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면(上道面) 187. 하일동(霞逸洞) 하현(霞峴)의 서남쪽은 골짝마다 그윽한데(霞峴西南谷谷幽), 재상이 예로부터 이 산중에 머물고 있네(山中宰相古今留). 두 정승(정제두, 최규서)의 집터와 세 정승의 무덤(정유성, 정제두, 권개) 있어(二公宅址三公墓), 이곳을 강화도의 ʻ제일구(第一區)ʼ이라고 부른다네(云是江州第一區). 상도면(上道面)은 강화부 관아 남쪽 35리에 있다. 도촌 정유성(陶村 鄭維城)은 묘는 하일리(霞逸里)의 서쪽 산기슭에 있다. 정제두는 도촌의 손자이다. 집터가 여기에 있는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도학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오조를 거쳐 국태로(國太老)의 학자라고 하였다. 또 하곡 선생이라고 불리었으며,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의 명을 받들어 지위가 숭록대부 우찬성 겸 성균좨주(崇祿大夫 右贊成 兼 成均祭酒)에까지 올랐고, 죽어서는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거처하는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지 못하여서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평소에 선생을 공경하였기 때문에 집을 지어주었다. 묘는 하현의 동쪽 기슭에 있다. 지금 그 손자인 참판(參判)을 지낸 정원하(鄭元夏)가 와서 살고 있다.(고재형, 역자 김형우․강신엽, 2008『역주 심도기행』, 인천학연구원․도서출판 아진, 213-214쪽)
강화도 하곡은 정제두의 호도 되지만 안산 추곡(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을 떠나 강화로 이거하여 살았던 하현(霞峴), 하일동(霞逸洞)을 말한다. 이곳에는 정제두 선생의 묘소를 기준으로 묘 바로 아래 아버지 정상징의 묘소가 있고 도로 건너 서쪽 구릉에 증조부 정근과 바로 아래 조부 정유성의 묘소가 있다. 정유성 묘소 위로 권개(權愷)의 무덤 등 안동권씨가의 무덤이 위치하는데, 고조부 정구응의 장인이 권개이다. 권개의 무덤 옆으로 동생 권율(權慄)장군의 양자에 파묘자리가 있고 그 옆에 상석만 놓인 동생의 무덤이 있다. 권개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의 아들로 동생이 행주대첩의 영웅이자 도원수로 임진왜란을 끝냈던 명장 권율이다. 강화는 정제두에게 있어 증조부의 외가(권씨)이자 조부 정유성의 외가(황씨)였다. 정제두 묘소 아래로 양지바른 평지에는 정제두 선생부터 후손인 정원하에 이르기까지 살았다는 고택 자리이다.
우리 증조부는 승문원 박사이며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 받은 정근(鄭謹, (1568~1598)은 자(字)가 여욱(汝頊)이다. 우리집안 정씨는 경주 영일이 본관이다. 고려시기 추밀원 지주사(知奏事) 정습명(鄭襲明, ?-1151)께서 문장으로 간쟁하여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한나라 양진(楊震, ?-124, 字伯起, 東漢의 名臣)과 같으며 『고려사』 열전에 실려있다. 10세 뒤에 문충공 포은 정몽주 선생은 도학을 일으키고 절의를 지켜서 우리나라 유학의 종주가 되었으며 공자묘에 종사되었다.
증조부는 포은 선생 5세손 정광윤이며 문장과 행실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고 기묘사류(己卯士類)로서 한림원이 되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조부 정운(鄭雲)은 이조 판서를 추증 받았다. 아버지 정구응은 사직서 참봉을 지내고 좌찬성을 추증 받았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며 호조 좌랑 권개(權愷, ?1468)의 따님이며 영의정 권철(權轍)의 손녀다.
