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온리(Koonny-쿠니)사격장, 농섬, 매향리역사기념관, 매향리평화생태공원, 화성시 공예문화관
2001년 처음 매향리에 갔었다.
그리고 6월 12일 이곳을 찾았다.
화성시 장안면 덕다리가 고향이지만 매향리를 처음으로 찾은 것은 2001년 군입대 이후였다. 엄밀히 말하면 의무전투경찰순경 일명 '의경'을 지원하면서 가게 되었다. 예전에는 전투경찰기수, 의경기수와 무전기 음어 등을 달달외웠는데 마흔이 넘어서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덕다리 수렁계는 송탄 오산미군기지에서 매향리로 가는 하늘길로 낮이건 밤이건 처음 보는 신식의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수시로 저공비행으로 날아 들었다. 여러 전투 헬기는 물론 일명 잠자리 헬기로 부른 치누크 헬기도 조종사와 기관총이 다 보일 정도로 지나갔다. 저녁이면 서쪽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고 대여섯 별들이 나타나 천천히 떨어졌다. 이게 조명탄이 투하된 거란 사실은 한 참 크고 나서 알았다. 그렇게 조명탄이 뜨고 으레 폭탄 폭발에 따른 불빛이 섬광으로 빛났고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밤하늘은 마치 공상과학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탄두가 줄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어린시절 동생과 보는 재밌는 볼거리였다. 이렇게 전투기들을 수시로 볼 수 있는 것이 특별한 경험인 걸 안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이다. 대학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하니 평생을 가도 이런 경험을 못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태반이고 보통사람이었다.
어느날 낮잠을 자다 창문이 마구 흔들려 지진이 난 줄 알았던 일이 허다했다. 알고보니 사격장에 투하된 강력한 폭탄의 진동이었다. 허기사 고온리사격장에서 직선 거리로 4~5km밖에 안 떨어졌었기 때문이다. 바로 옆인 매향리는 어떠했을지는 알만하다. 이러한 모습에도 어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우리도 소음 피해보상 받아야지" 그러면 바로 옆 이화리도 못받는데 무슨 피해보상이냐라는 당연하듯 이야기한 시절이다.
예전 수원군공항과 붙어있는 화성시 황계동의 마을 주민들은 비행기의 소음을 애국가로 여기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시절이었기에 사격장 폐쇄니 피해보상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시끄러워졌다. 90년대 말부터인가 시작하여 2000년대 초반에 반미시위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매향리 주민을 이끈 것은 토박이 전만규였고 학창시절 아래로 터울지는 후배여학생의 아버지였다. 아무래도 험한 일에 중심에 있다보니 그를 싼 안 좋은 소문이 난무하였다. 예전에는 개인적으로 문제가 많은가도 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정보기관이 주도한 음해공작이었을 것이다.(의경시절 화성경찰서 정보과 활동을 들은 풍문) 당시 삼괴고등학교 교실에서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한총련'의 불온성을 연세대사태(1996) 등을 공강시간에 교양으로 틀어주던 시절이었다. 당시 친구들과 이를 보면서 '대학생들이 분별없이 저러니 나라가 개판'이라둥 '나는 대학가면 안 그런다.'는 둥 이야기 꽃을 피웠었다.
그렇게 주민들만이 아닌 대학생들인 한총련과 반미시민단체 등이 합세하여 매향리는 곧 국제적인 반미투쟁지이자 반전운동지로 주목되었다. 일본의 오키나와 미군기지와 비견될 정도로 이슈가 된 것이다. 1999년 한총련 출범식(부산대)에서도 오키나와 반전운동가가 초청되어 오키나와와 매향리가 연대해야한다는 반미성토 연설을 할 정도였다.
의경이 되면서 시위 진압이 주임무라는 것을 알았다. 2001년 이 맘때 신병으로 내던져진 곳이 고온리 사격장이었다. 동네 가까운 곳에 가니 내심 마음이 들떴었다. 백일휴가도 나가기 전이기에 더욱 그랬다. 닭장차로 불린 경찰동원버스를 타고 고온리 기지에 짐을 풀고는 바로 엄한 고참들의 군기에 따라 열지어 방패를 들고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연일 시위대의 수가 최고치를 갈아치우던 때라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컸다. 정문 쪽에서 갑자기 시위대가 나타나 뚫릴 판국이 되자 우리 중대(화성 방범순찰대 279)가 긴급 출동하였다. 한총련과 주민이 한데 섞여 민중가요와 반미구호를 외치고 방패와 곤봉으로 전열을 갖추고 있던 우리 중대에 다가서더니 으싸으싸하며 밀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해 양쪽에서 밀고 밀리며 뒤엉켰다. 고참들은 '정신차려' 고함을 지르고 진압헬멧을 연신 치면서 군기를 잡았지만 어느새 시위대로 인한 전열이 무너지고 있었다. 내 방패도 밀려 들어가면서 방패를 잡은 팔이 끼게 되었다. 앞에서 시위대가 밀고 뒤에서 우리 고참들이 미는 상황이 되니 팔이 부러질 상황이었다. 순간 앞을 보니 내 방패를 미는 사람이 대학 후배였다. 무언가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순간 팔이 어찌되든 가만히 있었다. 그 때 다행히 민노총 한 분이 의경 팔부러지겠다. 그만 밀어라 하면서 사태가 진정되었다. 이렇게 치열했던 매향리 고온리사격장은 결국 2005년 폐쇄되었다.
