 거듭했다. 다행히 지금의 만년제 위치의 중외제약사거리 앞에 묻혀있던 만년제표석이 발견되는 한편 현재의 자리가 발굴되면서 만년제의 자리와 이름이 제대로 찾아질 수 있었다

  태안3지구 택지개발로 만년제는 발굴을 끝내고 정비를 어느 정도 했으나 철제 담을 이어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주변 융건릉 등 문화유적과 형평성에 맞춰서 제대로 정비되어 개방되어야 함에도 이처럼 방치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개발이 한창이나 길손이나 운동을 위해 길걷기를 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그러는 것일까 답답하다. 오늘날 사욕에 점철되어 다투는 못난 후손들과 달리 조선시대 만년제의 위상은 정조가 노래(번암집)했고 그를 상징하는 곳이었다.(정조대 영의정을 지낸 이병모가 지은 건릉 정자각 상량문)

 

 

농부 고충 노래한 장편 〈칠월〉 시 / 洋洋七月什
십 세 때 강석에서 음미했기에
 / 十載講筵聲
봇도랑 밭두렁에 우개 멈추고 / 羽蓋依溝壠
찰벼 메벼 이슬에 향로가 젖어 / 爐香濕稻秔
천하 근본 농사가 중대시되고 / 載疆天下本
성인 백성 농부들 벼를 거두니 / 其穫聖人氓
신농씨도 마땅히 감동을 하여 / 田祖應知感
오곡백과 해마다 풍성하리라 / 豐登歲歲呈

 

하교를 받들어 삼가 임금의 시를 첨부하다〔奉敎敬附宸章〕

저수지라 그 이름 만년제 길에 / 萬年堤上路
기나긴 날 어가를 멈추고 보니 / 遲日駐鑾聲
경사로세 금 같은 쌀을 옮기고 / 吉慶輸金粟
풍요롭다 옥 같은 벼를 대하네 / 豐穰對玉秔
빈풍처럼 낮 들밥 지어 내오고 / 豳風來午饁
주려처럼 새 백성 요구 들어줘 / 周旅聽新氓
두 통 술에 노고가 봄처럼 풀려 / 朋酒如春解
덩실덩실 서로들 춤을 추누나 / 爭將舞袖呈

 

-번암집 제1/ ()어정(御定) 갱화록(賡和錄) 삼가 어정범례(御定凡例)에 따라 유고의 각 편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수합하여 이 갱화록을 만들었다. 상(정조)께서 현륭원 친제를 마치고 화성부로 거둥하던 길에 현륭원 동구 밖에 장막을 치고 농부가 벼 베는 것을 구경하다가 해 질 녘에야 출발하였으니, 매우 거룩한 일이다上親祭罷 幸華城府 設幄園所洞口外 觀田夫刈穫 日將暮 始乃進發 甚盛舉也

 

 

어여차, 들보 머리 남쪽으로 저으니, 만년제(萬年堤) 저 물에 성은(聖恩)이 젖어 있네 취화(翠華)126) 는 어찌하여 다시는 오지 않고, 우리 백성들만 즐겁게 먹고 마시게 한단 말입니까?(兒郞偉抛樑南, 萬年堤水聖恩涵翠華何事不重到, 徒使吾民樂哺含)-순조실록 권1 순조즉위년 9월 2일 신사(1800)

 

 

 