정근(鄭謹)은 융경 2년(1568) 2월 12일에 태어났으며,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아버지 정구응께서 돌아가셔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좋은 자태를 타고나서 집안의 경사로 여겼다. 자라서는 자상하고 단정하였으며 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열심히 공부하여 만력 갑오년(1594)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에서 정자(正字)에서 박사까지 이르렀다. 선배와 어른들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다고 칭찬하고 조상의 미덕을 계승하여 세상에서 뛰어나길 기대하였다. 그런데 이때 왜구가 침입하여 강화도로 이사하여 외가집에서 살았다. 무술년(1598) 4월 10일 세상을 떠나니 31살이었다. 진강산 서쪽 큰재(大峴) 남쪽 감좌(坎坐)에 묘지를 모셨다. 외할아버지 권개 묘지 남쪽이다. 외할아버지 권개는 후손이 없어서 외손에게 기탁하셨다.
전 부인은 강화 최씨이며 강화도 최익휘(崔益輝) 후손이며, 제정공(齊貞公) 최용소(崔龍蘇)의 7세손으로서 지평을 추증 받은 최계선(崔繼善)의 따님이다. 일찍 돌아가셔서 안성 죽산(竹山)에 묘지를 모셨다.
둘째 부인은 창원 황씨이며 감사 황치경(黃致敬)의 따님이며, 동지 황대임의 손녀이며 고조는 명장 장무공 황형(黃衡)이다.
황씨 부인은 아들 1명을 두었다. 정근 31살에 세상을 떠날 때 겨우 3살이며 바로 우리 할아버지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다. 정유성은 효종과 현종 연간에 유명한 재상이며 귀하게 되어 조상을 추증하였다. 황씨 부인은 남편보다 37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며 안산 선영에 모셨고 묘지문이 있다.
충정공 정유성은 2남1녀를 두었다. 큰아들 정창징이 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을 추증 받았다. 둘째 아들 정상징은 진사이고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다. 따님은 승지 권상규(權尙矩)에 시집갔다. 정창징은 아들 정제현을 두었고 정제현은 효종의 공주 부마로서 인평위가 되었다. 정상징은 아들 2명을 두었고 정제두는 참의를 지내고 정제태는 세상을 떠났는데 한성부윤을 지냈다. 친 현손과 외 현손이 많아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정근(鄭謹)에게는 형님 정열(鄭說)이 있었는데 아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손이 없어서 아우 정근이 조상 제사를 모셨다.
아! 정근(鄭謹)은 정몽주 선생의 후손이며 적선한 집안에서 아버지를 일찍 여윈 고아로서 20대에 장성하고 삼십대에 수양하여, 효도와 우애를 순수한 마음에서 실행하였다. 집안을 잘 다스리고 조정에 나갔으니 마땅히 오래 장수하여 복을 누리시고 세상의 칭찬을 받아야하는데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막히고 이루지 못하셨다. 다만 대대로 적선하여 후사를 남기셔서 후손이 창대하게 되면 하늘도 바라는 것이며 오늘에 이르러 징험하였다.