지척에 살았지만 처음 찾았던 매향리는 의경생활을 하면서 시위와 단순 경비를 위해 자주 기지 내 숙영하면서 머물던 곳이고 신병이었던 우리 기수들이 무서운 고참들의 군기잡기로 벌벌 떨던 악명 높은 곳이었다. 진압훈련이며 얼차례로 마음이 고된 곳이었기도 하지만 숙영지 내에서는 신병 때라 평상시 잡무와 근무로 인한 피로누적을 풀 수도 있었다.(특별한 군기잡을 상황이 없으면 무조건 취침하였다. 24시간 기지 내 경비임무 때문에) 거기에 재수 좋게 고참들이 꺼리는 새벽시간 동기랑 근무를 서려고 나갈 때면 그 때만큼은 해방이었다. 당시 근무지는 가물가물하지만 매향교회, 요꼴, 헬기장, 정문 등이 있는데 매향교회 쪽이 멀고 때론 귀신도 나온다고 해서 꺼려지기고 했으나 오가는 시간과 근무시간이 겹쳐 해방감을 느낄 여유가 길었고 고참이 꺼리는 곳이라 이곳 근무를 갔다오면 고참들도 고생했다고 여기고 특별히 군기잡기를 하지 않았다. 군기잡기를 해도 이곳 근무자는 상황이 끝났을 때 들어오는 행운도 간혹 있었다. 20대 혈기방장한 녀석들과 희노애락을 함께한 고온리 사격장이다.
매향리 쿠니사격장은 미군들이 동네 지명인 '고온리' Koonny를 발음하지 못해서 쿠니로 발음하여 사격장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예는 많다. 우리나라 최대 미군기지인 오산미군기지는 오산에 없다. 송탄에 있는데 이 역시 송탄이 발음하기 어려워 오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현재 고온리는 행정리인 우정읍 매향1, 5리를 부르는 지명이다.
“쌍부는 서남쪽 60리이고 쌍부현 이전 백제의 육포였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쌍부로 고치고 당성군이 영현이 되었다. 현종 9년(1018) 수주의 속하였다.(雙阜西南六十里 本百濟六浦景德王改雙阜爲唐城郡領縣 貞松西南三十五里 本百濟松山景德王改貞松爲唐城郡領縣 右四縣高麗顯宗九年來屬)"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든 김정호는 위 『대동지지』에는 마한 상외국 이후 우정․장안면 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어 육포로 불린 것을 알수있다. 이 육포 중 하나가 고온리이다. 고온포(古溫浦[항)는 유래 깊은 지명이자 오래된 항구이다. 지금은 매향1리로 행정편재 되어 있지만 석천초등학교 한정택 교장이 정리한 석천초 교지 '국향(1991)'에 따르면 고온포가 백제 육포 중 하나인 구이포라고 실증하였다. 구이포는 1760년 만들어진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부터 『대동여지도』까지 흥천산봉수 서쪽을 구이포면(仇耳浦面)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1872년 『수원부지도(水原府地圖)』부터 구이포는 고온포라고 나온다. 고온포는 구이포(고로니, 고온이)의 차자(借字)표기로 보인다. 흥천산(봉수) 서쪽 큰 나루로 표기되어 있어 전근대시대 큰 나루는 현재 고온포가 합당하다.
