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안산 소릉 옛터 석물, 고잔동 태봉, 시흥 무지내동 태봉

달이선생 2021. 6. 8. 18:50

안산문화원 안산향토사박물관 야외 전시물

안산 소릉 옛터 석물, 고잔동 태봉, 그리고 시흥 무지내동 태봉

 

 

65일 안산을 찾았다.

  안산문화원 안산향토사박물관 야외 전시에는 옛 농가주택과 물레방앗간, 연자방앗간, 전통 그네 등 다양한 전시물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로 생각되는 것이 안산 소릉(昭陵) 옛터(안산시 목내동) 석물과 고잔동 태봉(고잔동 산18번지)과 관련된 유물이다.

  건물 옆 잔디밭에는 돌로 만든 양, 능원묘에 두른 난간 석주, 문인석 한 쌍, 상석 아래 고석 , 그리고 태실의 함개(뚜껑돌) 등이 서있다. 이 중 중요한 유물은 소릉 옛터에서 나온 석양과 난간 석주, 그리고 태봉 옛터 출토로 알려진 태함의 함개이다.

  소릉은 조선 제5대 왕인 문종의 비로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의 초장릉을 말한다. 소릉의 축조 당시 현덕왕후는 아직 문종이 등극 전이기에 세자빈으로 사망하여 처음 묘제는 원(세자나 비의 무덤)으로 조성되었다. 문종이 등극하면서 소릉으로 추봉되었다. 이후 단종 복위 사건으로 현덕왕후가 폐서인되면서 소릉이 폐위되고 개장되었다.

 

현덕빈(顯德嬪)을 옛 안산읍(安山邑) 와리산(瓦里山)에 장사지냈다. 그 지문(誌文)에 이르기를,(중략) 9월 초7일에 시호(諡號)하기를 현덕(顯德)이라 하고, ()를 갖추어 안산군(安山郡)의 고읍(古邑) 산에 장사하였다.(葬顯德 嬪于古安山 瓦里山其誌文曰 중략 以九月初七日, 諡曰顯德以禮葬于安山郡治之古邑山)-세종실록 93, 세종 23921일 갑인 3번째기사 1441

 

의정부(議政府)에서 예조(禮曹)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현덕빈(顯德嬪)463) 을 옛날 시호대로 추숭(追崇)하여 왕후(王后)라 하고, 혼전(魂殿)은 경희전(景禧殿)이라 하고, ()은 소릉(昭陵)이라 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癸卯朔/議政府據禮曹呈啓: "顯德嬪仍舊謚, 追崇爲王后, 魂殿號爲景禧殿, 陵稱昭陵" 從之)-문종실록 2, 문종 즉위년 71일 계묘 1번째기사 1450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현덕 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어미 아지(阿只)와 그 동생 권자신(權自愼)이 모반(謀反)하다가 주살(誅殺)을 당하였는데, 그 아비 권전(權專)이 이미 추후하여 폐()하여서 서인(庶人)으로 만들었으며, 또 노산군(魯山君)이 종사(宗社)에 죄를 지어 이미 군()으로 강봉(降封)하였으나, 그 어미는 아직도 명위(名位)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마땅하지 않으니, 청컨대 추후하여 폐()하여서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개장(改葬)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議政府啓: "顯德王后 權氏母阿只及弟自愼謀反伏誅, 其父專已追廢爲庶人, 且魯山君得罪宗社, 已降封君, 其母不宜尙保名位, 請追廢爲庶人, 改葬" 從之)-세조실록 8, 세조 3626일 무오 2번째기사 1457

 

  이렇게 소릉이 개장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수장된 것이 야외에 전시된 석양과 난간 석주이다. 이밖에도 소릉 옛터에서는 소릉 출토로 알려진 것으로 골동품상을 통해 수습된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석호 한 쌍이 있다. 석양과 석호는 빈으로 죽은 세자빈 권씨의 장지를 원으로 조성할 때 만들어져 원제를 따라 설치된 것이다. 이후 소릉으로 추봉되고 현덕왕후로 격상되면서 시설된 것이 난간 석주이다. 능제로 설치된 유물이라서 화려하다. 이러한 난간 석주와 달리 석양과 석호는 단조로운 표현으로 대비된다. 