계묘년(1663) 정유성은 아버지 정근의 관직을 추증하는 사령장의 누런색 부본을 묘지 앞에서 태워 아뢰고 묘석을 세웠다. 손자 정제두 등은 오래 되면 징험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기록을 남기고 비석의 글을 새긴다. 우리 임금 숙종 40년(1714, 甲午年, 하곡선생 66살)이며 숭정 이후 70년이다. 정근께서 갑오년에 돌아가신지 거의 두 갑자(120년)이 된다.(역주 하곡학연구원장 이경룡)
이는 우리 선조부 충정공의 무덤이니 선배 여러분의 행장(行狀)이나 명(銘)은 일찍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오직 묘석(墓石)에 음기(陰記)가 빠졌기에 손자 제두(齊斗)가 사사로이 그 뒤에 기록을 하였고, 또한 손자 제태(齊泰)가 내한(內翰)이 되어 국사에서, 당시 경연에서 있었던 공의 유사(遺事)를 보다 자세히 얻게 됨에 따라서 이를 고르고 모아서 후록(後錄)을 만들었다. 공은 효종조(孝宗朝)에서 실로 지우(知遇)를 받으셨는데, 임진년에는 지신사(知申事)로서 청대(請對)하여 민응형(閔應亨)을 죄주어 내쳤던 것을 간하여 아뢰되, “광직(狂直)한 말은 오직 밝은 임금이라야 용납하시니 한 늙은 신하를 용납하시어 성조(聖朝)를 돕게 하심이 또한 옳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말로 이름을 얻는 자는 스스로 그 죄를 받는 것이오나 신이 성조의 잘못을 간하는 것은 신이 성조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경연에서 말씀을 올린 조석윤(趙錫胤)의 경직(鯁直)한 충언은 조신들 가운데는 있지 않았던 것이온데, 전하께서는 그가 말을 다한 것을 미워하시어 북녘 변방으로 유배하셨으니, 고치시기를 힘쓰지 않으시렵니까?” 하였고, 누차 앞서의 간(諫)한 이들의 일이 심히 간절하고 곧다고 말씀하였더니, 상께서는 기꺼워하지 아니하시었다. 그러나 공은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이 오늘날의 일로 청하옵니다.” 하고는 극진하게 말하되 “전하께서 위엄띤 노기를 발하시므로 곧은 말이 모두 죄를 받게 되고 편벽된 사심 때문에 공정한 법이 시행되지 못하옵니다. 이것이 실로 병폐가 되는 곳이며, 따라서 그 유해(流害)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인하여 몇 가지 일을 분명히 아뢰기를, “하늘이 노하고 백성의 원망이 이와 같은 데도 오히려 생각지를 아니하십니까? 이와 같은 것을 오직 조석윤과 민응형이라야 능히 아뢰올 수 있는데 지금은 모두 쫓기어 나갔으니 앞으로도 누가 또다시 전하를 위하여 아뢸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아뢰기를, “나랏일을 할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자, 상(上)께서는 크게 감동하시어 이르기를, “지극한 정성으로 타일러 주니 참으로 감탄하노라! 전날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을 지금에야 후회하노라.” 하고,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하여 마지않으셨다. 다음에 또 간하여 아뢰기를, “천재와 시변(時變)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가오니 하늘과 사람의 관계가 크게 두려우며 몇 해 안 가서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오니 생각하면 간담이 떨어질 듯합니다. 어찌 크게 경계하고 진작하여 민심을 기쁘게 하고 하늘의 노염을 돌리며 하늘에 빌어서 나라의 명운을 길게 하실 생각을 아니 하시옵니까? 내수사에서 끼친 폐단 따위가 아마도 이런 것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이 이것을 말씀드린 적은 또한 많사옵니다. 청컨대, 한 번 엄하게 결단하시어 내조와 외조를 똑같이 여기는 정사를 드러내소서.” 하였다. 또 접빈사(接賓使)가 되어서 서쪽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왕께 하직할 적에 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은 천재가 있어서 바른 말을 구할 때이오니, 신이 어찌 한 말씀을 아룀이 없이 가오리까.” 하고는, “조석윤은 바른말을 하다가 남쪽 먼 곳에 오래 유배되어 장차 영남 해변에서 죽게 되었사오니 나랏일이 가석하옵니다.” 하였다. 공은 을미년(효종 6년)에 귀양 갔다가 병신년(효종 7년)에 다시 경연에 들어왔으며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일에 따라서 간절하게 간하였다. 또한 숫자나 채우는 관원으로서는 보필하는 보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여 일찍이 스스로를 탄핵하고 파직시켜 주기를 청하는 한편 날마다 경연을 열어 선비를 맞이하고 찾아서 그들의 도움을 구하시도록 청하였으며, 재변이 그치지 않고서는 나랏일은 구제할 수 없다고 자주 말씀을 올리었더니 상이 탄식하시며 이르기를, “경은 들어올 때마다 충정에서 간곡히 할 말을 다하지 않고서는 마지 아니하니, 내가 경의 이런 뜻에 은근히 감격하노라.” 하였다.