소다미술관 입구이다. 
소다미술관을 내려와 600m 정도 거르면 중외제약사거리로 만년제가 위치한다.
중외제약사거리에서 바라 본 만년제 전경

국장 도감(國葬都監)에서 건릉(健陵) 정자각(丁字閣)의 상량문(上樑文)을 올렸는데,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제향(帝鄕)110) 으로 진유(眞遊)가 아득히 멀어지니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어도 올라갈 계단이 없으며, 주구(珠丘)111) 에 서기(瑞氣)가 성하니 하루도 못되어 정자각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지개 형태의 대들보가 길이 공고하게 받히고 있으니 봉력(鳳曆)112) 이 더욱더 창성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 전하(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殿下)께서는 단군(檀君기자(箕子) 이래 요(()처럼 계승해 탄생하였습니다. 영조[英考]께서 효성스럽다고 하시니 매양 할아버지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버지를 의지한다는 옥음(玉音)을 받드셨으며, 천하는 인덕(仁德)에 귀의하는 법이니 직책에 있는 신하들의 도움을 기다릴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민사(民事)에 부지런하며 제사를 경건하게 지내고 군사를 잘 다스리는 등 허다한 성절(盛節)과 같은 것은 태사씨(太史氏)113) 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며,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호위하며 검약을 숭상하고 풍속을 바로잡은 제반 홍규(弘規)는 삼대(三代)114) 이상의 정치처럼 환히 빛났습니다. 공 부자(孔夫子)115) 의 금성 옥진(金聲玉振)116) 이 오늘날 비로소 임금으로서 스승을 겸하셨으며, 주 고정(朱考亭)117) 의 지부 해함(地負海涵)118) 은 다행하게도 사문(斯文)119) 이 하늘이 끝날 때까지 실추됨이 없게 되었습니다. 위대하게도 한()나라 초원(初元) 때의 애조(哀詔)120) 를 내렸으며 크게 노()나라 춘추(春秋)의 강기(綱紀)를 내걸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월(鈇鉞)121) 을 지극히 정미(精微)하게 가하는 뜻을 붙였으니 천지에 내세울 수 있으며, 의리(義理)를 더할 수 없이 엄대(嚴大)하게 하였으니 해와 별처럼 빛날 뿐만이 아닙니다. !상성(上聖)께서 24년 동안 고심(苦心)한 것은 모든 몽매한 사람들이 다 유도(牖導)되기를 바란 것이며 아! 530일의 말명(末命)은 만세(萬世)에 대경(大經)을 확립한 것입니다. 원래 임금의 임무를 한결같이 전일하게 한 것은 오직 정일(精一)하게 하는 그 심법(心法)에 근본한 것입니다. 대개 체용(體用)과 본말(本末)은 정의(精義)를 극진히 미루어 나가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정령(政令)과 시위(施爲)가 강하(江河)를 터놓아 물이 기운차게 흐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훈도(薰陶)하는 은택이 바야흐로 온 나라에 흠뻑 젖게 되었는데 모두가 슬퍼함은 갑자기 하늘에 사무침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보령(寶齡)122) 이 중년(中年)도 못되었는데 저 푸른 하늘은 어찌하여 차마 이런 일을 내린단 말입니까? 지리(至理)는 뒷일에서 증험할 수 있는 것이어서 대성인(大聖人)은 반드시 좋은 자리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이 화성(華城)의 거북점에 합치된 산등성이를 돌아보니 지난 봄 난가(鑾駕)가 머물렀을 때 점쳐 두었던 곳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원침(園寢)과 가까우니 마치 아침 저녁 달빛 아래 노니는 것 같고 산천(山川)을 끌어 당기는 것 같은 체세(體勢)는 하늘이 만들어 냈음을 믿게 합니다. 어로(御路)가 곧바로 소나무·잣나무 사이로 연결되어 있어 정신과 기맥(氣脉)이 서로 관통되고 있으며 유지(遺志)는 오래도록 분유(枌楡)123) 에 부치려 하였으므로 부로(父老)와 부유(婦孺)들이 아직도 이야기로 전하고 있습니다. 위제(衞制)가 방금 신읍(新邑)에서 이루어졌으니 임금 노릇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은 그 충심을 누가 알겠으며, 보정(寶幀)을 행궁(行宮)으로 옮겨 봉안(奉安)하였으니 한가롭게 늙어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혹은 위로하게 되겠습니다. 해원(亥原)의 역사(役事)를 시작함을 당하여 먼저 정자각(丁字閣)을 짓게 되었습니다. 만년토록 전해갈 능자리는 이미 최상의 길지(吉地)를 택정하였으며 사계절 제사를 올림에 있어서는 가장 편안히 모시도록 도모할 것을 중시하였습니다. 강만(崗巒)이 감싸 보호한 형세를 돌아보아 규경(圭景)의 위치를 측정하였으며 고금의 화려하고 검소한 법도를 헤아려 전에 저축한 내탕금(內帑金)을 내려 주었습니다. 재목(材木)을 육지나 바다로 운반하여 오는 번거로움이 없었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며 제도(制度)는 원묘(原廟)의 뜻을 모방했으니 예법이란 진실로 그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이 비밀스럽게 아끼던 아름다운 기지는 진실로 날마다 바라보고 날마다 살피던 효성과 합치하였습니다. 잣나무 기둥, 소나무 서까래 아름다운 장식이 영롱(玲瓏)하게 빛나고 바람에 나부끼는 구름 깃발은 신리(神理)의 기뻐하심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 이장(移葬)하던 해를 생각하여 보니 마치 어제의 일만 같은데 이에 한침(漢寢)의 의식을 만들어 설행(設行)하게 되니 차마 영구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아름다운 송문(頌文)을 지어 긴 대들보를 들어 올리는 것을 돕겠습니다.

 