 

이화여대 박물관 야외전시된 소릉 출토 석호 

 

임금이 친히 소릉(昭陵)637) 에 제사하고, 서울을 나가 양재역(良才驛) 앞들[前平]에 이르니, 경기 감사(京畿監司) 안숭효(安崇孝)와 도사(都事) 오백창(吳伯昌)이 매[]와 개[]를 바쳤다. 좌상(左廂우상(右廂)의 군사들로 하여금 지나는 여러 산에서 짐승을 몰이하여 과천(果川)에 이르렀는데,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이 노루 한 마리를 쏘아서 바치니, 옷을 내려 주었다.(丁丑/親祭昭陵, 出京至良才驛前平, 京畿監司安崇孝都事吳伯昌進鷹犬令左右廂軍士, 驅所過諸山至果川, 和義君 瓔射獐一口以進, 賜衣)-단종실록 12, 단종 2929일 정축 1번째기사 1454

 

  이렇게 조성된 소릉에는 단종이 1454(단종 2) 929~101일까지 행차하였다. 목내리에 어머니 현덕왕후를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단종의 능행은 이웃한 시흥시에도 그 자취를 남겼다. 단종이 지금의 군자봉을 지나가면서 이 산을 보고 마치 연꽃처럼 생겨 군자의 모습과 같다 하여 군자산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시흥시 군자봉(君子峰, 199m)은 옛 안산지역의 명승이자 현재도 군자지역(1919년 군면통폐합 군자면이 된 지역으로 안산시 원곡동과 시흥시 군자동 등 일부를 포함)의 명산이다. 군자봉의 유래에 대해서는 시흥문화원에서 펴낸 '시흥시 지명유래(2006)'에 전한다. 지금이야 안산과 시흥으로 나뉘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같은 안산이었다.

  현덕왕후의 초장지 소릉은 단종을 낳고 산후로 죽은 권씨와 그 아들 단종이 폐위되고 자기도 폐서인되면서 소릉은 파헤쳐 목내동 바닷가에 쓸쓸한 묘로 남겨지고 화려했던 석물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수장되는 비극으로 끝났다. 뿐만 아니라 단종은 폐위에서 그치지 않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에 위리안치(청령포)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이러한 현덕왕후 모자의 비극이 안산시의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관우물 설화이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 능안에 가면 소릉(昭陵)이 있는데, 이 능은 단종(端宗)[1441~1457]의 어머니이자 문종(文宗)[1414~1452]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덕왕후는 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단종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 능안에 묻혔다. 그런데 세조(世祖)[1417~1468]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 단종을 죽이고 현덕왕후의 소릉마저 폐지시켜 버렸다. 그 이전 세조가 단종을 죽이려 했을 때의 일인데, 하루는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나서 얼굴 가득히 분노의 빛을 띠고는 세조를 꾸짖었다. “너는 참으로 악독하고 표독하구나. 내 아들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도 부족하여 벽지인 영월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 하는구나. 네가 나와 무슨 원한이 그리 심하기에 이처럼 악착스러우냐. 이제 내가 네 자식을 살려 두지 않겠다.” 현덕왕후는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사라져 버렸다. 세조는 반정 이후 밤마다 꿈자리가 좋지 않아 걱정하던 차에 이런 꿈을 꾸고 나니 마음이 섬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동궁의 내시가 급히 들어와 세조에게 말하였다. “동궁마마께서 주무시다가 가위눌림이 되어 매우 위중하옵니다.” 세조는 꿈속의 현덕왕후 말이 생각나 급히 동궁의 처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동궁은 숨이 끊어진 뒤였다. 세조는 이것이 필시 현덕왕후의 보복이라 단정하고 크게 노하여 현덕왕후의 묘인 능안의 소릉에 사람을 보내어 파 보라고 명하였다. 왕의 명을 받은 관리들이 소릉에 도착하였을 때 인근의 백성들이 몰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어젯밤에 능에서 여자의 곡소리가 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관리들은 꺼림칙하게 여겼으나 임금의 엄명이라 할 수 없이 능을 파기 시작했다. 드디어 삽과 괭이가 관에 닿았다. 그런데 고약한 냄새만 날 뿐 단단하고 육중한 관은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이지 않았다. 