때마침 상께서는 바야흐로 북벌(北伐)의 큰 뜻을 서두르시므로 공은 “우선 내정을 닦아서 나라의 근본을 먼저 굳게 할 것이며, 한갓 병사(兵事)에만 생각을 두심으로써 패망을 취하시지 말 것이며, 또한 반드시 사(私)를 버리고 충성된 말을 받아들이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심으로써 회복을 도모하는 큰 계책을 삼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아뢰어 그치지 아니하였다. 상도 또한 공의 충성을 깊이 아시어 너그러이 받아들이시고 자주 감탄하시었으며, 항상 권면하는 일이 많았다. 말년에는 신하들의 효종의 덕화를 많이 칭송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임금에 그 신하였음을 볼 수 있었다. 얼마 뒤에 효종께서 승하하시고 현종(顯宗) 초년에는 공이 맨 먼저 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아뢰기를, “새로이 덕화를 펴실 때이오니 반드시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를 다하시어 나라의 근본을 먼저 하소서.” 하였고, 또 아뢰기를, “임금께서 항상 거상(居喪)하는 중에 계시어 신하를 접견하시는 날이 없으시므로 나랏일이 시일만 허송하여 장차 떨치지를 못하겠사오니 진실로 통곡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그 벼슬을 그만둔 뒤에도 바로 바로잡기를 마지 아니하였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었으며, 상께서도 여러 줄의 어찰(御札)을 내려 “경의 지극한 뜻을 감탄해 마지 아니한다.”고 유시하였다.
갑진년 겨울에 큰 뇌성의 이변이 있었는데 그해 11월 19일에 공이 돌아가셨다. 그때의 뇌성의 재변으로 여러 대신들에게 자문하게 되어 공이 입대하기를, “사람의 일은 아래서 허물이 있으면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오니 하늘의 노하심과 백성의 원망이 매우 두렵습니다.” 하였고, 인하여 대동법(大同法) 실시 후로 집집마다 출역(出役)하게 된 폐해를 아뢰면서 영을 내려 이를 금지시킬 것을 아뢰었으며, 곽제화(郭齊華)의 벌을 풀어 줄 일을 아뢰었다. 곽제화는 실은 당시의 집권자에게 아부할 뜻에서였지만 한편 충정공의 일을 말하다가 죄를 입었던 것이므로 반드시 풀어 주시도록 하였다. 이것은 바로 공이 임종하던 전달이었으니 공은 죽는 날까지도 충성을 바치기를 잊지 않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좌상홍중보(洪重普)가 조정에 나가서 아뢰기를, “어진 정승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불행합니다.” 하니, 상이 슬퍼하시며 “다시는 이런 사람을 못 보겠다.”고 말씀하시었다. 동춘(同春)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서간(書簡)에 이르되, “맑고 조심하며 선비를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던 정성으로는 이런 사람이 세상에 다시 없었다.” 하였다. 선배들이 일찍이 당세 선비들을 논평하는 데서도 문득 공과 조낙정(趙樂靜 석윤의 호)을 으뜸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세백(李世白) 공이 또한 그 외가의 선조인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교훈을 일컬어 이르되, “오직 대구(大舅 정유성을 말함)의 일을 법으로 삼고 본받음직하다.”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당세의 평론을 가히 볼 수 있었다.
