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마을은 화성시 매송면 어천1리로 면소재지이다. 최근 개통된 수인분당선 어천역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좋다. 마을에 들어서서 주민센터에 이르면 장승이 맞이하고 그 맞은편으로 계곡에 안기듯 마을이 자리한다. 마을은 2013년부터 이광재 이장과 주민들이 합심하여 마을가꾸기 사업으로 여러 공모사업을 진행하면서 이제는 '다정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정마을은 '정이 많고 우물이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로 들어가려면 마을에서 가장 큰우물로 '가운데 우물'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길손을 맞는다. 우물고사와 당제를 지내는 마을에 중요한 곳이었으나 점차 쓰임이 없어 쇠락하던 곳을 공모사업을 통해서 우물을 정비하고 마을의 대표적인 공간과 상징을 바꾸었다. 우물 곁에 이장님 소유의 개방형 텃밭까지 하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찾아오는 길손이나 뜸해지고 그러다보니 관리에도 어려움이 있지만 화성시에서 운영하는 시티투어인 '착한여행 하루'의 대표적인 여행지로 소개되어 있다. 마을의 이모저모를 소개한 리플릿도 만들어 놓고 있을 정도로 이 근방에서는 마을가꾸기 사업의 대표적인 마을이자 여행지로 손꼽힌다. 신청하시면 이장님의 친절한 설명으로 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 아울러 이장님과 목공체험도 할 수 있고 마을 공방인 '아토 도예공방'에서 도예체험과 적정기술로 만든 화덕에서 피자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다. 마을 부녀회장이자 아토공방의 박미원 도예가는 외지에서 마을로 이주하여 화성시 서부권 최초이자 유일한 이주민 출신의 부녀회장으로 토박이 정서가 강한 곳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이 마을에는 조선 숙종대 정려된 효자 정추 선생의 효자문이 어천사에서 볼 수 있다. 최근에 초계정씨 천호장공파 종친회에서 세운 '어천사'라는 사당 정면에 걸려있는데 문중사당이 공적인 곳이 아니므로 항상 개방된 곳이 아니라서 담장 밖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사당 옆으로는 정추 선생과 아버지 정원익의 묘가 위치한다.
정추(鄭推, 1650~1705) 선생은 본관은 초계, 자는 서경(恕卿)으로 숙종 대 효자이다. 숙종 6년(1680) 문과에 급제하고 평택군수, 진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선정과 덕을 베풀어 황해도 관찰사로 특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러한 정추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에는
홍주 목사(洪州牧使) 정추(鄭推)는 자못 명성과 치적이 있습니다(洪州牧使鄭推, 頗有聲績)
숙종실록 권35 숙종27년(1701) 임오 사헌부 전계
라고 나온다. 정추 선생의 효행은 평택군수로 부임한 숙종14년에 아버지 정원익의 병환에 따라 병간호를 하면서이다. 시탕을 하면서 약이 잘 듣지 않아 잉어가 좋다는 말에 겨울 한강에 나가 잉어를 어렵게 구한 일이나 급하게 약을 지어 가다 호랑이를 만나 고초를 겪은 일 등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나 아버지가 1년만에 돌아가니 지금의 오산시 초평동에 안장하고 3년 상을 치룬 효자였다. 이러한 효행의 상징 정추 효자문은 인근의 봉담읍 상리 이곤 선생 효자문, 분천리 최루백 효자비각, 안녕동 융건릉으로 이어지는 효행답사를 잡아도 좋다.