관리들은 어찌할 수 없이 이러한 사실을 임금인 세조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화가 치밀어 도끼로 관을 쪼개 버리라고 엄명을 내렸다. 관리들이 명령대로 관을 쪼개려고 도끼를 들어 올리자 관이 저절로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왔다.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진 관리들이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관을 불살라 버리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또 그렇게 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난데없이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내려 불을 지필 수가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세조는 관을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관을 바다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런데 현덕왕후의 관은 그곳을 떠나기가 싫었던지 다시 소릉 옆에 있던 바닷가까지 떠밀려 와 닿았다. 지금은 그곳이 육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바닷물이 마을 남쪽 어귀로부터 우물터까지 들어왔었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관이 바닷가에 떠밀려 와 있었지만 세조가 왕으로 있던 때라 감히 어느 누구도 건져 내 묻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관은 썰물에 밀려가지도 가라앉지도 않고 빈 배처럼 둥실둥실 떠돌다가 며칠 후에야 약간 떠내려가 양화나루에 닿았다고 한다. 양화나루에 관이 닿자 마침 그곳에 사는 순박한 농부가 이를 보고는, 현덕왕후의 관을 방치한 무지한 행위를 개탄하면서 밤중에 몰래 관을 옮겨 강기슭 양지바른 언덕 위에 묻어 주었다. 그러자 농부의 꿈속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잘 묻어 주어 고맙다고 말하면서 농부의 길흉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 후 농부는 가세가 번창하여 잘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중종조에 이르러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조정에 소릉의 복위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현덕왕후 관의 종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일과 관계된 관원의 꿈에 현덕왕후가 현몽하기를, “너희들 수고가 많구나.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내일은 나의 관이 있는 곳을 알게 되리라” 하는 것이었다. 관원이 현덕왕후의 말을 듣고 황공해 하는데 깨어 보니 꿈이었다. 한편, 관을 묻어 준 농부의 후손들은 관원들이 현덕왕후의 관을 찾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주저하고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현덕왕후가 후손의 꿈에 나타나 “관원에게 관이 묻힌 곳을 알려 주라”고 현몽하였다. 그래서 농부의 후손은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려 후한 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어 보니 관의 칠 냄새가 향기로웠고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현덕왕후의 관은 궁중 의식에 따라 문종의 능이 있는 동구릉으로 성대하게 이장하였다. 문종의 능과 현덕왕후의 능은 큰 수풀로 가로막혀 있었는데, 현덕왕후의 능을 모신 뒤부터는 수풀이 말라 죽어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관이 바다에 버려진 후에 처음 닿은 바닷가는 뒤에 육지가 되어 우물이 생겼는데, 사람들은 관이 닿았던 자리라 해서 그곳을 ‘관우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 백 년 전에는 어떤 사람이 향나무를 심어 얼마 전까지 고목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관우물도 고목도 모두 사라지고, 1997년에 안산문화원의 주선으로 주식회사 일진에서 세운 표석(標石)만이 외롭게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러한 소릉의 비극을 예견한 이가 있었다. 바로 세종 때 전농시의 노비 목효지(睦孝智)이다. 세자빈 권씨가 죽자 빈궁의 능소로 안산 고읍이던 목내리가 결정되자 목효지는 세종 23(1441) 825"빈궁의 능소인 안산 고읍의 땅이 흉지(안산 고읍 흉지설)"라고 상소하였다. 소릉 옛터에 대한 풍수사 목효지의 해석은 이러했다.