공의 휘는 유성(維城)이다. 우리 정씨는 대대로 영일인(迎日人)이며, 고려조의 충현(忠賢) 추밀주사(樞密奏事) 습명(襲明)이 비조(鼻祖)로서 문장과 곧은 도로 위태로운 조정에서 충절을 다하였으니 사적은 《고려사기(高麗史記)》에 있다. 10대 만에 포은(圃隱)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에 이르러 도학의 유종(儒宗)으로서 문묘에 배향되었고, 5대 만에 휘 광윤(光胤)에 이르러 한림을 지냈으니 이분이 고조이시다. 증조 휘 운(雲)은 증 이조판서요, 조 휘 구응(龜應)은 사직서 참봉이요, 고 휘 근(謹)은 승문원 박사인데,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시어 크게 성취하지 못하였다. 조는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고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비(妣) 창원 황씨(昌原黃氏) 정경부인은 감사 휘 치경(致敬)의 따님이며, 동지 휘 대임(大任)의 손녀이시고, 만력 24년 병신 윤 8월 4일에 공을 낳으셨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님께서 기르셨으며 정묘년에 문과에 올라 주서ㆍ한림ㆍ지제교ㆍ춘방ㆍ양사ㆍ옥당을 지냈으며, 전랑에 천거되었다가 응교로 승진하였다. 외임으로는 순천(順天)ㆍ남원(南原)ㆍ원주(原州) 등 여러 부사를 지냈고, 임오년에는 아헌(亞憲)으로서 동래부사(東萊府使)에 배명되었고, 통정에 승진하여 내임이 되어 승지ㆍ형조ㆍ호조ㆍ예조의 참의와 대사성ㆍ대사간ㆍ지비변사가 되었으며, 다시 나가서 전라ㆍ황해 두 도의 감사가 되었다가 승진되어 평안ㆍ경기 두 도의 방백이 되었다가 도승지, 여러 조(曹)의 참판이 되었으며, 이후로 잇달아 경연을 겸하였고, 계사년에는 승진하여 형조판서ㆍ대사헌ㆍ이조ㆍ예조ㆍ호조판서와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기해년 여름에 우의정에 배명되었다가 경자년에 사임하여 영중추부사로 옮겼고, 임인년 여름에는 다시 정승으로 들어갔으며 계묘년에는 사임하여 판중추로 돌아왔다가 갑진년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시니 수는 69세였다.
이듬해 정월에 강화(江華) 진강산(鎭江山) 서쪽 대현(大峴) 남쪽 자좌(子坐) 언덕 선의정공(先議政公) 무덤 아래 예장하였으니, 선조를 그리며 돌아가실 때의 유언을 따름이었다. 그 뒤 숙종(肅宗) 기묘년에 유사가 절혜(節惠)를 의논하여 시호를 충정(忠貞)이라 하였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감역 휘 구함(久涵)의 따님이고, 감사 휘 철(鐵)의 손녀이며, 무오사화의 절사(節士)인 평사 목(穆)의 현손이니, 완순한 덕이 부덕(婦德)의 으뜸이었다. 정경부인을 봉하였으며, 공보다 7년 앞서서 돌아갔으니, 수가 61세였고, 좌측에 부장되었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군수(郡守) 창징(昌徵)은 증좌찬성이요, 다음 진사 상징(尙徵)은 증 이조참판이며, 딸은 승지 권상구(權尙矩)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 2남이 있으니 처징(處徵)과 홍징(弘徵)이다. 찬성은 1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 제현(齊賢)은 효종 대왕의 따님 숙휘 공주(淑徽公主)에게 장가가서 인평위(寅平尉)의 직첩을 받았고, 사위 이세백(李世白)은 좌의정이며, 임진원(任鎭元)은 군수이고, 이문좌(李文佐)ㆍ이수실(李秀實)은 군수이다. 참판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제두(齊斗)는 참의에 제수되고, 다음의 제태(齊泰)는 관직(館職)으로부터 벼슬하여 부윤에서 마쳤고, 사위 민진주(閔鎭周)는 이조 판서이다. 권승지는 3남을 두었으니 수만(秀萬)은 목사요, 화만(和萬)과 중만(重萬)이다. 인평위는 1남을 두었는데 태일(台一)은 직장으로서 일찍이 죽었으니, 종질 건일(健一)을 양자로 하여 잇게 하였다.
