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으로 가면서 고민을 했다. 고찰 선운사를 갈 것인가 아니면 고창하면 떠올랐던 이미지인 고창 고인돌군을 찾아볼 것인가 역시 계획은 무계획이라고.. 구시포 상하농원을 갔다가 근처에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중요한 유적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하농원에서만 시간을 보낸 것이 몹내 아쉬워 근처 문화재나 유적을 보고 싶어서 무장읍성을 가려다보니 무장읍성을 보는 것이 짧은 시간으로는 안되겠기에 찾은 곳이 바로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高敞茂長東學農民革命起包址)'다. 무장읍성까지 7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무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무기 따위를 무장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인데, 무장은 조선 이전 무송과 장사현으로 조선 태종 때 둘을 합치고 이후 무장현(군)이 되었다가 1914년 고창군에 합쳐진 고을의 이름이다. 동학에 대한 공부를 할 때도 무장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라는 의미보다는 농민들이 무장하고 봉기한 것으로 이해했을 정도였다.
1894년 고부학정의 주모자 조병갑을 몰아냈으나 장흥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와서 인근 농민들의 패악질이 대단하여 그 고통이 컸다. 이러한 사정에 고창 출신의 전봉준 장군은 김개남 등 열혈 농민지도자들에게 봉기를 요청하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그 때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배꼽에서 비기를 얻어 큰 교세를 이룬 손화중을 찾아 의병창의를 결의한다. 고창에서 대단한 교세를 이룬 손화중은 손화중포라고 불린 정도로 지역 농민군의 지지와 세가 대단하였다. 여기에 태인에서 봉기한 김개남이 호응하였는데 이들이 농민들을 몰아 훈련시키고 창의(3.20.)한 곳이 바로 이곳 무장 당뫼(공음면 구암리 구수내 590)이다. 당뫼는 당산으로 마을 어귀 당산나무가 위치한 곳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농민군이 봉기(기포)하여 무장창의문((茂長倡義文, 무장포고문)을 밝힌다.
사람이 세상에 살아나가는 데 가장 귀중한 것은 그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군신(君臣)과 부자(父子)는 인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자식이 효도한 뒤에라야만 비로소 집과 나라를 이루어 능히 끝이 없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하고 사랑하시며, 정신이 밝고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시니, 만일 현량(賢良)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서 보좌하여 정치를 돕는다면, 요순(堯舜)의 교화(敎化)와 문경(文景)의 정치를 해를 보는 것처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생각지 않고 한갓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고 성상의 총명을 가리우고 갖은 아첨과 아양을 부려, 충성되게 간하는 선비를 가리켜 요망한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고 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에게 사납게 구는 관리만이 많아서, 인민들의 마음이 날로 더욱 변해 가고 있다.집에 들어가서는 삶을 즐길 만한 생업이 없고, 나가서는 몸뚱이를 보호할 방책이 없다. 사나운 정치가 날로 번져서 원망하는 소리가 서로 이어지고 있다.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다 무너지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 즉 예의염치(禮義廉恥)가 퍼지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고 했는데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도 더 심한 바가 있다.공경(公卿)이하로 방백(方伯), 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운 것을 생각지 않고 한갓 제 몸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람을 뽑아 쓰는 곳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고, 과거 보는 곳을 돈 주고 바꾸는 저자(市)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허다하게 생기는 뇌물은 나라의 창고로는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사삿집에 가득 채워진다. 나라에 쌓이고 쌓인 채무가 있는데도 이것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란하게 놀아 하나도 두려워하거나 꺼려하지 않는다.