 

"이제 빈궁(嬪宮)의 능소(陵所)인 안산(安山) 고읍(古邑) 땅을 보니, 그 산()의 내룡(來龍)이 얕고 약하며, []로 끊어진 곳이 많아서 10여 군데나 되옵니다. 동림조담(洞林照膽)에 이르기를, ‘내룡이 악()하고 약()하면 낳은 아이[]가 녹아버린다.’ 하였고, 곤감가(坤鑑歌)에 이르기를, ‘끊어진 산에 가로 파[橫槧]였으면 기()가 연()하기 어렵다.’ 하였고, 지리신서(地理新書)에 이르기를, ‘도로(道路)가 가로 파인 것은 기맥(氣脈)을 끊어지게 하는 것이라.’ 하였고, 신서(新書)에 이전(李筌)이 이르기를, ‘장성(長城)을 쌓느라고 산()을 끊어서 진()나라가 망하였고, (()105) 을 뚫느라고 지맥(地脈)을 끊어서 수()나라가 망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 크고 작은 것은 비록 다르나, 이치인즉 하나이옵니다. 또 건해산(乾亥山)이 변하여 계좌정향(癸坐丁向)이 되었고, 사지(巳地)에 수파(水破)되고 계산(癸山)이 토()에 속하여, 이미 태()가 끊어졌사오니 진실로 가소(可笑)롭습니다. 비록 흙을 모아서 그 장생(長生)이라는 말은 면하겠사오나, 반드시 그 불소(不小)한 해()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산은 건해방(乾亥方)이 주장이 되었고, 사방(巳方)이 수파(水破)되었사온데, 견해방은 금()에 속하여 사방(巳方)에 나오니, 이것이 장생(長生)이라는 것이옵니다. 의룡경(疑龍經)에 이르기를, ‘생왕방(生旺方)을 유파(流破)하면 모두 절멸(絶滅)한다.’ 하였고, 호수경(狐首經)에 이르기를, ‘주산(主山)이 감방(坎方)에 있다가 계축(癸丑)으로 전보(轉步)해서 머리를 숙여 간방(艮方)이 되었고, 수행(水行)은 더욱 앞으로 나오고 산행(山行)은 더욱 뒤져서, 먼저 목기(木氣)를 받고 다음에 토기(土氣)를 받아, 그제야 수기(水氣)를 받으면, 3년에 1(), 10년에 일세(一世).’ 하였고, 동림조담에 이르기를, ‘건산(乾山)의 온 것이 짧아서 산절(山節)로 오는 것이 해().’ 하였사온데, 이제 속사(俗師)들이 건방(乾方)에 앉은 산이 짧은 것을 본 것으로 곧 해산(亥山)이 주장이 되었다 하옵고, 다시 건산(乾山)을 가져서 물을 꺾[折水]지 아니하오니, 이것이 한 가지 병이옵니다. 호수경에 이르기를, ‘의당 나아가야 할 것이 들어오면 괴려(乖戾)의 모임이요, 의당 들어올 것이 나아가면 상파(傷破)의 실상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의 나가는 것이 보이면 이름하기를, 단기(短氣).’ 하였삽고, 또 혈()이 천관(天關)에 있사온데, 지리문정(地理門庭)에 이르기를, ‘천관혈(天關穴)은 범()하지 못할 것이니, 범하면 사내[]을 죽이고 어른[]을 죽인다.’ 하였고, 이순풍(李淳風)의 소권(小卷) 천관혈주(天關穴注)에 이르기를, ‘천관(天關)이라는 것은 물의 근원이라.’ 하였사오며, 또 청룡(靑龍)이 물[]을 띄고서 곧게 달아났사온데, 청룡(靑龍)이라는 것은 남자의 위치[男位]입니다. 문정(門庭)에 이르기를, ‘좌산(左山좌수(左水)가 곧은 것은 어른을 죽인다.’ 하였고, 낙도가(樂道歌)에 이르기를, ‘동궁(東宮)이 달려가서 서궁(西宮)을 지나[竄過], 장자(長子장손(長孫)이 일찍 죽는다. ’고 하였사옵니다. 또 고현(古縣)은 산가(山家)106) 가 역시 꺼리는 것이옵니다. 동림조담에 이르기를, ‘장터[市墟]나 고현(古縣)은 부녀(婦女)가 미천(微賤)하다.’ 하였사온데, 그 길흉(吉凶)의 감응(感應)은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 같사오니, 장서(葬書)의 이른바, ‘산이 무너지고 종()이 울며, 나무꽃[木華]이 조싹[粟芽]과 같다. ’는 것입니다. 명산론(明山論)에 이르기를, ‘주장하는 바의 길흉(吉凶)이 응()하기를 영향(影響)과 같다.’ 하였고, 장서(葬書)에 이르기를, ‘()와 복()이 해[]를 돌이키지 않는 것으로, 군자(君子)는 신공(神工)을 빼앗아 천명(天命)을 고치나니, 장서(葬書)의 법칙은 골짜기에서 부르는 것 같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서 보옵건대, 바로 그것이 흉악한 땅이옵니다.(今觀嬪宮陵所安山古邑之地, 其山來龍低弱, 路斷之處, 多至十餘。 《洞林照膽: "來龍惡弱, 生兒銷鑠" 坤鑑歌: "斷山橫塹氣難連" 地理新書: "道路橫塹, 令氣脈絶也" 新書李筌云: "築長城斷山岡而秦亡, 開淇汴斷地脈而隋亡" 其大小雖殊, 理則一也且乾亥山, 變爲癸坐丁向, 水破巳地, 癸山屬土, 巳爲胎絶, 誠可笑也雖作土而免其長生之言, 必發其不小之害也此山以乾亥作主, 水破巳地, 乾亥屬金, 生於巳, 是爲長生。 《疑龍經: "流破生旺皆絶滅" 狐首經: "主山在坎, 轉步癸丑, 垂頭爲艮水行益前, 山行益後先受木氣, 次受土氣, 方受水氣三年一步, 十年一世" 洞林照膽: "乾山來短, 來山節是亥" 今俗師爲所見, 坐乾山短, 便以亥山爲主, 更不將乾山折水, 此一病也。 《狐首經: "宜出而入, 乖戾之集; 宜入而出, 傷破之實" 又云: "見水所出, 名曰短氣又穴在天關" 地理門庭: "天關穴, 不可犯犯之則殺男殺長" 李淳風 小卷天關穴注云: "天關者, 水之源也又靑龍帶水而直走靑龍者, 男之位也" 門庭: "左山左水直者, 殺長" 樂道歌: "東宮走竄過西宮, 長子長孫須夭壽" 又古縣, 山家之亦忌也。 《洞林照膽: "市墟古縣, 婦女微賤" 其吉凶感應, 如影隨形, 葬書所謂山崩鍾鳴木華栗芽也。 《明山論: "所主吉凶, 應如影響" 葬書: "禍福不旋日君子奪神工改天命葬書之法, 若呼谷中" 以此觀之, 正是凶惡之地)"-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1441) 8월 25일 기축

 

  소릉 옛터는 풍수상 흉지라서 '내룡이 악하고 약하면 낳은 아이가 녹아버린다'라는 것이 주된 이유로 세자빈 권씨의 소생 단종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다. 이러한 목효지의 충심은 세종을 움직여 신개, 정인지 등 중신으로 하여금 다시 능소에 대한 풍수를 살피도록 하였으나 끝끝내 목효지의 뜻은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모르나 그의 예언대로 권씨의 소생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좌에서 쫓겨나 강원도 영월에서 절명하였다.