어여차, 들보 머리 동쪽으로 저으니, 광교봉(光敎峯)이 새벽 햇빛을 머금고 붉게 달아 오르도다. 황도(黃道)124) 가 혁연히 빛나 교화를 수립한 것 같아서 그 용광(容光)이 반드시 만백성을 비추어 환히 깨우치게 하리라. 어여차, 들보 머리 서쪽으로 저으니, 산등성이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마루턱에는 오동나무 낮게 드리워 있어, 기주(箕疇)의 도()125) 를 전하던 땅을 상상하니, 성통(聖統)은 일반이라 함께 대등하리라. 어여차, 들보 머리 남쪽으로 저으니, 만년제(萬年堤) 저 물에 성은(聖恩)이 젖어 있네 취화(翠華)126) 는 어찌하여 다시는 오지 않고, 우리 백성들만 즐겁게 먹고 마시게 한단 말입니까? 어여차, 들보 머리 북쪽으로 저으니, 화산(花山)의 서기(瑞氣)가 길게 뻗혀 있도다. 종남(終南)과 청한(淸漢)이 어디매인가? 삼보(三輔)127) 가 본래 경국(京國)을 옹호하는 법이라오. 어여차, 들보 머리 위로 저으니 태일(太一)128) 이 중앙에 있고 뭇 별들이 둘러싸고 있도다.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에게 베풀어 주는 것은 아! 순일한 덕을 밝혀 하늘의 마음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여차, 들보 머리 아래쪽으로 저으니, 아침 저녁 사관(祠官)이 부지런히 소쇄(掃灑)하네. 때로 산에서 구름 나와 태허(太虛)에 비내리니, 해마다 풍년들어 아름다운 곡식이 들판에 가득하네.’ 삼가 바라건대 상량(上樑)한 뒤에는 신도(神道)가 항상 편안하고 영구(靈邱)가 더욱 공고하여져 묘정(廟庭)에 오르내리시는 영령께서는 오례(五禮)를 갖춘 제사를 흠향하시고 보호하고 도와주시어 백세(百世)토록 창성하게 하여 주시며, 억만년이 되도록 경명(景命)129) 을 맞이하고 높은 강릉(岡陵)처럼 보록(寶籙)130) 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병모(李秉模)가 지었다.(國葬都監, 進健陵丁字閣上樑文

 

伏以帝鄕之眞遊渺邈, 籲天無階, 珠丘之瑞氣鬱蔥, 不日成閣虹樑永鞏, 鳳曆愈昌恭惟, 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殿下, 自檀箕來, 繼堯舜作英考曰孝, 每奉祖依孫, 孫依祖之音, 天下歸仁, 不待臣哉隣隣哉臣之助若敬天勤民毖祀詰戎之許多盛節, 不勝太史氏書, 而闢異衛正崇儉端俗之諸凡弘規, 煥然三代上治孔夫子之金聲玉振, 始今日以君兼師, 朱考亭之地負海涵, 幸斯文極天罔墜大哉! 漢 初元哀詔, 誕揭魯 春秋宏綱寓斧銊於至精至微, 可以建諸天地, 明義理於莫嚴莫大, 不啻炳如日星! 上聖二紀間苦心, 期群蒙之咸牖! 五月三十日末命, 立萬世之大經原夫不貳不參之宸工, 本之惟精惟一之心法蓋其體用本末, 罔非精義之克推, 所以政令施爲, 沛然江河之若決薰?方被於率土, 普痛遽纏於窮天寶齡未及於中身, 彼蒼者胡寧忍此? 至理可徵於後事, 大聖人必得其藏顧玆華城叶龜之岡, 卜自往春駐鑾之日密邇園寢, 怳晨昏於月遊, 控引山川, 信體勢之天作御路直連於松柏, 精神氣脈之相貫通, 遺志久寓於枌楡, 父老婦孺之尙傳說衛制纔成於新邑, 孰認無樂君之衷, 寶幀移奉於行宮, 倘慰未老閒之念當亥原之肇役, 先丁閣之載營萬年兆塋, 已占上吉之地, 四時芬苾, 最重皮虔之圖瞻崗巒拱護之形, 測圭景於位置, 酌古今華儉之度, 捐昔日之帑儲材不煩陸海之輸, 事非偶爾, 制則放原廟之義, 禮固宜然於乎! 神慳鬼秘之佳基, 允叶日瞻月覲之孝思柏楹松桷, 暎珠砂而玲瓏, 風馭雲旗, 想神理之悅豫回思移灤封之歲, 宛若隔晨, 爰設奉漢寢之儀, 忍忘沒世? 恭陳善頌, 助擧修樑兒郞偉抛樑東, 光敎峰含曉旭紅黃道赫然如立敎, 容光必照發群蒙兒郞偉抛樑西, 崗禽噦噦崗梧低想像箕疇傳道地, 一般聖統與之齊兒郞偉抛樑南, 萬年堤水聖恩涵翠華何事不重到, 徒使吾民樂哺含兒郞偉抛樑北, 花山瑞氣長蓊赩終南淸漢阿那邊? 三輔由來拱京國兒郞偉抛樑上, 太一居中環衆象陳錫宗支萬子孫, 於昭一德天心享兒郞偉抛樑下, 曉夜祠官勤掃灑時出山雲雨太虛, 穰穰嘉穀滿原野伏願上樑之後, 神道恒寧, 靈邱彌固, 陟降庭止, 備五禮而居歆, 保佑命之, 綿百世而昌熾, 迓景命於萬時億, 申寶籙而如岡如陵。 【領府事李秉模製。】)-순조실록 권1 순조즉위년 92일 신사(1800)

 

 

 

 

마치 폐건물 위에 컨테이너를 올린 듯 특이한 모습의 소다미술관 전경

 

 

 

 

소다미술관 리플렛

https://museumsoda.org/

 

museum soda – art museum

15,000원 12,000원 8,000원 5,000원 무료

museumsod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