온 나라가 어육(魚肉)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으니, 수재(守宰)들이 재물을 탐하고 사납게 구는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쇠잔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시골집을 건축하여 오직 혼자만 온전하려고 방책에 힘쓰면서 한갓 녹봉과 지위만 도둑질하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옳은 이치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버려진 백성이지만, 임금의 토지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살고 있으니, 앉아서 위태로워 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온 나라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 창생(億兆蒼生)이 의논을 모아 이제 의기(義氣)를 들어,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죽고 사는 맹세를 하는 바이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나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움직이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하여 다 함께 승평(昇平 )한 일월(日月)을 빌고, 모두다 성상의 덕화(德化)를 바랐으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1894년 3월 20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人之於世 最貴者 以其人倫也 君臣父子 人倫之大者 君仁臣直 父慈子孝 然後乃成家國 能逮無疆之福/ 今我聖上 仁孝慈愛 神明聖睿 賢良正直之臣 翼贊佐明 則堯舜之化 文景之治 可指日而希矣 今之爲臣 不思報國 徒竊祿位 掩蔽聰明 阿意 謟容 忠諫之士 謂之妖言 正直之人 謂之匪徒 內無輔國之才 外多虐民之官/ 人民之心 日益渝變 入無樂生之業 出無保軀之策 虐政日肆 怨聲相續 君臣之義 父子之倫 上下之分 遂壞而無遺矣 管子曰 四維不張 國乃滅亡/ 方今之勢 有甚於古者矣 自公卿以下 以至方伯守令 不念國家之危殆 徒切肥己潤家之計 銓選之門 視以生貨之路 應試之場 擧作交易之市 許多貨賂 不納王庫 反充私藏 國有積累之債 不念圖報 驕侈淫昵 無所畏忌 八路魚肉 萬民塗炭 守宰之貪虐 良有以也 奈之何民不窮且困也/ 民爲國本 本削則國殘 不念輔民安民之方策 外設鄕第 惟謀獨全之方 徒竊祿位 豈其理哉/ 吾徒雖草野遺民 食君土 服君衣 不可坐視國家之亡八路同心 億兆詢議 今擧義旗 以輔國安民 爲死生之誓 今日之光景 雖屬驚駭 切勿恐動 各安其業 共祝昇平日月 咸休聖化 千萬幸甚]- <수록>, <동비토록>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grandculture.net)
역사철학에서는 늘 역사의 진보를 두고 논란이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인가 진보한다면 역사의 심판은 왜 더딘 것인가 혹은 뒤바뀌는가 역사의 진보를 믿고 싶은 사람은 즉시적 심판 뿐 아니라 더딘 심판을 이야기한다. 동학이라는 큰 뜻이 역사의 진보라는 것을 볼 때, 도도한 흐름이라면 그 심판으로 조선이 무너지고 백성의 나라가 이루어졌어야 한다고 하나 우리는 1894년 농민전쟁 이후로 일제 36년의 암울한 식민지를 거쳐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현재까지 남북분단이 이루어지고 있다.
1894년 분명했던 심판받을 사람들은(조선 봉건지배층, 외세를 등에 업은 자) 2022년 현재 시간과 환경이 얽히고 설켜 모호해졌다. 그래도 믿고 싶다. 1894년 농민보다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북한의 인민이 더 낫다고
무장기포지를 둘러보면서 20여년 전 인촌 김성수 생가를 다녀갔던 일이 스친다. 호남 대지주의 모습도 좋으나 그래도 사학도의 답사라면 여기 정도는 들려야 하지 않나 유명하고 좋은데는 보통 사람들도 다 알고 다닌다. 몰라도 알아서 다닌다. 그 옛날 이곳을 모르고 다녀가지 못했던 것이 몹내 마음이 쓰리다. 모르고 왔지만 곳곳이 갑오농민전쟁의 성지다. 수원지역의 3.1운동 하면 으레 제암리 학살사건만이 이야기된다. 그게 못마땅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이 있던 것이 3월 31일 발안장 시위와 4월 3일 우정,장안면의 대규모 항쟁(가와바타 토요타로 순사 처단, 일제의 대규모 보복으로 수백명이 체포와 살상되고 마을이 불탐)에 따른 만행이란 것이 가려져서 그랬다. 그랬던 나인데 동학하면 정읍만 떠올리고 있었다.
발길을 돌려 나가면서 드넓은 농토를 가로지르는 길을 달린다. 표지판은 정읍, 고창, 상하를 가르킨다. 가는 내내 사람들이 사라지고 곳곳에 무덤만 눈에 띈다. 원래는 이곳에 많은 사람이 살았을 것이다. 그랬으니 그들이 기포하여 전주까지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했던 것이다.
국토 균형발전이 화두이다. 수도권 집중화가 문제이다. 이곳에 사람들이 돌아와야 한다. 너른 길을 한참을 달려도 맞은편에서나 가는 길에서나 만나는 차도, 보이는 사람도 없다. 1894년 농민군이 봉기했던 것처럼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살아가길 꿈꾼다.