우물이 많은 다정마을에는 오래된 나무도 많다. 어천사 바로 옆에 500년 세월을 이기고 자리한 느티나무는 작년 태풍에 넘어진 것을 주민들이 합심하여 다시 세운 것으로 다행히 올 봄에 싹이 돋아 그 생명력을 잇고 있다. 마을 터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걱정하는 가운데 나무를 세우면서 옆에 후계목을 같이 심어 보존하고 있다. 같은 태풍에 쓰러져 다시 세운 향나무는 아쉽게도 고사하였다. 원평에서 고개 넘어 마을 입구의 오래된 향나무도 바람에 쓰러져 다시 세우려고 하는데 이 마을 최고령 할머니께서 마을 남정네들 바람을 잠재워주는 건데 이제는 필요 없으니 그냥 놔둬도 된다고 하셨는데 할머니 연세에 그 아래들은 다 애들로 생각되니 이제는 쓸모가 없다는 말씀으로 웃음이 난다는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이처럼 마을 곳곳에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한 소중한 마을의 이야기가 자리한다.
이밖에 다정마을 인근에는 화성시의 선비문화를 엿볼 수 있는 여러 문화재가 위치한다. 남인이자 퇴계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수원현감을 지내고 의병을 조직해 맞아 싸우다 순직한 추연 우성전의 묘와 그의 후손으로 정조 대 경세치용 입장에서 국정개혁안(천일록)을 상소한 우하영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수원의 명문 수성최씨 시조 최영규의 묘가 그 옆 구릉에 위치한다. 다정마을과 이웃한 야목리에는 들목조씨로 불린 풍양조씨 세거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대동법을 시행한 조익 선생과 조복양, 조지겸, 정조 대 초계문신 조만원 선생이 나고 자란 마을이다. 지금은 헐어져 기둥 초석만 전하지만 조익 선생과 아들 조복양, 손자 조지겸의 위패를 모신 명고서원지가 있다. 그리고 송시열 선생의 위패를 모신 매곡서원지 등 조선 후기 화성시 선비문화의 본 고장이다. 명고서원과 매곡서원은 1795년 정조가 혜경궁을 모시고 온 행행에서 사신을 보내 제사(2.4)를 지내게 하였고 이후 순조가 아버지 정조의 건릉과 현륭원을 찾은 1804년 8월 28일, 1810년 8월 27일 2차례 능행에서 사신을 보내 제사(9.1, 8.28)를 하였다.
어천사
본 사당은 초계정씨 시조이시 광유후(고려조)
휘배걸 익홍문공 정삼품중추부사이시며 18대손이신
정삼품가선대부 상호군 휘지남공은 (이조)
420여년전부터 수원고등촌에 터전을 잡았고
공의 셋째 손자의 차자이신 정삼품 통 대부(이조)
휘추공은 승정원도승지 청주목사에
이르럿고 황해관찰사로 제수받았으나 선모를 봉양
키 위한 효심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후손들은
300여년전부터 어천에 터전을 잡아 오늘에 이르
럿고 공의 아우 이신 정삼품통훈대부(이조)
휘담공은 흥해군수를 시작으로 삼고
을의 수령을 지냈고 300여년전부터 후손들은
야촌에 터전을 잡아오늘에 이르럿읍니다 선조들의
음덕으로 유훈과 가현지덕을 다하여 왔으나 시대
변천에 따라 대대로 이어오든 미풍양속과 전통예의가
애퇴하여 가는것을 개탄하며 점점 숭조의 정
신과 예의절차가 소홀히 하여질것이 두려워서 이
에 후손들은 뜻을 모아 이곳에 사당을 세워 선
조들의 얼을 되 짚으며 후세만대에 이어지는 숭
조정신을 기리며 세일사(시사)이나마 근엄한 마
음으로 봉사하고저 합동제례의 사당을 봉건하였읍
니다
시사일 매년음력10월 첫일요일
서기1998년4월6일
초계정씨 추공 어천종친회
효자
증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지제효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행통훈대부청주목사청주진병마첨절제사겸춘추관주관정추지문
숙종계사 명여문
경종계묘 증직령
상경신개립
(뒷면)
동정대부전해사간원대사간지제교조한위근서
https://blog.naver.com/leelove97/222106465057
https://blog.naver.com/leelove97/222110737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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