제두(齊斗)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후일(厚一)이다. 제태(齊泰)는 4남을 두었으니 건일(健一)ㆍ순일(順一)ㆍ준일(俊一)ㆍ선일(善一)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우리 주상(主上 숙종(肅宗)) 40년 갑오 월 일 숭정(崇禎) 뒤 70년.( 하곡집, 제문류(祭文類) / 묘표(墓表)
영종(英宗) 12년 8월 임신[11일]에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성균 좨주(成均祭酒) 문강공(文康公) 하곡(霞谷) 정 선생이 돌아가시니 춘추(春秋)는 88세 이시었다. 그해 10월 모갑(某甲)에 강화부(江華府)하현(霞峴)의 언덕, 사시던 집 뒤에 장사하였다. 나라에서 내린 부의(賻儀)는 대신(大臣)의 장례(葬禮)에 견주어 같이 하였고, 장사를 지내자 문인(門人)인 태학사(太學士) 윤순(尹淳)이 제문(祭文)을 지어 선생에게 제(祭)를 올리었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이 마음을 간직하여 만 가지 이치[萬理]를 정미롭게 하였고 이 마음을 실(實)하게 하여 만 가지 일에 응했던 것은 선생님의 학문이 명통(明通)하시고 연색(淵塞 깊고 충실함)하시어 마침내 탄태(坦泰)하고 안이(安履)하심에 이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댁에 계실 때에는 말없이 이를 성취하셨고 그 본연(本然)의 천성(天性)을 즐기시었으며, 변박(辯博)과 영화(英華)를 가지고 남에게 빛내려 하시지 아니하셨다. 세상에 나아가실 때에는 예(禮)로써 행하시고 세신(世臣)의 절의(節義)를 공손히 하셨으며, 도덕(道德)과 빈사(賓師)의 지위를 가지고서도 그 몸을 높이지 아니하시었다. 비록 밖의 것에 치무(馳騖)한 자가 선생을 의혹하고 높은 것을 좋아하는 자가 선생을 의심하였다 하더라도 선생은 스스로를 믿으시고 후회하지 않으셨을 뿐더러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지 아니하시었으니, 공자(孔子)와 안자(顔子)가 ‘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또 이르건대, 당우(唐虞)의 구법(九法)이 막혀 어둡고 조종(祖宗)의 육전(六典)이 황폐하여 땅에 떨어졌다 해도 선생이 계실 적에는 멀게는 도가 합하였고[遠契] 가깝게는 말로 기술하시었으니[近述] 용행(用行)하면 다스림이 있을 것 같았건만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는 한갓 세상이 쇠퇴하고 운수가 막히는가 하면 학문은 끊어져서 이어지지 못함을 보겠도다. 아! 슬프도다! 선생을 백세(百世)의 뒤에 증거할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의 휘는 제두(齊斗)요, 자는 사앙(士仰)인데, 영남(嶺南) 영일현(迎日縣) 사람이시다. 고려 때에 시중(侍中)인 문충공(文忠公) 몽주(夢周)는 그의 11대조(代祖)이며 증조의 휘는 근(謹)이며 승문박사(承文博士)요, 조(祖)는 휘가 유성(維城)인데 우의정 충정공(忠貞公)이며, 고(考)의 휘는 상징(尙徵)이며 성균 진사(成均進士)이시었다.