  한편, 나이 어린 목효지를 갸륵하게 여긴 세종은 그의 뜻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828일 면천을 시켜주고 풍수학에 매진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이러한 세종의 은전에 더해 이후 목효지는 충심으로 왕실 풍수에 대하여 간하였다. 특히 세종이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경복궁에 문소전을 지으려 하자 문소전이 풍수상 지맥을 끊어 왕통에 문제가 생긴다고 여러 차례 반대상소를 한다. 이에 세종은 성리학을 하면서도 말년에 이르러 불교에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조정의 신하는 물론 조야의 반대에 부딛쳐 심기가 불편했는데, 예전 은전을 베풀었던 천인조차 자신의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목효지를 다시 전농시 노비로 만들었다. 당시 세종이 얼마나 화가 났던지 실록에는 "천인도 신(臣)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라고 할 정도로 이야기를 했는데 세종의 하문에 승지들도 귀천의 제한 없이 신을 칭할 수 있으나 목효지는 "모사(某司)의 종 아무라고 칭하였어야"한다고 아룄을 정도로 세종의 기분을 살폈다.  

  이후에도 목효지는 세종과 그의 적통이 대대로 길복을 받아 이어지도록 왕실 풍수에 대해서 충심으로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문종의 능지에 대해서도 흉지를 버리고 길지를 택할 것을 편지로 아뢰지만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수양대군이 단종을 대신하여 이 문제를 처리하면서 목효지가 천인으로 된 데 앙심을 품고 일을 방해한다고 힐날하면서 안성참의 노비로 떨어 뜨린다. 사실 수양대군의 이러한 조치는 다분히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 다만 목효지의 지적대로 문소전은 기맥을 눌러 세종 이후 문종, 단종의 적통이 단절되게 되는 비운이 맞게 되었고 문종의 장지 역시 흉지를 택하게 되면서 목효지의 말처럼 왕권이 약하되어 단종을 끝으로 세종의 왕통이 적장자가 끊어지는 불행을 맞이하였다.

  성군 세종의 은전으로 충심을 다한 목효지는 새 왕통을 열려는 수양대군에게는 눈엣가시가 되었고 위협으로 여겨졌다. 결국 세조가 왕이 되고 1445(세조 1) 119일 의금부로 하여금 목효지를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을 내린다. 목효지의 영감을 받은 영화 '관상(2013)'은 풍수가가 아닌 관상가 김내경을 가상 인물로 내세워 아들이 죽는 등 풍파를 다 겪고 천수를 누린 것으로 나오나 목효지는 세종 이후 문종, 단종에 충성하여 세조의 미움과 두려움으로 인해 절명하였다.(장릉 즉 단종이 죽을 때 연좌되어 죽은 사람 190인 중 전농시 노비 목효지가 포함되었다.-정조실록 권32, 정조 15(1791) 2월 병인)

  위대한 풍수가였지만 어쩌면 그의 말대로 되지 않았다면 그도 그가 섬긴 세종과 문종, 단종도 큰 변이 없었을테지만 역사에는 가정은 없다.

 

 

참고자료

김이순, 현덕왕후의 소릉 석물, 2016[홍익대])

안산시사(2012)

디지털안산문화대전디지털안산문화대전 (grandculture.net)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한 고잔동이지만 여기에는 태봉이 조성된 태봉산이 있었다. 그 사실을 말해주는 유물이 바로 고잔동 태봉지 출토 태함(태항아리를 담은 돌함)의 함개(뚜껑)이다. 설명을 보니 고려 문종의 태실이라고 하고 있다. 사실 고려시대 유물이나 유적이 흔하지 않고 접하기 힘든데 여기 안산에 문종이 태어났기에 그이 태실이 전한다고 하니 너무 반가웠다.

  문종은 조선의 문종과 같은 묘호를 쓰는 왕으로 고려 현종의 아들이다. 현종은 고려시대 큰 외침 중 하나인 거란(요)의 침입을 막아내고 고려시대 황금기를 연 왕이다. 당시 나라를 구한 영웅이 바로 서울 낙성대에서 태어난 강감찬 장군이다. 조선에 이순신 장군이 있다면 고려에는 강감찬 장군을 꼽는다. 낙성대는 큰 별이 떨어진 곳, 즉 강감찬 장군이 때어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지명인데,  보통 서울 외 사람들은 서울지하철 2호선에 위치하여 낙성대를 대학으로 안다는 우스겟소리도 있다. 조선시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부인 세자빈 강씨가 바로 강감찬 장군의 후손이다.