동학농민혁명발상지(표석)
이곳은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이당의 민중이 떨쳐 일어나 민족과 역사의 주인됨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우리 근대사의 자랑스런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곳이다. 그 당시 가장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농민들과 동학교도들과 뜻깊은 유생들이 부패한 봉건왕조와 세계열강의 침탈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역사적 항쟁으로써 세계사에 빛나는 획기적인 우리 민족사의 쾌거였다. 1888년경 대접주 손화중과 근동에 세거해온 천안전씨종친들과 연계된 전봉준장군은 동지를 결합 이곳 당산골에서 농민군을 양성해오던 차 1894년 1일 10일 조병갑군수의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고부농민들의 봉기로 인해 마침내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밝히는 무장포고문을 발표 고적흥덕을 거처 23일 고부를 다시 점령하고 25일 백산성에 총집결하는 대장정을 이룬다. 오늘 이땅은 역사의 민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담아내지 못한채 매말라가고 있어 농민혁명의 백주년을 제회하여 그 때 순절한 농민군의 정기와 단심을 기리고 그 발상의 뜻을 길이 밝혀둔다.
평? 정왕환 근서
고창문화원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1994년 4월 24일
고창주는 중시조 장흥백(長興伯) 중연(仲木筵)의 21세손이자 진사 자신(自愼)의 15세손으로 1858년 9월 14일 당시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마을에서 아버지 제량(濟良)과 어머니 청주 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과 무예에 능하였고 효우(孝友)와 의절(儀節)에 남달랐다고 한다. 그가 30대에 접어들어 동학이 전라도 지역에도 확산되자 그 뜻에 공감한 고창주는 동학의 대접주 손화중포에 입도하였다. 이후 고창주는 전봉준의 휘하에서 같은 마을의 친구였던 송문수·문덕중과 더불어 구적산(九笛山) 아래 당산골에서 농민군을 양성하는 일을 도맡았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송문수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영광·무장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나, 체포되었다. 1895년 3월 3일 법무아문에서 재판을 받고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방면되었으나, 귀향하던 도중 고부에서 다시 잡혀 무장으로 압송되었으며, 좌도난정(左道亂政)의 죄목으로 3월 27일 사자등(獅子嶝) 총살형장에서 다른 세 명의 농민군과 함께 처형되었다. 고창주의 시신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수습되어 두암산(斗岩山) 아래에 묻혔다.
이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맞아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등이 중심이 되어 그의 높은 절의와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비문에 새겨진 고창주의 활동 내용은 고로(古老)들과 후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비문은 전라북도 문화재 전문위원이던 이기화가 찬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 시스템 (e-donghak.or.kr)
갑오동학농민군고창주의장추모비
무릇 미족의 역사가 열린 곳에 민족의 정기가 있고 민족의 위기 속에 민족의 충렬이 꽃 피워진다 여기 개화기의 구한말 사직의 기강이 문란하여 탐관오리가 발호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봉건전제의 폐정이 극에 이르고 외세의 침탈으로 국난위국을 당하였을 때 분연히 일어나 동학농민혁명의 민중봉기를 결연히 선도하고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고공 창주 자 순택 의장의 거룩한 넋과 공적을 기리고자 한다.
공은 1858년 9월 14일 당시 이곳 무장군 동음치면 당산마을에서 중시조 장흥백 중연의 21세손이요 진사 자신의 15세손으로 부 제량, 모 청주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과 무예에 능하였고 정훈으로 가통을 이으매 대대로 선비요 효우의절이 행의사표였다. 이립의 고비에 이르러 그 웅지를 펴내내 제세요 구민이었다. 동학의 대접주 손화중포에 입도한 공은 민초의 선구자 전봉준휘하에서 일촌지기 송문수 문덕중과 더불어 구적산 아래 당산골에서 농민군 양성하는 간재들도 맡았다. 갑오봉기 때 송문수의 부장으로 영광 무장에서 출전하였다가 활동하였다가 체포되어 1895년 3월 3일 었다. 1895년 3월 3일 법무아문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방면되었으나, 귀향길에 고부에서 다시 잡혀 무장으로 압송 좌도난정 죄목으로 3월 27일 사자등총살형장에서 세 동지와 함께 산화함에 인근지덕으로 겨우 시신을 거두어 두암산하 갑좌경향에 죽렴장하니 오호통제라 반봉건외세로 보국안민의 대의를 펴내다가 화명좌절의 비탄과 비분강개의 한을 품은 채 끝내 반역의 누명을 쓰고 구천을 해맸는데 갑오거사후 백주년에 이른 오늘에사 역사의 재평가리에 통한의 심원을 이루게 됨에 만시지탄이나 향리의 후진들이 공의 높은 절의와 유덕을 추모하여 그 뜻을 비각한다니 참으로 반가운일이다. 이에 사승을 두고 고로들과 후손의 증언을 바탕으로 삼가 서술하면서 공의 숭고한 얼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전라북도문화재던문위원이기화근찬
전주이영회근서
고창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수
단기4327년 갑술오월 일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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