선생은 우리 인조(仁祖) 27년에 태어나, 숙종(肅宗)ㆍ경종(景宗)ㆍ영종(英宗)을 섬기시었고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탄강(誕降)하시자 보양관(輔養官)과 이사(貳師)의 임명을 받으셨다. 그 속백(束帛)의 높은 예와 임금께 아뢰던 좋은 계책은 국사(國史)와 묘비(墓碑)에도 실려 있거니와 선생의 도량은 박옥(璞玉)처럼 혼후(渾厚)하여 화(和)하면서도 남들과 어울리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혼잡한 세상은 순박하게 돌려놓을 수 없었던 까닭에 선생은 훌륭한 재주[寶]를 품고서도 한가하게 지내셨던 것이다. 과감하게 세상을 잊는다는 것은 교훈이 아니었던 까닭에 선생은 때때로 조정에 드나드셨던 것이다. 뜻을 돈독히 하여 힘써 행하고 널리 배워서 들은 것이 많다는 것과 육예(六藝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를 말함)에서부터 뭇 성인들의 법과 백가(百家) 중류(衆流)의 책이라던가 또는 역대 주하(柱下 도서관이란 의미)의 장서(藏書)와 《국조상위(國朝象魏)》의 법전이나 무릇 서적에 기록된 것은 두루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 지식은 마치 바다가 깊고 산[嶽]이 쌓였듯 했으니 아무리 자용(資用)해도 다함이 없었고, 그 요점은 또한 《이아(爾雅)》에다 요약[約]했던 것이다. 예(禮)는 선진(先進 《논어》의 편명임)을 따랐으며, 제도는 시왕(時王)과 같이 하셨다. 그리고 경위(經緯)는 족히 만물을 열[開] 수 있었고 재보(財輔)는 족히 시대를 바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여러 공(公)들은 의(義)를 품고 입을 모아 선생을 교대로 천거하였으니 벼슬은 내ㆍ외관을 합하여 무려 서른 한 차례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모두 끝내 나아가지를 않았으며 나아가셨다 하여도 역시 오래 있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에 큰 의혹이나 큰 정사가 있을 때에는 선생은 일찍이 참여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고 큰 일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셔도 나아가시지 않은 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아갈 때에도 영화스러운 것은 가까이 하시지 아니하였으며 물러날 적에도 역시 명예를 가까이 아니하셨다. 그리고 꼭 주장하시는 것도 없고[無適] 꼭 아니하시는 것도 없었으며[無莫] 오직 의(義)만을 따랐을 뿐이다. 저술하기를 기뻐하지 아니 하셨는가 하면 생도(生徒)들도 맞이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갑(甲)ㆍ을(乙)이 싸우는 데에 있으면서도 홀로 탁월하게 서서 같이 다투는 일이 없으셨으니, 이른바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으며 친근하게 할 수도 없고 멀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은 선생이 간직하셨던 것이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일찍이 졸거(卒去)하였으나 두 자녀를 두었으니 아드님 후일(厚一)은 부평 부사(富平府使)였고 따님은 성천 부사(成川府使) 이징성(李徵成)에게 출가하였다. 후부인 남양 서씨(南陽徐氏)도 역시 선생에 앞서 졸거하였다. 두 부인은 모두 호서(湖西) 지방 천안군에 장사하였고 선생과는 합장(合葬)하지 아니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7년에 증손 술인(述仁)이 석물(石物)을 세우고 신도(神道)를 표(表)하고자 하여 대우(大羽)에게 청하여 서문(序文)을 쓰고 이어서 명(銘)을 쓰게 하였는데 명기(銘記)에, “육부(六部 신라의 육부를 말함)가 분족(分族)하니 정씨(鄭氏)도 하나의 씨족이 되었도다. 그 조상인 습명(襲明)은 고려 때에 충절(忠節)로 나타났고 덕망이 드러난 시중(侍中 포은을 말함)이 해동(海東)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니 풍성한 근원은 물줄기[川]를 부러워하지 않았도다. 선생의 태어나심은 드물게 있는 기운[間氣]에다 아름다운 덕을 겸하셨도다. 총명하시고 명철하시되 온화하시고 돈독하셨도다. 공부는 신독(愼獨)에 말미암고 도학은 함장(含章)에 간직하셨도다. 회통(會通)에 잠심(潛心)하셨고 경전(經傳)에 묵묵히 합하셨도다. 요순도 사람들과 같고 공자와 안자도 나의 스승이란 것이었다. 경쟁하지 않고 자득한 역량이 계셨는지라[囂囂] 사람들이 나를 몰라본다고 관심하지 아니하셨도다. 탁월한 저 밝은 바는 쌓였던 빛이 반드시 비춰질지어다. 이에 훌륭하시던 행적을 표(表)하여 길이 후세에 빛낼진져!”라고 하였다.(하곡집, 부록 묘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