  문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할 때 공주절도사 김은부에게 의탁하여 위기를 면했는데 그 인연이 되어 김은부의 두 딸은 현종의 비가 되고 그 중 맏딸 원혜태후 김씨가 낳은 아들이 바로 문종이다. 문종의 외가가 안산이라고 한 이유는 김은부가 신라 경주김씨 경순왕의 후손이나 경순왕을 포함한 일족이 경주를 떠나 개경에 정착하고 그 중 김은부 가계가 안산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바로 안산김씨이다.(문벌귀족 인주이씨와 인척형성)  안산김씨의 자취는 수리산자락 취암(수암봉) 아래 안산동 현재 안산읍성과 관아지(객사복원)에 그의 후손 김정경이 심었다는 수령 6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있다. 김정경은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이 되고 연성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처럼 이들 집안으로 인해 안산은 작은 군현에 지나지 않았지만 문종의 외가로 존숭되고 번성하였다.  

  태봉(胎峯)은 태실(胎室)이라고도 하며 태반을 묻는 장소 혹은 태를 봉안(奉安)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여러 지역에 태봉이라는 지명을 찾아 볼 수 있다. 태봉은 본래 왕족의 태반을 묻은 석실(石室)인데, 왕실의 자손이 태어나면 일정한 의식과 절차에 따라 태를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여 관련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안태문화는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으로 길지(전국의 명당자리)를 택하여 태를 묻어 수복을 기원한 것으로 풍수사상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음양학(陰陽學)을 하는 정앙(鄭秧)이 글을 올리기를,
"당(唐)나라 일행(一行)121) 이 저술(著述)한 《육안태(六安胎)》의 법에 말하기를, ‘사람이 나는 시초에는 태(胎)로 인하여 자라게 되는 것이며, 더욱이 그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이 모두 태(胎)에 관계 있다. 이런 까닭으로, 남자는 15세에 태를 간수하게 되나니, 이는 학문에 뜻을 두고 혼가(婚嫁)할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앙(欽仰)을 받게 되는데, 다만 태를 간수함에는 묻는 데 도수(度數)를 지나치지 않아야만 좋은 상서(祥瑞)를 얻게 된다. 그 좋은 땅이란 것은 땅이 반듯하고 웃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 하여야만 길지(吉地)가 된다. ’고 하였으며, 또 왕악(王岳)122) 의 책을 보건대, ‘만 3개월을 기다려 높고 고요한 곳을 가려서 태를 묻으면 수명이 길고 지혜가 있다.’ 하였으니, 사왕(嗣王)의 태는 그가 왕위에 오름을 기다려 이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옛날 사람의 안태(安胎)하는 법에 어긋남이 있으니, 원컨대, 일행(一行)과 왕악(王岳)의 태를 간수하는 법에 의거하여 길지(吉地)를 가려서 이를 잘 묻어 미리 수(壽)와 복을 기르게 하소서."
하였다. 풍수학(風水學)에 내리어 이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상서(上書)한 것이 적당하다고 하므로, 명하여 내년 가을에 다시 아뢰라고 하였다.(辛未/陰陽學鄭秧上書曰 唐 一行所撰《六安胎》之法, 有曰: "人生之始, 因胎而長, 況其賢愚盛衰, 皆在於胎者乎! 是故男子十五年而藏胎, 皆待其志學遵嫁之年也。 男値好地, 聰明好學, 官高無疾; 女値好地, 嬋姸端正, 得人欽仰。 惟藏不過度, 乃獲徵祥。 其好地, 皆端正突起, 上接雲霄爲吉地。" 又觀王岳之書: "待滿三月, 選高靜處埋之, 可以長壽有智。" 以此觀之, 嗣王之胎, 俟其卽位而安之, 有戾於古人安胎之法。 乞依一行、王岳藏胎之法, 擇吉地以安之, 預養壽福。下風水學議之, 皆以上書爲當, 命來秋更啓。)
-세종실록 74권, 세종 18년 8월 8일 신미(1436년) 

 

 

따라서 태봉의 입지조건은 주산으로부터 생기 있게 뻗어 내린 혈을 포근히 감싸고, 물이 혈 앞을 감싸고 도는 형국이라야 되었다. 생명존중 사상이 담긴 조선왕실의 탄생문화는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 등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 고유의 문화로서 조선왕릉과 더불어 세계유산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을 갖췄으나 왕릉과 달리 일제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많이 파괴되어 안타깝다. 