고온포는 충남 당진군 송산면 가곡리 성구미 포구, 안섬 포구, 화성시 우정읍 국화도, 장안면 장안나루, 남양 궁평리 포구를 왕래하던 큰 포구로 특히 성구미 포구를 많이 왕래하며 송악 줄다리기 행사를 구경다녔다.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 의하면 1884년부터 해방영(海防營)에서 고온포 어망은 틀마다 10냥, 소금은 매 정마다 37냥을 세금으로 걷어갔다.(화성시사편찬위원회, 2005 『화성시사 충효예의고장』Ⅲ 乾 486쪽)
구이포는 주민들이 예전부터 부른 이름인 골온이, 고온이를 한자로 쓴 이름이다. 한자가 더해져 그 한자의 뜻을 보고 따뜻한 마을 이런 설명이 있는데, 화성시 곳곳의 지명들의 해설이 다 이렇다. 매향리는 '매화꽃 향기'나는 동네라는 이야기며, 독정리 꽃밭은 '꽃이 많아 꽃밭'으로 불렸다는 설명 등이다. 사람들은 꽃을 참 좋아한다. 고향 향수로 대표되는 동요 '과수원길'도 보면 온통 꽃 이야기다. 그러나 이곳 옛 마한 상외국이자 백제 육포, 고려 때 쌍부현, 이후 상귀, 삼괴로 불린 우리지역은 서해 조수간만의 차로 지형적으로 곶과 만이 발달된 지형으로 해안가 지명은 보통 바다로 돌출된 지형인 곶에서 유래하였다. 고온리도 매향리도 이화리도 꽃밭도 꽃이 아닌 곶과 관련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사는 사람들이 꽃으로 이야기 하는 지명 역시 중요하다. 우리가 사는 터전에 대한 이름과 기억은 절대적이고 불변한 것이 아닌 언제나 어느 때나 그곳의 환경과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있다. 예전 곶과 관련된 지명들이지만 이미 우리 지역은 대부분이 바다를 막아 육지가 되면서 바다였던 곳도 바다를 알지 못하는 순연한 농촌이 된지 오래다.
하여간 매향리는 오랫동안 미공군의 폭격장으로 6.25 한국전쟁 이후 상흔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겨졌던 곳이다.(1951~2005. 미 태평양 미공군사령부 산하 대한민국 주둔 제7공군 소속의 미군 전용 폭격장 이용)다행히도 매향리가 바뀌고 있다. 쿠니사격장은 매향리평화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미 공원은 거의 갖춰지고 중심의 옛 미군기지 내 평화기념관 공사가 막바지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고 한가로이 산책을 할 수 있다. 여러 종류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그 속에 무수히 많은 나비가 날아 오른다. 그리고 부대시설로 화성시 공예문화관은 벌써 개관하여 여러 체험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어 길손들의 발걸음을 잡고 있다. 그리고 공연 옆은 많는 야구장을 갖춘 드림파크로 야구를 좋아하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수도권 대표 야구단지이다.
2016년 아직 공사를 시작도 전이라 을씨년스럽던 고온리사격장은 화성시 동부권 융건릉 외에 화성시를 대표하는 해양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인접한 인프라도 좋다. 시흥평택간 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발안과 서평택ic와 가깝고 화홍방조제를 건너면 대단위 궁평항회센터, 전곡항, 당성지구 등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풍부하다. 여기 매향리도 공원이 완공되면 고온항이 활성화되어 지금은 한적한 회센터도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다. 또 궁평항 낙조가 좋다고 하나 내 고향 낙조는 역시 장관이다. 거기에 매향3리 입구에 위치한 역사기념관은 과거 농섬에 투하된 각종 포탄 들이 다양한 조형물로 꾸며져 있어 이 역시 눈길이 간다. 그 어느 곳보다 많은 녹슨 포탄의 양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반세기동안 쏟아부은 폭탄이다.
조암 혹은 화홍방조제에서 기아아산만공장 후문으로 가다보면 구릉 위에 위치한 매향리역사기념관이 우측으로 보이고 그 아래로 내려오면 우측으로 과거 기지 입구를 지키던 초소와 매향1.5리 마을 표지석이 나온다. 여기로 들어서면 매향리평화생태공원으로 옛 고온리사격장이다. 숙영을 하였던 옛 미군기지는 보존을 한다지만 평화기념관 공사로 너저분하나 그외 공원시설은 거의 완공되었다. 기지 앞 헬기장으로 불렸던 옛날 경비근무지는 실제로 미군 치누크 헬기가 종종 내려앉았고 전투헬기도 착륙했던 곳인데 지금은 헬기장 표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한민국 공군 퇴역 공군전투기 2대가 전시되어 있다. 논이자 바다 철조망으로 이루어진 연안은 너른 야생화와 나비가 어우러지는 공원이 되었고 다 쓰러져 가던 매향교회는 창작레지던시가 된지 오래라고 한다.
'좋은 기억은 추억이고,
나쁜 기억은 경험이다.'
고온리사격장을 걸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 사진첩을 들추니 빛바랜 의경기수 725기를 전후한 화성경찰서 방범순찰대 279중대원들의 모습이다.
몇장을 찍어 친구에게 보내주니 친구가
"그립냐"
고 한다.
"미쳤냐"
고 했다.
블로그를 하는 것은 단순한 추억팔이는 아니다. 그 시절을 기록하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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