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서세 283주기 하곡 정제두 선생 묘제

달이선생 2019. 9. 9. 11:00
8월에 강화(江華) 하곡(霞谷)으로 옮겨서 살았다.
선생은 장손이 요사하는 변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였으며 따라서 선묘(先墓) 가까운 곳에 살고자 하여 이곳으로 이사하였다.(八月移居江華之霞谷。先生遭長孫殤悲哀。仍欲依近先墓。遷居于此。) -하곡집, 연보

 

    조선의 양명학자 정제두 선생은 1709년(숙종 35) 61세에 안산군 추곡(楸谷,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에서 강화도 하일리로 이사하였다. 고령의 나이에 증조부 정근, 할아버지 정유성, 아버지 정상징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정제두 선생을 길러주신 할아버지 정유성의 고향이자 외가였다. 숙종과 영조로 부터 여러 벼슬을 제수 받았고, 특히 젊은 영조는 노론 중심의 정국에서 소론을 아우르는 탕평책을 펴며, 소론의 중심된 학자이자 원로였던 정제두를 가까이 하였다. 고령의 정제두를 위하여 낙죽을 보내거나 어의를 보내 건강을 챙겼으며, 정제두 선생 나이 80세(1728, 영조 4년)에 자헌대부로 가자하고 우찬성을 제수하였다. 88세에 이르자 세자 이사를 겸하게 하는데, 선생께서는 오히려 모든 직책을 다 그만두도록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숭록대부로 가자 되었다. 이후 임신 11일(음력 8월 11일) 정침에서 서거하였다.

 

이날에 대청에 나아가 단정하게 앉으시자 여러 자질(子姪)들이 모두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선생은 집에 있을 때나 처세(處世)할 때에 거울이 되고 경계될 만한 것과 자신의 뒷일에 대한 약간의 일을 말씀하는데 정신이 보통때와 다름이 없으므로 모시고 앉아 있는 자가 모두 깊게 염려하지도 않았는데 밤이 되자 방 가운데 평상(平床)을 펴고 그 위에 요를 깔고 베개를 놓아두라 명하더니, 남쪽으로 머리를 둔 채 손수 모도(摸度)로 몸을 정중하게 눕히고 손을 모아 단묵(端黙)하더니 조금 후에 졸거(卒去)하셨다. 이날 밤에 흰 무지개 한 가닥이 초정(初亭)의 서쪽 우물에서부터 시작하여 하곡별당(霞谷別堂) 남쪽 우물에 멈추었다가 다시 없어지자 운기(雲氣)가 장막과 집 위에 자욱하더니 날이 밝아지자 흩어졌다.(壬申 十一日 先生卒于正寢。是日就廳事端坐。諸子侄皆侍。先生爲語居家處世可鑒戒及身後若干事。精神無異平日。侍者皆不以爲深慮。逮夜命鋪床于室正中。鋪褥設枕于床上。臥南首。手自摸度。以身就正中。斂手端默。少頃而卒。是夕白虹一道。從初亭西井底。屬霞谷別堂南小井。及復乃滅。雲氣漫羃屋上。至明而散。) -하곡집, 연보 

 

  이렇게 선생이 돌아가시고  280 여 년이 흘렀다. 정제두 선생이 서거한 강화에서는 강화문화원을 중심으로 숭조회와 강화향교, 교동향교 등 유림들이 모여 선생의 묘제를 지내고 있다. 묘제를 하곡제라 하고 이번이 12회다. 특히 이번 묘제부터는 성균관으로부터 율곡선생 제례의 준용 인정에 따라 진행하며 매년 음력 8월 10에 하일리 묘소에서 진행된다. 태풍 링링이 할퀴고 지나가 묘소 주변 나무들이 부러지고 나뭇잎과 가지가 떨어져 매우 어지러웠다. 그래도 정제두 선생의 덕이 있어선지 궂은 날씨가 개이고 제례를 올리기에는 무리가 없었다.