 

출처 : 과림동사(2014) 85쪽

 

  고잔동 태봉 옛터를 알려주는 유물인 태함의 함개는 있지만 길지 태봉을 실제로 볼 수는 없다. 이곳은 이미 1979년 안산시 도시개발로 주공8단지가 들어서며 평탄화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처럼 고잔동 태봉의 주인에 대한 지역에서 가장 유력하게 이야기 되는 것은 주민들의 구전에 의한 고려시대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이라는 점을 토대로한 역사적 규명이다. 이를통해 역사적으로 고려 문종의 외가라서 문종의 태를 묻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태주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물인 태실비가 1940년까지는 있었지만 마을 부녀자의 바람기를 잠재우기 위해 비의 윗부분을 산 아래로 굴려 논바닥에 묻혔고, 이 자리마저 이미 개발이 되어서 쉬이 찾긴 어렵게 되면서 누구의 태실인지 규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구비문학 편에 또 다른 단서로 공주의 태라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어 현재 설명판처럼 문종의 태함으로만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태실 연구를 토대로 고잔동 태봉을 규명하면 먼저 함개의 특징인 4개의 돌기가 표현된 것이다. 고고학적 유물 편년으로는 고잔동 함개의 특징인 4개의 돌기와 둥근 형태의 모습은 대구의 광해군 함개 등과 비슷한 특징이다. 따라서 이들 유물과 같다면 고잔동 태봉도 16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진다. 조선시대 함개의 특성은 초기 상자형에서 15세기 후반에는 반원형으로 변하고 함신과 함께 원통형의 특징이 있다. 이후 고잔동 태봉의  함개처럼 돌기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쓰임은 예술성보다는 기능성을 우선한 것이다. 돌기는 덮개와 몸체를 견고히 묶고자 한 것이다. 때문에 고잔동 태봉은 조선시대 선조대를 전후하여 조성된 왕녀의 태봉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광해군 태실 발굴 모습. 함개가 드러난 모습

출처 : 안산시사 문화유산(2012) 375

 

  고잔동 태봉과 비교하여 가까이서 찾아볼 수 있는 태봉이 있다. 바로 시흥시 무지내동 군부대 안쪽에는 고잔동 태봉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길지 위에 태봉이 있다. 일명 '무지내동 태봉'으로 봉재산 산줄기가 내려와 오뚝하게 봉우리를 만든 길지 위의 태봉으로 시흥시 향토유적이다. 물론 군부대 안쪽이라서 쉬이 볼 수 없다는게 문제다. 그렇지만 군부대 협조로 들어가면 군용지하 유류저장고 사이를 지나 산이 감싸고 도는 형국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잘 보이는데 누가 봐도 명당임을 알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찾아보기를 추천한다.

 

 

시흥의 문화유산-무지내동 태봉
시흥시 향토유적 6호
1988년 주민제보로 알려진 태실이다. 현재 과림동 황현교회 옆 군부대 영내에 위치하여 일반인이 쉬이 접근할 수 없다. 근처에는 사묘 안장사의 주인공인 구종직의 신도비와 묘가 있다.
1797년 8월 정조가 김포 장릉을 들렸다 이 앞을 지나며 치제를 명한 명신이다.
무지내는 앞 개천인 목감천을 이르는 명칭으로 보이며 따라서 법정동명을 무지내동이라 했다. 인근에는 115년 전통의 감리교 무지내교회(아펜젤러 고사)가 위치한다.
무지내동 태봉은 조선시대 태아의 태를 태항아리에 담아 명산 좋은 봉에 태실과 태함을 마련해 안장한 시설이다. 보통 왕실의 아기씨들이 주인공이며 일반 사가에서도 모시기도 한다. 정확한 조사는 해야하나 이곳 태봉을 왕실이 아닌 반가의 것으로 보기도 하나 태봉의 풍수적 수려함과 바위에 사각의 태실을 조성하고 커다란 둥근 함두껑의 모양과 크기로 보아서는 왕실의 것으로 보인다. 태봉의 경관은 좌청룡 우백호의 산이 둘러치고 그 중앙 혈자리에 기둥처럼 봉우리가 솟고 그 앞을 내가 흐르는 전형적인 승지이다.
-과림동사 집필진 현지답사 중(2013. 5.) 남긴 페이스북 기록(2013.12.31.)

  무지내동 태봉은 고잔동 함개와 차이가 있다 현재까지 드러난 태함의 구조는 전문가들의 판단에 의하면 조선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왕실 태실(조성과 기법)과는 차이가 있어 사대부의 태실로 추정한다.

 

"의지(懿旨, 대비의 전교) 에 이르기를, ‘일반 사람은 반드시 모두들 가산(家山)에다가 태()를 묻는데, 근래에는 나라에서 땅을 가리는 것이 비록 정결(精潔)하기는 하나, 대길(大吉)한 응험(應驗)이 없으니, 풍수(風水)의 설()은 허탄(虛誕)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안태(安胎)만한 땅을 경기(京畿)에서 고르도록 하라."하였다.(懿旨云: ‘凡人必皆藏胎于家山比來國家擇地雖精, 無大吉應, 風水之說, 可謂虛誕其令擇于京畿)-성종실록 73, 성종 71128일 무진 2번째기사 1476

 

  성종의 전교를 통해 왕실만이 아닌 사가 즉 양반사대부가에서도 태실이 조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지내동 태봉은 양반가의 태실로 보고 있다. 재밌게도 이곳 태봉은 평해구씨 종중 선산이다. 안장공 구종직 선생의 묘소(사당 안장사)와 후손 묘들이 산재해 있다. 정확히 이 집안과 연결된 태실로 볼 수 있을지는 향후 발굴조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현재 태실 자체도 이미 도굴에 의해 태항아리 등이 없어지고 태함 역시 손상되었다. 그래도 정확한 발굴조사와 태실비 등을 찾는 노력은 필요하다. 

 

출처 : 과림동사(2014) 88쪽

 

  고잔동 함개나 무지내동 태함 모두 태주를 모른다는 어려움이 있다. 보통 왕실 태는 태주를 알리는 태실비를 세우고 태봉은 태주의 격(원자 300540m )에 따라 금표를 세워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태실수호군을 두어 관리하였다. 고잔동 태봉과 시기가 비슷한 가까운 거리의 태봉지와 태실비가 있다. 화성시 동탄호수공원 내 태봉산 아래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 태실비다. 정숙옹주 태실비는 접근성이 좋아 두루 알려진 유물이다. 비석의 글자도 잘 남아 확인이 된다. 다만 태봉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왕자가 왕으로 즉위하여 가봉(승탑처럼 만듦)하는 태봉 외에는 무덤 봉분과 같아 시간이 오래지면 없어지기가 쉽다. 

 

왕녀아지씨태실(王女阿只氏胎室)

황명만력 16년 7월 11일 을시립(皇明萬歷 十六年 七月 十一日 乙時立)

 

출처 : 정숙옹주 태실비 화성시청 김윤섭, 2019,

http://photo.hscity.net/mobile/photo/detail?photo_id=P000151844

 

 

  왕릉과 달리 수난의 역사가 오늘까지 이어지는 태봉은 능원과 달리 보호의 경계를 벗어났다. 일찍이 조선이 망하고 어쩌면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왕실을 격하하려고 노력한 일제의 야욕과 그러한 왕실 소유의 태봉은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수탈한 수많은 왕실 재산 중 하나였다. 때문에 능원과 달리 태봉은 빠르게 훼손되고 철거되어 오늘에 이른다.

 

 

참고자료

안산시사(2012)

과림동사(2014)

디지털안산문화대전http://ansan.grandculture.net/ansan

디지털시흥문화대전http://siheung.grandculture.net/siheung

 

 

  내 고향 화성, 이웃한 곳에 훌륭한 어른으로 이익 선생에 대한 패널 전시가 있어서 둘러보았다. 그중 가장 눈여겨 본 것이 박물관 입구에 벽면 부조로 된 해거방축 시와 노비의 처우를 가엽게 쓴 인사문, 그리고 안산에서 큰 인물로 마음 속 추앙한 동산공 윤지완에 얽힌 시이다. 윤지완은 성혼의 제자 윤민헌의 손자로 경종 세자청정을 두고 숙종과 독대를 한 이이명에게 ‘대신은 국왕의 사신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당대 전재왕권을 휘두른 숙종을 아랑곳하지 않고 선비의 기개를 보인 대신이다. 종묘 숙종묘에 배향된 공신이다.

 

해거방축과 성호사설

도랑 내고 밭 옮겨서 방조제를 쌓으면

소금기 줄어들어 벼가 자라 풍성하리,

새로 취락 조성하여 주거를 정돈하고,

농기구를 활용하면 잡초 걱정 없으리

그 누가 이 산천에 남김없이 이익 주어

풀 무성한 저 평원 버리지 않게 할까

푸른 바다 뽕밭으로 쉬 바꿀 수 있나니

백성에게 좋은 계책 말해 주려 하노라

穿渠移圃築防潮

鹹減禾生盡沃饒

聚落仍成居井井

鋤耰何患莠驕驕

誰敎山澤無遺利

可見平蕪免浪拋

碧海桑田容易變

良謀輸與訪芻蕘)

-성호전집(星湖全集)4, () 화포잡영(花浦雜詠) 17()

 

達理선생.. (daum.net)

 

이익 선생묘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가 임금이 학문에 힘쓰는 데 대하여 진술하고 나서 아뢰기를, "고(故) 부제학(副提學) 이준(李埈)은 신의 선조인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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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daum.net/ilovepk/266

 

안산문화원 안산향토사박물관

안산문화원 안산향토사박물관 안산에는 다양한 박물관이 있다. 안산의 주요 인물을 기념하는 성호기념관(실학자 이익), 최용신기념관(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가-상록수)과 안산의 어촌문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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